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德齡(1568년 12월 29일~1596년 8월 21일)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景樹, 시호는 忠壯이다. 별칭은 神將, 超乘將, 翼虎將軍, 忠勇將 등이며, 일본군은 石底將軍이라 부르기도 했다.
본관이 광산이기는 하나, 동시에 용안 김씨의 시조로 받들어진다.
문무겸전의 인물로, 향교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지방에서 그동안 모은 의병 3천여 명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이에 당시 전주에 내려와 있던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의 군호를, 권율로부터 초승장의 군호를 받았고, 이듬해 1월 선조로부터 忠勇將의 군호를 받는다. 1594년(선조 27년) 4월에 28세에 팔도 의병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김덕령이 의병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이루어지던 시기라서 큰 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아 별다른 공은 없으며, 1594년(선조 27년) 수륙합동 작전이 이루어졌던 장문포 해전에도 김덕령이 참전했으나 거의 활약하지 못하였다.
그 뒤 부하 장졸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다 죽게 한 일 등으로 옥고를 치르고 1596년(선조 29년) 2월 말에 풀려났다. 그러다 1596년 7월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하려 출병하였으나, 난이 끝나 돌아오다가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등의 무고로 투옥되어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년) 김덕령의 억울함이 신원되어 관직이 복구되었다. 1788년(정조 12년) 장군의 충효를 기리고자 사당을 건립하여 배향하는 한편 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해광 宋濟民은 그와 내외종사촌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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