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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52. 눈에는 꿀칠하고, 귀는 솜으로 막아

耽古樓主 2023. 6. 15. 08:59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서양사람도 참고 한국 사람도 참지만서양사람이 참는 것은 그저 물리적인 억제 이상의 뜻도 이하의 뜻도 없는데왜 우리 한국사람의 참음은 미덕이라는 윤리로까지 미화돼 있는 것일까.

 

■칼날에 마음이 짓눌린 참을 '인’ 자

 

참을 인(忍)'자를 찬찬히 뜯어보면 참 재미있게 생겼다. 칼날[刃]이 마음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 위에서 짓누르고 있다. 마음이 위로 솟으려 하거나 옆으로 빠져나가려 꿈틀거린다면 날카로운 칼날에 당장 베일 것 같은, 그래서 금방 피라도 흘릴 것 같은 모양이다. 세상은 살다 보면 고락도 있고 희비도 있으며 애도 있다. 이같은 마음을 밖으로 노출시키지 못하게끔 흉기로 짓눌러 놓은 심정 억제의 역학이 바로 '참는다'는 것이다. 물론 남자도 참고 여자도 참는다. 그런데 참는다 하면 바로 여자를 연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서양 사람도 참고 한국 사람도 참지만, 서양 사람이 참는 것은 그저 물리적인 억제 이상의 뜻도 이하의 뜻도 없는데, 왜 우리 한국사람의 참음은 미덕이라는 윤리로까지 미화돼 있는 것일까.

 

2차 대전 후 풍미했던 통속 실존주의에서는 '참는다'는 것을 위선이라고 저주하고 있는데, 왜 우리 한국 사람, 특히 한국 여인들은 참는다는 것을 도덕적 자질과 심리적 자질에까지 직결시키고 있는 것인가.

 

생각을 너무 많이 비약시켰는지 모르지만 참는다는 '참'과 참되다는 '참'과 참하다는 '참'과는 뿌리가 같은 자매는 아닐까? 서로 다른 세 개의 인간 상황이 왜 하나의 뿌리로 결속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경상도 안의 현감으로 있었을 때 적은 견문록 가운데 <열녀 함양 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이라는 게 있다.

 

어느 날, 벼슬자리에 있는 두 형제가 젊어서 과부가 된 노모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동료인 어느 누구의 선대에 과부가 있었는데, 바깥 소문이 좋지 않았으니 그 사람의 벼슬길은 의당히 막아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어머니가 놀라서 물었다. 부녀자의 안방 안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아느냐고. 풍문이 그렇다고 하자 이 과부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바람이란 소리만 들리고 형체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눈으로 볼래야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잡을래야 잡히지도 않는 그런 무형의 남의 일을 두고 왈가왈부하느냐.

또 너희들 역시 과부의 아들임에랴.

잠깐 있어라,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

하고 어머니는 품속에 깊이 간직해 두었던 엽전 한 닢을 꺼냈다. 그 동전은 앞뒤 할 것 없이 테두리는 닳아 없어지고 또 글자도 닳아 없어진 그런 동전이었다.

 

“이것이 너희 어머니가 죽음을 참아온 부적이다. 10여 년 동안 손으로 만지작거리느라고 다 닳아 없어져 민판이 된 것이란다. 때때로 혈기가 왕성하면 과부라고 해서 어찌 정욕이 아니 일겠느냐. 가물거리는 호롱불 아래 그림자를 조문(弔問)하며 외로운 밤 지새우기 괴롭고, 게다가 처마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든지 창에 달빛이 환하게 들어올 때, 오동잎이 하나 뜰에 날리고 외기러기는 하늘에 울고 가고 멀리서 닭울음 소리 들릴 때, 어린 종년은 코를 고는데 혼자 잠 못 이루는 그 고충을 누구에게 하소연하겠느냐.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엽전을 꺼내 손아귀 속에 힘주어 굴리고 굴리고는 그러다가도 못 참겠으면 이 엽전을 방 안에 굴렸다. 온 방 안을 찾아보면 둥근 놈이 또르르 잘 구르다가 어디고 막힌 데에 부딪쳐서 넘어져 있겠지. 그것을 찾아내어 다시 굴리고 이렇게 여남은 차례 굴리고 나면 날이 새겠지.

10여 년 동안에 굴리는 횟수가 해마다 줄어들더니 10년이 지나고부터는 닷새에 한 번 굴리거나 열흘에 한 번 굴리게 되더라.”

 

이에 모자는 서로 얼싸안고 울고 말았다는 이야기.

 

물론 이 이야기 속의 과부만이 돈을 굴리고 닳아 없애면서 참음으로써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우리 옛 부녀자들은 그 동전을 보다 더 많이 닳렸느냐 덜 닳렸느냐의 차이는 있을망정 어느 한 부녀자 예외없이 동전을 닳렸던 것이다.

 

참는 정신적 역량을 촉매하는 매체가 되는 이 동전을 '참는 돈'이라 해서 인전(錢) 또는 인고전(忍苦錢)이라 했다.

 

물론 돈 한 푼은 하찮은 경제적 가치밖에 없는 돈이지만 이 한국의 인전은 한국 여성사의 그 고된 고통의 총화를 참아낸 메가톤급의 핵에너지가 담긴 천 냥의 가치를 지닌 돈이기도 한 것이다.

 

시집살이는 슬프고 괴롭고 쓰라리고 온통 참아야 할 일의 연속이었다. 참을 일이 있을 때 그 참는 힘을 유도하고 집결시키는 매체가 필요하다. 그 매체로서 옷을 누비도록 했으며 누비다 보면 슬프고 괴로운 사연이 누비누비 이산되어 마음이 편해진다는 수백만 명의 한국 부녀자들이 수백 년 동안의 시집살이에서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값지고 값진 슬기인 것이다.

 

이 누비의 슬기를 인고봉(忍苦縫)이라 불렀다. 그렇게 그렇게 한많은 인생을 살다 보면 누비옷이 몇 벌씩이나 장롱 속에 쌓이는 것이었다.

 

언젠가 팔순 노모가 방에 걸레질을 하시면서 닦은 데를 닦고 또 닦곤 하시면서 코를 훌쩍거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걸레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울고 계셨다. 왜 우시냐고 물었더니, “아니다. 이 누비 걸레를 보니 옛 생각이 나서 절로 눈물이 나는구나.” 하셨다.

 

한국 부녀자의 참는 역할이 강력하게 응집된 인고전(忍苦錢)이요, 인고봉(忍苦縫)이 아닐 수 없다.

 

■왕자상, 무자상

 

태어날 때부터 한국 여인은 저주받고 태어났다. 진통 끝에 아기 울음소리가 터지면 문밖에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던 시어머니가 '고추냐, 보리냐'로 태어난 아기의 성별을 묻는다. 만약 대답이 '보리’라면 시어머니는 못마땅하다 하여 형식적이나마 가출을 했다 돌아오는 습속이 있었다.

 

미역국을 끓여 주면, 산모는 딸 낳고 미역국 먹을 염치가 없다 하여 상을 물리는 것이 예의였다.

 

이렇게 저주받고 태어난 딸은 '사내아이는 구슬을 들려 놀게 하고 계집아이는 기왓장을 들려 놀게 하는' 그런 차별을 받고 자라난다. 딸들은 철부지 때부터 차별을 당하면서도 참을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자라난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젖망울이 서고 살이 오르기 시작하면 그 부푸는 성정에 압박을 가하여 크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젖가슴을 바싹 죄는 '젖졸임말'이라는 압박대를 해서 고통을 참아야 했고 또 '틀어선'이라 하여 발을 크지 못하게 하는 압박 버선을 신고 비틀거리며 고통을 참고 살아야 했다. 개화기 때 이화학당 기숙사에서는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젖졸임질을 가하는 풍습이 있었다 한다. 졸임말을 두르고 양쪽에서 말끈을 잡아 죄어 대면 칼날같은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독립신문>은 이 여자기숙사의 담너머로 들려 나오는 비명을 두고 무슨 해괴망칙한 흉조냐고 비평을 하고 있다.

 

소녀가 참아야 할 것이 이 같은 육체적인 가학뿐만은 아니었다. 예뻐지고 싶고 또 남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동서고금 할 것 없이 여자의 가장 여자다운 본능일 것이다. 한데 우리 한국 사회는 여자가 예뻐지는 것을 악착스레 저해했다.

 

곧 예쁘다는 것은 부도덕이나 불행과 등식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부녀자의 존재 가치 가운데 기본적이요, 첫 번째의 임무는 사내아이를 낳음으로써 그 집안의 혈연, 가계, 재산 상속을 이어주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여자의 용모도 아들을 잘 낳을 왕자상(旺子相)이냐 아들을 못 낳을 무상(無子相)이냐로 따졌지, 미우냐 예쁘냐로 따져진다는 법은 없었다.

 

흥미있는 것은 현대 여성들이 추구하는 미는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무자상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현대 여성들이 굶어가면서까지 추구하는 가는 허리는 아이가 들어앉을 공간이 좁다 하여 무자상이요, 일부러 수술까지 해서 예뻐 보이려는 쌍꺼풀도 무자상이다. 웃으면 옴폭 패이는 보조개며 노랑머리도 역시 무자상이다.

 

예뻐지고 예뻐 보이려는 여자의 본능을 무자상이라는 기준으로 철저히 억압했으니, 억눌린 본질을 얼마나 고되게 참아야 했던가.

 

옛 여인들은 그렇게 사춘기와 처녀기를 참고 살다가 눈에 꿀칠을, 귀에는 솜을 틀어막고 어금니에는 대추 씨앗을 물린 채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갔다. 보지도 듣지도 또 웃지도 못하게 하는 이 '인간 증발’이 바로 고되게 참고 살아야 할 시집살이를 상징해 주는 것이다.

 

시집가서는 사내아이를 낳는 것과 소 한 마리 값으로 환산되는 노동력 이외에는, 감정이며 지능이며 사랑이며 하는 모든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완벽하게 소외당한 채 목석화(木石化)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시집살이가 고달프고 슬프다 해서 몰래 숨어 우는 것을 시어머니에게 세 번 들키면 소박맞을 충분한 조건이 되었으므로 울 수도 없었다.

 

반면에 시집 식구 초상이 나거나 제상 앞에서, 조금도 울고 싶지 않은데도 거짓으로라도 울지 않으면 또한 소박맞을 조건이 되었다. 그래서 친정어머니는 시집가는 딸의 허리춤에 겨자 씨앗을 담은 '눈물 주머니'라는 작은 주머니를 채워주는 습속이 있었다. 인위적이요, 조작적으로 울 필요가 있을 때 그 겨자 씨앗을 가루내어 눈 가장자리에 칠하면 매캐하여 눈물이 나온다.

 

거기에 거짓 소리만 보태면 훌륭한 며느리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고, 울고 싶지 않을 때 울어야 하는 부조리를 살아내는 데 얼만큼의 참을성이 소요됐을 것인가.

 

■백만 시앗 두어도 시샘치 않으며

 

거기에 그릇 한 죽(10개) 헤아릴 줄 몰라야 복 받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일부러 무식하고 무지하고 저능하며 백치인 척해야 했으니 그 또한 얼마나 참을성을 강요했음인가.

 

옛날 사람들은 애기보[子宮]에는 구멍이 좌우에 두 개나 있는데 왼쪽 구멍으로 아기씨[種]를 받으면 아들을 낳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씨받이를 하고 나면 아기씨를 왼쪽 구멍으로 받아 들이기 위해 왼쪽 겨드랑이를 방바닥에 대고 누워 오른발을 쳐든 기이한 몰골로 몇 시간 동안이나 지그시 참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수태를 하면 열 달 동안 그 생리적 부담을 참는 것에 그치지 않고 뱃속에 든 아이에게 완전무결하게 노예가 되어야만 했다.

 

칠태도(七胎道)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임부는 말이 많거나 웃거나 놀라거나 겁을 먹거나 울어서도 안 되었다.

임부는 가로눕지도 말고, 기대어 앉지도 말며, 한 발을 갸우뚱 구부리고 서 있어도 안 되었다.

임부는 삼불(三不)이라 하여 나쁜 말을 듣지 말고, 나쁜 일은 보지 말며, 나쁜 생각을 품어서도 안 되었다.

임부는 잠을 기울게 자서도 안 되고, 색다른 맛의 음식을 먹어서도 안 되었다. 열 달 동안 아이주머니로서의 생리적 고통보다 몇 곱절 큰 정신적 고통을 참고 견뎌야 했던 것이다.

 

일제 때 한국 여성의 노동량을 조사한 글을 보니 이 세상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한다는 독일 여자보다 한국 여성은 다섯 배나 더 일을 하고 있었다.

 

이 고된 노동을 감당해 내는 데 당하는 심신의 고통과 고달픔을 참아 낸 우리 여성이었다.

 

거기에다 으레 얻게 마련인 시앗과의 사이에 자생하는 새암, 곧 투정을 참아야 했다. 옛 부녀자들의 부도를 가르치는 글에는 '백만 첩을 두어도 시샘하지 않으며…'라는 구절이 꼭 들어가게 마련이었다.

 

정을 빼앗아 가는데 어떻게 투정하지 말라는 말인가. 속에서 이글거리는 그 투정을 지그시 참아야 했던 우리 부녀자였다.

 

참고 참고 참는 데다가 또 가중해 참고 참는 데 정신력이 모자라면 '인고전'을 굴리고 '인고봉'을 누벼 가며 참았고, 그로써도 참아낼 기력을 잃으면 대들보에 목을 매거나 치마를 둘러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졌던 한국 여인들의 참을성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