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은 조선 태종 때 의정부 贊成을 지낸 金漢老(양녕대군 장인)의 12대손이다.
광주의 서쪽에 위치한 평장동(지금의 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에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다가 고조할아버지 金文孫이 1470년경 光州盧氏 부인과 결혼하여 처가 마을인 석저촌으로 들어와 살면서 그곳이 새로운 광산 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평장동과 석저촌(지금의 충효동)은 직선거리로는 5km 안팎으로 가깝다. 증조할아버지 金翊은 호조 정랑을 지냈으나, 할아버지 김윤효와 아버지 김붕섭은 才行이 있었음에도 벼슬에 나가지 못하였다.
김덕령은 1568년(선조 원년) 12월 29일 전라도 광주 無等山 아래 石底村(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성안마을에서 아버지 金鵬燮과 直長 潘繼宗의 딸인 어머니 南平潘氏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위로는 형 德弘과 누나 3명이, 아래로는 德普가 있다.
집안이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여 儒業에 종사하여, 어려서부터 從祖父 沙村 김윤제의 별장인 환벽당에서 글공부하며 儒雅를 쌓기 시작하였고, 14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17세에 鄕解(초시)에 합격하고, 18세 때 담양에 사는 興陽李氏 부인과 혼인하였다. 20세에 형 德弘, 매부 金應會, 묵재 李貴 등과 함께 牛溪 成渾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무등산에서 말타기와 칼쓰기 등 무예를 익혔다고 한다.
당시 조정에서는 서인과 東人의 정권 싸움이 치열하였는데, 이런 가운데 1589년(선조 22년) 정여립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서인의 좌의정 鄭澈이 委官(재판장)으로서 동인의 과격파 李潑 등 1천여 명을 숙청하는 기축옥사를 일으키며, 이로 말미암아 동인의 원망을 크게 샀다. 김덕령은 성혼의 제자로서 서인 계열에 속하였고, 정철과는 同鄕이었으므로, 뒷날 동인 출신 臺諫들로부터 의병장 김덕령이 군율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여 군사를 죽였다고 탄핵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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