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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54. 어머니의 눈물

耽古樓主 2023. 6. 15. 09:01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어머니는 어떤 희망이나 의지 같은 것은 전혀 갖지 않고 그저 주어진 운명만을 감수하게끔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할아버지는 상머슴처럼 새경을 두 몫 받는 건장한 장정이 되어 주길 나에게 바랐고 아버지는 이 고을의 군수가 되길 바랐다. 한데 어머니는 나에게 뭣이 돼 달라고 말한 일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는 어떤 희망이나 의지 같은 것은 전혀 갖지 않고 그저 주어진 운명만을 감수하게끔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평생 동안 어머니가 잠든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잠든 훨씬 늦게까지 일하고, 내가 잠깨기 전 훨씬 일찍 일어나 하루종일 일하기 때문이었다. 뭣이 돼 주길 꾸준히 바라는 할아버지나 아버지보다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자식을 위해 일만 해주는 우리 어머니가 훨씬 아늑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어머니의 친정은 새로운 시대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만 해 온 그런 집안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젊음을 다 보낸 어머니로서 얼마만한 슬픔과 고통을 겪었을 것인가 짐작이 간다. 그런 과정에서 형성되었음인지 어머니의 성격 가운데는 강한 의욕이나 또는 집착 때문에 생기는 비극적인 요소도 있을 수가 없었다. 가혹한 처지에 처했으면서 그 처지 때문에 상처를 입어 비굴하고 천박해진다는 법도 없었다. 또한 어머니는 옛날 여느 부녀자와는 달리 신불(神佛)에게 빈다는 법도 없었다. 혹시 어머니는 신불에게 기도할 아무것도 갖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처음부터 신불의 뜻에 귀의하였기로 더 이상 구제받을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괄괄한 성격이었던 아버지는 이따금 어머니를 무식하고 무능하다면서 곧잘 손찌검질이나 발길질을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결코 대꾸를 한다든가 울면서 통곡한다는 법도 없고, 그저 그런 날 밤이면 장롱속에서 누비 바느질거리를 꺼내어 마냥 손을 놀려 옷을 누볐던 것이다.

 

일제말 어려웠을 때 나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이집 저집 돈을 꾸러 다녔던 몹시 쓰라린 기억이 있다.

 

빌려오면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빌려오지 못했을 때의 분위기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참담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 어머니는 안방에 들어가 다시 그 누비질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어린 자식을 돈 빌리러 보내지 않을 수 없었을 때의 어머니의 마음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을 게다. 울어 버리면 속이 좀 풀릴 수도 있었을 것을 어머니는 울지 않고 누비질로 그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염병(장티푸스)에 걸려 헛것을 보고 헛소리를 할 만큼 고열에 신음하고 있었을 때의 일이다. 잠시 악몽에서 깨어 보니 내 베갯머리에서 어머니는 누비질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자식의 괴로움이 전도되어 자식의 아픔보다 몇 곱절 괴로운 그 상황을 어머니는 누비질로 극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누비질은 비단 우리 어머니뿐 아니라 옛 우리 부녀자들이 괴로움을 견디는 보편적인 방편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환갑이 지난 연후, 고향에 다니러 갔을 때 어머니가 방바닥 걸레질을 하면서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평생 동안 처음 보는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알고 보았더니 그 인고의 일생이 올올이 스민 누비 바지가 다 해져, 걸레가 된 그 눈물의 결정(結晶)에 촉발된 그 엄청난 '슬픔의 총화'를 울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