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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31. 사랑방 문화와 계

구글서생 2023. 6. 15. 05:12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품앗이나 두레에는 작업능률을 올린다는 실용성보다 인간적 유대공동체의 정신력 함양이라는 정신적 효율이 더 컸다.

 

시골에는 사랑방이 있게 마련이었다. 청소년이 모여드는 '아사랑'이 있고 중장년이 모여드는 '중사랑', 노인들이 모여드는 '사랑'이 있어 연령별 횡적 유대기능을 사랑방이 대행했던 것이다.

 

사랑방 문화(文化)에는 부정적 측면도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아사랑에 가면 담배를 배운다든지, 노름을 알게 된다든지, 음담패설을 익힌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긍정적 측면이 한결 많았다. 새끼꼬고 짚신 삼으며 방석이며 멍석을 짜는 농공예의 기법을 전수받고 익히는 아사랑은 교육장이었다.

 

또 대보름날 같은 명절 전야에 乞粒이라 하여 풍장치고 집집을 돌아다니며 곡식을 얻어, 그 일부로 회식을 하기도 하지만 남은 곡식은 부모가 앓거나, 집안이 어렵거나 하는 친구집을 도와주기도 했던 것이다. 또 이웃 동네와 겨루는 줄다리기며 달집놀이며 편싸움으로 애향심을 기르는 이 모든 청소년 행사의 본거지가 아사랑인 것이다. 곧 농촌 청소년 문화의 본거지가 아사랑이었다.

 

아사랑이 그러하듯이 중사랑은 농촌 결사인 農社나 농청(農廳)의 본거지가 된다. 농촌의 각종 공동작업이며 관혼상제며 다리 놓고 길 닦는 공익사업을 이 중사랑에서 도맡아 한다.

 

또 중사랑은 지나가는 객(客)이며 떠돌이 소금장수나 새우젓 장수, 땜장이들의 숙소로 제공되기에 이들로부터 외지의 정보를 듣는 뉴스센터이기도 했다. 농한기에는 이 중사랑에서 연극도 꾸민다. <홍도야, 우지 마라> <검사와 여선생>이니 하는 연극을 동네 빈집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손자를 등에 업고 모여드는 노사랑에서는 이따금씩 떠돌이 입담꾼을 불러다가 이야기책을 읽히곤 했다. 창을 섞어가며 억양을 넣어 읽어대면 슬픈 대목에서 따라 울고 분노할 대목에서 더불어 분노하곤 했던 것이다. 향약이 있는 마을에는 이 노사랑이 향약의 집행소요, 그 향약을 위배한 사람에게 제재를 가하는 재판소이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의 전통 농촌 문화는 사랑방이 집약했다 해도 대과가 없다.

 

근대화 과정에서 이 농촌 문화의 횡적 유대기능이 약화되어 왔고 따라서 사랑방이 쇠퇴되어 왔다. 농사의 기계화, 약품화로 공동작업이 쇠퇴하고 농촌 자치의 鄕約 문화가 쇠퇴하여 농촌을 구심시킬 기능이 없어진 데다 텔레비전이 들어와 횡적 유대의 기회나 필요성을 크게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옛날에 훈훈했던 인간적 유대는 촌단이 되고 그 다정했던 농촌 인심이 증발되고 없는 것도 바로 이 사랑방 문화의 단절이 큰 요인인 것이다.

 

쇠퇴해 가는 농촌문화 가운데 하나로서 각종 공조 · 공동작업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공조 문화로서 품앗이를 들 수 있다. 곧 노력(努力)의 교환 문화와 교환되는 노력을 반드시 동일 종류의 노무에 국한된다는 법은 없었다. 남녀 간의 품앗이를 할 때도 차이를 두지 않았고 또 소도 하루 쓰는데 장정 한 몫과 품앗이를 했다.

 

품앗이는 사적인 소수인 사이의 정의적 조직(的組織)이기에 상호신뢰가 기반이요, 객관화된 규정은 없다.

 

곧 노동의 종류나 능력이나 시간에 있어 다소 과부족이 있더라도 굳이 따지지 않은 휴머니즘 노동 문화인 것이다.

 

품앗이가 소규모의 공조작업이라면 두레는 대규모의 공동작업이랄 수 있다. 온 동네의 동민이 모두 참여하기도 하고 필요한 농가만 참여하기도 하는 이 두레는 참여하는 각 농가의 경작면적과 두레에 차출하는 노동력을 사정하여 그 소요 노동일수를 결정한다. 공동작업을 필요로 하는 모심기와 김매기, 보리풀, 나락베기, 나락들이기, 타작 등에 두레를 짜는데, 특히 세 벌 김매기가 끝나는 두레를 호미씻이라 하여 잔치를 벌였다. 집집마다 음식을 장만, 숲거리에 모두 모여 농악을 치며 씨름도 하며 하루를 즐긴다.

 

이날 성인식(成人式)이 벌어지는 것이 관례인데 15~18세 전후의 동네 청소년에게 육체적인 시련을 가하여 그 시련을 통과하면 이제까지 반 품 받던 노동력을 장정과 똑같은 온 품으로 인정받게 된다. 시련은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려 하나에서 열 헤아릴 때까지 버티게 하든가, 나뭇가지에 외새끼줄만 매어놓고 그 외새끼줄에 매어단 다음 돌려대는 맷춤을 이겨낸다든가 마을에 따라 달랐다.

 

이 아름답던 농촌의 공조 · 공동작업 문화가 기계로 모심고 기계로 나락을 베며 약품으로 김을 매는 기계화, 과학화로 필요 없게 된 데다가 도시화 진행으로 농촌 인력이 빠져나간 바람에 사양에 접어들고 있다. 품앗이나 두레에는 작업능률을 올린다는 실효성보다 인간적 유대공동체의 정신력 함양이라는 정신적 효율이 더 컸던 것이다.

 

상실된 농촌 문화 가운데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상부상조하는 복지(福祉) 문화다.

 

그 중 하나로 공존이라는 게 있었다. 공존은 마을 안에 중병(重病)을 앓거나 불구자, 과부 그리고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의 농사를 같은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지어 주는 제도를 일컫는다. 물론 무보수 농사를 원칙으로 하여 각자가 점심을 들고 와서 일을 해주나, 그 마을의 유지나 부자가 공존날 주식(酒食)을 부담하는 관례도 있다.

 

이상과 같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어려운 사정에 있는 사람 이외에도 졸지에 농사의 적기를 놓치는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도 공존의 혜택을 받는다.

 

호남지방에서는 공존이라 하여 따로 날을 정하지 않고 두레가 끝나는 날 공존봉사를 했다.

 

'부조'로 불리는 상호부조 문화도 주로 북한지방에 널리 번져 있었다. 공존은 농삿일에 국한되지만 부조는 농삿일 이외에 동네 사람이 집을 새로 지을 때, 또는 열 살 미만의 아이가 죽었을 때의 장사(葬事), 그 밖에 농사조직의 우두머리인 尊位가 뭣인가 공동으로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인정됐을 때 동원, 봉사를 했다. 부조란 말은 북한지방에서 촌락 • 동리의 토속 호칭이다.

 

농촌의 공제(共濟) 습속으로 되살리고 싶은 것은 계(契) 문화이다.

 

요즈음 계는 거의가 목돈 마련을 위한 영리적(營利的) 계지만 옛날 농촌의 계는 공익을 위한 계, 산업을 위한 계, 공제(共濟)를 위한 계, 친목을 위한 계가 거의였다.

 

공익계로서 이중계(里中契)라는 게 있었다. 봄 가을에 춘곡(보리), 추곡(벼)을 추렴하여 그 자금을 마을 사람 가운데 가난하지만 착실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거기에서 나오는 이자로 공익성의 보(洑)를 막는다든가 다리를 놓는다든가 길을 고친다든가 할 때 쓰는 이중효과의 계다.

 

산업계의 대표적인 것으로 송계(松契)가 있었다. 예로부터 조정에서 장려해 온 이상적 산림정책 가운데 하나로 주인 없는 산을 마을에 주어 공동으로 식목, 육림케 하고 도벌을 막게 하여 그곳에서 나오는 재목을 팔아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갖는 계다.

 

공제계의 대표적인 것은 호포계(戶布契)다. 지주나 부잣집의 농삿일을 공동으로 지어주거나 객지로까지 出家하여 번 돈은 동장이 보관했다가 국세(國稅) 또는 호토세(戶土稅)가 나오면 그 돈으로 변제하는 계다. 세금이나 가렴주구에서 自救하는 계문화랄 수 있다.

 

양로계(養老契)도 그중 하나다. 마을의 일정 연령 이상의 노인에게 정기적으로 음식이나 의류를 바치고 잔치와 선물을 베풀어 주기 위한 계다. 선조 때 학자 이준(李埈)의 향로계목(鄕老契目)에 보면 양로잔치는 춘추계 월 15일로 하고 대상은 60세를 하한(下限)으로 하고 있다. 마을에서 추렴해서 돼지를 잡으면 살코기는 추렴한 사람들이 나누어 갖지만 그 내장(內臟)은 마을의 60세 이상 노인들에게 고루 나누어 드리는 배장은 경로 문화의 하나이다.

 

학계(學契)도 그중 하나다. 원래 종중(宗中)에서 돈을 추렴하여 종중 자녀 가운데 돈이 없어 못 가르치는 아이들의 학비를 대주던 계가 종중의 한계를 벗어나 마을 아이들 가운데 머리가 좋은 데도 진학을 못하면 학비를 대주는 데까지 발전하고 있다.

 

상여계, 족두리계 하는 혼상(婚喪)의 대사에 대비하여 계로 붙여쓰는 공제계도 극히 근대까지 남아 있던 계 풍습이었다.

 

되살리고 싶은 농촌 문화의 다른 하나로 마을 자치제라 할 수 있는 향약(鄕約)이다.

 

이 향약은 중국 송나라 때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뜬 것으로 마을 사람끼리 덕업상권(德業相勸)・과실상규(過失相規) · 예속상교(禮俗相交) · 환난상휼(患難相恤) 네 가지 덕목을 약정하여 실행하고 지키지 않으면 벌칙을 가했던 전형적 농촌 문화다.

 

여기 율곡 이이(李珥)가 제정한 해주향약의 환난상휼 대목을 간추려 봄으로써 향약 문화의 편모를 살펴보기로 한다.

 

●마을에 불이 났을 때의 약정-큰불이 나 그 가재를 모조리 소진당했을 때 쌀 5말을 주고 호당 장정 한 명씩을 차출, 짚 석다발, 재목 한 그루, 새끼 열 발, 그리고 각자 먹을 밥은 싸갖고 와서 복구에 무료 봉사한다.

 

●병자가 중환일 때의 약정 ㅡ약과 의원을 향약의 기금으로 대주고 농사지을 사람이 없으면 계원이 농사를 대신 지어 준다.

 

●억울한 누명으로 송사에 걸려 있을 때의 약정-계원이 연서 명관에 알려 救怨을 한다.

 

●마을사람이 상(喪)을 당했을 때의 약정ㅡ본인상에는 쌀 6말, 부모상에는 쌀 4말을 급여하고 각각 장정 2명을 차출, 횃불 하나, 초 한 자루씩 들고 상가에 가 장사(葬事)를 돕는다.

 

●도둑을 맞았을 때의 약정-도둑을 맞으면 모두 가서 구제하고, 도둑은 쫓아가 잡는다. 도둑맞은 재물은 그 비(比)에 따라 의정해서 등분의 곡식을 급여한다.

 

이 같은 약정들을 잘 이행하고 못 하고에 따라 선적(善籍)과 악적(惡籍)에 올려 응분의 벌칙을 가하는데, 상벌(上罰), 차상벌(次上罰), 중벌(中罰), 차중벌(次中罰), 하벌(下罰)로 나누어 처벌했다.물론 양반과 상민, 종이 다르고 남녀도 달리 처벌하였다.

 

자신의 나이보다 20세 위를 아버지뻘의 존자(尊者)라 하고 10세 위를 형님뻘의 장자(長者)라 하며 10세 이내를 적자(敵者), 10세 아래를 소자(少者), 20세 아래를 유자(幼者)라 하여 각기 지켜야 할 법도가 상세하게 정해져 있어 장유유서도 깍듯하였다.

 

이와 같은 다양한 농촌 문화가 맥락되어 있어 부쳐 먹을 논밭 한 뙈기 없는 그 많은 우리 선조들이었을망정 조금도 각박하지 않고 또 불안하지도 않은 채 평화스럽고 다정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