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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33. 옷물림과 노란색 스웨터

구글서생 2023. 6. 15. 05:14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윗사람을 의식하고 윗사람이 하지 않는 일은 안 한다는 가치관은 나만의 개별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모든 한국사람에게 보편화돼 있던 한국인의 동일성이다.

 

사람들에게는 각기 무의식층에 잠재되어 있는 자기색(自己色)이라는 게 있다 한다. 자신이 살아온 어떤 과거에 강렬하게 자극을 받으면 그 자극을 받았던 당시의 계절이나 환경의 빛깔과 그 기억이 맥락 밀착되게 마련이며 비록 그 기억을 상실하고 있더라도 그 빛깔만 보면 그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그 강렬했던 자기 자신의 기억과 맥락되어 잠재된 빛깔을 자기색(自己色)이라고 한다. 정신분석을 할 때 어떤 기억을 되살려내게 하는데, 이 자기색(自己色)을 가려내어 출발시키는 분석 방법이 있다고도 들었다.

 

그러기에 자기색(自己色)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고 또 기억에 따라 각기 다를 수도 있다.

 

봄만 되면 되살아나는 나의 자기색(自己色)은 노란색이다. 봄에 가장 일찍 피는 꽃이 산에서는 산수유꽃이요, 들판에서는 개나리꽃이다. 이 들꽃들이 다 똑같이 노란색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무튼 봄만 되면 이 노란 자기색(自己色)에 맥락된 노란 기억이 물씬하다.

 

나는 노란색 스웨터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갖고 있다. 아마도 내가 갖고 있는 스웨터의 거의가 노란색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길 가다가 쇼윈도에 노란색 스웨터가 걸려 있으면 다가가서 보곤 한다.

 

물론 사람에게는 개성에 따라 좋아하는 색이 있지만, 내가 노란색 스웨터에 끌리는 것은 그 같은 한가한 개성이나 기호의 차원이 아닌 것만 같다. 보다 각박하고 쓰라린 잠재적 선망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가난한 산촌 농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물론 옷이 귀했던 시절이기도 하려니와 당시 그 산촌 사람들은 '옷물림'이라 하여 아버지가 입던 옷을 맏아들이 물려 입고, 그 맏이가 물린 옷을 둘째가 물려 입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새 옷도 항상 아버지나 맏형차지요, 막둥이인 나는 항시 낡고 기운 옷을 입어야만 했던 것이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옛날 우리 한국민은 대체로 이 낡은 물림옷에 체질화되어 있었고 또 물림옷을 입어야만이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었던 것이다.

 

소학교 1학년 때 일로 기억이 된다. 아버지가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유람갔다 돌아오면서 선물로 스웨터를 사 갖고 오신 것이었다.

 

그 무렵 형님들은 중학교 이상의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에 나에게만 이 옷 선물을 한 것이었다. 그 스웨터 빛깔이 바로 노란색이었던 것이다.

 

해어진 물림옷만 입다가 이 파격적인 새옷………… 그 당시 그 산촌에 아무도 입는 사람이 없는 그런 디자인의 옷을 두고 나는 황홀해했으며, 식구들은 무척 나를 선망했던 기억이 선하다.

 

그런데 이 황홀했던 감정은 나의 속마음에 있을 뿐이요, 그 옷을 도저히 입을 어떤 정신적 준비가 되어 있질 않았던 것이다. 그 옷을 입고는 어딘가 괜히 마음이 불안하여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입고 싶은데 입지 못하는 그 표리(表裏)의 갈등이 당시의 어린 나를 무척 괴롭혔던 것이다.

 

밤에 모든 식구가 잠들면 몰래 일어나서 장롱 속의 그 노란색 스웨터를 꺼내 입고 황홀해한 적도 몇 번 있었다. 한데도 그 옷을 입고 나가지 못한 당시의 心性 구조를 나만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나보다 윗사람, 곧 나에게 옷을 물려준 형님들 그리고 아버지의 옷보다 사치스럽고 화려한 옷을 입을 수 없게끔 옷물림이라는 관습, 즉 정신적 스테레오 타입(固定觀念)을 이뤄 놓았기 때문이다.

 

그 스테레오 타입을 깨기가 당시의 어린 나로서는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그 좋은 옷을 입지 않는다고 꾸지람을 받아가면서까지도 끝내 그 노란색 스웨터를 입지 않고 말았던 것이다.

 

사치하지 말아야 하며 또 근검절약한다는 그런 성숙된 도의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윗사람이 이러한데 내가….… 하고 그런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 때문이었던 것이다. 입고 싶은데 입지 못했던 노란색 스웨터에 대한 선망은 이렇게 하여 나의 무의식중에 잠재되어 오늘의 나를 노란색 스웨터광(狂)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본다.

 

이 같은 윗사람을 의식하고 윗사람이 하지 않는 일은 안 한다는 가치관은 나만의 개별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모든 한국 사람에게 보편화되어 있던 한국인의 동일인 것이다.

 

이 동일성이 상하의 서열의식을 약화시키고 개인주의를 부각시키는 구미사조(歐美思潮)에 의해 찢어 발겨진 헌 걸레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민족이나 문화권의 동일성은 하루아침에 개조되거나 또 백 년이 지났다 하여 손쉽게 개조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노란색 스웨터에 얽힌 선망이 나의 의식 속에 수십 년 잠재되어 내렸듯이 민족의 기억 속에 유전질로서 잠재해 버린다는 것은 문화인류학이 입증하고 있는 바다.

 

그래서 나는 이 윗사람을 의식하는 잠재의식이 우리 모든 한국인의 기억 속에 바이탈리티를 누리고 있다고 확신하고 싶다.

 

이 바이탈리티 위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로써 절약이나 근검을 접목시킨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요, 또 그 접목이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 속담에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이라 하고 '관두지수(灌頭之水) 유하족저(流下足底)’라 했으며 '인지선악(人之善惡) 필종기선(必從基先)’이라 했다. 이마에 부은 물이 발뒤꿈치로 흐르고,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이 교훈은 이같은 한국적 바이탈리티의 가능성의 제시이기도 한 것이었다.

 

한국인의 소비성향이나 사치성향을 다잡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이 '윗물'을 맑게 하는 방법이라고 본다.

 

모 종합병원의 월급받는 원장을 하고 있는 나의 친구가 있다. 이 친구에게는 자가용이 배당되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버스를 타고 다니기에 지독한 사람으로 뒷손가락질 당하기도 하는 친구다. 그는 신발을 기워 신고 신문 틈에 끼어드는 광고지를 엮어 글을 쓴다. 그 친구는 그 친구 나름의 철학대로 산다. 물론, 그런 철학에 대한 평가는 가지가지겠으나 그 원장 슬하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들의 차림이나 절용이 다른 직장에 비해 유별나게 달라져 있다는 것만은 누가 봐도 일목요연하다.

 

근검절약하라고 직원에게 말 한마디 한 일도 없고 또 그의 생활철학에 대해 일언반구 입 밖에 낸 일도 없는데 그렇게 된 것이다. 또 외국에 플랜트 수출을 하고 5백여 노동자를 거느리고 기계 공업을 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공장에 딸린 15평의 좁은 집에서 살며 자신의 옷을 비롯, 모든 식구의 옷을 가장 값싼 동대문 시장에서 사 입는다.

이발 가위를 사놓고 집에서 이발을 한다. 이 절용근검이 아랫물로 흘러 노사분규가 한 번도 일어난 일이 없으며, 자재 전용 효율이 다른 회사에 비해 21퍼센트나 높다고 한다. 물론 물자절약을제도적으로 강제하거나 계몽하는 법도 없었다 한다.

 

옛날 고을을 다스리는 원님들은 삼권(三權)을 한손에 쥐고 있었기에 대단한 세도와 재력을 누렸었다. 하지만 그들의 밥상은 국 한 그릇, 김치 한 접시, 간장 한 종지 외 '이두이변(二豆二籩)'이라 하여 네 가지 반찬 이상 놓지 않는 것이 관례가 돼 있었다 한다. 목천현이나 연기현 같이 고을이 작아 예산이 적은 고을의 원님은 그나마도 두 가지 반찬으로 줄여 먹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고을의 가장 윗사람의 음식 가짓수를 제한시킨 관례는 곧 그 윗사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고을 주민으로 하여금 절용케 하는 '절풍(節風)'의 눈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윗사람 되기란 그런 측면에서도 고된 책임이 있음을 자성들 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