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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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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인은 노래나 그림이나 춤이나 장식이나 공간 배치나 모든 부문에서 여백의 미를 추구한다는 데 한국인의 멋이 깃들인다. 10여 년 전 한국의 저명한 동양화가 한 분이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졌었다. 그분의 저명도 때문인지 한 뉴욕의 화랑 주인이 두 점의 수묵화(水墨畫)를 사갖고 갔다. 그날 밤 이 화가는 뜻밖에도 화랑 주인의 방문을 받았다. 낮에 사갔던 두 점의 수묵화를 펴놓으면서 그리지 않은 여백에 마저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더라는 것이다. 여백을 둔 미, 여백에 깃들인 멋을 모르는 서양 사람들의 자연스런 요구일 수 있으며 여백을 둔 한국인과 서양인의 정서나 감각을 단적으로 들어낸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한국인은 노래나 그림이나 춤이나 장식이나 공간 배치나 모든 부문에서 여백의 미를 추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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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은 외부의 어떤 작용이 가슴으로 표현되는 심정의 표현에 와닿아 일으키는 어떤 동요다. 그러기에 흥은 반드시 즐거운 동요뿐만이 아니고 눈물겨운 동요도 흥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사이’와 ‘사아아이’의 미학 연전 서울 동교(東郊), 불암산(佛岩山)에 등산 갔다가 비를 만나 산 중턱에 있는 한 거사(居寺)의 헛간에서 밥을 지어 먹은 일이 있다. 50대의 절머슴이 나무를 갖다 주어 불을 피우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그 절머슴과 더불어 흥겨운 몇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흥이 난 이 절머슴은 그의 장기(長技)인 꼽추춤을 추어 보였다. 등산 냄비인 코펠을 등 저고리 아래에 넣어 꼽추 모양을 한 이 절머슴은 소시 때 기방(妓房)의 머슴을 할 때 꼽추춤의 본통을 이어받았다는 한 노기(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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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크고 작고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한국의 한 뼘은 대체로 15센티미터요, 한 뼘의 길이는 그 사람 신장의 대체로 10분의 1에 해당된다. 곧 열 뼘이 자신의 키가 된다. 런던의 한 양말 가게에 들어가 진열장 속을 들여다보았다. 회색 계통의 양말이 쌓여 있는 쪽을 손가락질하며 회색 것을 하나 보여달라고 했다. 한국에서처럼 바로 꺼내 줄 것을 기대하고 보여 달랬던 것인데 이 매점 아가씨는 움직일 생각도 않고 내 발의 사이즈를 묻는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맘에 드는 색깔의 것일지라도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허사다. 그러기에 빛깔은 사이즈의 차선적인 선택순서가 된다. 대체로 유럽 사람에 비해 우리 한국 사람은 실용가치보다 감각적인 요소가 선행되며 따라서 상품의 선택도 맞나 맞지 않느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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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말에는 산에 감히 오른다 하지 못하고 반드시 산에 든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숨이 턱에 닿아 어느 봉우리 위에 발을 좀 붙인 것이 어찌 산의 정복이 되겠습니까? 옛 선비로서 행락을 호사스럽게 한 분으로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를 들 수 있다. 이 시인이 보길도에서 행락할 때의 모습이 《가장유사(家藏遺事)》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조반 후에 사륜차(四輪車)를 타고 현죽(絃竹)의 예기(藝妓)를 따르게 하여 회수당(回水堂) 또는 석당(石堂)에 올라가 놀았다. 세연정(洗然亭)까지 갈 때는 노비(奴婢)들에게 술과 안주를 충분히 준비시켜 작은 수레에 싣고 제자들을 시중케 했으며 희녀(姫女)들을 작렬(作列)시켜 낚싯배를 못에 띄우고 남녀 영동(令童)의 찬란한 채복(彩服)이 물 위에 비치는 것을 보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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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람은 기독교 윤리에 입각하여 자선을 하고 봉사를 하지만 우리 한국인은 적선을 하고 積德을 해야만이 그 음보로 복을 받고 잘살게 된다고 믿었다. 조선조 명종(明宗) 때 유명한 점장이로 홍계관(洪繼寬)이란 이가 있었다. 그가 예언한 것 치고 맞지 않는 것이 없었기로 고관대작들도 다투어 그를 극진히 대접, 자신의 앞날을 예견하곤 했던 사람이다. 당시 名相인 상진(尙震, 1493~1564) 정승도 자신의 한평생 길흉을 미리 점쳐 두었는데, 희한하게 들어맞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상(尙)정승은 홍계관에게 자신의 죽을 해까지도 점쳐 알아두고 있었다. 그 예언 받은 죽을 해를 당하여 상정승은 신변을 정리하고 재산처분을 한 다음 조용히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계관은 무슨 일이 있어 전라도에 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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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건이 사리는 상행위라는 경제적 개념으로보다 한 공동체의 공생공존을 위한 집단 휴머니즘으로 이해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우리 옛 조상들은 무척 가난하게 살았다. 일제 초기 때 자연 취락한 단위 촌락의 빈부 조사한 것을 보면 열 집에 한 집꼴이 제 식구 먹고서 양식이 남을 뿐이요, 제 식구만 먹고 살 만큼인 집이 겨우 열집에 세 집꼴이었다. 나머지 열 집에 여섯 집이 제 식구도 못 먹고 사는 그런 가난한 처지였으며 그 중 세 집은 남에게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딱한 형편이었다. 이렇게 가난한 우리 옛 농촌이었는데도 요즈음처럼 남의 물건을 훔친다거나 사기를 친다거나 하는 범죄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법도 있고 그 법을 집행하는 관가도 있었지만 다스릴 대상이 없었으므로 유명무실했다. 우리나라가 외국에 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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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들은 필요불가결한 재물 이상의 재물을 추구하는 법이 없었으며 그 이상 추구하면 악덕이요, 부덕이요. 그 사회에서 손가락질당하는 그런 인간 실격을 뜻했던 것이다. 오늘에 사는 현대의 우리 한국인과 옛날에 살았던 전통적 우리 한국인과는 달라진 것이 많이 있다. 그 달라진 것 가운데 두드러진 것을 손꼽는다면 맨 먼저 분(分)을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문제를 들 수 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자신의 분을 지키며 살았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분을 지키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이다. 분을 지킨다는 것을 손쉽게 풀어서 말한다면 내가 처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인격적인 위치에 알맞는 행동을 하고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분에 넘는 벼슬이나 덕망을 사양하고 분에 넘는 몸치장이나 사치나 집이나 음식을 사양하는 것이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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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오히려 번거로운 쪽을 택해 살아온 이유는 일이 반드시 괴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일에는 삶의 뜻을 주는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나브로이즘' 하면 시나이반도에 기인한 유태주의를 연상하거나 등산용 버너를 연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나이반도와 버너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처음 이 지면에서 선보이는 신조어임을 밝혀둔다. 곧 우리나라 말의 부사인 시나브로 + 이즘[主義]으로, 한국 사람의 노동관을 밝혀주는 한국적인 한 슬기의 표현이다. 시나브로란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으로 풀이되어 있다. 곧 두껍게 짧게 않고, 가늘게 길게 한다는 뜻이다. 시나브로와 비슷한 말로 '시난고난하다'는 있다. 말이 병이나 어떤 증세가 심하지 않으면서 오래 끈다 할 때 쓰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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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지 못하고 허리를 한 번 펴면 참아내는 기간이 절반으로 줄고 그 절반이 다시 절반으로 줄어 김을 매는 건지 허리를 펴러 왔는지 모를 지경이 된다. 모든 인생이 다 그런 거여." 일곱 살이면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적령이다. 그러하듯이 옛날에는 농사일을 배우기 시작하는 적령이 일곱 살이었다. 일곱 살만 되면 논 한쪽 구석 50평 남짓을 '네' 곧 너의 논이라고 떼어준다. 나는 그 논을 곧 '나의 논' 곧 내 논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농사일의 교육답(畓)이요, 실습답의 정통적 호칭이 내 논인 것이다. 자작하는 초다랑이의 논도 없이 남의 논 빌어 짓는 소작농의 집에 태어난 일곱 살에 떼어 받은 내 논은 동구 밖 숲거리에 있었다. 네 논이라고 떼어준다 해서 내 이름으로 등기 분양해 준 것이 아니다.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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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스승이 해야 할 많은 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지식을 가르치는 지육(知育)보다 사람됨을 가르치는 덕육에 한결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일제 때 나의 별명은 '짜찌루'였다. 당시 영국 수상 처칠의 일본말 발음인 것이다. 이것은 죽도록 싫은 별명이다. 왜냐하면 영국은 당시 일본과 싸우고 있던 적성국(敵性國)으로 ‘죽여라, 짜찌루' 하는 따위의 표어며, 창살에 찔린 짜찌루 머리통을 그린 표어가 나붙곤 하던 때이기에 그 별명으로 불리울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모욕과 경멸을 느꼈던 것이다. 언젠가 학교 운동장에서 여자아이들 노는데 훼방을 놓다가 집단으로 짜찌루란 매도의 세례를 받았다. 사춘기가 시작된 때라 미묘한 열등감도 작용했던지 복받치는 분노를 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