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8. 한솥밥 본문

한글 文章/살리고 싶은 버릇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8. 한솥밥

구글서생 2023. 6. 15. 05:10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화랑이 물불 가림 없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솥차를 공음(共飮함으로써 형성된 결속력이 적지 않은 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 한솥밥을 먹는 사이

 

몸은 여럿이지만 마음은 하나라는 뜻인 일심동체를 두고 한솥밥을 먹는 사이라고 말한다.

 

곧 이해나 선악에 구애받지 않고 피와 정이 통하는, 그래서 인간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한솥밥을 먹는 사이다. 항상 한솥밥을 먹는 가족 관계만 보아도 한솥밥이 갖는 인간 결속의 마력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인간의 親疏는 한솥밥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먹더라도 자주 먹느냐 이따금 먹느냐로 친소의 양이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솥밥의 의미가 크고 또 마력이 있었기에 옛 우리 선조들은 한솥밥을 아무나 먹이는 법이 없었다. 곧 친밀을 유지할 사람에게만 제한해서 아주 경제적으로 한솥밥을 먹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한 집안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한솥밥을 먹는 식구와 딴 솥밥을 먹는 생구(生口)가 구분되어 있었다. 곧 한집에 사는, 피가 통하는 가족들은 식구라고 하여 한솥밥을 먹지만 피가 통하지 않는 노비나 머슴 같은 생구, 그리고 식객들은 식구가 먹는 밥솥과는 다른 밥솥에서 지은 밥을 먹었다.

 

친척이 손님으로 오더라도 한솥밥을 내는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가문에 따라 그 한계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대체로 친계(親系)는 오등친(五等親)까지만 한솥밥을 먹이고 외계(外系)는 삼등친(三等親)까지, 처계(妻系)는 이등친(二等親)까지만 한솥밥을 먹였다.

 

이를테면 처삼촌이 손님으로 왔다면 체계의 삼촌은 이등친을 벗어나므로 한솥밥을 먹이지 않고 딴 솥에다 밥을 따로 지어 냈던 것이다.

 

옛날 시골에는 소금장수, 젓갈장수, 일용품 잡화를 팔고 다니는 무시로 장수, 그리고 일용품을 수선하는 땜장수 등 행상이나 행장(行匠)들이 마을에 들르면 남의 집 사랑방에서 잠을 얻어 자게 마련이었다.

 

이렇게 사랑채에 행상이나 행장이 머물면 안집에서는 밥상을 내는 게 상식이 되어 있으나 법도 있는 집안에서는 밥상에 반찬과 국과 숟가락, 젓가락을 놓아 낼 뿐 밥을 놓아 낸다는 법은 없었다.

 

그까짓 밥 한 그릇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뜨내기 行客에게 한솥밥을 낼 수 없는 법도와 굳이 이를 위해 딴 솥밥을 지을 수 없기에 밥 없는 밥상을 낸 것이다.

 

이 법도를 알고 있기에 행상과 행장들은 남의 집 사랑에 잠을 얻어 잘 때는 밥만은 자신이 지어 먹게끔 관습이 되어 있었다.

 

담 밑에 돌을 괴어 인스턴트 부엌을 만들고, 준비해 둔 작은 솥으로 밥을 지어 안에서 내준 밥상에 놓고 밥을 먹곤 했던 것이다. 이처럼 한솥밥에 정신적 요인을 크게 둔 것은 한솥밥이 지니고 있는 혈연공동체의 결속력을 신성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불씨(火種)에서 불을 일으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솥에다 지어 먹는 밥은 조손결속(祖孫結束)의 종적인 매체일 뿐더러 이해를 초월한 혈연결속의 횡적인 매체이기도 했다.

 

이사 갈 때 장손이 불씨와 솥을 메고 맨 먼저 새집에 들어간 것도 그것이 신성한 결속매체이기 때문이다.

 

한솥밥이 갖는 결속의 마력을 가족 외의 공동체 결속의 매체로 이용한 것이 '상물림'이라는 습속이다.

 

한솥밥을 같이 먹음으로써 공동체의식이 강해지듯 한상밥을 물려 먹음으로써 상하의 공동체의식을 다지려는 것이 상물림인 것이다.

 

이를테면 옛날 관아에서는 점심밥을 상물림으로 먹는 것이 상식이었다.

대감상이라 하여 육조판서의 점심상은 열두 명이 들어야 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앞에서 포교(捕校)가 “대감상이오! 대감상!”하면서 행인을 젖히는 벽제(辟除)를 하고 열두 명의 관노가 든 교자상이 따르고 그 뒤에 반주상, 숭늉상을 든 관비가 따르는 대단한 행렬이었다.

 

판서대감 한 사람을 위해 저렇게 큰 상을………… 하고 빈축할지 모르지만 그건 오해다.

 

개화기 때 일본 사람들이 이 대감상 행차를 보고 조선이 망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개탄해 놓은 글도 있으나 그 역시 한국인의 상물림에 대한 관습이나 그 의미를 몰랐던 데서 나온 빈축이요, 개탄인 것이다.

 

이렇게 대감상이 들면 맨 처음 지금 장관이랄 판서와 차관이랄 참판이 먼저 점심을 든다. 물론 그 큰 상의 음식을 극히 일부밖에 먹을 수가 없다. 먹을 수 있어도 다 먹어서는 안 되게끔 법도가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상물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긴 밥상을 국장급인 참의와 과장급이랄 정랑에게 물린다. 중간 간부가 먹고 나면 이제 실무자들인 아전에게 물리고 아전이 먹고 난 그 밥상을 관노들에게 물린다.

 

물론 옛날에는 총 직원이 20 내지 30여 명 안팎이었기에 항상 네 물림으로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같이 하여 오시(午時)에 점심이 시작되면 미시(未時), 곧 지금 12시에 시작해서 4시에 끝나게 된다.

 

한 조직체나 집단 소속의 모두가 네 물림으로 항상 먹음으로써 인간적이고 정신적 결속의 접착제를 그에서 얻었던 것이다. 어느 한 조직체에서 거리가 생기고 또 배리감이 형성되게 마련인 상하가 같은 음식을 더불어 먹는 한상밥의 동체험(同體驗)으로 거리를 좁히고 배리감을 증발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곧 상물림은 한솥밥과 같은 차원에서 한 집단의 상하를 결속하는지 극히 현명한 매체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 밖에도 공식(共食)의 논리는 많은 형태로 습속화되어 있었다.

 

■피를 나누어 마셨던 혈맹

 

옛날로 소급하면 가장 원초적인 공식은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었다. 혈맹이라는 말도 있듯이 약속이나 의리를 지키는 일심동체를 맹세할 때 피를 나누어 마심으로써 너와 나라는 개체를 일체로 만들었던 것이다.

 

원시시대에는 서로의 몸에서 피를 내어 나의 피는 네가, 너의 피는 내가 마심으로써 피가 섞인 일체가 되는 것으로 알았다.

 

사람의 피가 잔인하다 하여 신성한 동물의 피로 그것을 바꾸고 있다.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패망했을 때 당나라 장군은 백제 왕족의 대표인 부여 융과 공주 웅진산에서 혈맹을 맺고 있는데 이때 그들이 나누어 마신 피는 백마의 피였다.

 

임경사(任慶思)의 난 때 난도 7명은 야밤에 승방동(僧坊洞)에 모여 일심동체로 배신않겠다고 혈맹을 하고 있는데, 이때 나누어 마신 피는 닭피였다.

 

이 피가 후대에 내려와 차(茶)로 바뀌고 있다. 어느 한 결속을 위해 소속원들끼리 일심동체로 융합하는 매체로써 선택한 것은 절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조직체의 차(茶)를 한솥밥, 한솥차의 마력이 이토록 정신력에 영향을 크게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차를 나누어 마심으로써 정신적 결속을 다지는 습속은 멀리 신라시대의 화랑들이 이미 그들의 결속 수단으로 도입하고 있다.

 

동해변에는 신라 화랑들의 유적지가 많은데, 유적지마다 차를 끓여 마신 흔적이 남아 있다.

 

강릉 경포대에도 화랑이 차를 끓였다는 돌솥과 다구(茶具)가 남아 있었다는 옛 기록이 있고 또 한송정(寒松亭)에도 샘가에 돌솥이 있고 들 곁에 국선화랑들이 썼던 다구가 출토되었다고도 했다. -《거유기(車遊記)》

 

그 밖에도 화랑의 성지인 경주 남산의 삼화령(三花嶺) 미륵불에 차를 바치고 그 차를 나누어 마심으로써 일심동체를 다지곤 했던 것이다.

 

화랑이 물불 가림 없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솥차를 공음(共飮)함으로써 형성된 결속력이 적지 않은 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특유의 음식 형태인 '비빔밥'도 공동체를 동심일체로 결속시키는 매체로서 발생되고 있다.

 

제사 때 그에 참여한 일가친척들은 제상에 차려진 반찬으로 밥을 비벼 서로 밤참을 먹게 되어 있다. 그것은 제사의 절차 가운데 하나이며 어릴 때 잠을 못 이겨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잠들어 버려도 이튿날 그 비빔밥을 남겨 두었다가 먹이는 것이 법도가 돼 있었음은 그 공식(共食)에서 소외시키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곧 죽고 없는 조상과 그 후손들이 공식(共食)함으로써 조손(祖孫) 간의 종적 결속과 또 살아 있는 혈손끼리의 횡적 결속을 시키는 매체가 바로 제상에 올렸던 모든 음식을 섞어 비비는 비빔밥이었던 것이다.

 

제사의 규모가 커지면 제상에 올랐던 밤이나 대추 하나, 감이나 사과의 반쪽이라도 나눠 먹게 되어 있었다.

 

동제(洞祭) 할아버지가 주머니 속에 곶감, 대추를 넣어 와서 손자들에게 반쪽씩이라도 나눠 먹였던 것은 바로 이 공식(共食)으로서 촌락공동체의 단합과 결속을 모색하려는 정신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었던것이다.

 

국가 규모의 큰 제사에는 제사에 희생했던 동물로 국을 끓여 많은 사람이 공식을 했다.

 

이를테면 조선조 때 농사의 신을 모시는 선농제(先農祭)에는 소를 희생하게 마련인데 이 신성한 소를 잡아 버리는 부분 없이 탕을 끓여 위로는 임금, 정승부터 아래로는 촌부, 거지에 이르기까지 한솥국을 나누어 먹었는데, 바로 이것이 선농탕(先農湯)으로 요즈음 설렁탕의 기원이 되고 있다.

 

한솥밥, 한솥차, 한솥국을 오늘날 기업이나 조직 사회에 현대적으로 조화시켜 도입한다는 것은 일심동체, 공존공영을 위해 크게 바람직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