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文章 269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92. 보리

보리값이 쌀값을 웃돌고 있다. 보리밭에서 가난 이미지가 증발하고 보리의 가공식품이 느는 데다가 수지가 맞지 않아 경작을 기피한 때문이라지만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이변이 아닐 수 없다. 보릿고개, 보리떡, 보리죽, 보릿자루 하면 가난 이미지가 물씬하다. '菽麥’ 하면 모자란 사람을, '보리밭 파수꾼' 하면 못된 사람을 연상하게 된다. 오뉴월에 보리밭 들판만 지켜보고 있다가 정사(情事)를 발견하면 그것을 미끼로 뜯어먹고 사는 진드기 인간이 보리밭 파수꾼이기 때문이다. 업고 있는 아기의 성별(性別)을 물을 때, 고추냐 보리냐고 물었다. 남존여비가 혹심했던 옛날인지라 보리라고 대꾸하면 혀를 찼다. 진통 끝에 애 울음소리가 나면 시어머니는 산실(産室) 밖에서 고추냐, 보리냐고 물었다. 보리라는 대꾸를 들으면 시..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91. 성균관

한국 최초의 대학이 충선왕 때 성균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맥을 잇고 있으니 대단한 대학의 전통이 아닐 수 없을 뿐더러 세계적인 대학문화재가 아닐 수 없다. 대학의 기원을 흔히들 고대 아테네의 아카데미아에 둔다. 20여 년 전에 이 아카데미아의 유지(遺址)를 찾아보고자 아테네를 헤매었으나 어느 한 시민도, 또 당국자도 학자도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완전히 망각 속에 묻힌 이 아카데미아가 있었다는 아크로폴리스신전의 오른쪽 벼랑 밑은 온통 슬럼가가 돼 있었다. 그중 누추한 한 집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던 자리'라고 새겨져 있는 뜨락의 디딤돌이 유일한 아카데미아의 흔적이 되고 있을 뿐이다. 은세공(銀細工)의 가내수공업으로 호구하고 있다는 그집 주인이 마침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90. 부채

선풍기 바람이 더위를 물리적으로 쫓고 에어컨이 화학적으로 삭인다면, 부채 바람은 더위를 달래면서 공존한다. 자연과 적대하지 않고 화합하는 것이 부채 바람의 묘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밀농도(親密濃度)를 연구한 심리학자 홀스타인이라는 이는 사람이 6개월 동안 만나지 않거나 소식을 전하지 않거나 하면 그 두 사람 사이의 친밀도가 반감한다고 했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고 싶은 친지에게는 반년에 한 번쯤은 편지를 하거나 전화를 걸거나 인편에 안부라도 전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이 홀스타인의 법칙을 알았을 턱은 없지만 체험적으로 터득을 하고 꾸준히 실행해온 데 머리가 숙여진다. 이를테면 정초에 원근의 친지들에 달력을 보내고 그 후 거의 반년이 가까워지는 단오날에 부채를 다시 보냄으로써 희석되어가..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89. 사불삼거(四不三拒)

"우리 형제가 국록을 먹으면서 이런 영업을 하면 가난한 백성들은 무엇으로 생업을 삼으란 말이냐" 형 김수팽은 동생을 매로 치며 염색물을 쏟아버렸다. 우리 전통 관료사회에 청렴도를 가르는 기준으로 '사불삼거(四不三拒)'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부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불(不)이다. 영조 때 호조(戶曹)의 서리(書吏)로 있던 김수팽(金壽彭, ?~?)이 어느 날 惠廳의 서리로 있는 동생집에 들렀다가 마당에 널려 있는 항아리에서 염색하는 즙(汁)이 넘쳐흐르는 것을 보고 어디에 쓰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그래서 동생이 처가 염색으로 생계를 돕고 있다고 하자, 노하여 동생을 매로 치며, “우리 형제가 더불어 국록을 먹고 있으면서 이런 영업을 하면 저 가난한 백성들은 무엇으로 생업을 삼으란 말이냐.” 하고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88. 리본과 매듭

리본은 육체나 정신, 정조나 절개를 봉쇄하는 여성의 무기이다. 리본의 미화 부위가 모두 남성의 사심이 파고들 함정인 데 예외가 없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리본 유행은 도덕 재무장의 표현이다. 여성들의 꾸밈새로 리본이 유행하고 있다 한다. 리본 하면 소녀들의 머리를 연상하게 되지만 지금은 노소(老少) 없이 머리며 목둘레, 젖가슴, 팔소매, 허리띠, 치마끈, 심지어 내복, 스타킹이며 들고 다니는 가방, 신발에까지 리본의 미화(美化) 부위가 전신으로 확대되고 있다. 리본을 우리말로 옮기면 매듭이다. 매듭은 뭣인가 묶어서 폐쇄시키는 실용적 가치에서 비롯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흐트러지기 쉬운 머리를 쪽을 찐다든지 댕기를 땋는다든지 하는 것도 매듭이요, 옷고름을 맨다든지 허리띠나 대님을 매는 것도 매듭..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87. 흙집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진리는 세상이 좁아지면서 왕성해지고 있는 문물 교류에 중대한 슬기를 암시해 주고 있다. 적화(赤化) 이전의 사이공에서 한국의 고추씨를 뿌린 고추밭을 본 일이 있다. 놀랐던 것은 그것이 고추밭이 아니라 고추나무숲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 땅에서는 겨우 한 자 남짓 자라는 풀에 불과하지만, 같은 씨앗인데도 기후 풍토가 다르면 키를 넘는 나무가 되는 것이다. 무명(木棉)도 그렇다. 남방 작물인 무명은 목면(綿), 목화(木花)란 이름이 말해주듯이 사람이 올라가 따야 하는 나무였다. 그것을 기후와 풍토가 다른 한국 땅에 옮겨 심었을 때는 한 자 남짓밖에 자라지 않는 풀이 되고 만다. 강남의 귤을 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이 진리는 세상이 좁아지면서 왕성..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86. 손님맞이

"만리풍파에 시달려 시장할 테니 약소하나마 거세한 소 세 마리와 닭 50마리, 달걀 1만 개를 주겠노라." 미군에게 선전통고를 하러 간 한국 사신의 말이다. 낯선 손님을 환대하는 습속은 세계가 공통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여류 시인인 사포의 시에 '제우스 크세니오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딴 도시 국가에서 온 손님이면 비록 거지나 도망쳐 온 죄인일지라도 환대하게끔 된 제도를 일컫는다. 이 이인환대(異人歡待)는 로마 시대에 전승되어 손님이면 귀천을 불문하고 목욕부터 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며 식사를 대접할 때까지 그의 신분을 물어서는 안 되게끔 돼 있었다. 이 제도 때문에 초기 기독교의 로마 전도가 가능했다고 한다. 낯선 곳에서 온 낯선 손님은 악령을 몰고 올 수도 있기에 이를 환대하여 해코지를 하..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85. 조선종이

고려지를 질기다 하여 만지(蠻紙)라 하는데, 누에고치를 넣어 만들었기로 희기가 백설 같고 질기기가 비단 같다. 우리 옛 조선종이가 좋았던 것은 소문이 나 있었다. 중국 문헌인 《박물요람(博物要覽)》에 보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먹(墨)을 먹는 품이 고려지(高麗紙)만큼 겸손한 종이가 없다 했으니 종이에 대한 칭찬치고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송나라에서는 고려지를 제일로 쳐 이를 얻어 글을 쓰는 것이 상류 사회의 자랑이기까지 했다. 중국에 가는 사신들의 선물 가운데 조선종이가 빠지지 않았던 것도 그 명성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북경(北京)에 와 있던 각국 천주당이나 러시아 공관을 방문할 때도 예물로써 조선종이를 들고 가는 것이 상식이었다. 문필용(文筆用)으로뿐만 아니라 질기기로도 세계 제일이었..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84. 모유

유방을 통한 엄마와 아기의 피부접촉이 하루 4시간 이상 지속되지 않으면 정서와 지능에 결함이 생긴다는 것을 선조들은 체험적으로 터득하고 있었다. 고대 라틴말로 유방(乳房)은 맘마(mamma)였다. 이 맘마는 어머니란 뜻도 되고 또 그곳에서 나는 젖에서 연유하여 食事란 뜻도 된다.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일이다. 한데 맘마란 말이 사어(死語)가 돼 버렸다. 영어에 유방이란 말이 따로 없고 가슴(breast)이란 말로 대용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젖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슴이 말랐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유방을 섹스의 일환으로 보았기에 섹스를 준엄했던 기독교 윤리에 저촉되어 이름마저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을 포함한 동양에 있어선 유방을 모성(母性)의 일환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