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文章/조선명인전 101

100.조선-이제마(李濟馬)

이능화(李能和) 1869~1962. 학자. 호 간정(侃亭). 충북 괴산 생. 정동 영어학당, 한어(漢語)학교, 관립법어 (法語 : 프랑스어 )학교 졸업. 칭경례식사무소(稱慶禮式事務所) 위원을 거쳐, 관립한성 외국어학교 학감 역임. 저서에 「조선불교통사」, 「조선무속고」,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 「한국도교사(韓國道敎史)」 등이 있음. 선생의 성은 이씨요 휘(諱)는 제마요 본관은 전주이시다. 이조 헌종 4년(무술)에 함흥 남리(南里)에서 출생하셨다. 선생의 조부는 일찌기 진사를 지내셨는데 하루는 꿈을 꾸시던 중 한 마리 용마(龍馬)가 시내를 건너오는 것을 보셨다. 이윽고 꿈을 깨고 보니 어디서 고고한 소리가 들리며 이때 바로 제마 선생이 출생하였다. 그래서 선생의 조부는 이 아이는 우리 집의 천리구..

99.조선-김정호(金正浩)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사학자. 호 호암(湖巖). 평북 의주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학부중퇴. 상해에 있는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 근무, 귀국 후 중동·중앙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편집 고문으로 7년간 근무. 저서에 「조선사화」, 「호암전집」, 「조선문화예술」, 「한국의 문화」 등이 있음. 예술을 즐겨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문화애(文化愛)란 것이 일반적으로 결핍하다, 조선인의 심원(心園)이 황폐한 지 이미 오래다고 이렇게 말하는 이가 흔히 있다. 오늘날 현상으로 본다면 이 설을 반드시 부인할 수 없는 바다. 그러나 한편으로 본다면 국제적 풍운이 잦은 반도에서 이만큼이나마 문화를 보존해 온 것은 문화애가 없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바다. 멀리는 그만두고..

98.조선-김정희(金正喜)

황의돈(黃義敦) 1891~1969. 사학자. 충남 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 평양 대성학교, 휘문의숙, 보성고보교원을 거쳐 조선일보 사원, 문교부 편수관, 동국대 교수 역임. 저서에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 「중등조선역사」등이 있음. 1 선생의 성은 김, 명은 정희, 자는 원춘(元春)이요,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노격(老隔), 담연재(覃硏齋) 등의 많은 별칭이 있었으며 경주인이요 유당(西堂) 김노경(金魯敬)의 아들로서 모 유씨가 수태한 지 24개월 만에 탄생하니 때는 정조 병자이었었다. 선생의 천성이 효우(孝友)하고 박학다문하였으며 순조 기사에 생원시를 마쳤고 동 기묘에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대제(奎章閣待制)로 문한(文翰)의 중..

97.조선-홍경래(洪景來)

현상윤(玄相允) 1893~ ?. 신소설가, 사학자, 교육자. 호 기당(幾堂). 평북 정주 생.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 졸업. 3·1운동 때에는 민족 대표의 1인으로 독립운동에 참가. 광복 후 서울대 예과부장을 거쳐 고려대 초대 총장 역임. 6·25 남침 중에 납북됨. 신소설 「한(恨)의 일생」, 「박명(博命)」과 저서에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등이 있음. 1. 경래의 위인 정조 임인년간에 경래가 평안도 용강군 농가에서 출생하니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용감하였었다. 아이들과 더불어 유희할 때에도 뜀질과 무거운 것을 들기와 달음박질과 높은 데를 뛰어오르기와 병정놀음 같은 것을 많이 하였었다. 그 후 경래가 자라매 몸은 비록 석대(碩大)치 아니하나 눈에 광채가 있고 예기가 있으며 기도(氣度)가 웅대하고..

96.조선-임상옥(林尙沃)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사학자, 호 호암(湖), 평북 의주 생. 일본 와세다(早) 대학 정치학부 중퇴. 상해에 있는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 근무, 귀국 후 중동·중앙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편집 고문으로 7년간 근무. 저서에 「조선사화」, 「호암전집」, 「조선문화예술」, 「한국의 문화」 등이 있음. 지하에 묻힌 고적 유물을 파내는 것만이 문화적 발굴이 아니다. 사회 저층에 묻힌 역사적 인물을 들추어 내는 것도 역시 문화적 발굴의 하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순조조 국제 거상(巨商) 임상옥 같은 인물을 잘 구명하여 당시 무역계의 대표자로서의 역사테 안에 집어넣는 것이 어떠할까. 모르면 모르거니와 문화사를 설명할 때 오늘날 새 각도로 본다면 역사테 밖에 두어서는 아니..

95.조선-유희(柳僖)

김윤경(金允經) 1894~1969. 국어학자. 경기도 광주 생.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 닛교(立敎) 대학 사학과졸업, 동우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경에 피검되었었으며 광복 후에는 연세대교수,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어학 분야에 크게 기여. 저서에 「조선문자 급 어학사(朝鮮文字 及 語學史)」, 「나라말본」, 「중등말본」, 「용비어천가 강의」, 「새로 지은 국어 학사」 등이 있음. 1. 머리말 현재 쓰는 조선글인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래 493년이 되었지만 갑오경장 이전까지는 이에 대한 연구는 새벽별보다 드물었다. 이를 창작한 세종과 이에 협력한 정인지(태조 5년 생 성종 9년 졸), 성삼문(태종 18년 생 세조 원년 졸), 신숙주(태종 17년 생, 성종 6년 졸), 최항(태종 9년 생, 성종..

94.조선-부용(芙蓉)

김태준(金台俊) 생몰 연대 미상. 평론가, 성대(城大) 조선문학과 졸업. 점차 극좌적인 평론 활동을 하다 6·25 전에 월북. 저서에 「조선소설사」, 「고려가사 주해」, 「조선한문학사」, 「조선가요집성」, 「청구영언」등이 있음. 부용 호는 운초(雲楚)니 연천(淵泉) 김판서 이양(履陽)의 권애(眷愛)를 받은 성천(成川)의 명기(名妓)다. 그는 시명(詩名)이 높으니 그가 “별(別)하니 사(思)라” 운운하는 기형적인 싯구를 지어 세상에 회자되고 있거니와 〈부용당청우시(芙蓉堂聽雨詩)〉에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명주는 일천 곡(斛)이니, 갈마들인 수량이 유리쟁반에 그득하이 개개의 둥근 모양이 수선화의 아홉 번 굴린 붉은색이라네” (편집자역)1) 1)“明珠一千斛 遞量琉璃盤 箇箇團圓樣 水仙九轉丹” 연천 김이양은 ..

93.조선-신위(申緯)

차상찬(車相瓚) 1887~1946. 저널리스트, 한시 시인, 수필가. 호 청오(靑吾). 강원도 춘천 생.보성전문졸업. 「개벽」의 창간 동인이며 신간 「개벽」의 발행인. 이어 「별건곤(別乾坤)」, 「신여성(新女性)」, 「농민」, 「학생」 등을 발간. 〈관동잡영(關東雜詠)〉 등의 한시 및 사화(史話), 수필 등 다수를 발표. 저서에 「조선사 천년비사」, 「해동염사(海東艶史)」, 「조선야담사화전집」등이 있음. 1. 그의 일평생 선생의 성은 신씨, 관(貫)은 평산(平山)이요 명(名)은 위(緯), 자는 한수(漢叟)니 소시에 일찌기 경기도 시흥 자하산(紫霞山;그의 선영 소재지)에서 글을 읽었기 때문에 인하여 자호(自號)를 ‘자하’라 하였다. 그의 문벌은 세세 한경(漢京)의 명문 귀족으로 중조(中祖)는 이조 초 상신..

92.조선-정약용(丁若鏞)

이승규(李昇圭) 생물 연대 미상. 동아일보 기자, 조선어연구회 회원 역임. 1. 가세 및 유년시대 선생의 성은 정씨요 이름은 약용이요 자는 미용(美庸)이요 본은 압해(押海;羅州)니 영조 38년 임오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草阜面) 마현리(馬峴里 ; 지금 양주군 瓦阜面 陵內里)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의 가세는 감사 호선(好善)의 5세손이요 참의 시윤(時潤)의 현손이요 목사 재원(載遠)의 아들로서 세세 문한가(文翰家)에서 출생하여 그 유전하는 재예는 도저히 타 종족의 비륜(比倫)1)할 바 아니다. 이때에 장헌세자(莊憲世子)의 변이 있어 부공(父公) 재원이 관(官)을 버리고 향리에 귀(歸)하였는데 마침 선생이 나므로 소자(小字)를 귀농이라 불렀다. 1) 비륜(比倫): 비교하여 같은 또래나 같은 종류..

91.조선-김홍도(金弘道)

高裕燮 1905∼1944. 미술사학가. 호 우현(又玄). 경기도 인천 생,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 이화여전, 연희전문 등에 출강하면서 국내의 명승 고적을 답사하여 미술문화 연구에 진력. 저서에 「송도고적(松都古蹟)」, 「조선 탑파(塔婆)의 연구」, 「조선미술문화사논총(朝鮮美術文化史論叢)」및 유저로 「한국미술사 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 及 美學論攷)」 등이 있음. 김홍도의 자는 사능(士能)이요, 호는 단원(檀園)이요, 단구(丹邱)·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 등 별호도 있었다. 김해인(金海人)으로 만호(萬戶) 김진창(金震昌)의 증조요 영조 36년 경진생(이 생년에는 다소 의심되는 바가 있다. 이것은 뒤에서 고증하겠다)으로 향년이 미상이요 화원 화원(畵院畫員)이었고 음보(蔭補)로 연풍현감에 이르렀다. 「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