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재 李貴 등은 용맹이 절륜하고 지혜가 뛰어나다고 평했다.
《임진기록》에서 김덕령이 올린 1594년 5월 11일자 장계에 따르면, “신은 그저 裨將으로서 선봉에 서서 돌격대의 임무를 맡았을 뿐인데, 이 고개를 넘은 직후 비로소 군에서의 명성을 떨치게 되었습니다.”라고 스스로 평하였다. 앞서 3월 2일 장계에서도 “신이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동지 몇 명을 불러 모아 한 장수의 선봉이 되고자 하였을 뿐인데 뜻밖에 상께서 장수의 호칭을 내려 주시고 모여 있는 군사를 慰撫해 주시니 신이 감당할 수 없어 밤낮으로 두렵고 민망합니다.”라며 비슷하게 자평하였다.
《서하집》권5에 따르면, 김덕령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일찍부터 자부심이 강하고 비분강개하는 기질을 가졌으며, 풍모는 그다지 長大하지는 않았으나, 용맹이 아주 뛰어나고 날렵하였다. 속으로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서 사람들 가운데 이를 아는 자가 드물었다.
《국조인물고》에 따르면, 김덕령이 군사를 일으키고 4년이 되도록 공을 세우지 못한 까닭은 밖으로는 김덕령의 위명이 너무 성하여 가는 곳마다 일본군이 군병을 거두어 먼저 피해버렸고, 안으로는 김덕령을 꺼리고 미워하여 해치려는 사람이 많았으며, 和議와 黨禍도 그 사이에 끼어 들었으니, 공을 이루지 못하고 무함을 받아 죽게 되었다.
무고에 의한 1차 옥사 때 김덕령이 하옥·압송되자, 진주의 유생들이 김덕령을 옹호하고 그의 방면을 청하는 글을 도체찰사 이원익과 조정에 올렸다. 이로써 김덕령이 경상도에 머무르는 동안 커다란 전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으나 지역민들로부터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음은 분명하다.
《호남절의록》과 〈三寃記事〉 등에서는 김덕령의 죽음을 중국 남송의 장군 岳飛의 죽음에 비유한다. 악비가 모함으로 죽었듯이, 김덕령도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선조의 의심과 충청병사 이시언·경상우병사 김응서 무리의 시기 때문에 죽었다고 밝힌다.
《난중잡록》 1596년 8월 24일자에서 김덕령의 죽음을 “당시에 뜻있는 이는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고 애도하였다.
현종조에 추증을 논의하였는데, 마땅한 전공이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선조가 좌랑 벼슬을 내리고 군호를 내리니, 온 나라 사람들이 고무되어 神將이라고 하였으며, 일본인들도 듣고서는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적과 대치한 3년 동안에 끝내 적의 목을 벤 공이 없었으며, 성질 또한 술주정이 심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다고 평한다.
1747년(영조 23년) 영조 대에 호남지역 量田使인 元景夏(1698~1761)가 호남의 형편에 대하여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김덕령을 호남의 10대 인물로 보아 그 용기를 특히 높게 평가한다.
전공
1592년(선조 25년) 8월부터 명나라의 沈惟敬과 일본의 小西行長 사이에 강화 회담이 시작되어, 1593년(선조 26년) 6월 강화 조약이 성립되었다.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던 臨海君·順和君 두 왕자가 송환된 후 그 뒤 4년 이상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며 그다지 큰 전투가 없었다. 그러다가 1596년(선조 28) 9월 강화 조약이 깨져 다시 전투가 벌어졌으나, 1598년(선조 31년) 8월 일본의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그의 유언에 따라서 일본군이 철수하며 7년 전쟁도 끝이 났다.
김덕령은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담양을 출발한 1594년(선조 27년) 1월 22일부터 옥중에서 사망한 1596년 8월 21일까지의 2년 7개월간으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 조약이 성립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였다. 김덕령이 처가가 있던 담양에서 의병 3천여 명을 모집하여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진주로 간 까닭은 진주성 전투와 관련이 있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 안에 있던 軍官民 5만여 명이 옥쇄(玉碎)하였다. 이에 전라도의 의병을 경상도 진주로 보내어 경상도 관군과 의병의 사기를 진작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비변사에서는 의병 대장 김덕령에게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진주로 가서 주둔하게 하였다. 또한 나이 28세의 김덕령은 전국 의병 5천여 명을 거느리는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어, 조방장 곽재우와 함께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경상도 서부 지방의 방어 책임을 맡았다. 이후 강화 조약이 성립되면서 전투 상황도 거의 종결되었고, 군량미가 부족해지자 비변사에서는 김덕령에게 의병 숫자를 줄이도록 명하였다. 또 후퇴하는 일본군과 아무쪼록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무익한 전쟁을 벌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전공은 극히 드물다. 1594년 9월 2일 충용군은 권율 휘하에서 경상도 固城 지방에서 일본군 2백여 명과 맞서, 김덕룡을 비롯한 2백여 명이 매복하여 싸워 단 한 명도 베지 못하였으나, 잡혀가던 사람 50여 명을 남김없이 구하여 데려오는 공을 세운다.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일한 전공이다. 다만 뚜렷한 전공 기록은 없어도 경상도로 넘어가 진해, 고성 방면을 방어했다는 기록도 있고, 정탁의 《임진기록》에 따르면, 2월 5일 김덕령 휘하의 별장 최강(1559~1614)이 고성에 나아가 일본군 수백 명과 맞서 싸워 넷을 베고 9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였고, 8일에도 창원에서 최강이 맞서 싸워 30여 명을 활로 쏘아 죽이고 한 명의 수급을 베었다. 오희문의 《쇄미록》에 따르면, 고성 전투는 3월 22일에 일어난 일이다. 다만 이 두 전공은 김덕령의 전공으로 보기는 힘들다.
1611년 현종 대에 김덕령을 신원할 때도 그 평가에서 전공을 거론하지 않고, 큰 절조를 지니고 용기와 힘을 지녔으며 위엄의 명성을 널리 떨쳤다고 밝힌다. 이는 원경하의 상소에서도 그의 용기를 높이 사서 호남의 10대 인물로 꼽고 있을 뿐, 임진란 때의 전공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한편 전공이 부족함에도 꾸준히 절조나 용기가 거론되는 이유는, 당시 의병 조직은 조선 상황이나 김덕령 개인 사정으로 볼 때 모두 빼어난 용기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제2차 진주성 전투로 말미암아 진주성에서 방어하던 군사나 그곳에 거주하던 조선인 상당수 살해당했고, 그로 말미암아 조선 정부는 경상도 서부를 방어할 거점을 잃게 되었다. 게다가 김덕령의 형 김덕홍이 제1차 금산전투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隆景]의 일본군을 맞아 싸우다가 고경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니, 그 용기를 칭찬할 만하다는 뜻으로 보인다.
다만 김덕령의 勇力을 두려워한 일본군들은 김덕령이 압송된 것을 보고, 뒤이어 옥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는 데에서 그의 존재만으로도 일본군의 발호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조실록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는 여러 차례 평하는 글이 실려 있다.
1594년 9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도 “김덕령은 神勇이 있으니 싸우지 않으면 몰라도 싸우기만 하면 반드시 이길 것으로 알았는데, 한 차례 전투에 공이 없자 주변 사람들이 실망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1595년(선조 28년) 2월 김덕령은 선조가 자신의 처자에게 식량을 주어 보살핀 일에 대해 선조에게 고맙게 여기어 상소하였다. 그 상소에서, 자신은 조그마한 공조차 없고, 이름만 널리 알려졌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이미 親喪에 능히 효성을 다하지도 못하였고 일과 마음이 서로 어긋나서 또 적을 치는 데 목숨을 바치지도 못하였으니, 나아가나 물러가나 의거할 바 없어 충효가 모두 결여되었습니다.”
1596년(선조 29년) 2월 19일, 선조가 살인죄로 옥사에 갇힌 김덕령이 어떤 성품인지 권율 등에게 물었다. 권율은 김덕령이 본래 光州의 校生으로 용력이 뛰어나 쓸 만한 인재이며, 군율을 너무 엄격히 하여 점차 사람이 멀리하였다고 말하였다. 金應南은 살인은 중죄라 아랫사람으로서 임금께 감히 전제할 수 없으나, 덕령은 힘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임을 남들이 모두 아는 바이고, 특명으로 은혜를 베풀면 힘을 다해 보답하기를 도모한다고 말하였다.
1596년 김덕령을 풀어주며, 선조가 그를 평하기를, 대장을 삼기에는 알맞지 않고 突擊將領을 시키기에 합당한 자라고 하였다. 즉, 용맹하나 지휘력이나 통솔력은 부족하였다.
1596년(선조 29년)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그를 잡으려 할 때, 김덕령의 용력이 매우 뛰어나서 그가 체포에 응하지 않을까 근심하여 여러 가지로 方略을 만들어서 그의 도망을 미리 방지하였다. 그러나 김덕령은 스스로 순순히 체포되어 하옥되다. 갑자기 유명해진 까닭에 李時言 등의 시기를 받았으며 조정 또한 그의 날쌔고 사나움을 제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고 의심하였으므로 기회를 타서 그를 제거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놓아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그해 8월에 역모에 연루되어 국문을 당하는 와중에도 스스로 공이 없고 허명만 가졌음을 밝혔다. 한편 능력이 뛰어난 최담령을 천거하기까지 한다. “여러 해 동안 종군하였지만 아직 조그만 공도 세우지 못해서 충성도 펴보지 못하고 도리어 불효만 하였습니다. 죄가 이에 이르렀으니 만 번 죽어도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충장공 김덕령'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덕령-관련사항 (1) | 2023.04.19 |
---|---|
김덕령-死後와 追尊 (0) | 2023.04.19 |
김덕령-이몽학의 난 (0) | 2023.04.19 |
김덕령-임진왜란 의병 활동 (0) | 2023.04.19 |
김덕령-생애 초반 (1) | 2023.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