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공 김덕령

김덕령-死後와 追尊

耽古樓主 2023. 4. 19. 02:18

 

김덕령-死後와 追尊
충장사 위치

 

 

사후

김덕령의 시신은 온전히 거두어져 수레에 실려 광주 석저촌에 도착한다. 역적 이몽학과 한현의 시신이 저잣거리에 걸리고 능지처참을 당한 것에 비하여 대접을 받은 셈이다. 시신에는 부인 이씨가 손수 만든 수의가 입혀지고, 장례식은 암울하게 치러진다. 역적으로 몰렸으니 조정에서 보낸 관리가 장례를 삼엄하게 통제하였다. 김덕령은 무등산 자락에 묻힌다.

 

그의 작품 중 죽기 전에 지었다는 詩調인 春山曲이 전한다.

 

부인 이씨는 자식도 없이 홀로 지내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으로 피난을 간다. 일본군은 이곳까지 추격하여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부녀자를 겁탈하였다. 그녀는 정절을 지키려다가 보리암 근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순절한다.

 

김덕령의 동생 김덕보는 세상이 싫어 은거하였다. 여러 곳을 떠돌다 고향에 돌아와 무등산 원효계곡 아래 집을 짓고 은거하고 죽을 때까지 지내는데, 그 집이 바로 楓巖亭이다. 뒷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김덕보는 安邦俊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나이가 많고 병이 들어 전장에는 나가지 못하였고, 그해 11월 28일 한 많은 세상을 뜬다. 안방준은 김덕령의 원통한 사연을 김덕보에게서 듣고 〈三寃記事>를 썼다.[89][91]

 

친아들 金光沃은 외가가 있던 전라도 익산군 용안면(현 익산시 용안면)에 숨어살며 本貫을 龍安으로 바꾸고 신분을 감추며 살았다. 그 뒤 김광옥은 그의 외삼촌인 李寅卿의 부임지인 평안북도 안주군 운곡면 쇠꼴이(숙천군 근처)로 이주하여 후손을 이어간다.

 

한편 김덕령의 죽음을 들은 일본군은 기쁜 얼굴로 서로 치하하였다. 南道의 軍民들은 항상 그에게 기대고 그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억울하게 죽게 되자 소문을 들은 자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가슴 아파하였다. 그때부터 남쪽 士民들은 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勇力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김덕령이 청원한 대로 별장 崔聃齡 · 崔堈을 사면하여 덕령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兩南의 방어사에게 나누어 배속시켰다. 최담령은 덕령과 함께 용력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는 어리석은 겁보인 체하여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였다. 덕령의 매부 李寅卿도 담략과 용기가 있고 術數를 알았는데 무과를 거쳐 일본군 토벌에 공을 세웠지만 덕령이 화를 입게 되자 이를 경계하여 벼슬이 변방 군수에 이르렀을 때 즉시 병을 칭탁하여 사임하고는 생을 마칠 때까지 감히 큰 將領이 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덕령이 죽은 지 1년 뒤 김덕령의 억울함을 상소함으로써 호소한 사람은 전라도 관찰사로서 김덕령을 의병장으로 추천한 이정암이었다. 그는 丁酉再亂 때 海西招討使로 있던 1597년(선조 30년) 10월 상소문을 통해 김덕령의 억울함을 선조에게 호소하였다.[94]

 

추존

1661년(현종 2년) 8월 30일 현종이 旱災 때문에 道臣에게 명하여 伸雪되지 않은 자들을 알아내 啓聞하도록 하였는데, 盤皐 金始振이 김덕령을 아뢰자, 특명으로 伸寃하여 관작을 복원해주었다.

 

1668년(현종 9년) 4월 13일 校理 李端夏가 요청하여 김인후ㆍ강항ㆍ김덕령을 추증하였는데, 정6품 좌랑 金德齡을 정3품 兵曹參議로서 당상관에 贈職하고 시호를 내렸다. 이 무렵 나주목사 李敏敍가 구전되는 자료를 모아 《金將軍傳》을 지었다.

 

1677년(숙종 3년)에 광주목사가 된 이민서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朴光玉의 사우 벽진서원을 중수하고, 1678년(숙종 4년) 지방 사림들의 뜻을 모아 김덕령을 벽진서원에 제향하였다.

 

1680년(숙종 6년) 윤8월 24일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일에 대해 이민서가 청액상소를 올려 朴光玉ㆍ김덕령을 배향한 사원에 “義烈”이라는 사액을 받게 하였고, 김덕령은 특별히 정2품 병조판서에 증직하였다.

 

1694년(숙종 20년) 왕명으로 이민서가 《김덕령유사》를 편찬하였다.

 

1710년(숙종 36년)에 김덕보의 아들 金璩의 손자이자 奉祀孫인 金守信이 錄用되어 음직으로 전설사 別檢과 北部都事를 지냈다.

 

1785년(정조 9년) 9월 5일 전라도 유생 奇錫周가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褒奬하여 증직하는 일도 지나치지 않다고 답한다. 그 뒤 정2품 증 병조판서 김덕령에게 忠壯의 시호가 내려졌고, 부인 이씨에게 종1품 정경부인을 추증하였고, 형 덕홍에게 증 持平 벼슬을, 아우 덕보에게 증 執儀 벼슬을 더해, 삼형제를 의열사에 함께 모시게 하였다. 충장이란 뜻은 ‘위태롭게 하여 임금을 받들었기에 충이라 하고, 무에 능하고 몸가짐이 진중하기에 장’이라 하였다.

 

1786년(정조 10년) 1월 25일 평안도 都事 金致光이 김덕령의 후손임이 알려지자, 정조는 유공자 후손의 특전을 베풀어 빈자리가 나거든 다시 내직에 擬望하게 했다. 이때 의망은 三望의 후보자로 추천하던 일인데, 삼망은 벼슬아치를 발탁할 때 후보자 셋을 추천하던 일이다. 즉, 빈자리가 난 내직의 후보자 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천하는 것으로, 벼슬자리를 주는 게 아니라 그 기회를 남들보다 더 많이 준다는 뜻이다.

 

1788년(정조 12년) 11월 16일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마을에 ‘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 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충장공 정려비를 세우게 명하였고, 이듬해 1789년 3월 그 비가 세워졌다. 1792년에 처음 세워진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1789년(정조 13년) 1월 11일 김덕령 부인의 職啣은 종1품 貞敬夫人이고, 김덕령의 증직은 정2품 資憲大夫 병조판서로 서로 어긋남을 이조판서 李𡊠이 아뢰자, 그 청대로 資級을 종1품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토록 下批하였고, 김덕령 형제가 자란 마을에 이미 牲繫를 烏頭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1789년(정조 13년) 4월 6일 김덕령의 제사를 영구히 지내고 절대로 신주를 옮기지 말라는 不祧特命을 내렸다. 조정의 명령으로써 방손 한 사람을 선택하여 공의 제사를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는데, 그 사람은 김덕보의 아들 金璩의 6세손 金致玉 또는 7세손 金洪基이다.

 

1791년(정조 15년) 숙종대에 왕명으로 간행했던 《김덕령유사》를 왕명으로 다시 간행하매, 徐龍輔에게 편집하여 목판본을 남기게 하였다.

 

김덕령을 모시던 광주 의열사는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뒤 복원되지 못한 채 지내다가 1971년 각지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충장공 김덕령장군사우 복원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빛을 보게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원 등 정부의 지원을 받아 광주 충효동에 자리를 잡고 1974년 11월 김덕령과 가족의 묘를 이장하고 1975년 2월 가족묘 앞에 忠壯祠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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