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의 뜻은 공부에 있었고, 활쏘기와 말타기가 있지 아니했으나,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형 덕홍이 전사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자, 나라의 수치와 형의 원수를 생각하며 날을 지내었다. 마침내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의병을 모아 거병하였다.
의병 조직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김덕령이 25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6월에 김덕령은 형 김덕홍(1558∼1592)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高敬命을 찾아가서 朴光玉 등과 함께 그의 막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며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고향 광주로 귀향하였다. 무등산에서 무예를 닦고, 鑄劒洞에서 무기를 만들어 전쟁터로 보급하는 등 후방에서 관병·의병 활동을 지원하였다.
다음 달 7월 10일 형 김덕홍이 제1차 금산전투에서 호남을 침범하려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대패함에 따라, 조정에서는 경상도 서부를 방비할 장병이 부족해지자 호남에서 유능한 장수를 뽑아 경상도로 보내기로 하였다. 이는 왜적이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하려고 제2차 진주성 전투 과정 및 승전 후 진주 사람 수만 명을 죽였기 때문이다. 8월에는 진주 전투에서 순국한 의병들의 義로움을 잇는다는 繼義兵이 일어났다.
그해 8월 노모마저 세상을 떠났다. 喪中임에도 그의 매형인 金應會와 종조부 김윤경의 외손자인 송제민이 의병을 일으키라고 권하고, 아우 김덕보가 대신 삼년상을 치르기로 하자 거병을 결심한다. 10월에는 담양부사 李景麟, 장성현감 李貴 등이 천거하여 그에 전라도관찰사 李廷馣이 직접 찾아와서 국가의 위급함을 구제하도록 권면하였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그해 윤11월 4일 친구 崔聃齡 등 수십 명과 함께 다시 의병을 담양에서 일으키고, 논밭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檄文을 띄워 군사를 모집하니, 精兵 1천여 명이 모였다.
현직 관료인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도 김덕령을 적극 도와주었다. 관내의 병역기피자들을 색출하여 의병에 편입시키었고, 전쟁 물자를 많이 지원하여 주었다. 지역 유지들도 적극 도왔다. 송제민은 제주도까지 가서 말을 가져왔으며, 고봉 기대승의 아들 함재 기효증은 김덕령 의병의 都有司가 되어 각 지방에 通文을 보내어 糧穀을 모았다. 김덕령의 친척인 김응회, 이인경, 김언욱, 김존경, 김덕후 등도 큰 역할을 하였다. 김응회는 김덕령의 매형으로 김덕령 군대의 핵심참모였고, 이인경은 손위처남으로 군관으로 활약했고, 金彦勖은 고종사촌으로 김덕령 군대의 핵심참모였고, 김존경은 김언욱의 아들로 문장이 뛰어나 문서 작성과 전령 업무를 담당하였다. 김덕휴는 사촌동생인데 김덕령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였다.
12월 13일 이정암은 자신이 천거한 김덕령에게 각 고을에 저축한 군량과 병기를 내어줄 수 있도록 分朝에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또한 전 현직 관료도 김덕령을 도왔다. 현직 관료로는 해남 현감 魏大器와 군산 만호 李世琛이 있고, 전직 관료로는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도와준 전 別坐 김응회와 전 察訪 김언욱이 있었다. 한편 이정암이 청한 군량은 11월에 명을 받고 해산한 계의병으로부터 일부 받았다.
이정암의 장계에 따르면,
첫째 모병은 조정의 하명에 따랐으며,
둘째 이정암이 김덕령을 직접 만나 추천할 만한 장수임을 확인했고, 원근에서 그를 좇아서 의병이 많이 모였으며,
셋째 조정에 군량과 병기 등을 지원하고 표창하는 등 사기를 북돋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군호를 받다
1593년 12월 22일 김덕령은 담양부사 이경린의 주선으로 전라도 삼례에서 세자 광해군을 만나게 된다. 당시 세자는 撫軍司를 이끌고 군인과 백성들을 위로하고 장수를 모집하려고 전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12월 27일 分朝의 광해군은 전주 과거시험장에서 주재하였다. 문과 시관은 좌의정 윤두수, 호조판서 한준, 세자 우빈객 이항복, 문학 유몽인 등이었고, 무과 시관은 좌참찬 이산보, 동지사 박진, 훈련원 첨정 정사시, 병조정랑 조응록 등이었다. 김덕령은 수많은 수험생 앞에서 무예 시범을 보임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이 인정하는 장수가 되었다. 전주 과거시험에서는 문신 11인과 무신 1천 6백 인이 뽑히었다. 한편 도원수 권율도 무군사의 명령을 받들어 경상도 합천에서 무과시험을 치러 무인 9백 명을 뽑았다.
김덕령이 보인 무술 시범을 보고 흡족한 광해군으로부터 翼虎將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받았다. 이후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에게도 그간의 경과와 군사상황을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권율은 김덕령에게 초승장의 군호와 超乘軍이란 표장을 내린다.
한편 김덕령이 세자 광해군을 만나 군호를 수여받는 사이 명군이 경주와 삼지 등에서 철수하는 등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이에 경상도에 내려가 있던 병조판서 이덕형은 경상도 진주와 경주를 지켜야 함을 역설하며, 그동안 불어나서 3천 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끄는 김덕령에게 그 방어를 맡기기를 청한다.
그 보고를 받고 비변사는 급히 선조에게 김덕령의 군대에 초승군이라 칭하고 기치를 내리기를 청하나, 선조는 아직 김덕령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큰 공이 없으니, 기치를 내리는 일은 신중히 하라고 명한다. 이틀 뒤인 1594년 1월 1일 선조는 忠勇將 및 忠勇軍의 군호를 내리지만, 기치를 내리는 일은 보류한다. 1594년 1월 5일 선조는 김덕령을 선전관과 좌랑의 벼슬을 내린다. 이때 아직 군공이 없다는 이유로 고관에 제수하지는 못하였다.
당시 사정이 급박하다고는 하나, 선조가 직접 군호를 내리고 교지까지 남겼다는 것은 김덕령에 대한 선조의 기대가 컸음을 뜻한다.
출병
1594년(선조 27년) 1월초 충용장 군호를 받은 김덕령은 곧바로 서울로 가서 선조의 소명을 받아야 했으나, 사정이 급박하여 김덕령은 무군사의 명을 받아 경상도로 떠난다. 이는 1월 2일 세자 광해군을 따라 전주에 내려와 있던 좌의정 윤두수가 영남의 전선이 위태하니 김덕령의 군대인 충용군을 경상도로 보내겠다고 보고하였기 때문이며, 1월 3일 김덕령도 상소하며 경상도로 떠나기를 청하였다.
1월 5일 선조는 김덕령에게 선전관과 정6품 좌랑의 벼슬을 내린다. 1월 6일 김덕령은 장성 임암산성과 담양 금성산성에서 훈련하고 있는 군사들을 모두 담양 추성관으로 모이게 하였다.
격문을 띄우고 김덕령은 담양에서 대기하였는데, 《난중잡록》과 《연려실기술》에는, 김덕령군의 예정 경로가 담양에서 출발하여 순창-남원-운봉-함양-산음-단성-삼가-의령-함안-창원-김해-동래-부산-동해-대마도를 거쳐 일본 오사카로 향한다고 쓴 그의 격문이 인용되어 있다. 그렇게 보름가량 담양에서 대기하며 추가로 모병하여 병력이 3천에 이르는데, 그때 해남 현감 위대기와 군산만호 이세침이 김덕령의 충용군에 합류하였고, 김덕령의 측근 김응회와 김언욱이 벼슬을 받았다.
1월 22일 김덕령의 충용군은 3천여 명의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군량미 3천 석을 실은 후 전라도 담양에서 출발하여 순창을 거쳐 남원을 머문다. 남원에 머무는 동안 助防將 곽재우의 군대에 합류하여 명령을 받겠다는 서신을 보내었고, 최담령을 별장으로 삼아 한 달 남짓 의병을 훈련 시킨다.
2월초에 조정에서는 분조에서 실시한 전주 무과시험 합격자 등을 김덕령의 충용군에 합류시켜, 충용군은 관군과 의병의 연합부대 성격을 띈다. 충용군은 경상도 함양에 도착하여 도원수 권율 막하에 가서 도착 보고를 하고 일본군을 토벌할 계책을 논의했다. 조정에서는 김덕령에게 진해·고성의 경계에 머물면서 경상도 거제, 진해, 함안 등지에서 노략질하는 일본군을 방어하도록 전교를 내린다.
2월 2일 경상도 산음현(지금의 산청군)의 換鵝亭에 본진을 마련한다. 崔堈, 安信甲 등 13명을 임명하였다. 3일에는 함안 부근 남산리(오늘날의 함안군 장지리·사내리 일부)에 도착해 산정에 가시나무 울짱을 두고 진을 치고, 별장들에게 병사를 매복케 하였다.
정탁의 《임진기록》에 따르면, 2월 5일 김덕령 휘하의 별장 최강(1559~1614)이 고성에 나아가 일본군 수백 명과 맞서 싸워 넷을 베고 9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였고, 8일에도 최강이 창원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워 3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이고 한 명의 수급을 베었다. 오희문의 《쇄미록》에 따르면, 고성 전투는 3월 22일에 일어난 일이다. 다만 이 두 전공은 최강의 전공이며, 김덕령의 전공으로 보기는 힘들다.
2월 7일 김덕령은 기병 100여 기를 이끌고 창원 성밖 5리쯤 되는 곳에 곧장 들어갔다. 일본군의 위세가 진주성 전투 때와 비슷했는데, 매복하던 일본군 네댓 명이 칼만 휘두르다 후퇴했다. 김덕령이 진영으로 돌아와 염탐하니 일본군은 熊川과 金海 등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9일 산음 본진으로 돌아온다. 10일 새벽 권율의 명을 받은 김덕령은 여러 별장을 거느리고 각각 300여 명을 인솔하여 전날 매복했던 곳에서 일본군의 허리를 끊게 했다.
2월 27일 김덕령의 충용군이 산음에 주둔한다. 충용군이 경상도에서 머무른 지 한 달이 되자 군량 부족에 시달린다.
3월 2일에 이르러 김덕령은 조정에 치계한 뒤, 별다른 전투 상황도 없고 군량도 부족함을 들어, 예하 3천여 병력 가운데 호남 군사로 벼슬한 자 5백여 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조정에서도 상황이 심각함을 알고, 위급할 때만 징병하고 평시에는 둔전을 설치하여 운용토록 한다.
4월 1일(또는 4월 12일) 김덕령 충용군은 산음을 떠나 의령을 거쳐 진주목 동쪽 대곡리(현재는 대곡면 대곡리)로 본진을 옮겼다. 진주 대곡리는 함안과 고성 사이에 있어, 일본군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 지나야 할 요충지였다. 그곳에서 진해와 고성 지방을 방어하였다. 그해 여름에는 대곡리를 떠나 진주 월아산 아래 대여촌(지금의 진주시 금산면 가방리 관방마을) 들판에도 진을 치고 둔전을 설치한다. 군인들은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하여 농사를 지었다. 또한 장기전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월아산 정상에 목책을 설치하고 제무소를 만들어 칼과 창 등의 무기도 제조하였다.
한편 《선조실록》 1594년 4월 17일, 18일자 기사에 따르면, 변방의 장수들이 굶주린 우리 백성의 목을 베어 전투에서 얻은 일본군의 목이라고 허위로 보고하고, 대부분의 군대들이 예전에는 명나라 군대에 의지하더니 이제는 김덕령의 충용군에만 의존하여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 도원수 권율의 지도력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었다.
그 무렵 1594년 4월에 선조는 각도의 모든 의병을 혁파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임계영의 전라좌의병, 변사정의 敵愾義兵 그리고 정인홍의 경상도 의병들을 해산하거나 그 일부를 모두 충용군에 소속시키었고, 그에 따라 김덕령은 나이 28세에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어, 助防將 곽재우와 함께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경상도 서부 지방 방어 임무를 맡았다.
그 뒤에 김덕령과 충용군은 9월 2일 권율 휘하에서 경상도 固城 지방에서 일본군 2백여 명과 맞서, 김덕령을 비롯한 2백여 명이 매복하여 싸워 단 한 명도 베지 못하였으나, 잡혀가던 사람 50여 명을 남김없이 구하여 데려오는 공을 세운다.
이렇듯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힘을 합쳐 여러 차례 걸쳐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므로 위명이 높아갔다.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시기는 강화 교섭기로서 큰 전과는 없었지만, 固城·昌原 방어를 통해 일본군이 진주 일원의 지역에 다시는 출현할 수 없도록 하여 결국 전라도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9월 21일 선조는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여 권율, 이빈, 곽재우 등 육군 수뇌부와 이순신, 원균, 이억기 등 수군 지휘관에게 포상하였고, 김덕령도 호피와 방한복 한 벌을 하사받았다.
장문포 해전
1594년(선조 27년)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場門浦에서 충무공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陸兵將 곽재우 등과 수륙 연합전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경상도 진해 · 고성 지방을 방어하였다.
1594년 8월 6일 장문포 해전에 앞서 조선 수군은 좌의정 윤두수는 삼도 체찰사가 되면서, 도원수 권율,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 체계를 갖추게 된다. 삼도체찰사 윤두수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건의에 따라 수륙합동작전을 비변사에 보고하지만, 비변사에서는 반대하고, 선조는 그 소신이 가상하다고 여겨 허락한다. 육군은 권율, 김덕령, 곽재우, 선거이 등이 나서고 수군은 이순신, 원균 등이 나섰다.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로부터 9월 27일까지 견내량으로 모여 장문포 전투에 참전하라는 명령을 받고, 26일에 8백여 병사를 거느리고 도착한다. 장문포는 현재의 거제시 장목면 장목리에 위치한 포구로서 바로 앞에는 칠천도가 있다. 27일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전선 50여 척으로 한산도에서 일제히 출발하여 적도(거제시 문덕면) 앞바다에 이르렀다.
전투에 앞서 김덕령과 곽재우의 대화가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데, 곽재우와 조정의 기대는 큰 데 반해 김덕령은 자신감이 없고 부담스러워 한다.
조경남의 《난중잡록》과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나타난 장문포 수륙 합동작전이 9월 28일부터 시작한다.
당시 충용장 김덕령은 도원수 권율의 명령에 따라 의령에서 차출된 군사를 이끌고 선봉장으로 장문포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10월에는 脚氣症에 들어 전투에서 그다지 활약하지 못하였다. 권율의 장계에 따르면, 곽재우를 전군을 지휘하는 도별장으로 삼고, 윤두수의 140여 명과 李鎰의 210여 명은 육전을 지원하도록 장수를 정하여 출전시키는데, 김덕령이 때마침 각기증을 앓고 있어 말을 타거나 걷는 모습이 쓰러질 듯싶어, 여러 장수는 모두 겁을 먹은 데다가 또 거제의 적병이 산야에 깔려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병조좌랑 김상준이 전한 김덕령의 병세도 그와 비슷하다.
《난중잡록》과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9월 29일 첫 전투에는 각기증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10월 4일의 두 번째 전투에 가까스로 참전하나, 초라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성에 올라 대항하매, 선거이가 김덕령에게, 용맹을 보여 달라고 청하나, 배에 타고 翼虎旗 두 개를 뱃머리에 꽂고 선봉으로 전진하다가 적의 공세가 거세어 퇴각하였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10월 4일 이순신은 조방장 곽재우·충용장 김덕령과 함께 수륙 합동작전을 협의하고 대대적으로 수륙합동공격을 실시하였다. 김덕령이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땅으로 상륙하여 산으로 올라가고 바다에서 수군이 호응하는 작전이나, 별다른 전과 없이 끝났다. 선봉에 선 김덕령 부대가 잠시 일본군을 혼란 시켰으나, 일본군이 높은 위치에서 총을 쏘아대니 공격을 멈출 수 밖에 없었고, 이에 선거이를 포함한 장수들이 모두 퇴각하였다.
조선군은 장문포에서 세 차례나 수륙합동작을 펼치며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견고하게 쌓은 성을 철통같이 수비한다. 일본군은 1.6km나 되는 거리에 뗏목을 배치하여 조선 수군의 접근을 막았고, 또한 “일본이 명나라와 더불어 지금 화친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니 싸울 필요가 없다.”라는 패문을 써서 땅에 꽂고는 싸우려 하지 않았으므로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결국 10월 7일부터 충청병사 선거이와 조방장 곽재우, 충용장 김덕령 등이 육지의 주둔지로 돌아가는 등 차츰 후퇴했다.
이렇게 장문포 전투에서 수륙합동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도체찰사 윤두수가 체직되고, 김덕령도 조정과 여러 사람으로부터 기대를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장문포 전투에서 좌상 윤두수에게 잘못 보여 훗날 목숨을 잃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선조는 자신이 허락하여 치른 전투였음을 감안하여 윤두수를 감싼다. 다시 말해 장문포 전투에 대한 장계 문제로 논란이 생기고, 선조가 윤두수를 감쌌으나 결국 체직한다. 경상도 관찰사 홍이상이 11월 19일에 보낸 장계가 조정을 발칵 뒤집는다. 이 장계에는 全羅舟師의 伺侯船 3척이 실종되고, 그 배에 탄 군사들이 거의 다 죽은 사실이 적혀 있었다. 10월 1일과 3일의 일부 경과를 서로 숨기고 사실대로 알리지 않고, 도리어 공훈을 보고하였다면서, 사헌부는 11월 22일에 권율 · 이순신을 잡아들여 신문하고 윤두수를 파직하라고 주청한다. 12월 1일까지 여러 차례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돌아가며 상소가 올라왔고, 결국 선조는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장수를 바꾸는 일은 兵家에서 꺼리는 일이라서 권율·이순신은 체직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 다만 16차례에 걸쳐 탄핵을 당한 윤두수만 체직시키고 이 사건을 마무리한다. 즉, 장문포 해전은 (원균이 처음 입안하고) 윤두수가 장계를 올려 허락을 받고 총책임자가 되었으며, 야전에서 도원수 권율과 통제사 이순신이 전투지휘를 하는 전투였다. 윤두수는 이 전투의 패배와 보고 미비의 책임을 지고 체직되었으나, 전투지휘를 했던 권율과 이순신은 전장의 장수라는 이유로 체직되지 않았다.
한편, 1594년 9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도 “김덕령은 神勇이 있으니 싸우지 않으면 몰라도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이길 것으로 알았는데, 한 차례 전투에 공이 없자 주변 사람들이 실망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10월 14일자 《선조실록》에서, 심지어 영의정 유성룡은 “김덕령이 병이 있다고 하는데, 일이 성공되지 못할 줄 알고 병을 핑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혹평한다. 도리어 선조가 “덕령이 만일 일이 성공되지 못할 줄 알았다면 의당 大將에게 힘써 말하여 중지시켰어야 한다. 듣자니 ‘여러 장수들은 덕령이 오지 않자 지팡이 잃은 맹인과도 같았다.’고 하는데, 여러 將官이 덕령 한 사람이 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렇게 낙심을 한단 말인가. 당초 거사할 때 나도 반드시 패할 줄을 알기는 하였으나 적을 토벌하려는 마음은 매우 취할 만하다. 비변사에서는 과히 책망하지 말고 별도로 뒷일을 잘 수습할 수 있는 계책을 하도록 하라.”라고 두둔한다.
진주에서 주둔한 지 2년이 다 되었건만 전투다운 전투는 하지 못하고 있었고, 명성을 드높일 기회인 장문포 전투에서도 초라한 성과를 거두자, 김덕령에 대한 조정의 신망은 갈수록 추락 일로였으나, 《선조실록》 1595년(선조 28년) 1월 8일과 2월 6일자 기사에 따르면, 선조는 아직도 김덕령을 계속 신임하였다.
10월 13일 장문포 해전을 마친 뒤 권율의 명에 따라 1593년 6월 하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의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제사를 지낸다.
1595년 1월 27일에 선조가 김덕령의 처자에게 식량을 주어 보살피자, 2월 3일 김덕령은 선조에게 사은 상소를 올린다. 한편 그 상소에서 김덕령은 군량 부족을 호소하였고, 조정은 그에 답하여 전라도 潭陽 등 네 고을에서 그 곡식을 계속 운송하여 군량이 떨어지지 않게 하도록 명하였다.
살인죄와 옥고
1595년(선조 28년) 말까지 김덕령은 진주에 둔전의 설치 등 전쟁에 대비하였지만, 강화의 추진으로 출전 기회가 적었고, 의병 진영에서 장기전의 대비에 따른 피로의 누적으로 군율의 기강 해이되는 사건이 빈발하였다. 그 해이해진 군사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군율을 엄하게 시행하여 도망치는 부하 몇 사람을 붙잡아 처벌하자, 막료와 군사들 사이에서는 불평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변사에 이것이 보고되자 서인과 동인을 막론하고 의병 대장 김덕령에 대한 비난을 쏟아 냈다. 그 뒤 윤근수가 체포하여 투옥할 때 서인은 그를 비난하였으나 동인의 재상들이 그를 옹호하였다. 이에 선조는 김덕령을 석방하였고, 이를 “제1차 김덕령 옥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1595년 4월에 선조는 해평부원군 尹根壽(1537∼1616)를 불러 일본군의 동태, 명나라 군대의 움직임, 그리고 조선군의 동향을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에 윤근수는 전라도와 경상도 각 지역을 돌아보다가, 진주에서 처음으로 김덕령을 만난다. 송강 정철이 성혼의 친우이고, 김덕령은 성혼의 제자였으며, 윤근수는 정철이 제기한 세자 책봉문제를 지지·찬성하다가 유배를 갔었기 때문에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고 각별한 애정을 표시한다. 그러다 윤근수는 이곳에서 그의 노복이 죄를 지어 문초를 받고 있음을 알고 김덕령에게 선처를 부탁한다.
같은 해 9월에 윤근수는 특산물 조달의 현지 조사를 위하여 체방사가 되어 다시 진주를 방문했는데, 그가 석방을 부탁한 노복이 김덕령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10월 17일자 윤근수는 분노하여 김덕령을 진주 옥에 가둔다.
김덕령이 첩보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다고 알려진 일은 첩보를 전달하는 전령이 제 역할을 못하여 적의 정보파악이 늦어지고 군량 조달에 차질이 빚어져서, 또 그 전령을 잡아서 볼기 몇 대를 쳤는데, 그게 와전되어 돌에 매달아 물속에 넣었다고 김덕령은 모함을 받았다. 김덕령이 약속을 어기고 윤근수의 노속을 죽였다고 알려진 일은 장문포 전투에 참가하기로 했던 병사 최인상·최덕웅 형제가 도망을 가서 그의 아버지 최춘용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병사들의 아버지를 매질하였는데, 윤근수의 부탁에 따라 풀어주었으나, 그 뒤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 이렇듯 군율에 따라 장졸을 다스린 김덕령에게 살인죄를 적용함은 지나치다고 진주 출신 부사 성여신과 진주 유생 박흥주 등은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청원서를 보낸다. 김덕령이 경상도에 머무르는 동안 커다란 전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으나, 지역민들로부터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음은 분명하다.
이듬해인 1596년(선조 29년) 김덕령이 진주옥에 갇힌 지 3개월이 다 된 1월이 되어서야 의금부로 옮겨 국문을 받았으나, 우의정 鄭琢 등이 석방을 탄원하는 등 사면을 요청한다. 1월 8일 김덕령이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고, 선조도 풀어주라 비변사에 명하였다. 그러나 1월 13일 사헌부에서 김덕령의 처벌을 간하며 아울러 그를 처벌하지 않은 형조 당상·색낭청의 추고를 청하였다. 《선조실록》 1월 14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 두 번째 청까지도 선조는 처벌을 허락하지 않지만, 1월 15일 사헌부가 세 번째 청을 하자 그때야 의금부 압송을 허락한다.
첫 옥살이는 큰 고초를 겪지 않고 지낸 듯하다. 1월 17일 이호민·유성룡 등이 풀어주도록 청한다. 감옥에 갇힌 지 4개월만인 1596년 2월 28일에 선조는 특명으로 김덕령을 풀어주고 그에게 궁중에서 사용하는 內廐馬 한 필을 주라고 명한다. 다만 3월 3일 이덕형이 선조에게 김덕령을 만나보라 청하고 선조가 김덕령을 보고 싶다고 오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3월 1일에 김덕령은 식량이 부족하여 군중으로 내려간 뒤였다. 그때 선조는 입시한 여러 신하에게 일러 평하기를, 대장을 삼기에는 알맞지 않고 突擊將領을 시키기에 합당한 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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