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篇은 말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잘 표현하여 남을 설득시키고 목적을 이룬 事例들을 모아 編成하였다. 談論을 잘하는 방법으로 荀子의 주장을 들어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태도를 엄숙히 하여 자기의 말이 진실임을 믿도록 할 것,
둘째 말을 정직하고 정성스럽게 하여 과장하거나 축소하거나 숨기지 말고 진실되게 할 것,
셋째 자신의 觀點을 굳게 지켜 목적한 바를 달성하지 않으면 중지하지 말 것,
넷째 比喩法을 잘 활용하여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고 허락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 것,
다섯째 對比法으로 사리를 분석하여 정반대의 논리를 세워서 이해시킬 것,
여섯째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하여 기쁘게 하거나 분노하게 하여 설득할 것 등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의 言術로 국가가 처한 위험한 상황을 타개하고 자신에게 닥친 환난에서 벗어난 인물과 사례들을 수집하였다.
1
孫卿曰:
「夫談說之術,齊莊以立之,端誠以處之,堅強以持之,譬稱以諭之,分別以明之,歡欣憤滿以送之,寶之珍之,貴之神之,如是則說常無不行矣。」
孫卿이 말하였다.
“말을 하는 방법은
엄숙하고 장중함을 세우며,
단정하고 성실함으로써 대하며,
주장을 굳고 강하게 지키며,
비유하는 말로 깨우쳐주며,
분별하여 사리를 밝히며,
기쁨과 분노하는 감정을 전하여,
보물로 여기고 진귀하게 여기며, 귀중하게 여기고 신묘하게 여기게 해야 한다.
이와 같게 하면 내가 하는 말이 항상 통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 孫卿 : 荀子이다.
▶ [欣] : 저본에는 ‘忻’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의거하여 ‘欣’으로 바로잡았다. 《荀子》 〈非相〉에는 ‘欣驩’으로 되어 있다.
夫是之謂能貴其所貴。
이것을 일러서 그가 귀하게 여기는 바를 귀하게 여기게 한다.
傳曰:
「唯君子為能貴其所貴也。」
傳에 말하였다
“君子라야 자기가 귀중히 여기는 것을 귀중히 여기게 한다.”
《詩》云:
「無易由言,無曰苟矣。」
《詩經》에 일렀다.
“가볍게 말하지 말며, 구차하게 말하지 말라.”
▶ 詩云……無曰苟矣 : 《詩經》 〈大雅 抑〉에 보인다.
鬼谷子曰:
鬼谷子가 말하였다.
「人之不善而能矯之者難矣。
“사람이 不善한데 그것을 바로잡기는 어렵다.
說之不行,言之不從者,其辯之不明也;
既明而不行者,持之不固也;
既固而不行者,未中其心之所善也。
설득하는 말이 시행되지 않고, 말을 따르지 않음은 그 말이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고,
명백한데도 시행되지 않는 것은 지킴이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고,
지킴이 견고한데도 시행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좋아하는 바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辯之明之,持之固之,又中其人之所善,其言神而珍,白而分,能入於人之心,如此而說不行者,天下未嘗聞也。
말하되 분명하고, 지키되 견고하고, 또 그 사람이 좋아함을 맞추면 그 말이 신묘하고 진귀하며 명백하고 분명하여 사람의 마음에 먹혀드나니, 이와 같은데도 말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천하에서 일찍이 듣지 못하였다.
此之謂善說。」
이를 ‘善說’이라고 한다.”
▶ 鬼谷子曰……此之謂善說 : 鬼谷子는 전국시대 楚나라 사람으로 縱橫家이며 蘇秦‧張儀의 스승이다. 鬼谷에 은거했으므로 鬼谷子 또는 鬼谷先生이라 한다. 이 내용은 현재의 《鬼谷子》에는 없는데, 《說苑校證》에 말하였다. “이 내용은 아마도 蘇秦과 張儀의 글에서 나온 듯하다.”
子貢曰:
「出言陳辭,身之得失,國之安危也。」
子貢이 말하였다.
“말하고 언사를 발표함은 자신의 得失과 국가의 安危이다.”
《詩》云:
「辭之繹矣,民之莫矣。」
《詩經》에 말하였다.
“말이 온화하면 백성이 편안하다.”
▶ 詩云……民之莫矣 : 《詩經》 〈大雅 板〉에 보인다.
夫辭者人之所以自通也。
말이란 사람이 자신을 알리는 도구이다.
主父偃曰:
「人而無辭,安所用之。」
主父偃이 말하였다.
“사람이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면 어디에 쓰겠는가.”
▶ 主父(보)偃 : 西漢 때의 大臣으로 臨淄 사람이다. 主父는 複姓이다. 《漢書》 〈藝文志〉의 縱橫家類에 《主父偃》 28편이 있다고 하였다.
昔子產脩其辭,而趙武致其敬;
王孫滿明其言,而楚莊以慚;
蘇秦行其說,而六國以安;
蒯通陳說,而身得以全。
옛적에 子産이 말을 잘하자 趙武가 공경을 표하였고,
王孫滿이 그의 말을 분명히 하자 楚 莊王이 부끄러워하였고,
蘇秦이 合縱說을 실행하자 6國이 그로 인하여 편안해졌고,
蒯通이 설명을 펴자 몸이 보전되었다.
▶ 子産修其辭 而趙武致其敬 : 子産은 춘추시대 鄭나라의 正卿이다. 趙武는 춘추시대 晉나라 卿으로 시호는 文이다. 朔의 아들로, 屠岸賈에게 趙氏 일족이 멸망당했을 때 유복자로 태어나 程嬰‧公孫杵臼의 도움으로 화를 면하고 卿이 되어 平公 때 執政이 되었다. 《春秋左氏傳》 襄公 25년에 보인다.
▶ 王孫滿明其言 而楚莊以慙 : 王孫滿은 周 定王 때의 大夫로, 楚 莊王이 帝位를 욕심내어 鼎의 크기와 무게를 묻자, 제위는 德에 있는 것이지 鼎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답하여 장왕의 야심을 그치게 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 3년에 보인다.
▶ 蘇秦行其說 而六國以安 : 蘇秦은 전국시대 東周 洛陽 사람이다. 鬼谷子에게 縱橫術을 익혀 燕‧齊‧韓‧魏‧楚‧趙의 合從을 성공시키고 6국의 相印을 차고 秦에 대항하게 하였다. 뒤에 燕의 樂毅가 齊를 공격할 때 反間의 혐의를 받아 車裂刑에 처해졌다. 《史記》 〈蘇秦列傳〉에 자세히 보인다. 《戰國縱橫家書 5》
▶ 蒯通陳其說 而身得以全 : 蒯通은 漢初의 遊說家로 涿郡 范陽 사람이다. 본래의 이름은 徹인데, 후대에 漢 武帝 劉徹의 諱를 피하여 通으로 고쳐 썼다. 武信君에게 유세하여 燕‧趙의 30여 城을 싸우지 않고 얻게 하였다. 뒤에 韓信에게 齊나라 땅을 차지하여 劉邦을 배반하고 自立하라고 권하였다가 韓信이 처형된 뒤에 잡혀갔으나 말을 잘하여 사면되었다. 《史記》 〈淮陰侯列傳〉에 보인다. 《漢書 蒯伍江息夫傳》서 벗어난 인물과 사례들을 수집하였다.
夫辭者乃所以尊君、重身、安國、全性者也。
말이란 곧 임금을 높이고, 자신을 귀중하게 하며,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性命을 보전하는 것이다.
故辭不可不脩而說不可不善。
그러므로 언사를 닦지 않을 수 없으며, 辯說을 잘하지 않을 수 없다.
2.
趙使人謂魏王曰:
「為我殺范痤,吾請獻七十里之地。」
趙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魏나라 安釐王에게 말하였다.
“나를 위해 范痤를 죽여주면 우리는 70리의 땅을 바치겠습니다.”
▶ 魏王 : 전국시대 魏나라 安釐(희)王을 말한다.
▶ 范痤 : 전국시대 魏나라 재상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魏王曰:
「諾」。
魏王이 말하였다.
“좋소.”
使吏捕之,圍而未殺。
관리를 보내 범좌를 체포하게 하니, 포위하되 죽이지는 못하였다.
痤自上屋騎危,謂使者曰:
「與其以死痤市,不如以生痤市,有如痤死,趙不與王地,則王奈何?
故不若與定割地,然後殺痤。」
범좌가 스스로 지붕에 올라가서 용마루를 타고 앉아 使者에게 말하였다.
“죽은 범좌를 가지고 거래하기보다는 산 범좌를 가지고 거래함이 나을 터이니, 나를 죽였다가 조나라가 왕에게 땅을 주지 않는다면 왕은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땅의 분할을 확정하고 나서 나를 죽임만 못할 터입니다.”
▶有如 : 마치 …와 같다. …와 비슷하다.
魏王曰:
「善。」
위왕이 말하였다.
“좋다.”
痤因上書信陵君曰:
「痤故魏之免相也。
趙以地殺痤而魏王聽之,有如強秦亦將襲趙之欲,則君且奈何?」
범좌는 信陵君에게 편지를 올려 말하였다.
“나는 원래 위나라의 면직된 재상이오.
조나라가 땅을 가지고 나를 죽이려 하매 위왕이 그 말을 들으려 하니, 만일 강한 秦나라가 趙나라의 하고자 함을 답습하면 그대는 장차 어찌하시겠소?”
信陵君言於王而出之。
신릉군이 위왕에게 말하여 범좌를 구출하였다.
▶ 信陵君 : 전국시대 魏나라의 公子 無忌의 封號이다. 昭王의 아들이고 安釐王의 아우로 3천 명의 食客을 거느렸으며, 趙나라 平原君을 구한 일이 있다. 전국시대 四公子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史記 魏公子列傳》
3
吳人入荊,召陳懷公,懷公召國人曰:
「欲與荊者左,欲與吳者右。」
吳王(闔廬)이 荊(楚)나라를 침입하고 陳 懷公을 불렀는데, 懷公이 都城 사람들을 불러놓고 말하였다.
“초나라와 동맹하려는 자는 왼쪽에 서고, 오나라와 동맹하려는 자는 오른쪽에 서라.”
▶ 吳人入荊 : 춘추시대 魯 定公 5년(B.C. 505)에 오나라의 闔廬가 楚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초나라 수도 郢에 들어갔던 일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定公 4‧5년, 哀公 元年》 荊은 楚나라의 옛 이름이다.
▶ 陳懷公 : 춘추시대 陳나라 군주로, 이름은 柳이다. 吳나라가 楚나라를 격파하고 懷公을 불렀으나 逢滑이 諫하는 말을 듣고 가지 않았다. 뒤에 吳나라가 다시 부르자 두려워 吳나라에 갔으나 吳王이 전에 오지 않은 일로 노하여 懷公을 억류하여 끝내 그곳에서 죽었다.
逢滑當公而進曰:
「吳未有福,荊未有禍。」
逢滑이 懷公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오나라에 〈興할 만한〉 福이 없고, 초나라에 〈衰할 만한〉 禍가 없습니다.”
▶ 逢(방)滑 : 춘추시대 陳 懷公 때의 大夫이다.
公曰:
「國勝君出,非禍而奚?」
懷公이 말하였다.
“나라가 망하여 군주가 달아났는데, 禍가 아니고 무엇인가?”
對曰:
「小國有是猶復,而況大國乎?
楚雖無德,亦不斬艾其民,吳日弊兵,暴骨如莽,未見德焉?
天其或者正訓楚也!
禍之適吳,何日之有?」
방활이 대답하였다.
“소국에 이런 일이 있어도 오히려 회복하는데, 하물며 큰 나라이겠습니까?
초나라에 德은 없지만 그래도 백성을 마구 살해하지는 않았고, 吳나라는 날마다 병사를 피곤하게 하고 시체가 잡초처럼 버려져 있으니, 덕을 보임이 없습니다.
하늘이 아마 초나라를 바르게 훈계하는 듯합니다.
禍가 오나라로 가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陳侯從之。
陳侯가 그 말을 따랐다.
4
桓公立仲父,致大夫曰:
「善吾者入門而右,不善吾者入門而左。」
齊 桓公이 管仲을 仲父로 세우고 大夫들을 불러 말하였다.
“내가 잘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문으로 들어와 오른쪽에 서고, 내가 잘못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문으로 들어와 왼쪽에 서시오.”
▶ 仲父 : 춘추시대 齊 桓公이 管夷吾를 존경하여 부른 칭호이다. 仲은 관이오의 字이고, 父는 아버지처럼 섬긴다는 뜻이다. 후대에는 管仲을 이르는 칭호로 썼다. 《荀子 仲尼》
有中門而立者,桓公問焉。
문의 중앙에 서 있는 이가 있으매, 桓公이 그 까닭을 물었다.
對曰:
「管子之知,可與謀天下,其強可與取天下。
君恃其信乎?
內政委焉;
外事斷焉。
驅民而歸之,是亦可奪也。」
대답하였다.
“관중의 지혜는 더불어 천하의 큰일을 의논할 만하고, 그의 강함은 더불어 천하를 취할 만합니다.
임금께서는 그의 誠信을 믿으십니까?
국내의 정치를 그에게 맡기시고, 외교의 일을 그가 결단케 하셨습니다.
백성을 몰아 그에게 귀의하게 하셨으니, 이런 권력을 좀 빼앗아야 합니다.”
桓公曰:
「善。」
환공이 말하였다.
“옳은 말이다.”
乃謂管仲:
「政則卒歸於子矣,政之所不及,唯子是匡。」
곧 관중에게 말하였다.
“정사를 모두 그대에게 맡기되, 정사가 미치지 못하면 다만 그대를 바로잡겠소.”
管仲故築三歸之臺,以自傷於民。
관중이 이 때문에 三歸臺를 지어 스스로 백성의 재물에 손해를 끼쳤다.
▶ 三歸 : 이에 대해서는 ① 세 姓氏의 여자에게 장가들었다는 설, ② 地名이라는 설, ③ 臺名이라는 설 등의 여러 해석이 있으나, 여기서는 臺名으로 풀이하였다.
5.
齊宣王出獵於社山,社山父老十三人相與勞王,王曰:
「父老苦矣!」
齊 宣王이 社山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사산의 父老에 13명이 서로 선왕을 위로하니, 선왕이 말하였다.
“노인들이 고생하는구려.”
▶ 社山 : 山東省 臨淄의 서쪽에 있는 산이다. 《太平御覽》 권633에는 ‘杜山’으로 되어 있다.
謂左右賜父老田不租,父老皆拜,閭丘先生獨不拜。
측근의 관리에게 田地에 조세를 거두지 말라고 말하니, 父老가 모두 拜謝하되, 閭丘先生은 절하지 않았다.
▶ 閭丘先生 : 전국시대 齊나라 사람으로, 춘추시대 제나라 閭丘嬰의 후예라고 한다.
▶ 〈獨〉 : 저본에는 ‘獨’자가 없으나, 《群書治要》와 《太平御覽》 권383‧633 등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王曰:
「父老以為少耶?」
宣王은 말하였다.
“노인들이 혜택이 적다고 여기오?”
謂左右復賜父老無徭役,父老皆拜,閭丘先生又不拜。
측근의 관리에게 다시 노인들에게 勞役을 면제하라고 말하니, 父老가 모두 拜謝하되, 閭丘先生은 또 절하지 않았다.
王曰:
「拜者去,不拜者前。」
宣王은 말하였다.
“사례한 사람은 가고 사례하지 않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시오.”
曰:
「寡人今觀父老幸而勞之,故賜父老田不租,父老皆拜,先生獨不拜.
寡人自以為少,故賜父老無徭役,父老皆拜,先生又獨不拜,寡人得無有過乎?」
말하였다.
“寡人이 오늘 와서 노인들이 사랑으로 위로함을 보매, 노인들의 田稅를 면제하는 혜택을 주었더니, 노인들이 모두 사례하되 선생만 사례하지 않았소.
寡人은 下賜가 적다고 여겨 父老에게 요역을 면제하였더니, 父老가 모두 사례하되 선생은 홀로 사례하지 않으니, 과인에게 잘못이 있음이 아니오?”
閭丘先生對曰:
「惟聞大王來遊,所以為勞大王,望得壽於大王,望得富於大王,望得貴於大王。」
여구선생이 대답하였다.
“대왕께서 와서 사냥하심을 알고 대왕을 위로함은, 대왕에게서 長壽함과 부유함과 존귀함을 얻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王曰:
「夫殺生有時,非寡人所得與也,無以壽先生;
倉廩雖實,以備災害,無以富先生;
大官無缺,小官卑賤,無以貴先生。」
선왕이 말하였다.
“대저 죽임과 살림에는 정해진 때가 있어서, 寡人이 줄 수 있음이 아니매, 선생을 장수하게 하지 못하고,
창름이 비록 가득 찼으나 재해에 대비하매 선생을 부유하게 하지 못하고,
높은 관직에는 결원이 없고 낮은 관직은 卑賤하매 선생을 존귀하게 하지 못하오.”
▶ 夫殺生 : 저본에는 ‘天’으로 되어 있으나, 《太平御覽》 권633에 의거하여 ‘夫’로 바로잡았다.
閭丘先生對曰:
여구선생이 대답하였다.
「此非人臣所敢望也。
“그것은 臣이 감히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 人臣 : 저본에는 ‘人’이 있으나, 《群書治要》와 《太平御覽》 권633에 모두 ‘人’자가 없고, 여기에서 ‘臣’은 自稱한 말인데, ‘人臣’이라 하면 신하 된 사람을 두루 이르는 말이 되므로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아래도 같다.
願大王選良富家子,有修行者以為吏,平其法度,如此臣少可以得壽焉;
대왕께서 선량한 부자 집안의 자제로서 행실을 닦은 자를 뽑아 관리로 삼아서 법도를 공평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시면 신이 조금은 장수할 수 있을 터입니다.
▶ 臣少可以得壽焉 : 아래의 “臣可少得以富焉”의 句法과 같으니, 이 구절도 “臣可少得以壽焉”이 되어야 옳을 듯하다.
春秋冬夏,振之以時,無煩擾百姓,如是臣可少得以富焉;
春秋冬夏에 때에 맞게 구휼하시어 백성을 번거롭고 소란하게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시면 신이 조금은 부유해질 수 있을 터입니다.
願大王出令,令少者敬長,長者敬老,如是臣可少得以貴焉;
대왕께서 명령하시어 젊은이는 어른을 공경하고 어른은 노인을 공경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시면 신이 조금은 존귀함을 얻을 수 있을 터입니다.
今大王幸賜臣田不租,然則倉廩將虛也, 賜臣無徭役,然則官府無使焉,此固非人臣之所敢望也。」
그런데도 대왕께서 신들에게 田稅를 면제하면 창름이 비고, 신들에게 노역을 면제하면 官府에 부릴 사람이 없어지매, 이것은 진실로 신들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齊王曰:
「善。願請先生為相。」
제 선왕이 말하였다.
“좋은 말이오. 선생을 宰相으로 삼겠소.”
6
孝武皇帝時,汾陰得寶鼎而獻之於甘泉宮,群臣賀,上壽曰:
「陛下得周鼎。」
孝武皇帝 때 汾陰 사람이 寶鼎을 얻어 甘泉宮에 바치니, 群臣이 경하하여 祝壽의 술잔을 올리며 말하였다.
“폐하께서 周鼎을 얻으셨습니다.”
▶ 汾陰得寶鼎 : 汾陰은 전국시대 魏나라의 邑 이름이다. 西漢 때 縣을 두었다. 지금의 山西省 萬榮縣 지역이다. 寶鼎을 얻은 일은 《史記》 〈武帝本紀〉에 보인다.
▶ 甘泉宮 : 漢 武帝의 行宮이다. 일명 雲陽宮으로, 지금의 陝西省 淳化縣 서북쪽의 甘泉山 위에 있었다.
侍中虞丘壽王獨曰:
「非周鼎。」
侍中 虞丘壽王이 홀로 말하였다.
“周鼎이 아니다.”
▶ 虞丘壽王 : 漢 武帝 때 사람으로, 虞丘는 複姓이고, 壽王은 이름이다.
上聞之,召而問曰:
「朕得周鼎,群臣皆以為周鼎而壽王獨以為非,何也?
壽王有說則生,無說則死。」
임금이 이 말을 듣고 불러서 물었다.
“짐이 周鼎을 얻어 群臣이 모두 周鼎이라 하는데 壽王만 아니라고 하니, 무엇 때문이오?
수왕에게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살겠지만,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죽을 터이오.”
對曰:
대답하였다.
「臣壽王安敢無說?
“臣 수왕에게 어찌 감히 합당한 이유가 없겠습니까?
臣聞夫周德始產于后稷,長於公劉,大於大王,成於文武,顯於周公,德澤上洞,天下漏泉,無所不通,上天報應,鼎為周出,故名周鼎。
臣이 듣기에, 周나라의 德은 后稷에게서 나와 公劉에서 자랐고 太王에서 성대해졌으며 文王‧武王에서 완성되고 周公에서 뚜렷이 나타났으며, 덕택이 위로는 하늘에 통하고 아래로는 황천에 스며들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하늘이 주나라의 德에 보답하여 寶鼎이 주나라를 위해 나왔으매 周鼎이라 이름했다고 합니다.
▶ 公劉 : 商나라 때 周나라 군주로 后稷의 증손이다. 后稷의 遺業을 이어 농사에 힘을 쏟아 周室을 흥성하게 하였다.
▶ 太王 : 文王의 조부인 古公亶父로, 商나라 때 周나라의 군주이다. 농업을 발전시켜 周나라를 점차 강성하게 하였다. 武王이 太王으로 추존하였다.
今漢自高祖繼周,亦昭德顯行,布恩施惠,六合和同,至陛下之身愈盛,天瑞並至,徵祥畢見。
지금 漢나라는 高祖로부터 주나라를 계승하여 德을 밝히고 善行을 드러내며 은혜를 널리 베푸니, 천지 사방이 다 같이 화목하여 폐하의 몸에 이르러 더욱 성대하여, 하늘의 祥瑞가 겸하여 오고 좋은 징조가 모두 나타나고 있습니다.
昔始皇帝親出鼎於彭城而不能得。
예전에 始皇帝는 친히 彭城에서 寶鼎을 발굴하려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습니다.
▶ 昔始皇帝……不能得 : 秦 始皇이 彭城(지금의 蘇州)을 지나다가 泗水에서 周鼎을 찾아내려고 재계하고 기도한 다음, 천 명의 사람에게 물에 들어가 찾도록 하였으나, 찾지 못한 일을 가리킨다. 《史記 秦始皇本紀》
天昭有德,寶鼎自至,此天之所以予漢,乃漢鼎,非周鼎也!」
하늘이 有德자를 밝히매 寶鼎이 저절로 왔고, 이것은 하늘이 한나라에 준 것이매, 곧 한나라 寶鼎이지 周鼎이 아닙니다.”
上曰:
「善!」
上이 말하였다.
“좋은 말이다.”
群臣皆稱:
「萬歲!」
群臣이 모두 외쳤다.
“만세!”
是日賜虞丘壽王黃金十斤。
그날 우구수왕에게 황금 열 근을 하사하였다.
7.
晉獻公之時,東郭民有祖朝者,上書獻公曰:
「草茅臣東郭民祖朝,願請聞國家之計。」
晉 獻公 때 城 동쪽에 사는 백성에 祖朝라는 자가 있어서 獻公에게 上書하여 말하였다.
“미천한 臣은 東郭의 백성 祖朝인데, 국가의 계책을 듣기를 원합니다.”
獻公使使出告之曰:
「肉食者已慮之矣。藿食者尚何與焉?」
헌공이 使者를 보내 일러주었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이미 근심하고 있는데, 나물을 먹는 자조차 어찌 거드느냐?”
▶ 肉食者 :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녹봉을 받아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藿食者 : 일반 백성을 이르는 말로, 가난하여 거친 나물 따위를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祖朝對曰:
조조가 대답하였다.
「大王獨不聞古之將曰桓司馬者?
“대왕만 桓司馬라는 옛 장군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 桓司馬 : 桓은 姓이고 司馬는 관직명인데, 이름과 행적은 미상이다.
朝朝其君,舉而宴,御呼車,驂亦呼車,御肘其驂曰:
『子何越云為乎?
何為藉呼車?』
아침에 임금을 뵈러 갈 때, 수레 준비가 늦어 마부가 수레를 불렀는데 驂乘이 또 수레를 부르자, 마부가 참승을 팔꿈치로 찌르면서 말하였습니다.
‘그대는 어찌 越權을 하오?
어찌 거듭 수레를 부르오?’
▶ 驂 : 驂乘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을 모시고 수레의 오른쪽에 타고 가면서 安全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車右, 陪乘이라고도 한다.
▶ 藉 : 거듭하다.
驂謂其御曰:
『當呼者呼,乃吾事也,子當御正子之轡銜耳。
참승이 마부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연히 불러야 할 사람이 부르나니 곧 나의 일이요, 그대는 그대의 말고삐와 재갈을 바르게 잡고 수레를 몰면 그만이오.
▶ 轡銜 : 저본에는 ‘轡御’로 되어 있으나, 《說苑校證》에 의거하여 ‘銜’으로 바로잡았다.
子今不正轡銜,使馬卒然驚,妄轢道中行人.
그대가 만일 말고삐와 재갈을 바르게 잡지 않았다가 말이 갑자기 놀라기라도 하면 길을 가는 사람을 함부로 칠 터이오.
▶ 轡銜 : 저본에는 ‘轡御’로 되어 있으나, 《說苑校證》에 의거하여 ‘銜’으로 바로잡았다.
必逢大敵,下車免劍,涉血履肝者固吾事也。
敵을 만나면 수레에서 내려 劍을 뽑아 피와 간을 밟음은 본래 나의 일이오.
▶ 免劒 : 칼집에 들어 있는 劍을 벗긴다는 뜻으로, ‘劍을 뽑다’로 해석하였다.
子寧能辟子之轡,下佐我乎?
그대가 어찌 그대의 말고삐를 놓고 수레에서 내려 나를 도울 수 있겠소?
其禍亦及吾身,與有深憂,吾安得無呼車乎?』
그 禍가 내 몸에까지 미쳐 함께 깊은 근심을 가질 테니, 내 어찌 수레를 부르지 않을 수 있겠소?’
今大王曰:
『食肉者已慮之矣,藿食者尚何與焉?』
지금 대왕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고기를 먹는 자가 이미 근심하고 있는데, 나물을 먹는 자조차 어찌 거드느냐?’
設使食肉者一旦失計於廟堂之上,若臣等藿食者,寧得無肝膽塗地於中原之野與?
가령 고기를 먹는 자가 어느 날 조정에서 계획에 실패하면 저처럼 나물을 먹는 자에게 어찌 中原의 들판에서 간과 쓸개로 땅을 바름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其禍亦及臣之身。臣與有其憂深。臣安得無與國家之計乎?」
그 禍가 저의 몸에 미쳐 저도 함께 깊은 근심에 빠질 터인데, 臣이 어떻게 국가의 계책에 간여하지 않겠습니까?”
獻公召而見之,三日與語,無復憂者,乃立以為師也。
헌공이 불러서 접견하고 3일 동안 함께 대화하여 다시 근심할 일이 없으매, 임명하여 스승으로 삼았다.
8.
客謂梁王曰:
「惠子之言事也善譬,王使無譬,則不能言矣。」
客이 梁王에게 말하였다.
“惠子가 일을 말함에 譬喩를 잘하니, 왕께서 비유하지 말라고 하시면 말하지 못할 터입니다.”
▶ 梁王 : 梁(魏) 惠王이다. 이름은 罃이고, 魏 武侯의 아들이다. 秦나라에 패배한 뒤 도읍을 安邑에서 大梁으로 옮긴 뒤에 국호를 梁이라 하고 王을 自稱하였다. 《史記 魏世家》
▶ 惠子 : 전국시대 宋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施이다. 梁 惠王의 재상을 지냈으며, 名家學派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莊子와 친하였는데, 莊子가 그를 일컬어 말하였다.
“惠施는 여러 방면에 뛰어나 저술한 책이 다섯 수레나 된다.[惠施多方 其書五車]”
王曰:
「諾。」
양왕은 말하였다.
“그리하마.”
明日見,謂惠子曰:
「願先生言事則直言耳,無譬也。」
이튿날 혜자를 만나서 말하였다.
“선생이 일을 말할 때 직접 말할 뿐, 비유하지 마시오.”
惠子曰:
「今有人於此而不知彈者,曰:
『彈之狀何若?』
應曰:
『彈之狀如彈。』
諭乎?」
혜자가 말하였다.
“지금 여기에 彈弓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서 ‘탄궁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묻는데, 대답하기를 ‘탄궁의 모양이 탄궁같다.’라고 하면 이해하겠습니까?”
▶ 彈 : 彈弓으로 탄환을 쏘는 활이다.
王曰:
「未諭也。」
양왕이 말하였다.
“이해하지 못하지요.”
「於是更應曰:
『彈之狀如弓而以竹為弦。』
則知乎?」
혜자가 말하였다.
“이때 고쳐 대답하기를 ‘탄궁의 모양은 활과 같은데, 대오리로 시위를 만들었다.’라고 하면 알겠습니까?”
王曰:
「可知矣。」
양왕이 말하였다.
“알 수 있겠지요.”
惠子曰:
「夫說者固以其所知,諭其所不知,而使人知之。
今王曰無譬則不可矣。」
혜자가 다시 말하였다.
“대저 설명하는 사람은 본래 그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알지 못함을 깨우쳐서 남이 알게 합니다.
그런데 왕께서 비유하지 말라고 하시니, 옳지 않습니다.”
王曰:
「善。」
양왕이 말하였다.
“좋은 말이오.”
9.
孟嘗君寄客於齊王,三年而不見用,故客反謂孟嘗君曰:
「君之寄臣也,三年而不見用,不知臣之罪也?君之過也?」
孟嘗君이 門客을 齊王에게 추천하였는데, 3년이 되어도 등용되지 못하매, 빈객이 돌아와서 맹상군에게 말하였다.
“君께서 저를 추천함에 3년이 되어도 등용되지 못했으니, 모르겠지만 저의 죄입니까? 君의 잘못입니까?”
▶ 孟嘗君寄客於齊王 : 孟嘗君은 권9 〈正諫〉 5 참고. 寄는 추천함이다.
孟嘗君曰:
「寡人聞之,縷因針而入,不因針而急,嫁女因媒而成,不因媒而親。
夫子之材必薄矣,尚何怨乎寡人哉?」
맹상군이 말하였다.
“寡人이 들으니, 실은 바늘에 의지하여 옷에 들어가나 바늘 때문에 긴요하게 여기지 않고, 딸을 시집보냄은 중매쟁이를 통하여 이루어지나 중매쟁이 때문에 부부가 친밀하지 않는다고 하오.
그대의 재능이 필시 엷어서인데, 그런데도 어찌 과인을 원망하오?”
客曰:
「不然.
臣聞周氏之嚳,韓氏之盧,天下疾狗也。
見菟而指屬,則無失菟矣;
望見而放狗也,則累世不能得菟矣!
狗非不能,屬之者罪也。」
門객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듣자니, 周氏의 嚳과 韓氏의 盧는 천하에서 아주 빠른 개입니다.
토끼를 보고 가리키며 명령하면 토끼를 놓치지 않지만,
토끼를 멀리서 바라보며 개를 풀어놓으면 여러 代가 되어도 토끼를 잡지 못합니다.
개가 무능함이 아니라, 명령하는 자의 잘못입니다.”
▶ 周氏之嚳 韓氏之盧 : 嚳과 盧는 모두 개 이름이다.
孟嘗君曰:
「不然.
昔華舟杞梁戰而死,其妻悲之,向城而哭,隅為之崩,城為之陁.
君子誠能刑於內,則物應於外矣。
夫土壤且可為忠,況有食穀之君乎?」
맹상군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예전에 華舟와 杞梁이 전쟁하다가 죽으매, 그의 아내가 슬퍼하여 城을 향하여 哭하자, 城의 귀퉁이가 그 때문에 허물어지고 城壁이 무너졌소.
君子가 진실로 내부에서 잘 다스리면 사물이 외부에서 반응하는 법이오.
저 土壤도 忠心에 감동하는데, 하물며 곡식을 먹는 군주이랴.”
▶ 華舟杞梁戰而死 : 본서 권4 〈立節〉 15 참고.
客曰:
문객이 말하였다.
「不然.
“그렇지 않습니다.
臣見鷦鷯巢於葦苕,著之髮毛,建之女工不能為也,可謂完堅矣。
제가 보니 뱁새가 갈대 이삭에 둥지를 틀면서 터럭으로 부착하면, 女工으로 지어도 그렇게 만들 수 없으니, 완전하고 견고하다고 말할 만합니다.
▶ 女工 : 《說苑校證》에 “《太平御覽》 권923에 의하여 ‘工女’로 교정해야 한다.”라 하였으나 고치지 않았으니, ‘여자의 공교로움’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工’은 공교함이다.
大風至,則苕折卵破子死者,何也?
큰바람이 불어와서 갈대 이삭이 부러져 알이 깨짐과 새끼가 죽음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其所託者使然也。
몸을 의탁한 곳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且夫狐者人之所攻也,鼠者人之所燻也。
또 여우는 사람들이 잡아 죽이는 것이고, 쥐는 사람들이 불을 태워 잡는 것입니다.
臣未嘗見稷狐見攻,社鼠見燻也,何則?
저는 稷廟의 여우가 잡혀 죽음과 社廟의 쥐가 불태워짐을 보지 못했으니,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 稷狐 : 后稷을 제사하는 사당에 서식하는 여우이다. 여우를 공격하여 잡고 싶어도 사당이 무너질까 염려되어 공격하지 못한다.
▶ 社鼠 : 土神을 제사 지내는 사당에 숨어 있는 쥐이다. 쥐를 불로 지져 죽이고 싶어도 사당이 燒失될까 두려워 죽이지 못한다.
所託者然也。」
몸을 의탁한 곳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於是孟嘗君復屬之齊王,齊王使為相。
이에 맹상군이 다시 그를 제왕에게 부탁하니, 제왕이 재상으로 삼았다.
▶ 屬之齊王 : 저본에는 ‘王’자가 빠져 있으나, 《說苑校證》을 따라 보충하였다.
10.
陳子說梁王,梁王說而疑之曰:
「子何為去陳侯之國而教小國之孤於此乎?」
陳子가 梁王에게 遊說하자, 양왕이 기뻤으나 의심하여 말하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陳侯의 나라를 떠나 이곳에서 작은 나라 임금을 가르치시오?”
陳子曰:
진자가 말하였다.
「夫善亦有道,而遇亦有時.
“사람의 친선에도 道理가 있고, 만남에도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
昔傅說衣褐帶索,而築於秕傳之城,武丁夕夢,旦得之,時王也;
寧戚飯牛,康衢擊車輻而歌碩鼠, 桓公得之,時霸也;
百里奚自賣五羊之皮,為秦人虜,穆公得之,時強也。
옛적에 傅說은 거친 옷을 입고 허리에 새끼줄을 매고 秕傅의 城을 쌓았는데, 武丁이 밤에 꿈꾸고 아침에 얻어서 당시에 王業을 이루었고,
甯戚은 큰길가에서 남의 소를 먹이다가 수레 바퀴통을 두드리면서 〈碩鼠〉를 노래했는데 齊 桓公에게 등용되어 당시에 霸業을 이루었고,
百里奚는 양가죽 다섯 장에 자신을 팔아 秦나라 사람의 노예가 되었다가 秦 穆公이 얻어서 당시에 强國이 되었습니다.
▶ 傅說(열) : 殷나라 武丁 때의 賢臣이다. 원래는 傅巖에서 담을 쌓던 인부였는데, 무정이 聖人을 얻는 꿈을 꾸고 부암에서 부열을 찾아 재상으로 삼아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고 한다. 《書經 商書 說命》‧《孟子 告子 下》‧《史記 殷本紀》
▶ 帶索 : 저본에는 ‘帶劒’으로 되어 있으나, 《墨子》 〈尙賢 中〉에 말하였다.
“부열이 거친 옷을 입고 허리에 새끼줄을 매고는 부암의 성을 쌓는 데에서 품팔이하였는데, 무정이 구하여 등용해 삼공으로 삼았다.[傅說被褐帶索 庸築乎傅巖 武丁得之 擧以爲三公]”라고 한 것에 근거하여 ‘帶索’으로 바로잡았다.
▶ 秕傅 : 傅說이 城을 쌓는 일로 품팔이했던 곳은 傅巖으로 전해지고 秕傅는 알려지지 않았다. 《書經》 〈商書 說命 上〉에는 말하였다.
“부열이 부암의 들에서 성을 쌓았다.[說築于傅巖之野]”라 하였고, 《史記》 〈殷本紀〉에는 말하였다.
“이에 백공에게 들에서 찾게 하여 傅險(傅巖) 안에서 부열을 찾았다.[於是迺使百工營求之野 得說於傅險中]”라 하였다.
▶ 甯戚飯牛康衢 : 甯戚은 본서 권1 〈君道〉 18 참고. 康衢는 사통팔달의 큰길이다.
▶ 碩鼠 : 저본에는 ‘顧見’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後漢書》 〈馬融傳〉의 注에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碩鼠’로 되어 있어 고쳤다.”라고 함에 의거하여 ‘碩鼠’로 바로잡았다. 碩鼠는 《詩經》 〈魏風〉의 篇名으로, 당시의 貪殘한 관리를 큰 쥐에 비유하여 자신을 해치지 말라고 노래한 詩이다.
▶ 百里奚自賣五羊之皮 : 본서 권2 〈臣術〉 09 참고.
▶ 穆公 : 秦 穆公이다. 본서 권2 〈臣術〉 09 참고.
論若三子之行,未得為孔子駿徒也。
세 사람의 행실 따위를 논한다면 孔子의 걸출한 門徒는 될 수 없습니다.
今孔子經營天下,南有陳蔡之阨,而北干景公,二坐而五立,未嘗離也。
그런데 공자는 천하를 경영하시어 남쪽에서는 陳·蔡의 곤액이 있었고, 북쪽에서는 齊 景公에게 뵙기를 요청하고 세 번 앉아서 말하고 다섯 번 서서 말씀하시면서 그곳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 陳蔡之阨 : 孔子가 천하를 周遊하면서 겪은 고초를 가리킨다. 陳나라에서는 양식이 떨어져 제자들이 일어나지 못하였고, 蔡나라에서는 공격을 받아 포위되었던 일을 이른다. 《論語 衛靈公》‧《孟子 盡心 下》‧《荀子 宥坐》‧《史記 孔子世家》
▶ 北干景公 : 干은 뵙기를 요청함이고, 景公은 齊 景公이다.
孔子之時不行,而景公之時怠也。
공자의 당시에 도가 행하여지지 않았고, 景公은 당시에 권태를 느꼈습니다.
以孔子之聖,不能以時行說之怠,亦獨能如之何乎?」
공자 같은 聖人도 때에 맞게 권태를 설득하지 못하였는데, 저 같은 사람이 홀로 어찌하겠습니까?”
11.
林既衣韋衣而朝齊景公,齊景公曰:
「此君子之服也?小人之服也?」
林旣가 가죽옷을 입고 齊 景公을 朝見하자, 제 경공이 물었다.
“이 옷은 君子의 복장이오? 小人의 복장이오?”
▶ 林旣 : 춘추시대 齊나라 사람으로, 행적은 미상이다.
林既逡巡而作色曰:
임기가 우물쭈물하다가 안색을 바꾸고 말하였다.
「夫服事何足以揣士行乎?
“복장을 가지고 어떻게 선비의 품행을 斷定할 수 있겠습니까?
▶ 揣士 : 저본에는 ‘端士’이나, 《群書拾補》에 “《太平御覽》 권437에 이 부분의 내용을 《新序》를 인용하면서 ‘揣’자로 썼고, 권464에도 ‘揣’자로 썼다.”라고 함에 의거하여 ‘揣’으로 바로잡았다. 揣 : 헤아릴 췌
昔者荊為長劍危冠,令尹子西出焉;
齊短衣而遂偞之冠,管仲隰朋出焉;
越文身剪髮,范蠡大夫種出焉;
西戎左衽而椎結,由余亦出焉。
옛날 荊(楚)나라는 긴 劍을 차고 높은 冠을 썼으나 令尹 子西가 나왔고,
齊나라는 짧은 옷에 遂偞冠을 썼지만 管仲과 隰朋이 나왔고,
越나라는 文身하고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으나 范蠡와 大夫 種이 나왔고,
西戎은 앞섶을 왼쪽으로 여미고 몽치 같은 상투를 하였으나 由余가 또 이곳에서 나왔습니다.
▶ 令尹子西 : 令尹은 춘추전국시대 楚나라의 執政大臣이다. 子西는 춘추 말기 초나라 영윤 公子 申으로, 子西는 字이다. 楚 平王의 庶子, 楚 昭王의 兄으로 영윤이 되어 집정하였으나 뒤에 太子 建의 아들 白公 勝에게 피살되었다. 《春秋左氏傳 昭公 26‧30년, 定公 5년, 哀公 1‧6‧13‧15‧16년》‧《史記 楚世家》
▶ 遂偞(엽)之冠 : 일설에는 가볍고 화려하면서 좋은 冠이라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群書拾補》에는 말하였다.
“《太平御覽》에 ‘遂之溝冠’으로 되어 있다.” 하였고, 《說苑校證》에는 말하였다.
“《太平御覽》 권437에 ‘遂溝之冠’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 隰朋 : 본서 권1 〈君道〉 19 참고.
▶ 范蠡大夫種 : 范蠡는 춘추 말기 越나라 大夫로, 원래는 楚나라 사람이다. 越王 句踐을 도와 吳나라를 멸망시킨 후 齊나라로 가서 鴟夷子皮라 일컬었고, 陶(지금의 山東省 定陶縣 서북쪽)에 들어가 陶朱公이라 改名하고 商業으로 거부가 되었다. 《國語 越語 上‧下》‧《史記 貨殖列傳》 大夫種은 본서 권9 〈正諫〉 참고.
▶ 椎結 : 머리를 위로 올려 몽치 모양으로 묶는 상투의 한 가지이다. 椎髻라고도 한다.
▶ 由余 : 본서 권8 〈尊賢〉 참고.
即如君言,衣狗裘者當犬吠,衣羊裘者當羊鳴,且君衣狐裘而朝,意者得無為變乎?」
임금의 말씀대로라면 개의 갖옷을 입은 사람은 응당 개처럼 짖어야 하고, 양 갖옷을 입은 사람은 응당 양처럼 울어야 합니다. 또 임금께서 여우 갖옷을 입고 조회를 보시니, 아마도 그렇게 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景公曰:
「子真為勇悍矣,今未嘗見子之奇辯也。
一鄰之鬥也,千乘之勝也。」
경공이 말하였다.
“그대는 참으로 용감하고 사나워서 아직껏 그대의 기이한 변론은 듣지 못하였다.
이웃 사람과 싸워도 되고 千乘의 제후도 이기겠다.”
林既曰:
임기가 말하였다.
「不知君之所謂者何也?
“임금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夫登高臨危而目不眴,而足不陵者,此工匠之勇悍也;
높은 데 올라 위험에 임하여도 눈이 어지럽지 않고 발이 떨리지 않음은 工匠의 용감함과 사나움이고,
▶ 陵 : 벌벌 떨다
入深淵,刺蛟龍,抱黿鼉而出者,此漁夫之勇悍也;
깊은 못에 들어가 蛟龍을 찔러 죽이고 자라와 악어를 잡아 나옴은 漁夫의 용감함과 사나움이고,
入深山,刺虎豹,抱熊羆而出者,此獵夫之勇悍也;
깊은 산중에 들어가 범과 표범을 찔러 죽이고 곰과 말곰을 잡아 나옴은 사냥꾼의 용감함과 사나움이고,
不難斷頭,裂腹暴骨,流血中流者,此武士之勇悍也。
머리가 잘리고 배가 갈라져서 들판에 해골이 나뒹굴며, 흘린 피에 떠다님도 어려워하지 않음은 武士의 용감함과 사나움입니다.
今臣居廣廷,作色端辯,以犯主君之怒,
前雖有乘軒之賞,未為之動也;
後雖有斧質之威,未為之恐也;
此既之所以為勇悍也。」
한편, 臣이 넓은 조정에 있으면서 안색을 엄숙히 하고 말을 바르게 하여 主君의 노여움을 범하여,
먼저 軒車의 상이 있더라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뒤에 도끼와 모탕의 위협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음은
앞서 말한 용감함과 사나움의 이유입니다.”
▶ 乘軒 : 大夫가 타는 수레를 탄다는 뜻으로, 곧 높은 벼슬에 오름을 이른다.
12.
魏文侯與大夫飲酒,使公乘不仁為觴政曰:
「飲不釂者浮以大白。」
魏 文侯가 大夫들과 함께 술을 마실 적에 公乘不仁을 시켜 술 마시는 규정을 만들고 말하였다.
“술잔의 술을 다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큰 술잔으로 罰酒를 주겠다.”
▶ 魏文侯 : 본서 권1 〈君道〉 38 참고.
▶ 觴政 : 술을 마실 때 지켜야 할 규정인 酒令을 말한다. 또는 酒令을 집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 釂(조) : (잔에 있는 술을)다 마시다.
▶ 浮 : 벌(주)을 주다.
▶ 大白 : 큰 술잔.
文侯飲而不盡釂,公乘不仁舉曰浮君。
文侯가 술을 마시되 술잔의 비우지 않자, 공승불인이 큰 술잔을 들어 문후에게 벌주를 주었다.
▶ 公乘不仁 : 전국시대 魏나라 사람으로, 행적은 미상이다.
君視而不應,侍者曰:
「不仁退,君已醉矣。」
문후가 보기만 하고 응하지 않으니, 시종이 말하였다.
“不仁은 물러나시오. 군주께서 이미 취하셨소.”
公乘不仁曰:
공승불인이 말하였다.
「《周書》曰:
『前車覆,後車戒。』
蓋言其危.
“《書經》 〈周書〉에 말하기를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지면 뒤에 가는 수레가 경계로 삼는다.’ 하였으니, 그 조심함을 말한 것입니다.
為人臣者不易,為君亦不易。
신하 노릇이 쉽지 않고, 임금 노릇도 쉽지 않습니다.
今君已設令,令不行,可乎?」
그런데 임금께서 酒令을 만들고도 주령이 시행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君曰:
「善。」
文侯가 말하였다.
“좋은 말이오.”
舉白而飲,飲畢曰:
「以公勝不仁為上客。」
큰 술잔을 들어 마시고 나서 말하였다.
“公乘不仁을 上客으로 삼겠다.”
▶ 浮以大白 : 罰酒를 큰 술잔에 부어 마시게 하는 일이다. 浮는 벌주이고, 大白은 큰 술잔이다.
▶ 周書 : 《書經》에서 周나라 역사를 기록한 부분인데, 아래의 두 句는 지금의 〈周書〉에는 없다.
13.
襄成君始封之日,衣翠衣,帶玉劍,履縞舄,立於流水之上,大夫擁鍾錘,縣令執桴號令,呼:
「誰能渡王者於是也?」
襄成君이 처음 受封하는 날 비취색 옷을 입고 玉劍을 차고 흰 비단신을 신고서 물가에 서 있었다.
大夫들은 鍾의 추를 끼고 縣令은 북채를 잡고 호령하였다.
“누가 여기에서 왕을 건너 드리겠느냐?”
▶ 襄成君 : 전국시대 사람인데, 성명과 행적 등은 미상이다.
▶ 流水 : 저본에는 ‘遊水’이나, 《群書拾補》에 말하였다.
“《北堂書鈔》와 《太平御覽》 권692에 의거하여 ‘流’로 고쳤다.” 하였고, 《說苑校證》에 “《水經注》 권21에 ‘徙倚於流水之上’으로 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따라 ‘流’로 바로잡았다.
▶ 鍾錘 : 저본에는 ‘鍾鍾’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의거하여 ‘錘’로 바로잡았다.
▶ 執桴號令 : 저본에는 ‘執將號令’으로 되어 있으나, 《說苑校證》에 “明鈔本을 따라 고쳤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桴’로 바로잡았다.
楚大夫莊辛,過而說之,遂造託而拜謁,起立曰:
「臣願把君之手,其可乎?」
楚나라 大夫 莊辛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양성군의 미모를 보고 기뻐하여 핑계하는 말을 만들어 배알하고 일어나서 말하였다.
“저는 君主의 손을 잡고 싶은데 되겠습니까?”
▶ 莊辛 : 전국시대 楚나라 大夫이다.
襄成君忿然作色而不言。
양성군이 분하여 안색을 바꾸고 말하지 않았다.
▶ 忿然 : 저본에는 ‘然’이 없으나, 《群書拾補》에 “《北堂書鈔》와 《太平御覽》에 ‘然’자가 있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莊辛遷延沓手而稱曰:
장신이 망설이다가 拱手하고 말하였다.
▶ 遷延 : 時日을 미루어 감. 망설임. 遲滯함.
▶ 沓手 : =拱手 《说文解字注》里进一步解释:
“拱,沓手也。九拜皆必拱手而至地。立时敬则拱手",“沓"是重迭的意思,沓手就是指两手相交、相迭。
「君獨不聞夫鄂君子皙之汎舟於新波之中也?
“군주만 鄂君子晳이 봄의 새 물결에서 배를 탄 일을 듣지 못했습니까?
▶ 鄂君子晳 : 춘추시대 楚나라 사람으로, 곧 公子 黑肱이다. 子晳은 字이고, 楚 恭王의 아들이다. 令尹을 지냈으며, 鄂에 봉해졌기 때문에 鄂君이라 한다. 《春秋左氏傳》 昭公 元年에 미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乘青翰之舟,極䓣芘,張翠蓋而撿犀尾,班麗褂衽,會鍾鼓之音畢, 榜枻越人擁楫而歌,歌辭曰:
『濫兮抃草濫予昌枑澤予昌州州𩜱州焉乎秦胥胥縵予乎昭澶秦踰滲惿隨河湖。』
靑翰의 배를 타고 風雨를 가리는 장막을 세우고 푸른색 깃털로 장식한 일산을 펼치며 무소 꼬리를 들고 무늬가 아름다운 옷을 입었는데, 鍾鼓의 연주에 맞춰 배를 모는 越人이 노를 잡고 노래를 부르니, 가사는 이러합니다.
‘濫兮抃草濫予昌𣐙澤予昌州州𩜱州焉乎秦胥胥縵予乎昭澶秦踰滲惿隨河湖’
▶ 靑翰 : 배 이름으로, 새의 모양을 조각하여 꾸미고 푸른 칠을 했다 한다. 《文選 三月三日曲水詩序》
▶ 極䓣芘(만비) : 孫詒讓이 “‘極’은 아마 ‘揷’이 되어야 하니, 《干祿字書》의 ‘揷’자와 모양이 비슷하여 잘못 썼고, ‘䓣’은 ‘縵’으로 읽어야 하는데 장막이며, ‘芘’는 ‘蔽’와 음이 가깝고 뜻도 같으니, 가린다는 뜻이다.”라고 한 것을 따라 해석하였다.
▶ 撿犀尾 : 저본에는 ‘檢犀尾’으로 되어 있으나, 《說苑校證》을 따라 ‘撿’으로 바로잡았다. 《群書拾補》에는 ‘㩉’으로 고쳤으나 따르지 않았다.
▶ 褂衽 : 저본에는 ‘桂社’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褂衽’으로 고쳤고, 《說苑校證》에 明鈔本도 같다고 한 것을 따라 ‘褂衽’으로 바로잡았다.
▶ 榜枻(예)越人 : 배를 부리는 越나라 사람이다. 榜‧枻는 모두 배를 젓는 노인데, 여기서는 ‘배를 부리다’로 번역하였다.
▶ 濫兮……河湖 : 이 구절의 가사는 당시의 越歌로 句讀를 떼는 것이 불가능하여 그대로 두었다. 번역은 아래에 나온다.
▶ 𣐙 : 이 글자는 字典에 없어서 무슨 글자인지 미상이다.
鄂君子皙曰:
『吾不知越歌,子試為我楚說之。』
악군 자석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越나라 가요를 모르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楚나라 말로 설명해주시오.’
於是乃召越譯,乃楚說之曰:
이에 곧 월나라 사람을 불러 통역하니, 초나라 말로 설명하였습니다.
『今夕何夕搴中洲流,今日何日兮,得與王子同舟。
‘오늘 밤은 무슨 밤인가? 하수 가운데 배를 젓는다네. 오늘은 무슨 날인가? 王子와 함께 배를 탔다네.
蒙羞被好兮,不訾詬恥,心幾頑而不絕兮,知得王子。
맛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받음이여, 남이 비웃는데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네. 내 마음 미련하여 단절하지 못하나, 王子를 알게 되었네.
山有木兮木有枝,心說君兮君不知。』
산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에는 가지가 있네. 나는 마음으로 그대를 좋아하건만, 그대는 내 마음 알지 못하네.’
於是鄂君子皙乃揄脩袂,行而擁之,舉繡被而覆之。
이때 악군 자석이 긴소매를 휘날리며 달려가 그를 포옹하고 수놓은 비단 이불을 들어 그를 덮어주었습니다.
▶ 揄脩袂 : 저본에는 ‘㯓脩袂’으로 되어 있으나, 《太平御覽》 권572와 《群書類聚》에 의거하여 ‘揄’로 바로잡았다.
鄂君子皙,親楚王母弟也。
악군 자석은 楚王의 同母弟입니다.
官為令尹,爵為執珪,一榜枻越人猶得交歡盡意焉。
벼슬은 令尹이고 작위는 執珪이건만 배를 부리는 越人조차 즐겁게 사귐에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 執珪 : 楚나라의 爵位 이름이다. 珪로 작위의 등급을 구분하는데, 규를 잡고 조정에 나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今君何以踰於鄂君子皙,臣何以獨不若榜枻之人.
그런데 군주는 악군자석보다 무엇이 나으며, 臣은 유독 배를 부리는 월인보다 무엇이 못합니까?
▶ 今君 : 저본에는 ‘令尹’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의거하여 ‘今君’으로 바로잡았다.
願把君之手,其不可何也?」
군주의 손을 잡고 싶은데 안 된다고 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襄成君乃奉手而進之,曰:
양성군이 이에 손을 받들어 내밀면서 말하였다.
「吾少之時,亦嘗以色稱於長者矣。未嘗過僇如此之卒也。
“내가 젊었을 때 미모로 어른들에게 칭찬을 들은 적이 있으나, 이렇게 倉卒간에 수모를 당한 적은 없었소.
自今以後,願以壯少之禮謹受命。」
지금 이후로는 젊은이의 예절로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14.
雍門子周以琴見乎孟嘗君。孟嘗君曰:
「先生鼓琴亦能令文悲乎?」
雍門子周가 琴을 가지고 孟嘗君을 뵙자, 맹상군이 말하였다.
“선생이 琴을 연주하여 나를 슬프게 할 수 있겠소?”
▶ 雍門子周 : 전국시대 齊나라 사람으로, 雍門은 齊나라 도성의 西門 이름인데, 그 서문 이름으로 姓을 삼았다. 周는 이름이다. 琴을 잘 타고 말을 잘했으며 哭도 잘했다고 한다. 《淮南子 覽冥訓‧繆稱訓》‧《新論 琴道》
▶ 文 : 孟嘗君의 이름으로, 姓은 田이다. 본서 권9 〈正諫〉 05 참고.
雍門子周曰:
옹문자주가 대답하였다.
「臣何獨能令足下悲哉?
“제가 무슨 수로 당신을 슬프게 할 수 있겠습니까?
臣之所能令悲者,有先貴而後賤,先富而後貧者也。
臣이 슬프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전에는 顯貴하다가 뒤에 卑賤하거나, 전에는 부유하다가 뒤에 가난한 자입니다.
不若身材高妙,適遭暴亂,無道之主,妄加不道之理焉;
그렇지 않으면 一身의 재능이 높고 출중하되 마침 포악하고 무도한 군주를 만나 함부로 무도한 처분을 받거나,
▶ 無道之主 : 저본에는 ‘無道之士’이나, 《群書拾補》에 의거하여 ‘主’로 바로잡았다.
不若處勢隱絕,不及四鄰,詘折擯厭,襲於窮巷,無所告愬;
그렇지 않으면 궁벽하고 고립된 환경에 처하여 사방의 이웃 사람들과 왕래하지 않아 좌절하고 배척과 억압을 당하여 곤궁한 골목에 은거하면서 하소연할 곳이 없거나,
▶ 擯厭 : 저본에는 ‘加厭’이나, 《說苑校證》에 “《藝文類聚》 권44‧《太平御覽》 권579‧《事類賦》 권11 등을 인용하면서 모두 ‘擯’으로 썼다.”라고 함을 따라 ‘擯’으로 바로잡았다.
▶ 襲: 덮다, 덮어 숨기다
不若交歡相愛無怨而生離,遠赴絕國,無復相見之時;
그렇지 않으면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여 원한이 없이 생이별하고 먼 나라에 가서 다시 서로 만날 기회가 없거나,
▶ 生離 : 저본에는 ‘任離’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生’으로 고쳤고, 《說苑校證》에 “明鈔本과 《新論》도 같다.”라고 함을 따라 ‘生’으로 바로잡았다.
不若少失二親,兄弟別離,家室不足,憂蹙盈胸。
아니면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형제와 이별하여 가족이 없어서 근심과 슬픔이 가슴속에 가득 찬 경우입니다.
▶ 憂慼 : 저본에는 ‘憂蹙’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慼’으로 고쳤고, 《說苑校證》에 “宋本‧范本‧明鈔本에 모두 ‘慼’으로 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따라 ‘慼’으로 바로잡았다.
當是之時也,固不可以聞飛鳥疾風之聲,窮窮焉固無樂已。
이런 때에는 본래 날아가는 새와 빠른 바람 소리도 들을 수가 없으니, 지극히 곤궁하여 진실로 즐거움이란 없습니다.
凡若是者,臣一為之徽膠援琴而長太息,則流涕沾衿矣。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은, 臣이 한번 이들을 위하여 弦을 조율하고 琴을 연주하면서 길게 탄식하면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십니다.
▶ 徽膠 : 琴의 弦과 고정시킨 기러기발이다.
今若足下千乘之君也,居則廣廈邃房,下羅帷,來清風,倡優侏儒處前選進而諂諛;
그런데 당신 같은 경우는 千乘의 君主이라, 거처는 넓은 집과 깊숙한 방이고, 비단 휘장을 드리워 청풍이 불어오고, 배우와 난쟁이가 앞에서 번갈아 아첨합니다.
燕則鬥象棋而舞鄭女,激楚之切風,練色以淫目,流聲以虞耳;
한가할 때는 장기나 바둑을 두면서 鄭女를 춤추게 하고, 간절한 楚나라 민요를 격하게 연주하고, 美色으로 눈을 방탕하게 하고, 흐르는 노랫소리로 귀를 즐겁게 합니다.
▶ 燕 : ‘宴’과 통용으로, 한가롭게 지내며 오락함을 이른다.
▶ 切風 : 저본에는 ‘功風’이나, 《群書拾補》에 의거하여 ‘切’로 바로잡았다.
▶ 練色 : 저본에는 ‘綵色’이나, 《群書拾補》에 ‘練’으로 고쳤고, 《說苑校證》에 “明鈔本에 ‘練’으로 썼고 《新論》도 같다.”라고 한 것을 따라 ‘練’으로 바로잡았다. ‘練’은 ‘揀’과 통용으로, 가려 뽑는다는 뜻이다.
水遊則連方舟,載羽旗,鼓吹乎不測之淵;
물에서 놀 적에는 배를 나란히 연결하고, 깃털로 꾸민 旗를 꽂고, 깊이를 잴 수 없는 못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野遊則馳騁弋獵乎平原廣囿,格猛獸;
들에서 놀 적에는 평탄한 들과 넓은 園囿에서 말을 달리며 사냥하여 맹수를 쳐서 죽이고,
入則撞鍾擊鼓乎深宮之中。
집에 들어오면 깊은 집에서 종을 치고 북을 울립니다.
方此之時,視天地曾不若一指,忘死與生,雖有善琴者,固未能令足下悲也。」
이런 때는 天地를 손가락 하나만도 못하게 여겨서 死生을 잊는 법이니, 琴을 아무리 잘 연주하는 사람이라도 도저히 족하를 슬프게 하지 못할 터입니다.”
孟嘗君曰:
「否!否!
文固以為不然。」
맹상군이 말하였다.
“아니오, 아니오.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소.”
雍門子周曰:
옹문자주가 말하였다.
「然臣之所為足下悲者一事也。
“그러나 臣이 족하를 위해 슬퍼함은 마찬가지 일입니다.
▶一事 : 저본에는 ‘一’자가 없으나, 《群書拾補》에 ‘一’자를 보충하였고, 《說苑校證》에 “《藝文類聚》와 《太平御覽》에 모두 ‘一也’로 썼고 ‘事’가 없다.”라고 함을 따라 보충하였다.
夫聲敵帝而困秦者君也;連五國之約,南面而伐楚者又君也。
명성이 帝王과 필적하여 秦나라를 곤란하게 한 사람은 君主(孟嘗君)요,
다섯 나라와 연합하여 남쪽을 향해 楚나라를 토벌한 사람도 군주입니다.
▶ 君也 : 저본에는 ‘君之’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也’로 고친 것을 따라 ‘也’로 바로잡았다.
天下未嘗無事,不從則橫,從成則楚王,橫成則秦帝。
천하에 無事함이 없어서 合縱하지 않으면 連橫하니, 합종이 이루어지면 초나라가 王을 일컫고, 연횡이 이루어지면 진나라가 帝를 일컬을 터입니다.
楚王秦帝,必報讎於薛矣。
초나라가 王을 일컫거나 진나라가 帝를 일컫게 되면 틀림없이 薛에 복수할 터입니다.
▶ 薛 : 孟嘗君의 封邑으로, 현재의 山東省 滕州市 남쪽에 있었다.
夫以秦、楚之強而報讎於弱薛,譽之猶摩蕭斧而伐朝菌也,必不留行矣。
진·초의 강성함으로써 약소한 薛에 복수함은 이를 비유하면 도끼를 갈아서 아침에 난 버섯을 벰과 같아서 필시 가로막지 못할 터입니다.
▶ 譽: 通“与” 同类 [kind]
交众誉多。——《管子·明法》
莫不亲誉。——《荀子·议兵》
推类接誉。——《荀子·臣道》
▶ 摩蕭斧 : 摩는 ‘磨’와 통용하며 도끼를 간다는 뜻이다. 蕭斧는 古代兵器斧钺이다.
▶ 留行 : 행위를 저지하다. ※千里不留行: 천 리 먼 길을 가도 가로막는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천하에 적이 없음을 이르는 말
天下有識之士無不為足下寒心酸鼻者。千秋萬歲後,廟堂必不血食矣。
천하의 식견이 있는 인사로서 당신을 위해 마음이 처량하고 코가 시큰거리지 않을 사람이 없고,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필시 사당에서 제사를 받지 못할 터입니다.
高臺既以壞,曲池既以塹,墳墓既以平而青廷矣。嬰兒豎子樵採薪蕘者,蹢躅其足而歌其上,眾人見之,無不愀焉,為足下悲之曰:
『夫以孟嘗君尊貴乃可使若此乎?』」
높은 누대가 무너지고 굽은 연못이 메워지며 분묘가 평지가 되고 푸른 풀만 자라서, 어린아이와 종과 나무하고 꼴을 베는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 노래를 부를 터이매, 사람들이 보고 서글퍼하지 않음이 없어서 당신을 위해 슬퍼하면서 말할 터입니다.
‘맹상군의 존귀함을 이렇게 되도록 하였는가?’”
▶ 以塹 : 저본에는 ‘以漸’이나, 《群書拾補》에 “《太平御覽》 권579에 의거하여 ‘塹’으로 고쳤다.”라고 한 것을 따라 ‘塹’으로 바로잡았다.
▶ 以平 : 저본에는 ‘以下’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平’으로 고쳤고, 《說苑校證》에 “《太平御覽》에서 인용한 두 곳에 모두 ‘平’자로 썼고, 《事類賦》도 같다.”라고 함을 따라 ‘平’으로 바로잡았다.
於是孟嘗君泫然泣涕,承睫而未殞.
이에 맹상군이 눈물을 흘렸으나 눈썹에 맺히고 떨어지지는 않았다.
雍門子周引琴而鼓之,徐動宮徵,微揮羽角,切終而成曲,孟嘗君涕浪汗增欷 下而就之曰:
「先生之鼓琴令文若破國亡邑之人也。」
옹문자주가 琴을 끌어당겨 연주하면서 宮聲과 徵聲으로 느리게 연주하다가 羽聲과 角聲으로 가볍게 휘몰고 간절하게 마쳐서 一曲을 이루자, 맹상군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더욱 탄식하면서 옹문자주의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
“선생의 琴 연주가 나를 국가를 파멸하고 封邑을 망치는 사람으로 만드는구려.”
▶ 下而 : 저본에는 ‘下’자가 없으나, 《說苑校證》에 “《藝文類聚》‧《北堂書鈔》‧《太平御覽》‧《事類賦》에 모두 ‘下’자가 있다.”라고 한 것을 따라 보충하였다.
15.
蘧伯玉使至楚,逢公子皙濮水之上,子皙接草而待曰:
「敢問上客將何之?」
蘧伯玉이 楚나라에 使臣으로 갔다가 濮水에서 公子 晳을 만나자, 子晳이 풀을 뽑으며 기다리다가 말하였다.
“감히 묻노니, 貴客은 어디로 가십니까?”
▶ 公子晳濮水 : 본편 13의 鄂君 子晳은 黑肱이나, 이곳의 子晳은 다른 사람인 듯하다. 黑肱 子晳은 楚 平王이 즉위하기 전인 B.C. 529년에 죽었는데, 本章에 보이는 ‘墮平王之墓’는 B.C. 506년의 일이니, 黑肱 子晳이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國語》 〈楚語 上〉에 나오는 大夫 僕夫子晳이 이 사람인 듯하다.
濮水는 옛 黃河와 濟水의 지류가 합류하는 강으로, 河南省 封丘와 原陽을 지나 山東省 경내에서 합류한다.
▶ 接草 : 孫詒讓은 “接草는 뜻이 통하지 않는다. 응당 ‘捽’자가 되어야 하니, 자형이 비슷하여 잘못된 것이다.”라 하여 ‘뽑다’의 뜻으로 보았기에 이를 따랐다.
蘧伯玉為之軾車。
거백옥이 수레 앞의 가로 막대를 잡고 몸을 숙이며 敬意를 표하였다.
公子皙曰:
「吾聞上士可以託色,中士可以託辭,下士可以託財,三者固可得而託身耶?」
공자 석이 말하였다.
“내 듣자니, 上士는 안색에 몸을 의탁할 수 있고, 中士는 言辭에 몸을 의탁할 수 있으며, 下士는 재물에 몸을 의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 가지를 얻을 수 있다면 어느 것에 의탁해야 하겠습니까?”
蘧伯玉曰:
「謹受命。」
거백옥이 말하였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蘧伯玉見楚王,使事畢,坐談話,從容言至於士。
거백옥이 楚王을 뵙고 사신의 일을 마치고 나서, 앉아서 담화함에 자연스레 화제가 士에 이르렀다.
楚王曰:
「何國最多士?」
초왕이 말하였다.
“어느 나라에 士는 가장 많소?”
蘧伯玉曰:
「楚最多士。」
거백옥이 대답하였다.
“초나라에 士가 가장 많습니다.”
楚王大悅。
초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蘧伯玉曰:
「楚最多士而楚不能用。」
거백옥이 말하였다.
“초나라에 士가 가장 많으나 초나라는 잘 쓰지 못합니다.”
王造然曰:
「是何言也?」
초왕이 안색을 바꾸면서 말하였다.
“무슨 말이오?”
▶ 造然 : 불안하여 안색이 변하는 모양이다.
蘧伯玉曰:
거백옥이 말하였다.
「伍子胥生於楚,逃之吳。吳受而相之。發兵攻楚,墮平王之墓。伍子胥生於楚,吳善用之。
“伍子胥는 초나라에서 태어났으나 吳나라로 달아났는데 오나라가 받아들여 재상으로 삼아 서, 군대를 출동시켜 초나라를 공격하고 平王의 무덤을 파헤쳤으매, 오자서는 초나라에서 태어났으나 오나라가 잘 썼습니다.
釁蚡黃生於楚,走之晉,治七十二縣,道不拾遺,民不妄得,城郭不閉,國無盜賊,蚡黃生於楚而晉善用之。
釁蚠黃은 초나라에서 태어나고 晉나라로 달아나서 72縣을 다스리자, 길에 흘린 물건을 줍지 않고 백성이 함부로 재물을 얻지 않으며, 城郭의 문을 닫지 않아도 나라에 도둑이 없었으니, 蚠黃은 초나라에서 태어났으나 진나라가 잘 썼습니다.
▶ 釁蚠黃 : 盧文弨는 말하였다.
“釁蚠黃은 곧 苗賁皇이다. 釁은 음을 門으로 읽으니, 苗와 음이 비슷하다.” 하였다.
今者臣之來,逢公子皙濮水之上,辭言
『上士可以託色,中士可以託辭,下士可以託財,三者固可得而託身耶?』
又不知公子皙將何治也。」
이번에 臣이 초나라에 올 적에 공자 석을 복수에서 만났는데 말하기를,
‘上士는 안색에 몸을 의탁할 수 있고, 中士는 말에 몸을 의탁할 수 있으며, 下士는 재물에 몸을 의탁할 수 있으니, 세 가지를 얻는다면 어느 것에 몸을 의탁해야 하느냐?’
라고 하였습니다.
공자 석을 장차 어떻게 처분하실지 모르겠습니다.”
於是楚王發使一駟,副使二乘,追公子皙濮水之上,子皙還重於楚,蘧伯玉之力也。
이에 초왕이 使者의 駟車 한 채와 副使의 수레 두 채를 보내어 복수에 있는 공자 석을 쫓아가게 하였으매, 자석이 돌아와서 초나라에 중용됨은 거백옥의 덕이다.
故《詩》曰:
「誰能烹魚,溉之釜鬵,
孰將西歸,懷之好音。」
此之謂也。
그래서 《詩經》에 말하기를,
“누가 물고기를 삶으려는가? 솥을 깨끗이 씻어주리라.
누가 서쪽으로 돌아가려는가? 좋은 소식으로 위로하리라.”
라고 하였으니, 이를 이름이다.
▶ 詩曰……懷之好音 : 《詩經》 〈檜風 匪風〉에 보인다.
物之相得,固微甚矣。
사물이 서로 융합함은 본디 미묘함이 심하다.
16.
叔向之弟羊舌虎善欒逞,達有罪於晉,晉誅羊舌虎,叔向為之奴。
叔向의 아우 羊舌虎가 欒逞과 친하게 지냈는데, 난영이 晉나라에서 죄를 지으니, 진나라는 양설호를 죽이고 숙향을 노예로 삼았다.
▶ 叔向 : 본서 권5 〈貴德〉 15 참고.
▶ 羊舌虎 : 춘추시대 晉나라 大夫로, 肸(叔向)의 이복 아우이다. 힐의 어머니가 얼굴이 아름답고 용력이 있어서 장차 집안의 禍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였는데, 뒤에 欒盈의 총애를 입어 난영이 멸망할 때 范宣子에게 피살되고 멸족되었다. 《春秋左氏傳 襄公 21년》
▶ 欒逞 : 저본에는 ‘樂達’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欒逞’으로 고치고 “逞은 盈과 같다. 아래도 같다.”라고 한 것을 따라 ‘欒逞’으로 바로잡았다. 《說苑校證》에 ‘逞’과 ‘盈’을 통용하는 것은 《春秋左氏傳》 昭公 23년의 ‘沈子逞’을 《春秋穀梁傳》에는 ‘盈’으로, 《春秋公羊傳》에는 ‘楹’으로 쓴 것을 그 증거로 제시하였다.
欒逞은 곧 欒盈으로, 춘추시대 晉나라 下卿이다. 欒黶의 아들로, 시호는 懷이다. 어머니 欒祁는 范宣子 士匄의 딸인데, 난염이 죽은 뒤 淫行이 있었다. 난영이 어머니의 음행을 걱정하자 난기가 두려워하여 범선자에게 말하였다.
“아들 영이 범씨 일가를 원망한다.”고 무고하여 외조부 범선자에게 멸망당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 21‧23년》
既而祁奚曰:
「吾聞小人得位,不爭不義,君子所憂,不救不祥。」
얼마 후에 祁奚가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小人이 지위를 얻음에 諫爭하지 않으면 不義이고, 君子에게 憂患이 있음에 구원하지 않으면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였다.”
▶ 祁奚 : 춘추시대 晉나라 大夫이다. 悼公 때 中軍尉가 되었는데 늙어 물러날 때 도공이 후계자를 묻자 원수 관계인 解狐를 추천하였고, 부임하기 전에 해호가 죽자 자기의 아들 午를 추천하여 공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史記》 〈晉世家〉에는 ‘祁傒’, 《大戴禮記》 〈衛將軍文子〉에는 ‘祁徯’로 되어 있다. 《春秋左氏傳 成公 8‧15년, 襄公 3‧16‧21년》‧《國語 晉語 7》‧《呂氏春秋 去私》
乃往見范桓子而說之曰:
그러고는 范桓子에게 가서 만나 설득하였다.
▶ 范桓子 : 춘추시대 晉나라 正卿인 士匄를 가리킨다. 范은 采邑 이름이고 桓은 宣과 통용한다. 주로 范宣子로 일컫는다. 《群書拾補》에는 “당연히 ‘宣’이 되어야 한다.” 하였고, 《說苑校證》에는 “‘桓’과 ‘宣’은 모두 ‘亘’의 音을 따르므로 자연히 통용된다.”라고 하였다. 范宣子는 欒氏를 멸하고 국정을 장악하였으며 刑書를 제정하였다. 《春秋左氏傳 成公 17‧18년, 襄公 3‧9‧10‧13‧14‧18‧19년》
「聞善為國者,賞不過;
刑不濫。
“내가 들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賞賜가 지나치지 않고
형벌을 함부로 시행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賞過則懼及淫人;
刑濫則懼及君子。
賞賜가 지나치면 사악한 사람에게 미칠까 걱정하고,
형벌을 함부로 시행하면 군자에게 미칠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與其不幸而過,寧過而賞淫人,無過而刑君子.
불행히 잘못하는 경우에도, 賞賜가 지나쳐서 사악한 사람에게 상을 줄지언정, 형벌이 지나쳐서 군자에게 형벌을 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故堯之刑也,殛鯀於羽山而用禹;
周之刑也,僇管、蔡而相周公,不濫刑也。」
그러므로 堯임금이 刑을 집행함에, 羽山에서 鯀을 죽이고도 禹를 등용하였고, 周나라가 형을 시행함에 管叔과 蔡叔을 죽였으나 周公을 재상으로 삼았으니, 형벌을 함부로 시행하지 않음입니다.”
▶ 堯之刑也 殛鯀於羽山而用禹 : 堯임금이 羽山에서 鯀을 형벌하여 죽이고서도 그의 아들 禹를 重用하여 治水를 담당하게 했던 일을 이른다. 곤은 요임금의 신하로 처음 치수를 맡겼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자 요에게 처형되었다. 《書經 虞書 堯典》
▶ 周之刑也 僇管蔡而相周公 : 周나라에서 管叔을 죽이고 蔡叔을 유배시키고 周公을 相으로 삼은 일을 이른다. ‘僇’은 ‘戮’과 통용으로, 죽임이다. 관숙과 채숙은 武王의 아우로, 무왕이 죽은 뒤 아들 成王이 어려서 周公이 攝政하자, 이에 불복하여 流言을 퍼뜨렸다. 주공이 두려워하여 東都로 피하였는데, 성왕이 주공을 맞이해 돌아가니 관숙과 채숙이 紂王의 아들 武庚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이 出兵하여 무경과 관숙은 죽이고 채숙은 유배하였다. 《書經 周書 金縢‧大誥》‧《詩經 豳風 東山》‧《史記 周本紀》
桓子乃命吏出叔向.
범환자가 즉시 관리에게 명하여 숙향을 석방시켰다.
救人之患者,行危苦而不避煩辱,猶不能免。
남의 우환을 구원하는 사람은 위험과 수고를 수행하여 번거로움과 치욕을 회피하지 않지만, 그러고도 우환을 면하게 하지 못하기도 한다.
今祁奚論先王之德而叔向得免焉,學豈可已哉?
그런데 기해는 先王의 德政을 논하여 숙향이 우환을 면하였으니, 학업을 어찌 그만두겠는가!
17.
張祿掌門,見孟嘗君曰:
「衣新而不舊,倉庾盈而不虛,為之有道,君亦知之乎?」
張祿이 孟嘗君의 집에 가서 그를 만나고 말하였다.
“새 옷을 입고 헌 옷을 입지 않으며, 창고가 가득 차고 비지 않게 함에 방도가 있으니, 主君은 알고 있습니까?”
▶ 張祿掌門 : 張祿은 사람 이름이다. 장녹이 곧 范雎라는 說이 있으나, 史實과 부합하지 않고, 일설에는 同名異人이라고 한다. 掌門의 뜻은 미상이다. 《說苑纂註》에는 “‘掌’은 ‘踵’자인 듯하다.” 하였으니, ‘踵門’은 어떤 사람의 집에 온다는 뜻이다.
孟嘗君曰:
「衣新而不舊,則是脩也。
倉庾盈而不虛,則是富也。
為之奈何?其說可得聞乎?」
맹상군이 물었다.
“새 옷을 입고 헌 옷을 입지 않음은 수선하기 때문이고,
창고가 가득 차고 비지 않음은 부유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 설명을 들을 수 있겠나?”
張祿曰:
「願君貴則舉賢,富則振貧,若是則衣新而不舊,倉庾盈而不虛矣。」
장녹이 말하였다.
“주군께서 존귀하면 현자를 등용하고, 부유하면 가난한 사람을 救恤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새 옷을 입고 헌 옷을 입지 않을 터이며, 창고가 가득 차서 비지 않을 터입니다.
孟嘗君以其言為然,說其意,辯其辭,明日使人奉黃金百斤,文織百純,進之張先生。
맹상군이 그 말이 옳아서 그 의견을 좋아하고 그 말에 조리 있다고 여겨, 이튿날 사람을 시켜 황금 백 근과 文織 백 純을 장선생에게 보냈다.
▶ 文織百純(돈) : 채색으로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 100段이다. 純은 길이의 단위로, 布帛 1丈 5尺이 1純이다. 《戰國策 秦策 1》‧《穆天子傳 3》
先生辭而不受。
선생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後先生復見孟嘗君。孟嘗君曰:
「前先生幸教文曰:
『衣新而不舊,倉庾盈而不虛,為之有說,汝亦知之乎?』
文竊說教,故使人奉黃金百斤,文織百純,進之先生,以補門內之不贍者,先生曷為辭而不受乎?」
훗날 장선생이 다시 맹상군을 만나자, 맹상군이 말하였다.
“전에 선생이 은혜롭게도 나를 가르치기를, ‘늘 새 옷을 입고 헌 옷을 입지 않으며, 창고가 가득 차고 비지 않게 함에 방법이 있으니, 당신은 이를 알고 있는가?’ 라고 하였소.
나는 그 가르침을 좋아하였으매 사람을 보내 황금 백 근과 文織 백 純을 선생에게 드려서, 집안의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을 도우려 하였는데, 선생은 무엇 때문에 사양하고 받지 않았소?”
張祿曰:
「君將掘君之府錢,發君之庾粟以補士,則衣弊履穿而不贍耳。
何暇衣新而不舊,倉瘐盈而不虛乎?」
장녹이 말하였다.
“주군의 府庫의 돈을 다 긁어내고 주군의 倉廩의 곡식을 꺼내어 선비를 도우면, 옷이 해지고 신발이 뚫어져도 넉넉하지 못할 터입니다.
어느 겨를에 새 옷을 입고 헌 옷을 입지 않으며, 창고가 가득 차고 비지 않게 하겠습니까?”
▶ 府錢 : 저본에는 ‘偶’로 되어 있으나, 《說苑校證》에 “‘偶’는 ‘府’의 오자인 듯하다.”라고 한 것을 따라 ‘府’로 바로잡았다.
孟嘗君曰:
「然則為之奈何?」
맹상군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소?”
張祿曰:
장녹이 대답하였다.
「夫秦者四塞之國也。
“저 秦나라는 사방이 요새인 나라입니다.
遊宦者不得入焉。
벼슬하려는 사람도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願君為吾為丈尺之書,寄我與秦王.
주군께서 저를 위해 짧은 편지를 써서, 저를 秦王에게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 丈尺之書 : 《群書拾補》에 “‘丈’은 ‘咫’인 듯하다.” 하였고, 《說苑校證》에 “‘咫’가 옳다.”라고 함을 따라 해석하였다. 咫尺之書는 짧은 편지를 이른다. 《史記 淮陰侯列傳》
▶ 與 : ‘於’와 통용이다.
我往而遇乎,固君之入也。往而不遇乎,雖人求間謀,固不遇臣矣。」
제가 가서 禮遇를 받으면 본래 주군께서 入國시킴이고, 가서 禮遇를 받지 못하면 비록 사람이 사적인 궁리를 동원하여도 본래 臣을 예우하지 않음일 터입니다.”
孟嘗君曰:
「敬聞命矣。」
맹상군이 말하였다.
“삼가 가르침을 따르겠소.”
因為之書,寄之秦王,往而大遇。
그리하여 그를 위하여 편지를 써서 장녹을 진왕에게 寄託하자, 장녹이 가서 크게 禮遇를 받았다.
謂秦王曰:
「自祿之來入大王之境,田疇益辟,吏民益治,然而大王有一不得者,大王知之乎?」
진왕에게 말하였다.
“제가 大王의 境內에 들어오니 논밭은 더욱 개간되어 있고, 관리와 백성은 더욱 잘 다스려지고 있었으나, 대왕에게는 한 가지 얻지 못한 것이 있으니, 대왕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王曰:
「不知。」
진왕이 말하였다.
“알지 못한다.”
曰:
「夫山東有相,所謂孟嘗君者,其人賢人.
天下無急則已,有急則能收天下雄俊之士,與之合交連友者,疑獨此耳。
장녹이 말하였다.
“山東에 재상이 있어 소위 맹상군이니, 위인이 賢人입니다.
천하에 긴급한 일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긴급한 일이 발생하면 천하의 영웅과 俊傑를 거두고 그들과 연합하여 친구 관계를 맺을 사람은 아마 이 한 사람뿐일 터입니다.
▶ 山東 : 전국시대에서 秦‧漢 때까지 崤山, 혹은 華山의 동쪽 지역을 일컬었다. 전국시대에는 秦나라 이외의 여섯 나라(齊‧楚‧燕‧韓‧趙‧魏)를 일컫기도 한다. 《戰國策 趙策 2》
然則大王胡不為我友之乎?」
그러한데 대왕께서는 어찌 저를 통하여 그와 벗하지 않습니까?”
秦王曰:
「敬受命。」
진왕이 말하였다.
“삼가 가르침을 따르소.”
奉千金以遺孟嘗君,孟嘗君輟食察之而寤曰:
「此張生之所謂衣新而不舊,倉庾盈而不虛者也。」
千金을 받들어 맹상군에게 바치게 하니, 맹상군이 밥을 먹다가 중지하고 자세히 생각하더니 깨닫고 말하였다.
“이것이 장선생의 소위 ‘늘 새 옷을 입고 헌 옷을 입지 않으며, 창고가 가득 차고 비지 않게 함’이구나!”
18.
莊周貧者,往貸粟於魏,文侯曰:
「待吾邑粟之來而獻之。」
莊周가 가난하여 貧者가 魏에 가서 곡식을 꾸어달라고 하자, 魏 文侯가 말하였다.
“내 封邑 곡식이 오기를 기다려 보내주겠소.”
▶ 莊周 : 전국시대 철학가로 字는 子休‧子沐이다. 宋나라 蒙(지금의 安徽省 蒙城) 사람으로 일설에는 河南省 商丘 사람이라 한다. 宋나라 漆園吏를 지냈다. 원래는 楚 莊王의 後裔로, 난리를 만나 宋나라로 이주하였다. 天人合一과 淸靜無爲를 주장하는 道家學說을 創始한 사람의 하나로, 老子와 함께 老莊으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莊子》가 있다.
▶ 貧者 : 저본에는 ‘者’자가 있으나, 《群書拾補》에 “《初學記》 6에는 ‘者’자가 없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周曰:
장주가 말하였다.
「乃今者周之來,見道傍牛蹄中有鮒魚焉,大息謂周曰:
『我尚可活也?』
“이번에 제가 올 적에 길 곁의 소 발굽 자국에 붕어가 있음을 보았는데, 크게 탄식하면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이러고도 살 수 있겠소?’
▶ 鮒魚 : 민물고기의 한 가지로 붕어이다.
周曰:
『須我為汝南見楚王,決江、淮以溉汝。』
제가 말하였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남쪽에 가서 楚王을 뵙고 長江과 淮河를 터서 너에게 물을 대어줄 터이니, 기다려라.’
鮒魚曰:
『今吾命在盆甕之中耳.
乃為我見楚王,決江、淮以溉我,汝即求我枯魚之肆矣。』
붕어가 말하였습니다.
‘지금 나의 목숨은 한 단지나 한 항아리에 달렸을 뿐이오.
그런데 나를 위해 초왕을 뵙고 장강과 회하를 터서 나에게 물을 대어주겠다 하니, 그대는 곧 나를 건어물 가게에서 찾을 터이오.’
今周以貧故來貸粟,而曰須我邑粟來也而賜臣,即來亦求臣傭肆矣。」
지금 저는 가난 때문에 곡식을 꾸러 왔는데, 내 봉읍의 곡식이 오기를 기다려 저에게 주기를 기다리라고 하시니, 곡식이 오면 저 역시 품팔이하는 가게에서 찾을 터입니다.”
文侯於是乃發粟百鍾,送之莊周之室。
위 문후가 이에 곡식 백 鍾을 내어 장주의 집에 보내주었다.
▶ 鍾 : 고대의 용량 단위이다. 춘추시대 齊나라 公室의 용량 단위로, 1鍾은 6斛 4斗이다. 후대에 8斛 또는 10斛으로 삼은 제도도 있었다. 《春秋左氏傳 昭公 3년》
19.
晉平公問叔向曰:
「歲饑民疫,翟人攻我,我將若何?」
晉 平公이 叔向에게 물었다.
“농사는 흉년이 들고, 백성은 전염병에 시달리며, 翟人은 우리나라를 침공하니, 우리는 장차 어찌해야 하겠소?”
▶ 晉平公問叔向 : 晉 平公은 본서 권1 〈君道〉 01 참고.
叔向은 본서 권5 〈貴德〉 15 참고.
▶ 翟人 : 고대 중국 북부에 살던 민족 이름이다. ‘翟’은 ‘狄’과 통용이다.
對曰:
「歲饑來年而反矣,疾疫將止矣,翟人不足患也。」
叔向이 대답하였다.
“농사의 흉년은 내년이면 회복될 터이고, 전염병은 장차 그칠 것이며, 적인은 근심하기에 부족합니다.”
公曰:
「患有大於此者乎?」
평공이 말하였다.
“우환에 이보다 더 큰 것이 있소?”
對曰:
「夫大臣重祿而不極諫,近臣畏罪而不敢言,左右顧寵於小官而君不知。
此誠患之大者也。」
숙향이 대답하였다.
“大臣이 많은 녹봉을 받으나 극력으로 諫하지 않고, 近臣은 得罪할까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하며, 측근은 하급 관리의 사랑에 관심을 두는데도 임금께서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큰 근심거리입니다.”
▶ 左右顧寵於小官 : 君主의 측근들이 小官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는 뜻으로, 뇌물을 바치며 청탁을 일삼음을 이른다.
公曰:
「善。」
평공이 말하였다.
“좋은 말이오.”
於是令國中曰:
「欲有諫者為之隱,左右言及國吏罪。」
그러고는 온 나라에 명령하였다.
“諫하고자 하는 사람를 은폐하거나, 측근의 말이 나라의 관리에 미치면 치죄하겠다.”
20.
趙簡子攻陶,有二人先登,死於城上,簡子欲得之,陶君不與。
趙簡子가 陶邑을 공격할 적에 두 사람이 먼저 城에 올라갔다가 성 위에서 죽으매, 조간자가 두 사람의 시체를 얻으려 하였으나 陶君이 주지 않았다.
▶ 趙簡子攻陶 : 趙簡子는 본서 권1 〈君道〉 35 참고. 陶는 옛 지명으로, 지금의 山東省 定陶縣 경내에 있었다. 일명 陶丘로, 周 武王이 여섯째 아우 振鐸을 봉하여 曹伯으로 삼았던 곳이다. 《讀史方輿紀要 山東 兗州府 曹州》
承盆疽謂陶君曰:
「簡子將掘君之墓,以與君之百姓市曰:
『踰邑梯城者將赦之,不者將掘其墓,朽者揚其灰,未朽者辜其尸。』」
承盆疽가 도군에게 말하였다.
“조간자가 장차 임금의 조상 무덤을 파내고 임금의 백성을 오게 하여 말할 터입니다.
‘邑을 넘고 城을 기어서 오르는 사람은 사면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장차 그 조상 무덤을 발굴하여 썩은 시체는 그 뼛가루를 뿌리고, 썩지 않은 시체는 四肢를 찢어버리겠다.’”
▶ 承盆疽 : 사람 이름인데, 행적은 알 수 없다.
▶ 市 : 유인한다는 뜻이다.
陶君懼,謂效二人之尸以為和。
도군이 두려워하여 두 사람의 시체를 바치고 和平하였다.
▶ 辜 : 四肢를 찢는다는 뜻이다.
21.
子貢見太宰嚭,太宰嚭問曰:
「孔子何如?」
子貢이 太宰 嚭를 만나자, 태재 비가 물었다.
“孔子는 어떤 사람입니까?”
▶ 太宰嚭(비) : 伯嚭라고도 한다. 본서 권9 〈正諫〉 20 참고.
對曰:
「臣不足以知之。」
자공이 대답하였다.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太宰曰:
「子不知,何以事之?」
태재 비가 다시 말하였다.
“그대가 알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그를 스승으로 섬깁니까?”
對曰:
「惟不知,故事之.
夫子其猶大山林也,百姓各足其材焉。」
자공이 대답하였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승으로 섬깁니다.
夫子는 큰 山林과 같아서 백성이 각각 그에 적합한 재목을 충족합니다.”
太宰嚭曰:
「子增夫子乎?」
태재 비가 말하였다.
“그대는 부자를 추켜세웁니까?”
對曰:
「夫子不可增也。
夫賜其猶一累壤也,以一累壤增大山,不益其高,且為不知。」
자공이 대답하였다.
“부자는 추켜세우지 못합니다.
나는 한 삼태기의 흙과 같으니, 한 삼태기의 흙을 큰 산에 보태더라도 그 높이를 더할 수 없고, 더구나 알지도 못합니다.”
▶ 一累壤 : 한 삼태기의 흙을 이른다. ‘累’는 ‘虆’의 假借字이다.
太宰嚭曰:
「然則子有所酌也。」
태재 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대에게 부자의 학문을 짐작한 바가 있습니까?”
對曰:
「天下有大樽而子獨不酌焉,不識誰之罪也。」
자공이 대답하였다.
“천하에 큰 술 단지가 있는데 그대만 헤아려 취하지 않았으니,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겠습니다.”
22.
趙簡子問子貢曰:
「孔子為人何如?」
趙簡子가 子貢에게 물었다.
“孔子의 사람됨은 어떻습니까?”
子貢對曰:
「賜不能識也。」
자공이 대답하였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簡子不說曰:
「夫子事孔子數十年,終業而去之,寡人問子,子曰不能識,何也?」
조간자가 불쾌하여 말하였다.
“선생이 공자를 섬기기 수십 년에, 학업을 마치고 떠났기에 寡人이 그대에게 물었건만, 그대가 알지 못한다고 말하니, 무엇 때문이오?”
子貢曰:
「賜譬渴者之飲江海,知足而已,孔子猶江海也,賜則奚足以識之。」
자공이 대답하였다.
“저는 비유하면 목마른 사람이 강과 바다의 물을 마시는 것이어서, 갈증을 해소할 줄만 알 뿐이요, 공자는 강과 바다와 같으니, 제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簡子曰:
「善哉!子貢之言也。」
조간자가 말하였다.
“훌륭하구나.
자공의 말이여!”
23.
齊景公謂子貢曰:
「子誰師?」
齊 景公이 子貢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를 스승으로 섬겼소?”
曰:
「臣師仲尼?」
자공이 대답하였다.
“臣은 仲尼(孔子)를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公曰:
「仲尼賢乎?」
제 경공이 물었다.
“중니는 어집니까?”
對曰:
「賢。」
자공이 대답하였다.
“어집니다.”
公曰:
「其賢何若?」
제 경공이 물었다.
“그의 어짊은 어떠합니까?”
對曰:
「不知也。」
자공이 대답하였다.
“알지 못합니다.”
公曰:
「子知其賢而不知其奚若,可乎?」
제 경공이 물었다.
“그대는 그의 어진 줄은 알고 얼마나 어진지는 모른다면 말이 됩니까?”
對曰:
「今謂天高,無少長愚智皆知高,高幾何? 皆曰不知也.
是以知仲尼之賢而不知其奚若。」
자공이 대답하였다.
“만일 하늘이 높다고 말하면 어린아이, 어른, 어리석은 이, 지혜로운 이가 모두 하늘이 높은 줄을 알지만, 높이가 어떠하냐고 물으면 모두 모른다고 대답할 터입니다.
이 때문에 중니가 어진 줄은 알지만, 얼마나 어진 줄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24.
趙襄子謂仲尼曰:
「先生委質以見人主七十君矣,而無所通,不識世無明君乎?意先生之道,固不通乎?」
趙襄子가 仲尼께 말하였다.
“선생께서 예물을 드리고 70명이나 되는 임금을 뵈었지만 道가 통한 곳이 없으니,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현명한 임금이 없어서입니까? 혹시 선생의 道가 본디 통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 趙襄子 : 춘추시대 晉나라 正卿이다. 본서 권3 〈建本〉 30 참고. 단, 趙襄子는 孔子와 同時代의 인물이 아니다.
▶ 委質(지) : 폐백(禮物)을 드린다는 뜻이다. 옛날에 지위가 낮거나 나이가 어린 사람이 尊長을 뵐 때 예물을 드리는 禮가 있었다. 《禮記 曲禮 下》
▶ 意 : ‘혹, 혹시’라는 뜻이다. ‘抑’과 통용이다.
仲尼不對。
중니는 대답하지 않으셨다.
異日,襄子見子路曰:
「嘗問先生以道,先生不對,知而不對則隱也。
隱則安得為仁;
若信不知,安得為聖?」
훗날 조양자가 子路를 만나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선생께 道를 물었으나 선생이 대답하지 않으셨으니, 알면서 대답하지 않았다면 숨긴 것이오.
숨겼다면 어찌 仁이라 할 수 있겠소?
만일 진실로 道를 모른다면 어찌 聖人이라 할 수 있겠소?”
子路曰:
「建天下之鳴鐘,而撞之以梃,豈能發其聲乎哉?
君問先生,無乃猶以梃撞乎?」
자로가 말하였다.
“천하에 가장 잘 울리는 큰 종을 세우고 나무줄기로 두드리면 어찌 제소리를 내겠습니까!
임금께서 선생께 물음은 나무줄기로 두드림과 같지 않겠습니까?”
▶ 以梃 : 저본에는 ‘以挺’이나, 《群書拾補》에 “풀의 줄기인 ‘莛’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고, 《說苑校證》에는 “‘梃’의 잘못이다.”라고 한 것을 따라 ‘梃’으로 바로잡았다.
25.
衛將軍文子問子貢曰:
「季文子三窮而三通,何也?」
衛나라 장군 文子가 子貢에게 물었다.
“季文子가 세 번 궁하였다가 세 번 通達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 文子 : 춘추시대 衛나라 卿이다. 이름은 木, 字는 彌牟로, 衛 靈公의 손자이다. 일설에는 미모의 아우 惠叔蘭인데, 惠子라고도 하며 司寇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大戴禮記 6 衛將軍文子》‧《禮記注疏 檀弓 上》‧《冊府元龜 731》
▶ 季文子 : 춘추시대 魯나라의 卿인 季孫行父를 이른다. 文子는 시호이다. 季友의 손자로, 文公 때 경이 되어 宣公‧成公‧襄公의 삼대에 걸쳐 執政하면서 일을 처리할 때마다 세 번 생각한 뒤에 실행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 6‧12년, 成公 16년》‧《論語 公冶長》
子貢曰:
자공이 말하였다.
「其窮事賢,其通舉窮,其富分貧,其貴禮賤。
“그가 궁할 때 어진 이를 섬겼고, 현달할 때 궁한 사람을 천거하였으며, 부유할 때 貧者에게 나누어주고, 顯貴할 때 미천한 사람을 예우하였기 때문입니다.
窮而事賢則不悔;
通而舉窮則忠於朋友,富而分貧則宗族親之;
貴而禮賤則百姓戴之。
궁할 때 어진 이를 섬기면 侮蔑을 당하지 않고,
현달할 적에 궁한 사람을 천거하면 벗에게 마음을 다함이고, 부유할 때 빈자에게 나누어주면 종족이 친애하고, 현귀할 때 미천한 사람을 예우하면 백성이 떠받듭니다.
其得之,固道也;
失之,命也。」
그런 이가 현달을 얻음은 본래의 正道이고, 잃는 것은 운명입니다.”
曰:
「失而不得者,何也?」
계문자가 말하였다.
“잃기만 하고 얻지 못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曰:
「其窮不事賢,其通不舉窮,其富不分貧,其貴不理賤.
其得之,命也;其失之,固道也。」
자공이 대답하였다.
“그가 궁할 적에 어진 이를 섬기지 않고, 현달할 때 궁한 사람을 천거하지 않고, 부유할 때 빈자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현귀할 때 미천한 사람을 예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가 현달을 얻음은 운명이고, 잃는 것이 본래의 정도입니다.”
▶ 舉窮 : 저본에는 ‘舉賢’으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을 살펴볼 때 ‘窮’이 맞을 듯하고, 《說苑校證》에도 ‘窮’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窮’으로 바로잡았다.
26.
子路問於孔子曰:
「管仲何如人也?」
子路가 孔子께 여쭈었다.
“管仲은 어떤 사람입니까?”
子曰:
「大人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大人이다.”
子路曰:
「昔者管子說襄公,襄公不說,是不辯也;
欲立公子糾而不能,是無能也;
家殘於齊而無憂色,是不慈也;
桎梏而居檻車中無慚色,是無愧也;
事所射之君,是不貞也;
召忽死之,管仲不死,是無仁也。
夫子何以大之?」
자로가 말하였다.
“옛날 管子가 襄公에게 유세할 적에 양공이 즐거워하지 않았으매, 관중이 말재주가 없음이요,
公子 糾를 임금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으매 능력이 없음이요,
가족이 齊나라에서 해를 입어도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으매 자애롭지 않음이요,
차꼬와 수갑을 차고 檻車에 갇히고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매 부끄러움이 없음이요,
활을 쏘았던 임금을 섬겼으매 忠貞하지 않음이요,
召忽은 따라 죽었는데 관중은 죽지 않았으매 仁德이 없음입니다.
선생님께서 무엇 때문에 대인이라고 하십니까?”
▶ 襄公 : 춘추시대 齊나라 군주이다. 이름은 諸兒로 莊公의 손자이다. 魯 文公의 부인이 된 누이 文姜과 간음하였다. 大夫 連稱과 管至父에게 葵丘를 지키게 하고 기한이 지나도 교체해주지 않자, 이들이 난리를 일으켜 양공을 시해하였다. 《春秋左氏傳 桓公 15‧18년, 莊公 2‧7‧8년》‧《史記 齊太公世家》
▶ 公子糾 : 춘추시대 齊 襄公의 아우이다. 양공이 亂政을 행하자, 魯나라로 망명하였다가 양공이 시해당한 뒤 齊나라에 들어와 齊侯가 되려 하였다. 그러나 먼저 들어와 즉위한 小白(桓公)이 노나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소백이 노나라에 명하여 죽이게 하였다. 《春秋左氏傳 莊公 8‧9년》‧《史記 齊太公世家》
▶ 桎梏而居檻車中 : 齊 襄公이 시해당하자 管仲과 召忽이 公子 糾를 받들고 魯나라로 달아났다. 한편 鮑叔은 小白과 莒로 달아났다가 먼저 齊나라에 들어간 소백이 공자 규를 들여보내려는 노나라의 군대와 싸워 이기자, 桓公이 노나라에 관중을 보내라고 요청하니, 관중에게 차꼬와 수갑을 채워 檻車에 실어 보낸 일을 이른다. 《春秋左氏傳 莊公 8‧9년》
▶ 事所射之君 : 管仲이 小伯(桓公)을 죽이려고 활을 쏘았으나 화살이 소백의 띠쇠[帶鉤]를 맞히는 바람에 소백이 죽지 않았는데, 관중은 뒤에 환공을 섬겨 재상이 되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24년》‧《抱朴子 君道》
▶ 召忽 : 춘추시대 齊나라 대부이다. 管仲과 함께 公子 糾를 섬겼다. 양공이 죽은 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공자 규를 따라 魯나라로 망명하였다. 뒤에 공자 규를 보호하여 제나라로 돌아와 君位를 다투려 하였으나 먼저 들어온 소백이 즉위하여 노나라에게 공자 규를 죽이게 하자 召忽도 따라 죽었다. 《春秋左氏傳 莊公 8‧9년》‧《管子 中匡》
子曰:
「管子說襄公,襄公不說,管仲非不辯也,襄公不知說也;
欲立公子糾而不能,非無能也,不遇時也;
家殘於齊而無憂色,非不慈也,知命也;
桎梏居檻車而無慚色,非無愧也,自裁也;
事所射之君,非不貞也,知權也;
召忽死之,管仲不死,非無仁也.
召忽者,人臣之材也,不死則三軍之虜也;
死之則名聞天下,夫何為不死哉?
管仲者,天子之佐,諸侯之相也,死之則不免為溝中之瘠;
不死則功復用於天下,夫何為死之哉?
由!汝不知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管仲이 양공에게 유세할 적에 양공이 즐거워하지 않음은 관중의 말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라, 양공이 그 주장을 몰랐기 때문이고,
공자 규를 세우려다가 성공하지 못함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가족이 齊나라에서 해를 입어도 근심하는 기색이 없음은 자애롭지 않음이 아니라 天命을 알았기 때문이고,
차꼬와 수갑을 차고 檻車에 갇히고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음은 부끄러움이 없음이 아니라 스스로 자제했기 때문이고,
활을 쏘았던 임금을 섬김은 忠貞하지 않음이 아니라 權變을 알았기 때문이고,
소홀은 따라 죽었는데 관중이 죽지 않음은 仁德이 없음이 아니다.
소홀은 신하의 재목에 불과하매, 따라 죽지 않으면 三軍의 포로가 되고, 죽으면 천하에 이름이 날 터이니, 어찌 죽지 않겠느냐?
관중은 天子를 보필할 재목이고, 諸侯의 재상이 될 인물이매, 죽으면 구렁텅이에서 썩는 해골 신세를 면치 못하고, 죽지 않으면 공을 세워 천하에 다시 등용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죽겠느냐?
仲由야, 너는 도리를 알지 못하는구나.”
▶ 瘠 : ‘胔’와 통용으로, 아직 완전히 썩지 않은 시체를 이른다.
27.
晉平公問於師曠曰:
「咎犯與趙衰孰賢?」
晉 平公이 師曠에게 물었다.
“咎犯과 趙衰 중에 누가 더 현명하오?”
▶ 晉平公問於師曠 : 晉 平公과 師曠은 본서 권1 〈君道〉 01 참고.
▶ 咎犯與趙衰(최) : 咎犯은 본서 권6 〈復恩〉 03 참고. 趙衰는 춘추시대 晉나라 대부로, 重耳(文公)를 따라 19년 동안 외국을 방랑하면서 중이를 보필한 사람이다. 수많은 어려운 일을 겪고 중이를 도와 즉위하게 하였고, 霸業을 이루게 하였다. 시호는 成子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24‧25년》‧《國語 晉語 4》‧《史記 趙世家》
對曰:
사광이 대답하였다.
「陽處父欲臣文公,因咎犯,三年不達,因趙衰,三日而達。
“陽處父가 文公의 신하가 되고자 구범에게 의뢰했더니 3년 동안 추천해주지 않았고, 조최에게 의뢰하자 3일 만에 추천해주었습니다.
▶ 陽處父(보) : 춘추시대 晉나라 사람이다. 襄公 때 蔡나라를 정벌하고, 江나라가 楚나라에 포위당했을 때 구원하였다. 양공이 죽은 뒤 賈季에게 살해되었다. 벼슬은 太傅를 지냈다. 《春秋左氏傳 文公 6년》‧《國語 晉語 5》
智不知其士眾,不智也;
知而不言,不忠也;
欲言之而不敢,無勇也;
言之而不聽,不賢也。」
지혜로 그의 선비들을 잘 알지 못했다면 지혜롭지 못함이고,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면 不忠이고,
말하고 싶은데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면 용기가 없음이고,
말했는데도 윗사람이 듣지 않았다면 현명하지 못함입니다.”
28.
趙簡子問於成摶曰:
「吾聞夫羊殖者,賢大夫也,是行奚然?」
趙簡子가 成摶에게 물었다.
“내가 들으니, 羊殖이라는 사람은 어진 大夫라는데, 이 사람의 행실은 어떤가?”
▶ 趙簡子問於成摶 : 趙簡子는 본서 권1 〈君道〉 35 참고. 成摶은 사람 이름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일설에는 《春秋左氏傳》 昭公 28년에 나오는 成鱄이라고 한다.
▶ 羊殖 : 춘추시대 晉나라 大夫로 행적은 알 수 없는데, 일설에는 羊舌職인 듯하다 하였다.
對曰:
「臣摶不知也。」
성단이 대답하였다.
“臣 摶은 알지 못합니다.”
簡子曰:
「吾聞之子與友親,子而不知,何也?」
조간자가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그대와 친구로 사귄다던데, 그대가 알지 못함은 무엇 때문이오?”
摶曰:
성단이 말하였다.
「其為人也數變.
“그는 사람됨이 수차 변하였습니다.
其十五年也,廉以不匿其過;
其二十也,仁以喜義;
其三十也,為晉中軍尉,勇以喜仁;
其年五十也,為邊城將,遠者復親。
今臣不見五年矣。
恐其變,是以不敢知。」
그가 열다섯 살 때 청렴결백하여 자신의 잘못을 숨기지 않았고,
스무 살 때 仁愛하면서 의리를 좋아하였으며,
서른 살 때 晉나라의 中軍尉가 되어 용감하면서 인애를 좋아하였고,
그의 나이 쉰 살 때 邊城의 장수가 되어 멀리 떠났던 사람과 다시 친근해졌습니다.
지금 제가 그를 만나지 못한 지 5년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또 변하였을 터이매, 감히 안다고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 中軍尉 : 춘추시대 晉나라에 두었던 軍職이다. 中軍은 군대를 左‧中‧右나 上‧中‧下의 三軍으로 나누었을 때 主將이 지휘하면서 全軍에 軍令을 내리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尉는 中軍將을 보좌하는 일을 맡은 벼슬이다. 《春秋左氏傳 成公 18년》‧《國語 晉語 7》
簡子曰:
「果賢大夫也,每變益上矣。」
조간자가 말하였다.
“양식은 과연 어진 대부다. 변할 때마다 더욱 나아지는구나.”
2023.12.3 탐고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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