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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옛날 우리의 전통 관료 사회에서는 관료들이 꼭 지켜야 할 "四不三拒"의 불문율이 있었다, 첫째는 재임 중 부업을 갖지 않는 것이다.영조 임금 때 書吏로 있던 金壽彭이란 분은 동생의 댁이 쪼들리는 살림에 보태기 위해 염색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김수팽이 아우를 찾아가 종아리를 치며 "우리 형제가 비록 말직이기는 하나 국록을 먹고 있거늘 관리로서 부업을 한다면 우리보다 더 살기 힘든 백성들은 무엇으로 생계를 꾸리라는 것이냐? "라고 호통을 치며 염색 통들을 모두 엎어 버렸다고 전해 온다. 둘째는 재임 중에는 집을 늘리지 않는 것이다.대제학 金裕란 분은 서울 남산골에 살고 있었는데 집이 좁은 데다 자식들은 장성하니 가재도구들을 처마 끝에다 내놓아야 할 판 이었다. 어느 해 장마가 지면서 집의 일부가 파손된..
石銘如飛鳥之影 南冥 曺植 선생이 1558년 4월 10일부터 26일까지 지리산 청학동을 유람하였다. 조식은 4월 19일 이른 아침 청학동을 향해 계속을 오르다가 큰 바위에 새겨진 '李彦憬 洪淵'이라는 글씨를 보았다. 이를 본 조식 선생은 세상 사람들의 헛된 욕심을 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大丈夫名字 當如靑天白日 太史書諸冊 廣土銘諸口 區區入石於林莽之間 猿狸之居 求欲不朽.邈不如飛鳥之影 後世果烏知何如鳥耶대장부의 이름은 마땅히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두고 넓은 땅 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야 한다.(그런데도) 구차하게 원숭이나 승냥이가 사는 수풀 속에 이름을 새겨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아득히 날아가 버린 새의 그림자만도 못하니, 후세 사람이 과연 무슨 새였는지 어찌 알겠는가?..
膠漆之心 金石之交처럼 아주 쉬운 비유로 두터운 우정을 나타내는 성어가 다수 있는데 膠漆之心도 그 중 하나다. 짐승의 가죽이나 뼈 등을 진하게 고은 阿膠(아교)를 바르고 윤을 내려는 가구에 옻을 칠하면 떨어지지도 않고 벗겨지지도 않아 꼭 필요한 존재라는 데서 나왔다.중국 당나라의 유명시인 白居易와 元稹(원진)은 과거 공부를 할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字가 樂天과 微之로 함께 과거에 합격하고 관료의 길도 함께 걸었다. 世人은 두사람을 합칭하여 元白으로 불렀다.현실을 반영하고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新樂府 운동에 백거이가 주체가 되고, 원진도 뜻을 같이 하는 사이였다. 이 운동으로 주체세력의 눈 밖에 난 두 사람은 각각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좌천되고 말았다.백거이가 멀리 떨어진 원진을 그리..
살체교자(殺彘敎子) 출전 : 外儲說左 上篇 의미: 부모는 자녀의 거울이기에 아이에게 한 말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볼드윈의 말이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경우란 거의 없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른들을 모방하지 않는 경우도 거의 없다." 원문 및 해석 曾子之妻之巿, 其子隨之而泣.증자의 아내가 시장에 가려는데 그 아들이 따라가겠다며 울었다.其母曰: 女還, 顧反爲女殺彘.그녀가 말했다. "얘야 돌아가렴. 돌아와서 돼지 잡아줄게."妻適巿來, 曾子欲捕彘殺之.그녀가 시장에 갔다 오니 증자가 돼지를 묶어놓고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妻止之曰: 特與嬰兒戲耳.아내가 말리면서 말했다. "애를 달래려고 장난삼아 한 말이었어요."曾子曰: 嬰兒非與戲也. 嬰兒非有知也, 待父母而學者也, 聽父母之敎. ..
觀命昇進(관명승진) 문헌: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유래 조선 숙종 때 당하관 벼슬에 있던 李觀命(1661~1733)이 어명으로 영남에 내려가 백성의 실태를 살피고 돌아왔다. “수의어사 이관명 알현이오.” 옥좌에 정좌한 숙종은 용안에 희색이 만연하여 그를 맞았다. “얼마나 객고가 많았는가? 그래, 백성들을 직접 살펴본 소회는 어떠한고?” “상감마마께서 정사를 바르게 펴신 덕택에 지방 관리들도 모두 백성들을 잘 보살펴 주고 있었습니다. 다만 통영에 있는 섬 하나가 후궁의 땅으로 되어 있사온데, 그곳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공물이 너무 많아 원성이 자자하였기로 감히 아뢰옵니다.” 숙종은 후궁의 땅이라는 데 크게 노하였다. “과인이 조그만 섬 하나를 후궁에게 주었기로서니 그것을 탓하여 감히 나를 ..
寡子倍學(과자배학) 문헌: 고금청담(古今淸談) 유래 조선 명종(明宗) 때 이준경(李浚慶.1499~1572)은 본관이 광주(廣州)이며 호는 동고(東皐)이다. 중종(中宗) 17년에 생원이 되는 것으로 관직에 올라 명종(明宗) 20년(1565년) 때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기묘사화(己卯士禍) 와중에 죄인을 변호했다가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사 파직되었다. 그 후 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 폐위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자 다시 복귀되었는데, 청렴하고 검소하여 덕망이 높았다. 준경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위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자랐는데, 어머니 신씨는 효경편(孝敬編)의 내용대로 아들을 엄하게 교육했다. “효경에 과부의 아들과는 사귀지 말라 했느니라, 이는 과부의 자식은 자칫 버릇이 없을 수 있어 ..
求官不擢(구관불탁) 문헌: 조선인물고(朝鮮人物考),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 유래 조선 明宗 때, 이조판서를 지낸 李後白(1520~1578)은 본관이 延安이고, 호는 靑蓮으로 인사관리를 공평무사하게 했던 청백리였다. 그에게 친척 한 사람이 찾아와서 벼슬 한 자리를 은근히 청탁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미 관리로 채용하려고 작성해둔 명단에 올려져 있었다. 이후백은 그 명부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보시게! 나는 그대의 이름을 이렇게 적어 두고, 장차 순서대로 채용하고자 했는데 그대가 염치없이 벼슬을 달라는 말을 하니 만약 그대에게 벼슬을 먼저 준다면 이는 공평한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아깝게 되었네, 그대가 벼슬을 청탁하지 아니했다면 벼슬을 하게 되었을 텐데…….” 벼슬자리를 부탁한 친척은 부..
碁敗寄馬(기패기마) 문헌: 조선오백년기담(朝鮮五百年奇譚) 유래 덕원군(德源君. 본명:李曙.1449~1498)은 世祖의 아들로 成宗 때 종부서 도제조의 직을 맡아 종실의 규찰과 선왕 제향소를 관리했다. 그는 성격이 호탕하였으며 잡기 중에 바둑 두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실력도 뛰어나서 주위에는 아무도 그를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한 軍卒이 찾아와서 아뢰었다. “소인은 鄕軍이온데 이번에 번을 들기 위해 한양에 왔습니다. 오래전부터 대군마마께서 바둑을 잘 두신다는 말을 들어온 터라 한 수 가르쳐주십사 하고 이렇게 찾아 뵈었습니다.” “알겠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한번 두어 보자꾸나!” 덕원군은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바둑판 앞에 마주 앉았다. 애기가(愛碁家)는 원래 ..
面鬼心水(면귀심수) 문헌: 마산의 혼(馬山의 魂). 古今淸談 유래 고려 고종(高宗. 1192~1259) 때 주열(朱悅)은 첨의부사를 지냈다. 그는 치적이 쌓이자 관찰사로 승진했고, 그에 따른 위엄과 명성이 높아져 사람들이 다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중국에 사신을 보낼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가 맨 처음 추천되어 사람들은 그를 전문 奉命使臣이라고 불렀다. 주열은 도량이 컸다. 한번은 어느 고을에 가서 유숙을 하는데 방바닥이 갈라져 있어 그 틈으로 불씨가 들어와 소지품을 다 태워버렸다. 아전들은 불호령이 내릴 것이라 예상하고 벌벌 떨고 있는데 그는 잠잠했다. 큰 태풍이 닥치리라 예상했으나 미풍도 불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또 한번은 어느 고을 수령이 뇌물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고는 ‘탐욕스런 ..
覆椀之功(복완지공) 문헌: 人物韓國史 유래 고려의 李資謙(?~1126)은 둘째 딸이 제16대 예종(睿宗)의 비로 책봉되자 邵城郡開國伯의 자리에 올라 세력가가 되었다. 예종이 죽자(1122년) 그는 왕위를 탐내던 왕제들을 물리치고 외손자를 인종(仁宗)으로 옹립하고, 자기의 셋째 딸과 넷째 딸을 비(妃)로 삼게 했다. 인종은 2명의 姨母를 비로 삼은 셈이다. 그렇게 해서 막강한 위세를 얻자 자기 일파를 요직에 등용하고, 자기는 태자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또 매관매직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권세와 더불어 십팔자(十八子), 즉 이씨가 임금이 되리라는 참위설(讖緯說)을 퍼드렸다. 그리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인종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독살을 시도했다. 즉 자신의 딸인 왕비를 시켜 독이 든 음식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