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공 김덕령 7

김덕령-관련사항

그의 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 미상의 전기 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광주광역시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충장로라는 길이 있다. 광주광역시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충장사라는 사당이 있다. 광주광역시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충장공 정려비와 그 비각이 있다. 비문 전면은 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이며, 충장공 김덕령과 그 형재 덕홍, 덕보의 행적, 그 부인 흥양이씨의 행적이 적혀 있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충효동은 충장공 정려비에 적힌 忠孝之里로부터 비롯한 이름이다. 광주광역시 충효동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취가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광주광역시에 주둔한 육군 제31보병사단의 별칭이 충장부대이다. 楓岩亭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 있는 건물로,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가 형의 죽음에 상심하여 은거하며 ..

충장공 김덕령 2023.04.19

김덕령-평가

묵재 李貴 등은 용맹이 절륜하고 지혜가 뛰어나다고 평했다. 《임진기록》에서 김덕령이 올린 1594년 5월 11일자 장계에 따르면, “신은 그저 裨將으로서 선봉에 서서 돌격대의 임무를 맡았을 뿐인데, 이 고개를 넘은 직후 비로소 군에서의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평하였다. 앞서 3월 2일 장계에서도 “신이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동지 몇 명을 불러 모아 한 장수의 선봉이 되고자 하였을 뿐인데 뜻밖에 상께서 장수의 호칭을 내려 주시고 모여 있는 군사를 慰撫해 주시니 신이 감당할 수 없어 밤낮으로 두렵고 민망합니다.”라며 비슷하게 자평하였다. 《서하집》권5에 따르면, 김덕령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일찍부터 자부심이 강하고 비분강개하는 기질을 가졌으며, 풍모는 그다지 長大하지는 않..

충장공 김덕령 2023.04.19

김덕령-死後와 追尊

사후 김덕령의 시신은 온전히 거두어져 수레에 실려 광주 석저촌에 도착한다. 역적 이몽학과 한현의 시신이 저잣거리에 걸리고 능지처참을 당한 것에 비하여 대접을 받은 셈이다. 시신에는 부인 이씨가 손수 만든 수의가 입혀지고, 장례식은 암울하게 치러진다. 역적으로 몰렸으니 조정에서 보낸 관리가 장례를 삼엄하게 통제하였다. 김덕령은 무등산 자락에 묻힌다. 그의 작품 중 죽기 전에 지었다는 詩調인 春山曲이 전한다. 부인 이씨는 자식도 없이 홀로 지내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으로 피난을 간다. 일본군은 이곳까지 추격하여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부녀자를 겁탈하였다. 그녀는 정절을 지키려다가 보리암 근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순절한다.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는 세상이 싫어 은거하였다. 여러 곳을 떠돌다..

충장공 김덕령 2023.04.19

김덕령-이몽학의 난

1596년(선조 29년) 7월 6일 충청도 鴻山 지역에서 왕족 李夢鶴이 난을 일으켰다. 이몽학은 “충용장 김덕령과 의병장 곽재우·홍계남 등이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도우며, 병조 판서 이덕형이 내응한다” 라는 등 거짓말과 헛소문을 퍼뜨렸다. 한편 7월 12일에 도원수 권율은 충청병사 이시언의 요청을 받아 전라감사 박홍로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을 거쳐 尼山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권율은 반란군의 세력이 매우 많음을 알고 충용장 김덕령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게 하였다. 그러나 며칠 뒤 부여군 石城에서 크게 이겨 이몽학의 목을 베어 난을 진압한다. 7월 14일 권율의 명을 받은 김덕령은 난을 진압하려고 진주를 떠나 충청도로 진군하다 15일에 단계에서 유숙했으며 16일에 함양으로 갔다. 17일에 미처..

충장공 김덕령 2023.04.19

김덕령-임진왜란 의병 활동

김덕령의 뜻은 공부에 있었고, 활쏘기와 말타기가 있지 아니했으나,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형 덕홍이 전사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자, 나라의 수치와 형의 원수를 생각하며 날을 지내었다. 마침내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의병을 모아 거병하였다. 의병 조직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김덕령이 25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6월에 김덕령은 형 김덕홍(1558∼1592)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高敬命을 찾아가서 朴光玉 등과 함께 그의 막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며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고향 광주로 귀향하였다. 무등산에서 무예를 닦고, 鑄劒洞에서 무기를 만들어 전쟁터로 보급하는 등 후방에서 관병·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 다음 달 7월 10일 형 김덕홍이 제1차 금산전..

충장공 김덕령 2023.04.19

김덕령-생애 초반

김덕령은 조선 태종 때 의정부 贊成을 지낸 金漢老(양녕대군 장인)의 12대손이다. 광주의 서쪽에 위치한 평장동(지금의 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에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다가 고조할아버지 金文孫이 1470년경 光州盧氏 부인과 결혼하여 처가 마을인 석저촌으로 들어와 살면서 그곳이 새로운 광산 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평장동과 석저촌(지금의 충효동)은 직선거리로는 5km 안팎으로 가깝다. 증조할아버지 金翊은 호조 정랑을 지냈으나, 할아버지 김윤효와 아버지 김붕섭은 才行이 있었음에도 벼슬에 나가지 못하였다. 김덕령은 1568년(선조 원년) 12월 29일 전라도 광주 無等山 아래 石底村(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성안마을에서 아버지 金鵬燮과 直長 潘繼宗의 딸인 어머니 南平潘氏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충장공 김덕령 2023.04.19

김덕령-개괄

金德齡(1568년 12월 29일~1596년 8월 21일)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景樹, 시호는 忠壯이다. 별칭은 神將, 超乘將, 翼虎將軍, 忠勇將 등이며, 일본군은 石底將軍이라 부르기도 했다. 본관이 광산이기는 하나, 동시에 용안 김씨의 시조로 받들어진다. 문무겸전의 인물로, 향교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지방에서 그동안 모은 의병 3천여 명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이에 당시 전주에 내려와 있던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의 군호를, 권율로부터 초승장의 군호를 받았고, 이듬해 1월 선조로부터 忠勇將의 군호를 받는다. 1594년(선조 27년) 4월에 28세에 팔도 의병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김덕령이 의병으로 활동하던 시기..

충장공 김덕령 2023.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