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文章 269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3.수험계

삼불(三不)은 입지 않았던 새 옷을 입혀 과장에 내보내지 말라는 것으로 입던 옷을 입히고 또 먹던 음식을 먹임으로써 평상시의 생체리듬을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과학적이랄 수 있다. 옛 중국에서 15세 전후에 치르는 첫 과거를 현시(縣試)라고 한다. 이 현시가 있는 날 새벽 축시(丑時, 3~4시)에 수험생들에게 起寢을 알리는 대폿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린다. 인시(寅時, 5~6시)에 두 번째의 대폿소리가 울리는데 이 소리를 듣고 수험생은 필묵과 도시락을 들고 시험장을 향해 떠난다. 이 축포와 인포 사이에 수험생에 대해 부모들이 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 일이 있었다. ‘오불심요(五不心要)'로 속칭되는 이 가르침은 요즈음 세상에도 딱 들어맞는 지혜이기에 되뇌어볼까 한다. 그 하지 말아야 할 일불(一不)이 수험생에게..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2.발달한 편달 문화

우리말에 가르쳐 이끌어주는 것을 편달이라 하고, 가르치는 스승을 敎鞭 잡는다고 했음은 바로 매(鞭)가 교육적 수단으로서 차지한 비중을 암시해 준다. 매로써 사람들 다스리는 편달 문화(鞭達文化)가 무척 발달했던 우리나라였다. 날이 몹시 가물거나 윤상(倫常)을 문란시키는 일이 자주 일어나면 그 고을을 다스리는 원님은 자신의 惡政에 대한 천심의 응징으로 보고 천심매(天心鞭)를 자청했던 것이다. 원님은 동헌앞에 편대(鞭臺)를 쌓아놓고 그 위에 바짓가랑이를 걷고서 올라선다. 그러면 복면한 포졸들이 가죽채찍을 들고 그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후려친다. 집무처인 동헌의 가장 복판에 있는 기둥을 천심이 하달되고 또 인심(人心)이 상달되는 천주(天柱)라 일컬었는데, 원님은 상체를 벌거벗은 다음 이 천주에 머리를 조아리고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1.신바람의 정신

종교나 신앙도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한국인의 신바람 체질과 절충 융화되었던 데 예외가 없다. 우리 한국인은 신앙을 믿더라도 신이 나는 그리하여 신과 교감하는 황홀경에 젖고 싶어한다. 나는 한국의 사주팔자에서 소외받고 태어났던 것 같다. 여남은 살 때의 일로 기억된다. 명이 짧다 하여 명다리를 잇는 무당굿을 당한 일이 있다. 물론 이 무당굿의 주인공은 나였다. 굿판 한가운데에 나를 앉혀 두고 무당이 방울을 흔들고 주문을 외며 돌아대는 것으로 이 굿은 시작되었다. 넋을 빼는 절차였던 것 같다. 어느 지경에 이르니 동령(動鈴) 소리가 마치 바닷물 썰고 밀리듯이 멀리 들렸다 가까이 들렸다 하던 기억이 난다. 이때 나는 나도 몰래 그 동령 소리의 원근(遠近)에 맞추어 몸을 좌우로 흔들었던 것 같다. 이때 무당은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0.놀부의 심사부

아무리 세상이 험하고 어렵다 해도 그 어려움과 험한 속에서 놀부만한 의지와 집념을 가지고 임한다면 어떠한 난국도 타개할 수 있는 것이다. 흥부는 박을 타서 나온 쌀로 밥을 지어 남산만큼 쌓아놓고 아들 스물다섯을 불러댄다. 놈들은 철환처럼 이 밥의 산에 박혀 보이지도 않고 그저 꿈틀꿈틀하며 그 많은 밥을 먹어치운다. 다른 박에서 청금단(靑錦緞), 흑공단(黑貢殺) 비단이 쏟아진다. 흥부 내외를 비롯 스물다섯 아이들이 마냥 한 필씩 들고 몸에 감아댄다. '뺨과 턱을 휘둘러서 목덜미를 감은 뒤에 왼쪽 어깨에서 시작하여 손목까지 내려감고 도로 감아 올라와 오른쪽 어깨 손목까지 내려감고 ………겨드랑이에서 불두덩까지 감아 내려와서는 두 다리 갈라 감고…………’ 이렇게 감아놓고 보니 진상(進上)가는 청대 죽물(竹物)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19.한국적인 것의 재음미

박해받고, 수난받고, 때려 부수고, 발로 짓밟아도 길 복판에 피어나는 질경이처럼 강인하게 살아난 이 민족의 '기억' 이 무엇인가. 미국 사람은 미국적인 것을 자랑한다. 영국 사람은 영국적인 것에 긍지를 갖는다. 프랑스 사람도 그렇고 중국 사람도 그렇다. 물론, 유태인도 유태적인 것에 긍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역사가 긴 민족이나 강대한 나라들은 스스로의 고유한 것에 긍지를 갖고 있다. 그 긍지가 바로 힘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민은 한국적인 것에 긍지를 갖고 있지 않다. 옛날에도 그러했고 오늘날도 예외없이 그렇다. 학교 교육에서도 한국적인 것이 좋다고는 별반 가르치고 있지 않다. 긍지나 자랑은커녕 한국적인 것은 빨리 없애버릴수록 좋다는 그런 열등감을 갖는 데 예외가 없다. 옛날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18.여백과 여운

우리 한국인은 노래나 그림이나 춤이나 장식이나 공간 배치나 모든 부문에서 여백의 미를 추구한다는 데 한국인의 멋이 깃들인다. 10여 년 전 한국의 저명한 동양화가 한 분이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졌었다. 그분의 저명도 때문인지 한 뉴욕의 화랑 주인이 두 점의 수묵화(水墨畫)를 사갖고 갔다. 그날 밤 이 화가는 뜻밖에도 화랑 주인의 방문을 받았다. 낮에 사갔던 두 점의 수묵화를 펴놓으면서 그리지 않은 여백에 마저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더라는 것이다. 여백을 둔 미, 여백에 깃들인 멋을 모르는 서양 사람들의 자연스런 요구일 수 있으며 여백을 둔 한국인과 서양인의 정서나 감각을 단적으로 들어낸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한국인은 노래나 그림이나 춤이나 장식이나 공간 배치나 모든 부문에서 여백의 미를 추구한..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17.흥

흥은 외부의 어떤 작용이 가슴으로 표현되는 심정의 표현에 와닿아 일으키는 어떤 동요다. 그러기에 흥은 반드시 즐거운 동요뿐만이 아니고 눈물겨운 동요도 흥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사이’와 ‘사아아이’의 미학 연전 서울 동교(東郊), 불암산(佛岩山)에 등산 갔다가 비를 만나 산 중턱에 있는 한 거사(居寺)의 헛간에서 밥을 지어 먹은 일이 있다. 50대의 절머슴이 나무를 갖다 주어 불을 피우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그 절머슴과 더불어 흥겨운 몇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흥이 난 이 절머슴은 그의 장기(長技)인 꼽추춤을 추어 보였다. 등산 냄비인 코펠을 등 저고리 아래에 넣어 꼽추 모양을 한 이 절머슴은 소시 때 기방(妓房)의 머슴을 할 때 꼽추춤의 본통을 이어받았다는 한 노기(妓)..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16.身尺等式의 지혜

사람이 크고 작고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한국의 한 뼘은 대체로 15센티미터요, 한 뼘의 길이는 그 사람 신장의 대체로 10분의 1에 해당된다. 곧 열 뼘이 자신의 키가 된다. 런던의 한 양말 가게에 들어가 진열장 속을 들여다보았다. 회색 계통의 양말이 쌓여 있는 쪽을 손가락질하며 회색 것을 하나 보여달라고 했다. 한국에서처럼 바로 꺼내 줄 것을 기대하고 보여 달랬던 것인데 이 매점 아가씨는 움직일 생각도 않고 내 발의 사이즈를 묻는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맘에 드는 색깔의 것일지라도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허사다. 그러기에 빛깔은 사이즈의 차선적인 선택순서가 된다. 대체로 유럽 사람에 비해 우리 한국 사람은 실용가치보다 감각적인 요소가 선행되며 따라서 상품의 선택도 맞나 맞지 않느냐 하..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15.국토를 애인같이

우리 옛말에는 산에 감히 오른다 하지 못하고 반드시 산에 든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숨이 턱에 닿아 어느 봉우리 위에 발을 좀 붙인 것이 어찌 산의 정복이 되겠습니까? 옛 선비로서 행락을 호사스럽게 한 분으로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를 들 수 있다. 이 시인이 보길도에서 행락할 때의 모습이 《가장유사(家藏遺事)》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조반 후에 사륜차(四輪車)를 타고 현죽(絃竹)의 예기(藝妓)를 따르게 하여 회수당(回水堂) 또는 석당(石堂)에 올라가 놀았다. 세연정(洗然亭)까지 갈 때는 노비(奴婢)들에게 술과 안주를 충분히 준비시켜 작은 수레에 싣고 제자들을 시중케 했으며 희녀(姫女)들을 작렬(作列)시켜 낚싯배를 못에 띄우고 남녀 영동(令童)의 찬란한 채복(彩服)이 물 위에 비치는 것을 보며 자..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14.아름다운 적선사상

서양 사람은 기독교 윤리에 입각하여 자선을 하고 봉사를 하지만 우리 한국인은 적선을 하고 積德을 해야만이 그 음보로 복을 받고 잘살게 된다고 믿었다. 조선조 명종(明宗) 때 유명한 점장이로 홍계관(洪繼寬)이란 이가 있었다. 그가 예언한 것 치고 맞지 않는 것이 없었기로 고관대작들도 다투어 그를 극진히 대접, 자신의 앞날을 예견하곤 했던 사람이다. 당시 名相인 상진(尙震, 1493~1564) 정승도 자신의 한평생 길흉을 미리 점쳐 두었는데, 희한하게 들어맞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상(尙)정승은 홍계관에게 자신의 죽을 해까지도 점쳐 알아두고 있었다. 그 예언 받은 죽을 해를 당하여 상정승은 신변을 정리하고 재산처분을 한 다음 조용히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계관은 무슨 일이 있어 전라도에 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