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충실기 12

雙忠實紀 原文(쌍충실기 원문)

雙忠實紀 原文 최대한 원문 그대로 올리려 노력하였습니다. 혹시 오자나 탈자가 있다면 未擧한 後孫이 先祖의 勳業을 躁急히 올리려다 범한 過失로 海諒하여 주시기를 감히 바랍니다. 파일에는 해석에 동원된 주석이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23.3.26 의민공의 15세손 도석 삼가쓰다. 雙忠實紀 序 自古 國家當寇亂 搶攘之時 平日 任守土將兵之責者 率多望風禠魄 惟恐奔竄之或後 不念國事之謂何而 乃有一二忠義之士奮身 草萊誓心 敵愾毅然 以捍國難爲己任 雖其勢有衆寡 其功有大小而 所竭者吾忠 所盡者吾力 彼肉食而 遺君負國者 獨何心哉 在節龍蛇之亂 列郡瓦解 擧國風靡 守土者不能死於疆 將兵者不能死於綏 國家之勢 岌岌乎殆矣 時則有若崔蘇湖蘇溪公兄弟者 以遐土匹夫 投袂奮起 倡率義旅 兄爲籌劃於中 弟則戰鬪於外 拯白徒 當凶鋒 直以忠義二字 ..

쌍충실기 2023.03.26

의민공 의숙공과 당항포국민관광지

▣ 충무공 당항포대첩 기념탑 당항포국민관광지에는 충무공 성웅 이순신장군의 장군의 위업을 기리는 충무공당항포대첩기념탑을 건립하였습니다. 기념탑 전면 동판에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아름다운 이 당항포(당목) 앞바다를 보라. 그리고 저 우뚝 솟은 구절산과 거류산을 둘러보라. 바로 이 앞바다에서 전라좌수사이신 이순신 장군께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 7월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거북선을 앞세운 51척의 연합함대를 이끌고 왜적선 26척을 전멸시켰다. 또한 2년 뒤인 1594년 4월 23일과 24일 이틀 동안에도 삼도수군통제사가 이순신 장군께서는 왜적선 31척을 모조리 격파하시었다.” 우리 고장 선조들도 관민을 가리지 않고 충무공을 도와 싸웠습니다. 이 두 해전의 승리로 남해안 일대를 넘나들던 왜적은 그..

쌍충실기 2023.03.26

義敏公(의민공) 義肅公(의숙공) 소개

義敏公 崔均 1.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2.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평(汝平). 호는 소호(蘇湖). 아버지는 최운철(崔云哲)이다.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주역』에 통달하였고, 특히 천문에 밝았다. 3. 생애 및 활동사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생 최강(崔堈)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를 풍운장(風雲將)이라고 불렀다. 고성·사천 등지에 진격하여 적병을 많이 참살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기고 守門將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1605년 배를 타고 침입한 적병을 형제가 힘을 합하여 격퇴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본디 벼슬에 뜻이 없었던 그는 혼미를 거듭하는 조정에 회의를 느껴 고향에 돌아가 형제간의 우애를 ..

쌍충실기 2023.03.26

我川飜譯文集 後記(아천번역문집 후기)

我川 飜譯文集 後記 경남 문화 연구소에서 我川文集에 이어 我川 飜譯 文集을 발간하게 되니 기쁘고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로 해서 先考께서 생전에 손수 출간하여 한문을 모르는 후손들에게 祖先의 가르침과 위업을 알게 하고자 원고를 정리해 두시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신 花山集 중에서 家訓부분과 雙忠實紀가 완역되어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花山集은 나의 오대조이신 諱 鼎鎭 號 花山의 文集으로 先考께서 집안 어른들과 議論하여 伯曾王考府君의 筆寫本을 영인하여 출간하였던 책입니다. 그 때 직접 쓰신 후기에 家訓一編은 世世孫孫 刻骨銘心해야 할 指南의 寶라 하시고 그 내용을 後孫들이 읽을 수 있게 하고자 노력하셨으며 그 후 國民大學의 李相寶교수님께서는 花山集 중에서 국문 가사를 연구하여 “화산 최정진의..

쌍충실기 2023.03.26

쌍충실기(雙忠實紀) 중간(重刊) 발문(跋文)

雙忠實紀 重刊 跋文 위 최씨쌍충록은 곧 소호, 소계 두 분의 창의토적(倡義討賊)하신 사실로써 시간(始刊)은 재거(再去)한 계미년이었다. 그 유문(遺文)과 의적(懿蹟)이 응당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인데도 병화의 나머지 많이 산일(散逸)되어 전하지 아니한다. 그리하여 공의 여러 후손들이 이를 개탄하여 다시 원근을 두루 찾아 여러 해가 지나 무릇 사적을 보완해야 할 것을 얻은 것이 십수조(十數條)이다. 아울러 후래(後來), 제가(諸家)가 찬술한 것도 함께 원록(原錄)에 붙였다. 이에 흥락(興洛)이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한마디의 말을 그 말미에 붙인다. 돌이켜 보건대 노폐(老弊)하고 무문(無文)이기 때문에 이 일을 감내할 수 없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공의 형제는 우리 선조 문충공(文忠公)과 함께 난리의 틈에 ..

쌍충실기 2023.03.26

쌍충실기(雙忠實紀) 구본(舊本) 발문(跋文)

雙忠實紀舊本 跋文 곽사중(郭思中) 발문(跋文) 소호, 소계 두 선생께서 용사의 변을 만나 종묘사직의 전복(顚覆)을 민망히 여기고 생령(生靈)들이 어육이 될 것을 염려하여 형은 백의로 창의하고 아우는 적수(赤手)로 일어나서 적을 막아 겪고 머리를 베어 중흥의 큰 공을 도와 이루었으니 그 인기(人紀)를 바로잡고 세교(世敎)를 권함이 어떠한가? 다만 병화의 나머지 문헌이 남은 것이 없어 그 가모(嘉謨), 웅략과 지행, 격언이 거의 인몰(湮沒)되어 전하지 아니하더니 다행히 국승과 야사에 있었다. 이에 소계공의 사손(祀孫) 정악(靖岳)씨가 한 두어 가지의 잡서에서 나온 것을 수집하여 유고의 약간을 합하여 한 부를 만들었다. 이 실록은 그의 사언(私言)이 아니고 실지에 근거한 바가 있는 것이다. 아! 두 분 선생께..

쌍충실기 2023.03.26

雙忠實紀 卷之五(쌍충실기 제5권)

제 5 권(卷之五) 종유제현록(從遊諸賢錄) 김성일(金誠一) 학봉(鶴峯) 김성일은 자가 사순(士純)이요 문소인(聞韶人)이다. 문과에 올라 사국(史局)에 뽑히어 들어가 사가(賜暇)로 호당(湖堂)에서 공부하였고, 삼사(三司)의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조정에 선 지 30년 동안 말을 다하고 꺼리지 않아 옛날 간신(諫臣)의 풍모가 있었다. 신묘년(선조 24년, 서기 1591년)에 사신으로 일본에 가서는 정도(正道)를 지켜 흔들리지 아니하였고, 임진년에는 초유사에 임명되어 영남의 의병을 일으켜 중흥의 기틀을 튼튼히 이루었으며, 계사년에 진주에서 졸하였다. 일찍이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 심학(心學)의 적전(嫡傳)을 이어받았고 덕행과 훈업(勳業)이 백대에 찬란하게 빛났다.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를 문충공이라 하였다. 조..

쌍충실기 2023.03.26

雙忠實紀 卷之四(쌍충실기 제4권)

제 4 권(卷之四) 포전(褒典) 시장(諡狀) 아! 용사(龍蛇)의 변란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임금이 피난하고 삼경(三京)이 함락되니 나라의 점위(阽危)함이 근근이 일발(一髮)의 사이였다. 화란(禍亂)을 잘 평정하여 사직이 회복되고 안정된 것은 오직 명나라가 두 번에 걸쳐 도와준 은혜요, 7년의 전쟁에서 마침내 중흥의 공을 이루게 된 것은 또한 여러 도에서 창의한 힘이었으니, 그때를 당하여 소계 최공 또한 그 한 분이었다. 공의 휘는 강(堈)이요 자는 여견(汝堅)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상조(上祖)의 휘는 아(阿)이니 고려조의 문하시중이요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5세대를 이어 잠조(簪組)가 연속되었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사필(斯泌)은 문과에 올라 시정(寺正)을 지냈고, 휘 자경(子涇)은 문과..

쌍충실기 2023.03.25

雙忠實紀 卷之三(쌍충실기 제3권)

제 3 권(卷之三) 포전(褒典)과 진청(陳請) 가리포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 최강(崔堈)에게 하교하신 글 임금께서 이같이 이르셨다. “몸을 잊어버리고 적개(敵愾)하여 나를 업신여긴 흉적을 이미 꺾었으니 뛰어난 공훈에 관질(官秩)을 올려서 가내(嘉乃)의 은전을 베푸는 것이 합당하므로 이에 탄고(誕告)하여 군정(軍情)을 크게 떨치게 하고자 한다. 생각건대 경(卿)은 규규(赳赳)한 간성(干城)으로 환환(桓桓)한 웅호(熊虎)와 같은 장수였다. 십 년 동안 전진(戰陣)에서 싸우면서 이미 시험한 공로 많았고, 삼품의 초반(貂班)의 관자에 있으면서도 오래도록 신지(信地)의 기여(寄與)에 전념하였다. 방비를 맡은 순칙(巡飭)에 부쳤음에 용양(龍驤)을 거머쥐고 선등(先登)하였다. 홍도(洪濤)가 하늘에 닿았으니 장한 뜻이..

쌍충실기 2023.03.25

雙忠實紀 卷之二(쌍충실기 제2권)

제 2 권(卷之二) 가승(家乘) 만력(萬曆) 임진(壬辰: 선조 25년, 서기 1592년) 4월 13일에 왜구(倭寇)가 부산(釜山), 동래(東萊)를 함락시키니, 열진(列鎭)이 와해(瓦解)되었다. 적이 내지(內地)로 난입(攔入)하여 인민(人民)을 도략(屠掠)하니 계공(季公)이 평소에 담략(膽略)과 기절(氣節)이 있었는데, 강개(慷慨)하여 백공(伯公)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충효(忠孝)를 지켰고 또 저가 이미 국은(國恩)을 받았으니 중인(衆人)과 같이 배의(背義)로 투생(偸生)만 하여 임수(林藪)의 사이에서 구차스럽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의려(義旅)를 일으켜서 충절(忠節)을 다하도록 합시다.” 라 하니, 백공께서 듣고 기특하게 여기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너의 포부(抱負)가 녹녹(碌碌) ..

쌍충실기 2023.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