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짐하다는 말이 내포한 알파의 의미는 곧 한국적 인간의 원천적 본질을 뜻하는 것으로 유학이 정립한 서열주의에 서민적 원형주의의 반동이며 단일을 위한 개성의 희생이다.
중학교 2학년 때 국어시간이었다. 선생님이 ‘푸짐하다’는 낱말 뜻을 물었다. 풍성하고 많고 넉넉하다는 뜻이라고 모두들 바로 대답들을 했다.
사전에도 그렇게 되어 있고 선생님도 맞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어딘지 그것이 반드시 맞는 대답은 아니라는 막연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국어사전을 보았던 것도 아닌데 그 낱말이 가지는 뉘앙스의 차이 때문에 선생님께 질문을 했다.
“선생님, 많고 넉넉하고 풍성하다는 풀이로는 모자랍니다.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고 봅니다.”
“깊은 뜻이? 그게 뭔데.”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같은 풀이는 껍데기고 딴 뜻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이 뜻을 못 대는 나의 이의에 왁자지껄하게 웃어댔다.
푸짐하다는 말은 내가 성장해 오면서 가장 자주 들어온 형용사 가운데 하나였고 그런대로 그 말이 갖는 이미지는 내 나름대로 선명하게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이웃집에 길동이라는 가난한 친구가 살았었다. 논 한 뙈기도 없는 길동이 아버지는 동네의 궂은 일, 이를테면 돼지 암붙여 주는 일, 동네 매 볼기치는 일, 노름판에 판 빌려주는 일, 무당굿에 칼맞는 일 등을 주로 하였었다.
그날도 동네에서 돼지 한 마리를 추렴해서 잡는데 그 칼질을 길동이 아버지가 맡았었다. 그 칼질의 대가로 창자 몇 토막 공으로 얻어 지푸라기에 매어 들고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몇 토막 안 되는 곱창에 김치를 썰어 넣고 김치찌개를 만들었다. 만들어 놓고 동네 어른들 몇 분을 불렀다. 나의 할아버지도 초대되어 갔고 나도 따라갔었다.
나는 그 초라한, 하지만 어딘가 훈훈한 김치찌개 밥상의 분위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때 모인 사람들 입에서 번갈아 튀어나왔던 말, 푸짐하다는 그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이 곱창 김치찌개가 그것을 나눠 먹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수에 비해 넉넉하고 많고 풍성한 것은 아니었다. 칼질해서 공짜로 얻는 그 몇 토막 곱창이 풍성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푸짐하다는 말뜻에 저항을 느낀 것은 이같은 나의 체험의 축적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곧 푸짐하다는 말뜻은 국어사전에서 있는 양적인 차원보다 어떤 질적인 차원으로 포착돼야 할 것 같았다. '푸짐하다'에서 ‘많다’를 마이너스해도 남는 알파가 있는 것이다.
그 알파가 무엇인가. 그 알파야말로 한국적인 眞髓요, 한국인을 아는 심오한 열쇠가 될 것이다.
서민사회는 양반사회처럼 서열구조나 종적 구조가 뚜렷하지 않고 오히려 평등구조나 원적(圓的)인 구조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밥상을 두고도 서열의 질서에 얽매이는 법이 없고 밥상을 복판에 두고 원(圓)으로 둘러앉아 평등하게 나눠 먹는다. 그들의 밥상에 할아버지 반찬, 아버지 반찬, 그리고 막둥이의 반찬, 손녀의 반찬 등의 차등은 없다. 그들은 함께 한 음식을 평등하게 먹는다. 그러기에 그들 밥상에는 많은 가짓수의 음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한 가지 것이 많이 있기만 하면 된다. 많은 사람이 평등하게 나눠 먹는 많은 한 가지 음식의 형용을 푸짐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가족이나 어떤 집단 속에 개인을 매몰(埋沒)시키는 음식 속에서 푸짐하다는 말의 존재 이유가 성립된다.
서양처럼 집단보다 개성이 너무 섬세하고 자상하게 보장된 음식 속에서 푸짐하다는 말은 도시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洋式 식탁에 앉아본 한국인이면 누구나 당하는 당혹이 곧 이 개인성과 집단성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맨 처음 소프트 드링크를 뭘로 하겠느냐고 묻는다. 위스키로 하겠다면 스카치냐 버번이냐고 따져 묻는다. 스카치를 달라면 물이냐 소다나 스트레이트냐고 따져 묻는다. 그것만으로 끝나지는 않고 싱글이냐 더블이냐고 개성을 섬세하게 따지고 든다.
이 복잡한 질문은 그들 음식 습속인 철저한 컨폼이즘에 따라 수프를 내올 때, 야채를 내올 때, 고기를 내올 때, 디저트를 내올 때마다 지겹도록 계속된다.
그리고 마지막 차 한 잔 내오는 데 따져지는 개성의 세분화를 살펴보자.
"커피냐, 홍차냐."
"커피면 터키 식이냐, 미국식이냐."
"미국식이면 스트롱이냐, 위크냐, 미디엄이냐."
"밀크는 넣겠느냐, 안 넣겠느냐."
"리틀이냐, 저스트 어 드롭이냐.”
"슈가냐, 노슈가냐."
“넣겠다면 하나냐, 두 개냐, 하나 반이냐."
길들지 않은 한국인이면 진땀을 빼기는커녕 짜증까지 날 지경이다.
집단적 음식 습속을 지닌 한국인의 음식상에는 먹든 말든 또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차려다 놓는다. 그리고 한국인은 다소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또 맛이 없더라도 먹는다. 집단의 몰개성이 체질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음식 가운데 국물이나 찌개 같은 단일음식의 발달은 이같은 한국인의 의식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 집단성의 음식을 표현할 한국 특유의 말로서 푸짐하다는 말이 탄생한 것이다.
단일 식품의 발달은 이같은 한국인의 집단취락 성향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한국의 촌락은 반드시 주산(主山)으로 불리우는 신성한 산 아래 취락하였고 동신(洞神)을 받드는 동제(洞祭)를 모시므로써 집단이 접착하는 핵을 이루고 있었다. 이 동제 때 희생을 한 고기나 동제 때 차렸던 제수(祭需)는 그 분량이 아무리 적더라도 동민이 나눠 먹어야 하는 습속이 있어 왔다.
필자도 어릴 때 동제날이면 축제 기분에 들떴던 기억이 선하며 제사에서 돌아오는 할아버지를 숲거리에 나아가 진종일 기다렸던 기억 또한 선하다.
할아버지가 두루마기자락을 날리며 강변 둑길에 아름아름 다가오면 어린 나는 마냥 신이 나서 달려갔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반가워서가 아니었다. 할아버지 허리춤에 매여 있는 커다란 주머니가 그렇게 달려가게 했던 것이다.
댕기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강둑을 달려오는 손자를 보면 할아버지는 주머니 속에 넣어온 대추나 밤, 곶감 나부랭이를 미리 꺼내들고 달려오는 손자를 안아 들곤 했던 것이다.
매정한 편인 할아버지였기에 손자를 위해 그 동제의 제수 음식을 주머니에 넣어오는 소행을 반드시 손자를 사랑하는 소치로만 볼 수는 없겠다.
동제 음식은 동민이 나눠 먹어야 한다는 습속화된 주술 행위가 손자를 반기는 행위와 복합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느 집안에서의 제사 때도 음복이라 하여 제주(祭酒)나 제수를 나눠 먹는 것도 이같은 집단성을 강조하는 원시적 주술의 유습인 것이다.
제천(祭天)이나 각종 신들을 제사할 때 소나 돼지를 희생하고 그 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그 희생물을 나눠 먹으므로써 공통적 운명을 다짐하였고 그 주술(呪術)의 분배적인 공유로 집단적 운명을 같이하는 한편 집단성의 강도(强度)를 다져온 것이다.
한국 농촌에서 단일 음식을 분배적으로 공유하는 습속은 이같은 원시적 집단주술이 강하게 잔존(殘存)한 증거이기도 하다.
많은 한 가지 음식, 그 음식을 두고 원형(圓形)으로 평등하게 둘러앉아 나눠 먹는 이런 단란한 상황 표현이 곧 푸짐하다는 어휘를 한국에 있게 한 것이다.
아무리 음식이 다채하고 많더라도 縱的이고 계급적인 서열에 의해 먹혀질 때 푸짐하다고는 할 수 없다.
또 여관 밥상을 받아본 사람이면 알 수 있듯이 그 수많은 가짓수의 반찬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놓여 있지만 그것을 푸짐하다고 생각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반찬들은 단일 식품이 많은 것이 아니라 잡다한 식품이 조금씩 많기 때문이다.
많다는 질이 다른 데다가 그것을 먹는 사람의 평등한 유대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푸짐하다는 말이 내포한 알파의 의미는 곧 한국적 인간의 원천적 본질을 뜻하는 것으로 곧 유학(儒學)이 정립한 서열주의에의 서민적 원형주의(단란성)의 반동이며 집단에의 개인 매몰이고 단일을 위한 개성의 희생인 것이다.
이런 한국인의 알파는 오랜 역사 과정에서 모살(殺)당해 왔으며 겨우 사어(死語)가 되어 가는 푸짐하다는 낱말에 애오라지 명맥을 잇고 있을 뿐인 것이다.
'한글 文章 > 살리고 싶은 버릇'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34. 국물 (0) | 2023.06.15 |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33. 옷물림과 노란색 스웨터 (0) | 2023.06.15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31. 사랑방 문화와 계 (2) | 2023.06.15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30. 막걸리 (1) | 2023.06.15 |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9. 타임 브레이크 (1) | 2023.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