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공 김덕령

김덕령-이몽학의 난

구글서생 2023. 4. 19. 02:10

김덕령-이몽학의 난
김덕령의 묘

 

1596년(선조 29년) 7월 6일 충청도 鴻山 지역에서 왕족 李夢鶴이 난을 일으켰다.

이몽학은

“충용장 김덕령과 의병장 곽재우·홍계남 등이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도우며, 병조 판서 이덕형이 내응한다”

라는 등 거짓말과 헛소문을 퍼뜨렸다.

한편 7월 12일에 도원수 권율은 충청병사 이시언의 요청을 받아 전라감사 박홍로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을 거쳐 尼山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권율은 반란군의 세력이 매우 많음을 알고 충용장 김덕령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게 하였다.

그러나 며칠 뒤 부여군 石城에서 크게 이겨 이몽학의 목을 베어 난을 진압한다.

 

7월 14일 권율의 명을 받은 김덕령은 난을 진압하려고 진주를 떠나 충청도로 진군하다 15일에 단계에서 유숙했으며 16일에 함양으로 갔다. 17일에 미처 운봉에 닿기 전에 도원수가 다시 전령을 고쳐 반란이 진압되었다고 하였기에,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의 陣所로 돌아간다.

 

이몽학이 죽은 뒤 그가 지닌 문서를 보니 김·최·홍의 세 姓이 적혀 있었다. 도원수 권율이 홍주 옥에 갇힌 募粟官 韓絢을 심문하니 그는 “김덕령· 최담령· 홍계남이다”고 자백하고, “곽재우와 고언백도 모두 나의 심복이었다”라고 자백하였다.

이에 무과에 급제한 정식 장수이면서도 후방에 배치되거나 김덕령의 막하에서 종군함을 불만으로 여기던 충청도 순찰사 이정암의 종사관 辛景行이 7월 18일에 김덕령을 체포하라는 장계를 올린다. 그때 忠淸兵使 李時言과 慶尙兵使 金景瑞가 더욱 장군을 꺼려서 시기를 이용해 죽이려고 密啓하여 김덕령이 반역할 정황이 있다고 말하고, 영의정 유성룡이 이시언 등의 말에 동조하였다.

 

그러한 무고가 받아들여져, 선조는 즉시 동부승지 徐渻을 보내 김덕령을 잡아오도록 하였다. 서성이 전주에 이르니 도원수 권율이 김덕령을 이미 진주 옥에 가두어 놓은 상태였는데, 권율은 김덕령이 명령을 거역할까 염려하여 비밀리에 成潤文에게 시켜 그를 잡아 오게 하였다. 성윤문은 김덕령의 억울함을 알기에 두 손만 자물쇠로 채워서 옥에 보냈다. 서성이 장계를 올렸는데, 거기에 四日遲留 觀望成敗(나흘동안 머뭇거리며 성패를 바라보다.) 여덟 글자가 있었는데, 그게 죄목으로 되었기 때문에 서성이 비난을 받았다.

 

7월 27일에 서성은 김덕령을 전 현감 김경눌 등을 시켜 檻車에 실어 압송하도록 하여 서울의 옥에 가둔다. 이를 “제2차 김덕령 옥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 김덕령이 국문을 당하고 있는데도 권율이 김덕령에 대해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한현이 동조자로 지목한 곽재우, 고언백, 홍계남은 잡혀 왔다가 우의정 정탁·김응남 등이 구명·탄원에 노력하여 풀려났고, 반란군의 입에 오르내린 병조판서 이덕형은 40일 동안 거적을 깔고 엎드려 처분을 기다린 끝에 무사하였다. 그러나 오직 김덕령만은 무사하지 못하였다.

 

8월 4일 선조에게 친히 첫 국문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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