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世家 30

世家60-三王世家(삼왕세가)

이 篇은 30 世家의 마지막 편으로 한무제의 세 아들 齊王劉閎, 燕王劉旦, 廣陵王劉胥가 왕으로 봉해질 때의 文辭를 기록한 것이다. 文辭는 漢武帝가 三王을 봉할 때 신하들에게 묻고 답한 글이며 策文은 황제가 신하들의 책문(: 策問)에 답한 글을 말한다. 이 편에서는 皇子 세 명을 제후왕으로 봉하기를 청하는 상소문과 무제가 이들을 봉할 때 조서를 내려 묻고 답하는 책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 부분은 사학자인 저소손이 그 당시의 정황을 보충하였다. 사마천은 太史公 自序에서 “황제의 세 아들이 왕으로 봉해졌는데 그때 지은 황제와 신하들의 策文이 볼 만하다. 이에 제30편 ‘三王世家’를 지었다.” 라고 기술하였다. 「大司馬臣去病昧死再拜上疏皇帝陛下: “大司馬 臣霍去病은 죽음을 무릅쓰고 재배하며 황제 폐하께 上疏..

史記/世家 2023.07.14

世家59-五宗世家(5종세가)

이 篇은 30世家 중 29번째 편으로 漢景帝의 다섯 명의 후비에게서 태어난 열세 명의 아들들이 제후왕이 되었다가 몰락하는 과정에 관한 기록이다. 漢景帝의 부인은 일곱 명으로 첫 번째 부인인 薄皇后는 폐후되고 武帝劉徹의 어머니인 왕씨가 황후가 되었다. 景帝는 슬하에 모두 14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그 중 하나가 漢武帝유철이고 다섯 명의 후비에게서 태어난 13명의 아들은 모두 諸侯王에 봉해졌다. 사마천은 같은 모친에서 태어난 아들을 宗親이라 하였으며, 이에 5명의 후비들이 낳은 아들이 모두 모친으로 여겨 같은 종친으로 지낸다고 해서 五宗이라고 한 것이다.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景帝의 다섯 후비의 자식들이 제후왕이 되어 친족이 화합을 이루었고, 크고 작은 제후들이 蕃國이 되어 각자 자기 직분을 다하니 분수..

史記/世家 2023.07.12

世家58-梁孝王世家(양효왕세가)

이 篇은 30世家 중 28번째 편으로 前漢 景帝의 친동생인 梁孝王 劉武에 관한 전기이다. 梁孝王 劉武는 竇太后의 막내아들이며 代王·淮陽王을 역임했고 최종적으로는 梁王이었다. 전한 문제의 둘째 아들이며 전한 경제의 친동생으로 오초칠국의 난 진압에서 큰 공을 세웠다. 황제인 景帝의 황태제 자리를 노렸으나 이를 좌절시킨 원앙을 암살해 위기에 몰렸으며, 어머니 두태후와 누나 관도장공주의 도움으로 모면했으나 형과의 사이는 회복되지 못하였다.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오초7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황실의 제후국 중 梁만이 대항하였다. 梁孝王 劉武는 두태후의 총애를 믿고 공로를 뽐내다가 화를 입어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오초7국의 난을 막은 공로를 칭송하여 제28편 ‘梁孝王世家’를 지었다.” 라고 기술하였다. 梁孝王..

史記/世家 2023.07.12

世家57-絳侯世家(강후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27번째 편으로 漢나라 초기의 명장인 周勃과 주발의 아들 周亞夫에 대한 合傳이다. 周勃은 고조 유방이 패현에서 봉기할 때 고조를 따라 천하 평정의 공을 세우고, 絳侯에 봉하여졌다. 후에 呂氏一族이 난을 일으키자, 陳平과 더불어 여씨를 평정하고 文帝를 옹립하여 한나라 왕실을 안정시켰다. 周勃의 아들인 周亞夫는 승상을 역임했으며 文帝 6년(기원전158년)에 河內太守로 있다가 아버지가 죽자 뒤를 이어 條侯로 봉해졌다. 景帝 前元 3년(기원전154년) 吳楚가 반란을 일으키자 太尉로서 七國의 난을 평정하였다. 吳王을 죽인 뒤 丞相이 되었다.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여씨 일족이 방종하여 황실을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周勃이 권모술수를 써서 여씨 일족을 제거하였다. 吳楚의 반란 때 周亞夫는..

史記/世家 2023.07.11

世家56-陳丞相世家(진승상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26번째 편으로 前漢高祖劉邦의 공신인 陳平에 대한 전기이다. 陳平은 한나라의 공신으로 처음에는 항우를 섬겼으나 후에 유방을 도와서 한나라 통일에 공을 세웠다. 그는 계략에 뛰어나 항우의 책사였던 범증이 쫓겨나게 모략을 꾸몄고, 항우 휘하의 대장군으로 실력자로 평가받았던 종리매에 대한 신임을 잃게 하였다. 유방의 신임을 받아 고향의 戶牖侯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 曲逆侯로 승진하였고, 相國 曹參이 죽은 후에는 左丞相이 되어, 여씨의 난 때 周勃과 함께 이를 평정한 후 유방의 아들 文帝를 옹립하였다.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여섯 가지 기발한 계책을 사용하니 제후들이 모두 한나라에 복종하였다. 呂氏들을 토벌한 것은 陳平이 주모한 것으로 끝내 종묘사직을 안정시켰다. 이에 제26편 ‘陳丞相世家..

史記/世家 2023.07.11

世家55-留侯世家(유후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25번째 편으로 前漢 高祖 劉邦의 策士인 張良에 대한 전기이다. 張良의 字는 子房이며 시호는 文成公이다. 博浪沙에서 秦始皇을 습격했으나 실패하고 下邳에 은신하고 있을 때 黃石公으로부터 를 물려받았다. 陳勝·吳廣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유방의 진영에 속하였으며, 후일 項羽와 유방이 만난 '홍문의 會'에서 유방의 위기를 구하였다. 선견지명이 있는 策士로서 한나라의 서울을 秦나라의 故地인 關中으로 정하고자 한 劉敬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蕭何와 함께 책략에 뛰어나 한나라 창업에 힘써서 그 공으로 留侯에 책봉되었다. 韓信·蕭何와 더불어 漢初三傑로 일컬어진다.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군대의 장막 안에서 책략을 구사하여 무형의 것으로 승리를 거둠은 張良이 그 일을 꾸몄으며 슬기로웠다는 이름도 없었고..

史記/世家 2023.07.10

世家54-曹相國世家(조상국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24번째 편으로 前漢高祖 劉邦의 장수이었으며, 蕭何를 이은 相國 曹參에 대한 전기이다. 曹參은 전한의 군인이자 개국 공신으로, 자는 敬伯이다. 원래 진나라의 옥리였으나, 고조 유방의 거병 시에 뜻을 같이하였다. 한신과 더불어 군사면에서 활약을 하였다. 진나라와 항우를 공략하여 한나라의 통일대업에 이바지한 공으로 건국 후에는 공신서열 2위 平陽侯로 책봉되었고 경포의 반란 등을 평정하였다. 고조가 죽은 뒤 肅何의 추천으로 相國이 되어 惠帝를 보필하였다.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韓信과 함께 魏를 평정하고, 趙를 격파하고, 齊를 함락함으로써 마침내 楚를 약하게 만들었다. 蕭何를 이어 相國이 되었으나 제도를 바꾸지도 개혁하지도 않으니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曹參이 자기 공과 능력을 자랑하지 않..

史記/世家 2023.07.08

世家53-蕭相國世家(소상국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23번째 편으로 前漢高祖 劉邦의 중요한 謀臣인 相國 蕭何에 대한 기록이다. 蕭何는 沛縣의 말단 관리였으나 나중에 고조 유방의 재상이 되었다. 한나라 유방과 楚 항우의 싸움에서는 관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조를 위하여 양식과 군병의 보급을 확보했으며, 한왕조의 건립과 정권을 공고히 하는 데 공헌한 인물로 그의 탁월한 공훈을 이편에 기록한 것이다. 소하에 대한 기록은 高祖本紀에도 기록되어 있다. [史記本紀]권08. 高祖本紀 사마천은 태사공 자서에서 “초패왕의 군대가 漢나라를 滎陽에서 포위하여 3년 동안 서로 대치한 것은 蕭何가 關中을 안정시키고 인구를 계산하여 군사를 보충하고 식량이 끊어지지 않게 보급하였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한나라를 사랑하고 楚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만든 때문이었다. 이에..

史記/世家 2023.07.08

世家52-齊悼惠王世家(제도혜왕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22번째 편으로 前漢의 제후국인 齊悼惠王 劉肥와 그 후대에 대한 기록이다. 齊悼惠王 劉肥는 고조 유방의 서얼 장자로 생모는 曹씨이다. 고제6년(기원전201년), 韓信을 대신하여 제후국인 齊왕에 봉해졌고, 교동·교서·임치·제북·박양·성양 6군 73현을 통치하였다. 혜제6년(기원전189년)에 죽었다. 시호를 悼惠라 하였고, 아들 劉襄이 작위를 이었다. 齊는 기원전127년, 厲王이 죄를 지어 자결하면서 폐지되었다. 한때 무제의 아들 회왕이 책봉되어 부활하였으나, 기원전110년 회왕이 아들 없이 죽은 후 다시는 설치되지 않았다.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천하는 평정되었으나 고조의 친족들이 적었다. 悼惠王 劉肥가 먼저 장성하여 동쪽 齊 땅을 지켰다. 齊哀王은 여씨 일족의 행위에 분노하여 자기 ..

史記/世家 2023.07.08

世家51-荊燕世家(형연세가)

이篇은 30世家 중 21번째 편으로 漢나라의 荊王 劉賈와 燕敬王 劉澤에 관한 기록이다. 荊王 劉賈와 燕敬王 劉澤은 漢高祖 劉邦의 먼 친척 형제로 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할 때 전공을 세워 왕후로 봉해졌으므로 사마천이 두 사람에 대한 전기를 기록하였다. 사마천은 태자공 자서에서 “고조가 秦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을 때 劉賈가 함께하였다. 그 후 英布의 공격을 받아 荊과 吳땅을 잃었다. 營陵侯 劉澤이 여태후를 감동시켜 琅琊王에 봉해졌다. 祝午에게 기만당해 齊哀王을 믿어 齊로 돌아올 수 없게 되자 꾀를 내어 서쪽으로 관중으로 돌아와서 文帝를 옹립한 공으로 다시 燕王에 봉해졌다. 천하가 미처 평정되지 못한 때 유고와 유택은 친족의 신분으로 한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이에 제21편 ‘荊燕世家’를 지었다.” ..

史記/世家 2023.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