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장군 8

최영장군-기타 정보

9. 기타 이성계와의 비교 이성계는 당시 신흥 무인의 대표이자 신진사대부의 일원이었다. 이성계의 조상은 본래 전주에서 살다가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 지방으로 옮겨가 그 지역의 유력자로 성장했다. 원이 그 자리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면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나라의 다루가치를 지냈다. 그러나 고려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 할 때 이에 동조, 왕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출정하여 여진족 토벌과 고려군을 지원함으로써 이성계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최영은 권문세족의 후예였다. 이성계와 비교되던 최영은 유서깊은 가문 출신으로 그 딸은 우왕의 왕비이다. 이성계가 신흥 무인세력의 대표라면 최영은 구세력의 대표라고 할 수 있었다. 한편 요동정벌 실패 후 그의 최후가 너무도 당당해서 뭇사..

최영장군 2023.04.18

최영장군-일화, 묘지, 가족관계

6. 일화 《고려사》에서 "평생을 군문(軍門)에 종사했지만 아는 얼굴이 두서넛에 불과했다" 라고까지 평가할 정도로 군대 내의 파벌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치와 축재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김용이 주살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용이 생전에 가지고 있던 묘아안정주(猫兒眼精珠)라는 보옥이 조정에 바쳐져 관인들이 모두 돌아가며 구경하는 것을 보고 "김용의 그 크던 뜻을 겨우 이까짓 물건이 더럽혀 놓았는데,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완상하시는가?" 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고려사》열전에는 어떻게 하면 관인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상공(商工)을 배우면 된다." 라고 대답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매관매직 세태를 비꼬아 대답한 것이었다. 당시 고려의 권세 있는 자들은 서로의 저택에 초대해서 성대한 연회를 ..

최영장군 2023.04.18

최영장군-사후와 평가

4. 사후 손쉽게 개경을 손에 넣은 이성계 일파는 최영을 귀양보냈다가 두달 후 죽였다. 이성계는 최영이 역모를 꾸몄다고 우왕에게 고하였고, 그 시신을 길에 내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의 최후가 너무도 당당해서 뭇 사람들이 감동한 나머지 시체가 버려진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조선 세종 때의 재상 중의 한사람인 맹사성은 그의 손녀사위로, 의정부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5. 평가 그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엇갈린다. 첫째는, 고려의 만고 불변의 충신이다. 여러 난신적자들이 횡행하는 가운데서도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고 왕에 충성하고자 했던 고려의 충신이다. 둘째는,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고집스런 사람이다. 고려는 권문세가의 전횡으로 인하여 이미 그 ..

최영장군 2023.04.18

최영장군-생애 후반

3. 생애 후반 조반의 난과 권문세족 숙청 우왕이 그의 서녀 영비 최씨를 자신의 비로 삼겠다고 강요하자, 최영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겠다고 거절하였으나 우왕이 끝내 요구하므로 마지못해 승락하였다. 1381년 영삼사사(領三司事) 등을 지내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우왕 13년(1387)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던 염흥방(廉興邦, ? ~ 1388)의 종 이광(李光)이 조반(趙胖, 1341년 ~ 1401년)의 땅을 빼앗자 조반은 이광을 죽였다. 그리고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염흥방은 오히려 조반이 난을 일으키려한다고 허위보고를 하였다. 1388년(무진년) 정월 초하루 염흥방은 우왕에게 강권하여 조반을 수배하였다. 체포된 조반은 순군옥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6, 7 명의 탐욕스러운 재상들이 사방에 종을 놓아 남의 노비..

최영장군 2023.04.18

최영장군-관료생활

2. 관료 생활 변방 수비와 쌍성총관부 공격 처음에는 무인으로서 양광도 도순문사(都巡問使)의 휘하에 있으면서 여러 번 왜구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으며, 우달치에 임명되었다. 1352년(공민왕 원년) 음력 9월에 조일신의 역모를 안우(安祐)·최원(崔源) 등과 함께 진압하여 호군(護軍)으로서 출세하게 되었다. 당시 고려는 80년 넘게 원나라(元)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354년(공민왕 3년) 중국 산동 지역에서 장사성(張士誠) 등의 홍건적이 원 조정에 반기를 들자 원은 고려에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조정군(助征軍)을 요청했는데, 이때 최영은 대호군(大護軍) 대장군으로서 류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과 함께 병력 2천 명과 함께 출정했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였고 원에서 대기 중이던 고려인 2만 명을 합류시..

최영장군 2023.04.18

최영장군-생애초반

1. 생애 초반 최영은 고려 후기의 학자로서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지낸 최유청(崔惟淸)의 5대손이며 최원직(崔元直)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 때 최영은 사헌부 간관(司憲府諫官)을 지냈던 그의 부친 최원직으로부터 “너는 마땅히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유훈(遺訓)을 받은 후 최영은 이를 그대로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였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다.

최영장군 2023.04.18

최영장군-개괄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 겸 정치가이다. 본관은 동주(東州)이다. 아버지는 최원직(崔元直)이고, 어머니는 봉산 지씨(鳳山智氏)이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우왕의 왕비인 영비 최씨는 그의 서녀였다. 군관으로 출사하여 우달치에 임명된 뒤 관직은 육도 도순찰사, 양광, 전라도 왜적 체복사 등을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했고, 1376년(우왕 2)에는 왜구의 침략 때, 육군을 이끌고 논산군 연산의 개태사(開泰寺)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여러 번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었다. 이인임 등을 멀리하였고 1388년 이인임, 염흥방을 제..

최영장군 2023.04.18

최영장군-간략한 생애

​예전에는 國民學校 音樂敎科書에 『최영장군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라져서 요즘 어린이들은 아마도 이 노래를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 노랫말 自體가 崔瑩將軍의 一生을 要約한 것이었지요. 崔瑩將軍의 노래(나운영 작곡 최태호 작사) 黃金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한평생 나라 위해 바치셨으니 겨레의 스승이라 崔瑩將軍 이 겨레 이 나라 바로 잡고자 南으로 倭賊을 물리치시고 北으로 오랑캐를 무찌르시니 壯하다 그 이름 崔瑩將軍 遙東땅 너는 알라 將軍의 뜻을 威化島 回軍의 怨恨을 품고 조용히 斬刑으로 돌아가시니 슬프다 붉은 무덤 崔瑩將軍 『見金如石』 『黃金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 말은 지나친 慾心을 부리지 말라는 뜻으로, 大義를 위해서는 富貴榮華를 생각하지 않..

최영장군 2023.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