한글 文章 269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33. 옷물림과 노란색 스웨터

윗사람을 의식하고 윗사람이 하지 않는 일은 안 한다는 가치관은 나만의 개별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모든 한국사람에게 보편화돼 있던 한국인의 동일성이다. 사람들에게는 각기 무의식층에 잠재되어 있는 자기색(自己色)이라는 게 있다 한다. 자신이 살아온 어떤 과거에 강렬하게 자극을 받으면 그 자극을 받았던 당시의 계절이나 환경의 빛깔과 그 기억이 맥락 밀착되게 마련이며 비록 그 기억을 상실하고 있더라도 그 빛깔만 보면 그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그 강렬했던 자기 자신의 기억과 맥락되어 잠재된 빛깔을 자기색(自己色)이라고 한다. 정신분석을 할 때 어떤 기억을 되살려내게 하는데, 이 자기색(自己色)을 가려내어 출발시키는 분석 방법이 있다고도 들었다. 그러기에 자기색(自己色)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고 또 기억에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32. 많다 + α =푸짐하다

푸짐하다는 말이 내포한 알파의 의미는 곧 한국적 인간의 원천적 본질을 뜻하는 것으로 유학이 정립한 서열주의에 서민적 원형주의의 반동이며 단일을 위한 개성의 희생이다. 중학교 2학년 때 국어시간이었다. 선생님이 ‘푸짐하다’는 낱말 뜻을 물었다. 풍성하고 많고 넉넉하다는 뜻이라고 모두들 바로 대답들을 했다. 사전에도 그렇게 되어 있고 선생님도 맞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어딘지 그것이 반드시 맞는 대답은 아니라는 막연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국어사전을 보았던 것도 아닌데 그 낱말이 가지는 뉘앙스의 차이 때문에 선생님께 질문을 했다. “선생님, 많고 넉넉하고 풍성하다는 풀이로는 모자랍니다.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고 봅니다.” “깊은 뜻이? 그게 뭔데.”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같은 풀..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31. 사랑방 문화와 계

품앗이나 두레에는 작업능률을 올린다는 실용성보다 인간적 유대공동체의 정신력 함양이라는 정신적 효율이 더 컸다. 시골에는 사랑방이 있게 마련이었다. 청소년이 모여드는 '아사랑'이 있고 중장년이 모여드는 '중사랑', 노인들이 모여드는 '사랑'이 있어 연령별 횡적 유대기능을 사랑방이 대행했던 것이다. 사랑방 문화(文化)에는 부정적 측면도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아사랑에 가면 담배를 배운다든지, 노름을 알게 된다든지, 음담패설을 익힌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긍정적 측면이 한결 많았다. 새끼꼬고 짚신 삼으며 방석이며 멍석을 짜는 농공예의 기법을 전수받고 익히는 아사랑은 교육장이었다. 또 대보름날 같은 명절 전야에 乞粒이라 하여 풍장치고 집집을 돌아다니며 곡식을 얻어, 그 일부로 회식을 하기도 하지만 남..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30. 막걸리

막걸리는 숨가쁘게 돌변하는 기후대 아래 어느 다른 나라 사람보다 부지런하게 또 꾸준히 일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인에게 있어 새참으로써 십상인 식품이다. 강화섬에서 몰락한 왕손의 후예로 가난하게 살았던 철종은 왕궁의 그 무수한 미주(美酒)가 입에 당기지 않았다. 어느 날 반주를 들면서 강화에서 마시던 막걸리 생각이 간절하다고 말했으나 왕궁에는 막걸리가 없었다. 中殿은 친정어머니에게 막걸리를 구해 들여보내 달라고 했다. 부부인(府夫人)도 당황하고 있는데 때마침 찬간에서 일하던 계집종이 들어와 자기 남편이 즐겨 마시는 이문안 막걸리가 장안에서 제일 좋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이 이문안 막걸리를 구해 바치자 철종은 그렇게 좋아라 하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 후부터 이 이문안 막걸리집에 進封 막걸리를 만들게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9. 타임 브레이크

옛 할머니들이 '시이이 시이이 하면서 일을 했던 것도 곧 타임브레이크의 대뇌 피질 작용으로 고됨을 덜어주는 체험적 지혜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빨래를 하고 있는 할머니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시이이 시이이'하며 고의적으로 소리를 내고 일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어릴 때의 일이라 신기해서 왜 그런 소리를 내느냐고 물었었다. 그런 소리를 내고 일하면 덜 피로하다는 어른들의 가르침이 있어 젊을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체질화됐다는 것이다. 물론 할머니는 그 적당한 간격의 그 같은 발음으로 피로가 덜한지 더한지는 자신도 모르지만 어른들이 그렇게들 하니까 자기도 그렇게 한 것뿐이라 했다. 비단 나의 할머니뿐 아니라 옛 노인들이 중노동을 할 때면 이같이 시간을 마르는 리드미컬한 타임 브레이크를 하는 습성이 일반화..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8. 한솥밥

화랑이 물불 가림 없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솥차를 공음(共飮) 함으로써 형성된 결속력이 적지 않은 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 한솥밥을 먹는 사이 몸은 여럿이지만 마음은 하나라는 뜻인 일심동체를 두고 한솥밥을 먹는 사이라고 말한다. 곧 이해나 선악에 구애받지 않고 피와 정이 통하는, 그래서 인간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한솥밥을 먹는 사이다. 항상 한솥밥을 먹는 가족 관계만 보아도 한솥밥이 갖는 인간 결속의 마력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인간의 親疏는 한솥밥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먹더라도 자주 먹느냐 이따금 먹느냐로 친소의 양이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솥밥의 의미가 크고 또 마력이 있었기에 옛 우리 선조들은 한솥밥을 아..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7.경로 민속

늙어서 찾아 쓰게끔 된 노후생활연금신탁이 생기자마자 계약고가 몇천억을 웃도는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데, 그 폭발적 인기가 바로 폭발적 불안의 지표인 것이다. 마을에 애경사(哀慶事)가 있거나 추렴해서 돼지를 잡았을 때 살코기만이 주인 소유요, 그 내장고기는 마을의 노인들 소유로 돌리는 것이 관례였다. 마을에 따라 60세 이상, 또는 70세 이상의 노인이 있는 집에 골고루 등분하여 나누어주었으며, 이 경로 습속을 배장(配臟)이라 했다. 환갑이 지난 노부모를 모시는 집에서는 양식이 떨어져도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먼동이 트기 전에 좀 잘사는 집에 찾아가 마당을 쓸어놓고 돌아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不請의 노동을 '마당쓸이'라 하는데, 노부모의 끼니 이을 양식이 떨어졌다는 묵계된 사인인 것..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6.성묘

대체로 성묘는 1년에 한 번이 상식이요. 그나마도 성묘하는 나라보다 하지 않는 나라가 더 많은 것을 보면 이 세상에서 우리 한국의 망혼이 가장 행복하다. 언젠가 여객기 옆자리에 50대로 보이는 중년의 일본 여인과 나란히 앉아 여행한 일이 있다. 하와이 여행을 위해 3년 동안 예금을 하는 도중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어 혼자 오게 됐다면서 생각하다가는 울고 울다가는 생각하곤 했다. 하와이 상공에 이르자 이 여인이 '도창(아빠)!' 하고 부르기에 깜짝 놀라 돌아보았더니 핸드백 속에서 죽은 남편의 위패를 꺼내어 창문에 갖다 대고는 말하는 것이었다. “와이키키 해변이 내려다보입니다. 보이지요?” 위패를 통해 사자(死者)와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사자와의 대화를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한다. 죽은 친구의..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5.계

줄행랑친다는 것을 '삼십육계'라 하고, 무슨 일에 깽판 놓는 것을 '산통 깬다'고 하는데 이는 도박성 계가 못되게 악용된 경우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리나라 저축 수단이 제도 금융으로 옮겨 가므로써 전통적인 계가 사라져 가고 있다. 계는 전통적 저축 · 보험 · 영리 수단일 뿐만 아니라 상부상조 · 친목 · 공익 수단이기도 한, 우리나라에만 있는 자랑스런 유산이다. 이 세상 어떤 나라에서도 경제와 정신이 이토록 아름답게 조화된 이런 형태의 문화유산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더러 그리스·로마시대에 장례비를 추렴하던 장의(葬)조합이나 러시아의 인두세(人頭稅) 공동 부담을 위한 미르, 영국의 프렌들리소사이어티 등을 우리의 계와 견주는 학자도 있으나, 그것들은 우리 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 그 모두를 포..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4. 삼세동당(三世同堂)

노인에게 있어 마지막까지 남는 최후의 욕망은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은 '집단'이라 한다. 집단욕이란 바로 고독의 반대로 식욕과 정욕과 더불어 3대 본능 가운데 하나다. 문호(文豪) 괴테는 81세가 되던 어느 날 자신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가족을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이고자 모든 식품 창고와 식기 찬장의 열쇠를 자신의 베개 속에 숨겨 두었다 한다. 그 열쇠를 얻기 위해 끼니때마다 찾아오는 가족들과 어울림으로써 공포에 가까운 고독을 발산시키려는 발악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 가족과 더불어 있는 시간을 연장시키고자 그날 그날 먹는 빵을 낱낱이 저울질해서 내주었다 하니 눈물겹기만 하다. 노인에게 있어 마지막까지 남는 최후의 욕망은 누군가와 같이 있고 싶은 '집단욕(集團欲)'이라 한다. 집단이란 바로 고독의 반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