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使는 임금의 명을 받아 외국에 出使하여 원만하게 使命을 완수한 일을 蒐輯한 篇이다.
外交 使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국가의 이익을 무엇보다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국가에 이익이 되고, 君主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외교를 펼치되 외교 현안에 대한 應變은 전적으로 사신이 결정하여 민첩하게 대처해야 하는 事例를 보이고 있다.
사신은 죽는 위험에 처할 수도 있고, 또는 견디기 어려운 치욕을 당할 때도 있다.
이를 극복하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늠름한 용기와 굴욕을 참아내는 강인한 의지를 갖춰야 할 德目으로 제시하고 있다.
本篇에 제시한 외교의 중요한 방법은,
외교에 관한 禮節을 중시할 것,
상대의 短點을 거론하지 말 것,
넓은 지식을 갖추고 침착해야 하며 口辯이 있어야 할 것 등인데, 이것을 갖춰야 使命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
1.
春秋之辭有相反者四,既曰:
「大夫無遂事。」
不得擅生事矣。
《春秋》의 문장에 뜻이 상반되는 곳이 네 군데가 있으니, 이미 이르기를,
“大夫는 독자적으로 처리하는 일이 없다.”라고 하니,
제 마음대로 일을 일으킬 수 없다는 말이다.
▶ 大夫無遂事 : 《春秋公羊傳》 莊公 19년에 보인다. 遂: 專橫하다, 마음대로 하다
又曰:
「出境可以安社稷,利國家者則專之可也。」
또 일렀다.
“국경을 나감에 社稷을 안정시킬 수 있고, 국가를 이롭게 하는 일은 專斷하여도 된다.”
▶ 出境……可也 : 《春秋公羊傳》 莊公 19년 ‘大夫無遂事’의 끝부분에 보인다.
既曰:
「大夫以君命出,進退在大夫矣.」
또 일렀다.
“대부는 임금의 명으로 出使함에 進退는 대부에게 달려 있다.”
▶ 大夫……大夫矣 : 《春秋公羊傳》 襄公 19년에 보인다.
又曰:
「以君命出,聞喪徐行而不反者」
또 일렀다.
“임금의 명으로 出使함에 喪事를 들으면 천천히 가되 돌아오지 않는다.”
▶ 以君命出……不反者 : 《春秋公羊傳》 宣公 8년에 보인다.
何也?
무엇 때문인가?
曰:
이렇다.
「此義者各止其科,不轉移也。
이 네 가지의 뜻은 각기 그 항목에만 한정되므로 다른 데 옮길 수 없다.
不得擅生事者,謂平生常經也;
專之可也者,謂救危除患也;
進退在大夫者,謂將帥用兵也;
徐行而不反者,謂出使道聞君親之喪也。
'제 마음대로 일을 일으킬 수 없다.'라 함은 평상의 일반 원칙을 말하고,
‘전단해도 된다.’라 함은 危害를 救援하고 환난을 제거함을 말하며,
‘進退가 大夫에게 달려 있다.’라 함은 장수의 用兵을 말하고,
‘천천히 가되 돌아오지 않는다.’라 함은 出使하였다가 도중에 부모의 喪을 들음을 말한다.
▶ 君親 : 저본에는 ‘君’이 있으나, 《說苑校證》에 《白虎通》 〈喪服〉, 《春秋公羊傳解詁》, 《春秋繁露》 〈精華〉 등을 인용하여 衍文인 듯하다고 함에 따라 衍文으로 해석하였다.
公子子結擅生事,春秋不非,以為救莊公危也。
公子 結이 제멋대로 일을 벌였을 때 《춘추》에서 비난하지 않음은 莊公을 危難에서 구하였기 때문이다.
▶ 公子結擅生事 : 公子 結은 춘추시대 魯나라 大夫이다.
魯 莊公 19년에 公子 結이 陳 宣公의 夫人이 될 衛나라 여자의 媵妾으로 가게 된 魯女를 호송하여 衛나라 都城으로 가다가, 鄄에 당도하여 齊侯와 宋公이 會盟한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바꾸어 다른 사람을 시켜 魯女를 호송하게 하고 자신은 魯나라의 대표로 會盟에 참석하여, 魯君의 危難을 해소한 일을 훌륭하게 여김을 이른다.
《春秋左氏傳 莊公 19년》
公子遂擅生事,春秋譏之,以為僖公無危事也。
公子 遂가 제멋대로 일을 벌였을 때 《춘추》에서 비난함은 僖公에게 위험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 公子遂擅生事 : 公子 遂는 춘추시대 魯나라 大夫이다. 東門遂 또는 東門襄仲이라고도 한다.
魯 僖公 30년에 公子 遂가 僖公의 명으로 周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기회를 이용하여 개인적으로 晉나라에 간 일을 비난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30년》
故君有危而不專救,是不忠也。若無危而擅生事,是不臣也。
그러므로 임금에게 위난이 있는데도 전재하여 救難하지 않으면 不忠이고,
임금에게 위난이 없는데도 제멋대로 일을 벌이면 不臣(신하의 도리를 행하지 않음)이다.
傳曰:
『詩無通詁,易無通吉,春秋無通義。』
此之謂也。」
傳에 말하기를,
“《詩經》에 관통하는 해석이 없고, 《周易》에 관통하는 吉한 卦가 없으며, 《春秋》에 관통하는 의리가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이름이다.
▶ 傳 : 經書를 해석한 책으로, 여기서는 《春秋繁露》를 이른다.
▶ 詩無通故……春秋無通義 : ‘故’는 ‘詁’와 통용이다.
《春秋繁露》 〈精華〉에 “《詩經》은 확정된 해석이 없고, 《周易》은 확정된 占이 없으며, 《春秋》는 확정된 말이 없다.[詩無達詁 易無達占 春秋無達辭]”라고 한 말을 변용하였다.
2.
趙王遣使者之楚,方鼓瑟而遣之,誡之曰:
「必如吾言。」
趙王이 使者를 楚나라로 보냄에, 막 비파를 연주하여 전송하며 경계하였다.
“반드시 내 말대로 하시오.”
使者曰:
「王之鼓瑟,未嘗悲若此也!」
사자가 말하였다.
“왕의 비파 연주가 이렇게 슬픈 적이 없었습니다.”
王曰:
「宮商固方調矣!」
조왕이 말하였다.
“宮‧商의 음조를 방금 확실히 조율하였소.”
▶ 宮商 : 중국 고대 음악의 五聲 중 宮聲과 商聲을 말하는데, 음률을 두루 이르는 말로 쓴다.
使者曰:
「調則何不書其柱耶?」
사자가 말하였다.
“조율이 잘 되었다면 어찌 그 기러기발에 기록해두지 않습니까?”
▶ 柱 : 거문고나 가야금 따위 絃樂器의 줄을 고르는 역할을 하는 기러기발이다.
王曰:
「天有燥濕,絃有緩急,宮商移徙不可知,是以不書。」
조왕이 말하였다.
“天氣는 燥濕이 있고, 絃에 완급이 있어서 궁‧상의 음조 변화를 알 수 없으매, 기록해두지 못하오.”
使者曰:
사자가 말하였다.
「明君之使人也,任之以事,不制以辭,遇吉則賀之,凶則弔之。
“현명한 임금이 사자를 파견함에 사무를 맡기되 말을 제한하지 아니하여 吉한 일을 만나면 축하하고 凶한 일을 만나면 위문하였습니다.
今楚、趙相去,千有餘里,吉凶憂患,不可豫知,猶柱之不可書也。
지금 楚나라와 趙나라의 거리는 천여 리나 되어 吉凶과 憂患을 미리 알 수 없음이 기러기발에 기록해두지 못함과 같습니다.
《詩》云:
『莘莘征夫,每懷靡及。」
《詩經》에 ‘사신 가는 많고 많은 사람들, 使命을 완수하지 못할까 걱정한다오.’라고 하였습니다.”
▶ 莘莘征夫 每懷靡及 : 《詩經》 〈小雅 皇皇者華〉에 보인다.
‘莘莘’은 많은 사람이 서둘러 가는 모양으로, 현재의 《詩經》에는 ‘駪駪’으로 되어 있는데, 뜻은 같다.
3.
楚莊王舉兵伐宋,宋告急,晉景公欲發兵救宋,伯宗諫曰:
「天方開楚,未可伐也。」
楚 莊王이 군대를 일으켜 宋을 공격하여 송나라가 〈晉에〉 위급함을 알리니, 晉 景公이 군대를 출동시켜 宋을 구원하려고 하매 伯宗이 諫하였다.
“하늘이 한창 楚나라의 國運을 열어주고 있으니,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 伯宗 : 춘추시대 晉나라 大夫이다.
어질고 直言을 좋아했으나 直諫하다가 郄氏에게 죄를 얻어 살해되었다.
《春秋左氏傳 宣公 15년, 成公 5‧15년》‧《史記 晉世家》
乃求壯士,得霍人解揚,字子虎,往命宋毋降.
이에 壯士를 구하여 霍의 사람 解揚을 얻으니, 字는 子虎이다. 宋에 가서 楚에 항복하지 말라고 명령 전하게 하였다.
▶ 霍人解揚 : 霍은 본래 周 武王의 아우 叔處의 封地이다.
지금의 山西省 霍縣의 남서쪽에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晉나라에 멸망되었다.《書經 周書 蔡仲之命》
解揚은 춘추시대 晉나라 대부로 字는 子虎‧霍虎이다.《春秋左氏傳 文公 8년‧宣公 15년》
道過鄭,鄭新與楚親,乃執解揚而獻之楚。
道程이 鄭나라를 지나는데, 鄭은 楚와 최근에 친근하였으매, 해양을 사로잡아 楚에 바쳤다.
楚王厚賜,與約,使反其言,令宋趣降,三要,解揚乃許。
楚王이 후하게 상주고 더불어 약속하기를, 晉나라 임금의 말을 반대로 전하여 송나라가 빨리 楚에 항복하게 만들라고 세 번 요구하자 해양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於是楚乘揚以樓車,令呼宋使降.
이에 楚는 해양을 樓車에 태우고 송나라가 항복하라고 소리치게 하였다.
▶ 樓車 : 고대의 戰車로 위에 望樓를 설치하여 멀리 적군을 바라보는 데 쓴다.《春秋左氏傳 宣公 15년》‧《史記 五宗世家》
遂倍楚約而致其晉君命曰:
「晉方悉國兵以救宋,宋雖急,慎毋降楚,晉今至矣。」
끝내는 楚와의 약속을 배반하고 진 경공의 명령을 전하였다.
“晉이 온 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宋을 구원할 참이니, 宋은 위급하더라도 부디 초나라에 항복하지 말라. 晉의 구원병이 곧 도착할 터이다.”
▶ 倍 : ‘위배하다, 위반하다’의 뜻으로 ‘背’와 통용한다.
楚莊王大怒,將烹之,解揚曰:
「君能制命為義,臣能承命為信,受吾君命以出,雖死無二。」
초 장왕이 크게 노하여 삶아 죽이려 하자 해양이 말하였다.
“임금이 능히 명령을 制定함을 義라 하고, 신하가 능히 명령을 받듦을 信이라 하는데, 우리 임금의 명을 받고 出使하였으니, 죽더라도 두 마음을 품을 수 없습니다.”
王曰:
「汝之許我,已而倍之,其信安在?」
초왕이 말하였다.
“너는 나의 요구를 허락했다가 뒤이어 배반하니, 그놈의 信은 어디에 있는가?”
解揚曰:
「所以許王,欲以成吾君命,臣不恨也。」
해양이 말하였다.
“왕의 요구를 허락한 까닭은 우리 임금의 명령을 완수하려 함이니 臣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 所以 : 저본에는 ‘死以’로 되어 있으나, 《史記》 〈鄭世家〉에 의거하여 ‘所’로 바로잡았다.
顧謂楚軍曰:
「為人臣無忘盡忠而得死者。」
楚軍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남의 신하가 되어서 충성을 다하다가 죽는 사람을 잊지 말라.”
▶ 楚軍 : 저본에는 ‘楚君’으로 되어 있으나, 《史記》 〈鄭世家〉에 의거하여 ‘軍’으로 바로잡았다.
楚王諸弟皆諫王赦之。於是莊王卒赦解揚而歸之。
초왕의 아우들이 모두 초왕에게 사면하라고 간하니, 이에 초 장왕이 마침내 해양을 사면하여 돌려보내었다.
晉爵之為上卿。
진나라는 해양에게 벼슬을 주어 上卿으로 삼았다.
故後世言霍虎。
그 때문에 후세에 霍虎라고 불렀다.
4.
秦王以五百里地易鄢陵,鄢陵君辭而不受,使唐且謝秦王。
秦王이 500리의 땅을 가지고 鄢陵과 바꾸자고 하였는데, 鄢陵君은 거절하고 받지 않고, 唐且를 사신으로 보내 진왕에게 사과하라고 하였다.
▶ 秦王 : 秦 始皇 嬴政이다.
▶ 鄢陵 : 周나라 초의 鄢國으로, 춘추시대에 鄭나라에 예속되어 鄢邑이 되었다가 뒤에 鄢陵으로 고쳤다. 전국시대에는 韓나라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魏나라에 예속되어 安陵이라 하였다. 지금의 河南省 鄢陵縣 서북쪽에 있었다.
아래의 ‘鄢陵君’은 곧 安陵君으로, 魏 襄王이 그 아우에게 내려준 封號이다.
▶ 唐且(저) : ‘且’는 ‘雎’로도 쓴다.
전국시대 魏나라 사람으로, 鄢陵君의 신하이다. 전국시대 魏나라에는 두 사람의 唐且가 있었다.
하나는 魏 公子이고, 하나는 秦 昭王을 설득하여 魏나라를 구한 사람인데, 여기 나오는 唐且는 동일 인물이 아니다. 《戰國策 魏策》‧《史記 魏世家》
秦王曰:
「秦破韓滅魏,鄢陵君獨以五十里地存者,吾豈畏其威哉?
吾多其義耳。
今寡人以十倍之地易之,鄢陵君辭而不受,是輕寡人也。」
진왕이 말하였다.
“秦나라는 韓나라를 깨뜨리고 魏나라를 멸망시켰는데, 언릉군만 50리의 땅을 가지고 생존한 것이 어찌 내가 그 위세를 두려워하기 때문이겠느냐?
내가 그 道義를 훌륭하게 여겼을 뿐이다.
지금 寡人이 열 배의 땅을 가지고 바꾸자고 하는데 언릉군이 거절하고 받지 않으니 과인을 경멸함이로다.”
唐且避席對曰:
당저가 자리를 회피하며 대답하였다.
「非如此也。
“그렇지 않습니다.
夫不以利害為趣者,鄢陵君也。
利害를 가지고 강요할 수 없는 사람이 언릉군입니다.
▶ 趣(촉) : 어떤 일을 억지로 하게 한다는 뜻이다.
夫鄢陵君受地於先君而守之。雖復千里不得當,豈獨五百里哉?」
저 언릉군이 先君에게 땅을 받아 지키고 있으매, 다시 천 리의 땅을 가지고 바꾸자 하더라도 합당하지 않을 텐데, 어찌 단지 500리의 땅이겠습니까?”
秦王忿然作色,怒曰:
「公亦曾見天子之怒乎?」
진왕이 벌컥 성을 내어 안색이 변하더니 노하여 말하였다.
“公도 일찍이 天子가 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唐且曰:
「王臣未曾見也。」
당저가 말하였다.
“臣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 王臣 : 저본에는 ‘王’자가 있으나, 《群書拾補》에는 ‘主’자로 고치고 “‘主臣’은 惶恐하다는 뜻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說苑校證》에 “《戰國策》 〈魏策〉에 ‘臣未之聞也’로 되어 있고 ‘主’자가 없다.”라고 함에 따라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秦王曰:
「天子一怒,伏尸百萬,流血千里。」
진왕이 말하였다.
“천자가 한 번 분노하면 거꾸러진 시체가 백만에 흐르는 피가 천 리에 달한다.”
唐且曰:
「大王亦嘗見夫布衣韋帶之士怒乎?」
당저가 말하였다.
“王께서도 베옷에 가죽띠를 맨 勇士가 분노함을 본 적이 있습니까?”
秦王曰:
「布衣韋帶之士怒也,解冠徒跣,以頸顙地耳,何難知者。」
진왕이 말하였다.
“베옷에 가죽띠를 맨 용사가 분노하면 冠을 벗고 맨발로 머리를 땅바닥에 찧을 뿐이니, 알기에 무엇이 어려울 것인가.”
唐且曰:
당저가 말하였다.
「此乃匹夫愚人之怒耳,非布衣韋帶之士怒也。
“그것은 곧 보잘것없고 어리석은 남자의 분노일 뿐이고, 베옷에 가죽띠를 맨 용사의 분노는 아닙니다.
夫專諸刺王僚,彗星襲月,奔星晝出;
要離刺王子慶忌,蒼隼擊於臺上;
聶政刺韓王之季父,白虹貫日.
專諸가 王僚를 찔러 죽일 적에 살별의 광채가 달빛을 가리고 流星이 낮에 나타났고,
要離가 王子 慶忌를 찔러 죽일 적에 푸른 새매가 누대에 들이쳤고,
聶政이 韓王의 季父를 찔러 죽일 적에 흰 무지개가 태양을 가로질렀습니다.
▶ 專諸(저)刺王僚 : 專諸는 춘추시대 吳나라의 자객이다. 鱄設諸‧鱄諸‧剸諸로도 쓴다.
伍子胥의 추천으로 公子 光을 위해 吳王 僚를 시해하였으나 僚의 신하에게 살해되었다. 《春秋左氏傳 昭公 27년》‧《史記 吳泰伯世家‧刺客列傳 專諸》
吳王 僚는 춘추시대 오나라 군주로 餘昧의 아들이다. 季札이 왕위를 사양하자 왕에 추대되었으나 공자 광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史記 吳泰伯世家》
▶ 要離刺王子慶忌 : 要離는 춘추시대 吳나라 용사이며, 慶忌는 吳王 僚의 아들이다.
吳王 僚가 시해당한 후 경기는 화를 피해 衛나라로 달아났는데, 吳王 闔閭(公子 光)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경기를 죽이려 하였다.
요리는 합려에게 자신의 처자를 죽이게 하고 죄를 지어 衛나라로 도망온 것처럼 가장하여 경기에게 신임을 받은 뒤 경기를 죽이려다 실패하자 이를 수치로 여겨 자살하였다. 《呂氏春秋 忠廉》‧《吳越春秋 闔閭內傳》
▶ 聶政刺韓王之季父 : 聶政은 전국시대 韓나라 자객이고, 韓王의 季父는 韓 烈侯의 숙부 韓傀(字는 俠累)이다.
聶政이 살인하고 齊나라로 도피하여 도살장에 은거하였다.
韓나라 大夫 嚴遂가 國相 韓傀와 원수를 맺고 도망쳐 와서 聶政이 용감하다는 말을 듣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원수를 갚아달라고 요청하였다.
聶政은 老母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가 어머니가 죽자 嚴遂를 위해 韓傀를 찔러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였다. 《戰國策 韓策 2》‧《史記 刺客列傳 聶政》
此三人皆布衣韋帶之士怒矣, 與臣將四士,含怒未發,鋟厲於天。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베옷에 가죽띠를 맨 용사의 분노이고, 신과 함께 네 사람의 용사가 될 터이니, 분노를 품고 표현하기 전에 좋지 않은 징조가 하늘에 먼저 나타납니다.
▶鋟 : 새기다
▶厲 : 미워하다. 좋지 않은 일. 鬼神
士無怒即已,一怒伏尸二人,流血五步。」
용사가 분노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번 분노하면 쓰러진 시체가 2인이 되고 流血이 5步에 이를 터입니다.”
▶ 二人 : 저본에는 ‘一人’이나, 《群書拾補》에 ‘二’로 고쳤고, 《說苑校證》에 “《戰國策》 〈魏策〉에 ‘二’로 썼고, 《藝文類聚》 〈匕首〉와 《太平御覽》 권346‧437‧483‧779 등에 모두 똑같이 ‘二’로 썼다.”라고 함에 의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
即案其匕首起視秦王曰:
「今將是矣。」
즉시 그의 비수를 잡고 일어나 진왕을 노려보면서 말하였다.
“지금 당장 이렇게 하겠습니다.”
▶ 案其匕 : 저본에는 ‘其’자가 없으나, 《說苑校證》에 “《藝文類聚》 〈匕首〉와 《太平御覽》의 인용문에 모두 ‘其’가 있다.”라고 함에 따라 보충하였다.
秦王變色長跪曰:
「先生就坐,寡人喻矣。
秦破韓滅魏,鄢陵獨以五十里地存者,徒用先生之故耳。」
진왕의 안색이 허리를 세우고 꿇어앉으며 말하였다.
“선생은 자리에 앉으시오. 과인이 알게 되었소.
진나라가 한나라를 깨뜨리고 위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언릉군만 50리의 땅을 가지고 존립함은 단지 선생을 기용했기 때문이구려!”
5.
齊攻魯。子貢見哀公,請求救於吳, 公曰:
「奚先君寶之用?」
齊나라가 魯나라를 공격함에, 子貢이 魯 哀公을 뵙고 吳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고 청하니, 哀公이 말하였다.
“어찌 先君이 보물로 여기는 것을 쓰겠소?”
子貢曰:
「使吳責寶而與我師,是不可恃也。」
子貢이 말하였다.
“설사 吳나라가 우리의 보물을 요구하면서 우리 군대를 돕겠다고 하더라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於是以楊幹麋筋之弓六往。
이에 楊木과 고라니의 힘줄로 만든 좋은 활 여섯 벌을 가지고 吳나라에 갔다.
▶ 楊幹麋筋 : 楊幹은 楊木이다.
‘麻䈥’을 《說苑校證》에 孫詒讓의 《札迻》에 의거하여 ‘麋筋’으로 고친 것을 따랐다. 麋筋은 고라니의 힘줄이다.
子貢謂吳王曰:
「齊為無道,欲使周公之後不血食,且魯賦五百,邾賦三百,不識以此益齊,吳之利與?非與?」
子貢이 吳王에게 말하였다.
“齊나라가 無道하여 周公의 후예가 血食하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장차 魯나라의 兵賦 500과 邾나라의 兵賦 300을 齊나라에 더 보태준다면 吳나라에 유리할지 불리할지 모르겠습니다.”
▶ 血食 : 제사를 말한다. 고대에 희생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혈식이라 한다.
不血食은 周公의 후예인 魯나라를 멸망시킴을 이른다.
▶ 邾 : 춘추시대 魯나라의 附庸國이다. 뒤에 鄒로 고쳤고, 전국시대에 楚나라에 멸망되었다. 지금의 山東省 鄒城市 동남쪽에 있었다.
▶ 兵賦 : 고대에 천자가 신하에게 징발한 병역과 군용품을 말하며, 이는 밭 시스템과 결합하여 군사적으로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징발하는 방법이다. 아래를 참조하라.
军赋,亦称赋或兵赋,是指古代天子向臣属征发的兵役与军用品,是与田制相结合的 一种征调军事需用的人力、物力的办法。
古者以田赋出兵,赋与兵有联带关系。后世有商代“因井田而制军赋”的记载。周朝制定按田邑多少征集车马甲士的军赋制度。据《汉书·刑法志》记载,其制度是“凡起徒役,正卒毋过家一人,以其余为羡。九夫为井,四井为邑,四邑为丘,丘十六井,出戎马一匹,牛三头。四丘为甸,甸井,出戎马四匹,丘车一乘,牛十二头,甲士三人,步卒七十二人,干戈具备,是为乘马之法。”春秋后期鲁国作丘甲与郑国子产作丘赋,汉代的更赋、口赋、算赋,以及后代的田赋制度,是从军赋制度演变而来。
吳王懼,乃興師救魯。
吳王이 두려워하여 곧 군대를 일으켜 魯나라를 구원하였다.
諸侯曰:
「齊伐周公之後,而吳救之。」
제후들이 말하였다.
“齊나라가 周公의 후예를 토벌하려 하자 吳나라가 구원하였다.”
遂朝於吳。
마침내 吳나라에 朝見하였다.
6.
魏文侯封太子擊於中山,三年,使不往來,舍人趙倉唐進稱曰:
「為人子,三年不聞父問,不可謂孝, 為人父,三年不問子,不可謂慈。
君何不遣人使大國乎?」
魏 文侯가 太子 擊을 中山國에 封한 지 3년, 使者가 왕래하지 않으니, 舍人 趙倉唐이 태자에게 말하였다.
“아들로서 3년 동안 부친의 안부를 듣지 못한다면 孝子라고 말할 수 없고, 아버지로서 3년 동안 자식의 소식을 묻지 않는다면 慈父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主君께서는 어찌 사람을 파견하여 大國에 사자로 보내지 않습니까?”
▶ 魏文侯封太子擊於中山 : 魏 文侯는 본서 권1 〈君道〉 38 참고.
太子 擊은 본서 권8 〈尊賢〉 22 참고.
中山은 본서 권2 〈臣術〉 05 참고.
周나라 威烈王 20년(B.C.406년)에 위 문후가 태자 격을 보내 중산국을 멸하고 그를 그곳에 봉하여 지키게 하면서 趙倉唐으로 보좌하게 하였다.《史記 魏世家》
▶ 舍人 : 太子에게 속한 벼슬로, 곁에서 侍從하는 일을 맡았다.
太子曰:
「願之久矣。未得可使者。」
태자가 말하였다.
“원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可當한 사자를 찾지 못했소.”
倉唐曰:
「臣願奉使,侯何嗜好?」
趙倉唐이 말하였다.
“제가 명을 받들어 사자로 가겠습니다. 君侯께서 무슨 음식을 즐기고 무엇을 좋아하시는지요?”
太子曰:
「侯嗜晨鳧,好北犬。」
태자가 말하였다.
“君侯께서 晨鳧의 요리를 즐기시고 北犬을 좋아합니다.”
▶ 晨鳧(부) : 물오리이다. 언제나 이른 새벽에 날아오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北犬 : 북쪽 지방에서 나는 사냥개이다.
於是乃遣倉唐繰北犬,奉晨鳧,獻於文侯。
이리하여 趙倉唐을 파견하여 北犬을 끌고 晨鳧를 받들고 가서 文侯에게 바치게 하였다.
倉唐至,上謁曰:
「孽子擊之使者,不敢當大夫之朝,請以燕閒,奉晨鳧,敬獻庖廚,緤北犬,敬上涓人。」
趙倉唐이 도착하여 문후에게 알현하기를 청하였다.
“庶子 擊의 사자는 감히 大夫의 조정에 들 수 없기에, 한가히 계실 때 晨鳧를 받들어 삼가 庖廚에 바치고 北犬을 끌어다가 삼가 涓人에게 바치기를 청합니다.”
▶ 上謁 : 자기의 姓名을 통보하고 尊長에게 나아가 뵙는 일이다.
▶ 涓人 : 궁중을 청소하여 청결하게 하는 일을 맡은 近侍이다.
文侯悅曰:
「擊愛我,知吾所嗜,知吾所好。」
문후는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격이 나를 사랑하여 내가 즐기는 음식을 알고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아는구나.”
召倉唐而見之,曰:
「擊無恙乎?」
趙倉唐을 불러 만나고는 말하였다.
“격은 아무 탈 없는가?”
倉唐曰:
「唯唯。」
趙倉唐이 대답하였다.
“예예.”
如是者三,乃曰:
「君出太子而封之國君,名之,非禮也。」
이렇게 하기를 세 번, 이에 趙倉唐이 말하였다.
“임금이 태자를 내보내어 國君에 봉하시고 이름을 부름은 禮儀가 아닙니다.”
文侯怵然為之變容。問曰:
「子之君無恙乎?」
문후는 당황하여 안색을 고치고 물었다.
“그대의 주군은 아무 탈 없는가?”
倉唐曰:
「臣來時,拜送書於庭。」
趙倉唐이 말하였다.
“제가 올 때 뜰에서 절하며 편지를 보냈습니다.”
文侯顧指左右曰:
「子之君,長孰與是?」
문후가 측근들을 돌아보고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대 주군의 키는 이 중에서 누구와 같은가?”
倉唐曰:
「禮,擬人必於其倫,諸侯毋偶,無所擬之。」
趙倉唐이 말하였다.
“禮에 사람을 견줌은 반드시 그 무리 중에서 해야 하는데, 제후에게 짝이 없으매 견줄 곳이 없습니다.”
曰:
「長大孰與寡人。」
문후가 말하였다.
“키 큼이 寡人과 견주어 어떤가?”
倉唐曰:
「君賜之外府之裘,則能勝之,賜之斥帶,則不更其造。」
趙倉唐이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하사하신 바깥 창고의 갖옷을 입을 수 있었고, 하사하신 띠를 고쳐 만들지 않았습니다.”
▶ 斥帶 : 저본에는 ‘斤帶’이나, 《尙史》 권21‧《淵鑑類函》 권68-1‧《說苑校證》 등에 모두 ‘斥’으로 되어 있음을 따라 바로잡았다. 斥=尺
文侯曰:
「子之君何業?」
문후는 말하였다.
“그대의 주군은 무엇을 학습하는가?”
倉唐曰:
「業詩。」
趙倉唐이 대답하였다.
“《詩經》을 학습하고 있습니다.”
文侯曰:
「於詩何好?」
문후가 말하였다.
“《詩經》에서 무엇을 좋아하는가?”
倉唐曰:
「好晨風、黍離。」
趙倉唐이 말하였다.
“〈晨風〉章과 〈黍離〉章을 좋아합니다.”
▶ 晨風黍離 : 《詩經》의 두 篇名이다.
‘晨風’은 〈大雅〉의 편명인데, 새매의 일종이다.
‘黍離’는 〈王風〉의 편명인데, 기장이 늘어진 모양이다.
文侯自讀晨風曰:
「鴥彼晨風,鬱彼北林,
未見君子,憂心欽欽,
如何如何,忘我實多。」
문후가 스스로 〈신풍〉장을 읽었다.
“저 빨리 나는 신풍이여, 저 울창한 북쪽 숲속을 나네.
君子를 만나지 못했기에 근심하는 마음 서글퍼라.
어쩌면 좋을까! 어쩌면 좋을까! 참으로 나를 많이 잊었구나.”
▶ 鴥彼 : 저본에는 ‘鴆彼’이나, 《詩經》에 ‘鴥’로 되어 있음 따라 바로잡았다.
文侯曰:
「子之君以我忘之乎?」
문후가 말하였다.
“그대의 주군은 나를 잊었는가?”
倉唐曰:
「不敢,時思耳。」
趙倉唐이 말하였다.
“감히 잊지 못하여 때때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文侯復讀黍離曰:
「彼黍離離,彼稷之苗,
行邁靡靡,中心搖搖,
知我者謂我心憂,不知我者謂我何求?
悠悠蒼天,此何人哉?」
문후가 다시 〈서리〉장을 읽었다.
“저 기장들 늘어져 있는데, 저 피의 싹들은 자라고 있구나.
길을 가는 일 더디고 더디어, 내 마음 마구 울렁이누나.
나를 아는 사람은 내 마음 근심에 싸였다고 말하는데, 나를 모르는 사람은 내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하네.
아득히 먼 푸른 하늘이여, 이 어떤 사람인가?”
文侯曰:
「子之君怨乎?」
문후가 말하였다.
“그대의 주군은 나를 원망하는가?”
倉唐曰:
「不敢,時思耳。」
趙倉唐이 대답하였다.
“감히 원망하지 못하고 때때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文侯於是遣倉唐賜太子衣一襲,敕倉唐以雞鳴時至。
문후가 이에 趙倉唐을 보내면서 태자에게 옷 한 벌을 하사하고, 趙倉唐에게 닭이 울 무렵에 도착하라고 申飭하였다.
太子迎拜,受賜發篋,視衣盡顛倒。
태자가 일어나서 절하고 하사품을 받고 상자를 열어 옷을 보니 모두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 迎拜 : 저본에는 ‘起拜’이나, 《群書拾補》에 “《太平御覽》 권689에 의거하여 ‘迎’으로 고쳤다.”라고 함을 따라 바로잡았다.
太子曰:
「趣早駕,君侯召擊也。」
태자가 말하였다.
“재촉하여 일찍 수레를 준비하라. 君侯께서 나를 부르신다.”
倉唐曰:
「臣來時不受命。」
趙倉唐이 말하였다.
“臣이 올 때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太子曰:
태자가 설명하였다.
「君侯賜擊衣,不以為寒也.
欲召擊, 無誰與謀.
故敕子以雞鳴時至.
《詩》曰:
『東方未明,顛倒衣裳,顛之倒之,自公召之。」
“군후께서 나에게 옷을 하사하심은 추위를 막으라 함이 아니다.
나를 부르려 함은 함께 일을 의논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에게 닭이 울 무렵에 당도하라고 申飭하셨다.
《詩經》에 이르기를,
‘동방이 아직 밝지 않아서, 옷을 거꾸로 뒤집어 입었는가?.
거꾸로 뒤집어 입음은, 군후가 나를 불렀기 때문이라네.’라고 하였네.”
▶ 詩曰……自公召之 : 《詩經》 〈齊風 東方未明〉에 보인다.
遂西至謁。文侯大喜,乃置酒而稱曰:
「夫遠賢而近所愛,非社稷之長策也。」
마침내 서쪽으로 가서 문후를 뵈니, 문후가 크게 기뻐하여 酒宴을 베풀면서 말하였다.
“賢者를 멀리 보내고 사랑하는 사람만 친근함은 社稷을 위한 좋은 계책이 아니다.”
乃出少子摯,封中山,而復太子擊。
이에 작은 아들 摯를 내보내 중산국에 封하고 태자 격을 복귀시켰다.
故曰:
「欲知其子,視其友;
欲知其君,視其所使。」
그래서 일렀다.
“그 아들을 알려면 그의 벗을 보고,
그 임금을 알려고 하면 그가 보낸 使者를 보라.”
▶ 視其父 : ‘視其友’로 되어 있으나 속언과 맞지 않아 視其父로 고쳤다.
欲知其君 先視其臣 欲識其人 先視其友 欲知其父 先視其子<명심보감 성심편 하>
趙倉唐一使而文侯為慈父,而擊為孝子。
조창당이 한번 사자로 가자 문후는 慈父가 되고 태자 擊은 효자가 되었다.
太子乃稱:
「《詩》曰:
『鳳凰于飛,噦噦其羽,亦集爰止,藹藹王多吉士,維君子使,媚于天子。』 」
태자가 곧 詩를 읊어 칭송하였다.
“봉황이 날아오름이여, 날개 소리 퍼덕이더니, 그칠 데에 내려앉았네.
王室에 吉士가 많고 많으니, 君子가 사신 가서, 천자께 사랑을 받았네.”
▶ 詩曰……媚于天子 : 《詩經》 〈大雅 卷阿〉에 보인다.
舍人之謂也。
사인인 조창당을 이름이다.
7.
楚莊王欲伐晉,使豚尹觀焉。
楚 莊王이 晉나라를 공격하려고 豚尹을 보내어 晉나라에서 정황을 살펴보게 하였다.
▶ 豚尹 : 揚豚邑의 大夫이다.
《春秋左氏傳》 襄公 18년에 楚나라 벼슬에 揚豚尹宜라고 보이는데, 林堯叟의 注에 “揚豚邑의 大夫이니, 이름은 宜이다.”라고 하였다.
反曰:
「不可伐也。
其憂在上;
其樂在下。
且賢臣在焉,曰沈駒。」
돌아와서 말하였다.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 나라의 근심은 윗사람에게 있고,
그 나라의 즐거움은 아랫사람에게 있었습니다.
더구나 賢臣이 그 나라에 있으니 沈駒입니다.”
▶ 沈駒 : 춘추시대 晉나라 사람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明年,又使豚尹觀焉,反曰:
이듬해에 또 돈윤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니,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 觀焉 : 저본에는 ‘焉’이 없으나, 《說苑校證》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可矣。
“공격해도 되겠습니다.
初之賢人死矣。
전에 있던 현신은 죽었습니다.
諂諛多在君之廬者,其君好樂而無禮;
其下危處以怨上, 上下離心.
아첨하는 사람이 임금의 거처에 많고, 임금은 향락을 즐기면서 無禮하고,
아래 백성들은 위험에 처하여 윗사람을 원망하여 上下가 합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興師伐之,其民必反。」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면 그 백성이 틀림없이 반란을 일으킬 터입니다.”
莊王從之,果如其言矣。
莊王이 그의 말을 따르니, 정말 그의 말과 같았다.
8.
梁王贅其群臣而議其過,任座進諫曰:
「主君國廣以大,民堅而眾,國中無賢人辯士,奈何?」
梁王이 群臣을 모아놓고 그의 잘못을 토의하게 하자, 任座가 諫言을 올렸다.
“主君의 나라는 넓고도 크며 백성은 굳세고 많은데, 나라 안에 賢人과 辯士가 없으니, 어찌하시겠습니까?”
▶ 梁王贅其群臣 : 梁王은 곧 魏王이다. 贅는 ‘모으다, 소집하다’의 뜻이다.
王曰:
「寡人國小以狹,民弱臣少,寡人獨治之,安所用賢人辯士乎?」
왕이 말하였다.
“寡人의 나라는 작고 좁으며 백성은 나약하고 적어서 寡人이 혼자 다스리는데, 賢人과 辯士를 어디에 쓰겠소?”
任座曰:
임좌가 말하였다.
▶ 任座 : 전국시대 魏나라 신하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不然,
昔者齊無故起兵攻魯,魯君患之,召其相曰:
『為之奈何?』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 齊나라가 까닭 없이 군대를 일으켜 魯나라를 침공하자 魯君이 근심하여 그의 재상을 불러 물었습니다
‘어찌해야 하오?’
▶ 齊無故起兵攻魯 : 이 사실은 《春秋左氏傳》 僖公 26년에 보인다.
相對曰:
『夫柳下惠少好學,長而嘉智,主君試召使於齊。』
재상이 말하였습니다.
‘柳下惠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어른이 되어서는 지혜를 칭찬하매, 주군께서는 불러서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보십시오.’
▶ 柳下惠 : 춘추시대 魯나라 사람 展禽이다. 展은 氏이고 이름은 獲이며 字는 禽이다. 士師가 되어 刑獄을 담당하였다. 柳下에 살았고 시호가 惠이기 때문에 柳下惠라 일컫는다.
후세 사람들이 和聖으로 칭하였다.
《論語 衛靈公》‧《孟子 萬章 下》 본문에 齊侯와 나눈 말은 《春秋左氏傳》에는 展喜가 展禽(柳下惠)에게 듣고 가서 한 말로 되어 있으며, 내용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魯君曰:
『吾千乘之主也,身自使於齊,齊不聽。
夫柳下惠特布衣韋帶之士也,使之又何益乎?』
노군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千乘의 임금이오.
내 친히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더라도 제나라는 내 말을 듣지 않을 터이오.
저 유하혜는 베옷에 가죽띠를 띤 선비일 뿐이니, 사신으로 보내도 무슨 이익이 있겠소?’
相對曰:
『臣聞之,乞火不得不望其炮矣。
今使柳下惠於齊,縱不解於齊兵,終不愈益攻於魯矣。』
재상이 대답하였습니다.
‘臣이 듣기에, 불씨를 구걸하여 얻지 못하면 불을 지핌을 바라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유하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면 齊兵을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결국 노나라를 더욱 맹렬히 공격하지는 않게 될 터입니다.’
魯君乃曰:
『然乎?』
노군이 말하였다.
‘그렇소?’
相即使人召柳下惠來。
재상이 즉시 사람을 시켜내 유하혜를 불렀습니다.
入門,袪衣不趨。
유하혜가 문으로 들어와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는 종종걸음치지 않았습니다.
魯君避席而立,曰:
『寡人所謂飢而求黍稷,渴而穿井者,未嘗能以歡喜見子。
今國事急,百姓恐懼,願藉子大夫使齊。』
노군이 자리를 피하여 일어나 말하였습니다.
‘과인은 이른바 배가 고파야 黍稷을 찾고 목이 말라야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 기쁜 일로 그대를 만난 적이 없소.
지금 국사가 위급하여 백성이 두려워하고 있으니, 그대 大夫의 역량을 빌리려 하니 齊나라에 사신으로 가주시오.’
柳下惠曰:
『諾。』
乃東見齊侯。
유하혜가 ‘예.’라고 말하고 이에 동쪽으로 가서 齊侯를 만났습니다.
齊侯曰:
『魯君將懼乎?』
柳下惠曰:
『臣君不懼。』
齊侯가 ‘노군이 두려워하는가?’라고 묻자,
유하혜는 ‘신의 임금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齊侯忿然怒曰:
『吾望而魯城,芒若類夫亡國,百姓發屋伐木以救城郭.
吾視若魯君類吾國。子曰不懼,何也?』
제후가 벌컥 성을 내며 물었습니다.
‘내가 너희 노나라 城을 바라보니, 아득히 멸망하는 나라와 같아서 백성들이 집을 헐고 나무를 베어다가 성곽을 修築하고 있었다.
나는 노군을 우리나라의 백성처럼 여기는데, 그대가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니 무엇 때문인가?’
▶ 芒若 : ‘芒然’과 같다.
또 ‘芒然’은 ‘茫然’으로도 쓰는데, ‘아득하다’는 뜻이다.
▶ 類夫亡國 : 저본에는 ‘類失亡國’이나, 《說苑纂註》에는 “‘失’은 ‘夫’자인 듯하다.”하였고, 《說苑校證》에는 “‘失’자는 틀림없이 ‘夫’자의 잘못이다.”라고 함을 따라 ‘夫’로 바로잡았다.
柳下惠曰:
『臣之君所以不懼者,以其先人出周,封於魯,君之先君亦出周,封於齊.
相與出周南門,刳羊而約曰:
「自後子孫敢有相攻者,令其罪若此刳羊矣。」
臣之君固以刳羊不懼矣,不然,百姓非不急也。』
유하혜가 대답하였습니다.
‘신의 임금께서 두려워하지 않음은 그의 선조가 周나라에서 나와 魯에 봉해졌고, 君主(齊侯)의 先君 또한 주나라에서 나와 齊에 봉해졌기 때문입니다.
함께 주나라의 南門을 나올 적에 羊을 잡아 盟約하며 말하였습니다.
<지금 이후로 자손에 감히 서로 공격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이번에 양을 죽임과 같게 하겠다.>
신의 임금은 다만 양을 잡아 맹약한 일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뿐, 그렇지 않다면 백성이 다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齊侯乃解兵三百里。
제후가 이에 군대를 물리니 300리였습니다.
夫柳下惠特布衣韋帶之士,至解齊,釋魯之難,奈何無賢士聖人乎?」
유하혜는 베옷과 가죽띠의 선비일 뿐인데 제나라의 포위를 풀어 노나라의 危難을 해결함에 이르렀으미, 어찌 賢士와 聖人이 없겠습니까.”
9.
陸賈從高祖定天下,名為有口辯士,居左右,常使諸侯.
陸賈가 漢 高祖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매, ‘말재주가 있는 辯士’라고 불렀고, 황제의 측근에 있으면서 항상 제후에게 사신으로 나갔다.
▶ 陸賈 : 漢나라 楚 땅 사람이다.
高祖 劉邦을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南越王 趙佗를 설득하여 漢나라에 복속시켰다.
惠帝 때 陳平‧周勃과 협력하여 外戚 呂氏 일족을 축출하고 劉氏를 안정시켰다.
벼슬에서 물러나자 재산을 자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어 ‘陸賈分金’이라는 말이 생겼다.
벼슬은 太中大夫를 지냈고, 저서에 《新語》가 있다. 《史記 酈生陸賈列傳》‧《漢書 酈陸朱劉叔孫傳》
及高祖時,中國初定,尉佗平南越,因王之,高祖使陸賈賜尉佗印,為南越王。
高祖 때가 되어 중국이 처음 안정될 적에, 尉佗가 南越을 평정하고 인하여 王이라 일컬으니, 고조가 육가를 파견하여 위타에게 國王의 印章을 下賜하여 남월왕으로 삼으려 하였다.
▶ 尉佗 : 趙佗를 가리킨다.
西漢의 眞定 사람으로, 일찍이 秦나라 南海郡尉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尉佗로 부른다. 《史記 南越列傳》 佗는 《史記》에는 ‘他’로, 《漢書》에는 ‘它’로 되어 있다.
陸生至,尉佗椎結箕踞見陸生。
육가가 남월에 도착하니, 위타가 몽둥이 모양으로 상투를 틀고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육가를 접견하였다.
▶ 椎結箕踞 : 한 줌의 몽둥이 모양으로 상투를 틀고 다리를 키처럼 뻗고 앉는다는 말이다.
椎結은 椎髻‧魋結이라고도 하는데, 옛 南蠻의 首飾이다.
箕踞는 오만하여 예절을 지키지 않는 행태를 이른다. 《史記 南越列傳》‧《後漢書 西南夷列傳》
陸生因說佗曰:
육가가 인하여 위타를 설득하였다.
「足下中國人,親戚昆弟墳墓在真定。
“그대는 중국 사람이니, 친척‧형제의 墳墓가 眞定에 있소.
▶ 眞定 : 漢代에 지금의 河北省 지역에 두었던 縣으로, 治所는 正定縣 남쪽에 있었다. 《讀史方輿紀要 直隷 眞定府》
今足下棄反天性,捐冠帶,欲以區區之越,與天子抗衡為敵國,禍且及身矣。
그런데 그대는 天性을 위배하며 冠帶를 던져버리고, 보잘것없는 남월을 가지고 天子와 맞먹는 대등한 국가로 여기니, 재앙이 곧 자신에게 닥칠 터이오.
▶ 捐冠帶 : 禮義와 敎化를 포기했다는 말이다. 冠帶는 중국의 복식으로, 文明을 가리킨다.
▶ 抗衡 : 필적하다. 맞서다. 맞먹다
且夫秦失其政,諸侯豪傑並起,惟漢王先入關,據咸陽,項籍倍約,自立為西楚霸王,諸侯皆屬,可謂至彊。
또 秦나라가 失政하자 제후와 호걸들이 한꺼번에 일어났으나 오직 漢王께서 먼저 關中에 들어가 咸陽을 차지하였으되, 項籍이 약속을 저버리고 스스로 즉위하여 西楚霸王이 되어 제후들을 모두 예속시키니, 지극히 강대하다고 말할 만하였소.
▶ 咸陽 : 秦나라 때의 國都이다. 지금의 陝西省 西安市 동쪽, 渭城의 옛 성으로 秦 孝公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곳이다. 《史記 秦始皇本紀》‧《三秦記》
▶ 項籍倍約 : 項羽가 약속한 일을 위배했다는 말이다. 籍은 항우의 이름이다.
항우는 楚나라 義帝와 함께 秦나라를 쳐서 關中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을 關中王으로 封한다고 약속하였으나, 劉邦이 먼저 들어가자 이를 어기고 유방을 漢中王으로 삼아 巴蜀으로 내보냈다. 《史記 項羽本紀‧高祖本紀》
然漢王起巴蜀,鞭笞天下,劫諸侯,遂誅項羽,滅之。
그러나 한왕께서 巴蜀에서 起兵하여 천하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제후들을 위협하여 마침내 項羽를 죽이고 멸망시켰소.
五年之間,海內平定,此非人力,天之所建也。
5년 사이에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늘의 세움이오.
天子聞君王王南越,不助天下誅暴逆,將相欲移兵而誅王,天子憐百姓新勞苦,且休之,遣臣授君王印,剖符通使.
천자께서 君王이 남월에서 왕이라 일컬으며 천하를 구조하고 暴逆을 誅殺하지 않음을 아시니, 將相들이 군대를 파견하여 군왕을 주살하려고 하였으나, 천자께서는 백성의 새로운 노고를 가엾게 여기시어 우선 주살하자는 의견을 물리치시고, 臣을 파견하되 군왕의 인장을 주고 符信을 나누어 通使로 삼으셨소.
▶ 剖符通使 : 剖符는 諸侯를 分封하거나 功臣을 封賞함을 이른다. 고대에 竹符를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王室에 두고 한쪽은 受封者에게 주어 標信으로 삼았다.
通使는 서로 사신을 보내어 通好함을 말한다.
君王宜郊迎,北面稱臣,乃欲以新造未集之越,屈彊於此.
군왕은 의당 교외에서 영접하고 北面하여 신하를 일컬어야 하는데, 갓 건국하여 안정되지 못한 남월을 가지고 이곳에서 남에게 굽히려 하지 않고 있소.
▶ 新造未集 : 새로 막 나라를 세워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 屈彊 : 倔强과 같다. 억세고 거만하여 순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漢誠聞之,掘燒君王先人冢墓,夷滅宗族,使一偏將將十萬眾臨越,越則殺王以降漢,如反覆手耳。」
한나라 조정이 이런 사실을 알면, 군왕의 조상 무덤을 파내어 불태우고 종족을 전부 멸하고, 副將 한 명이 1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월을 토벌하게 할 터이니, 남월 사람들이 군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함을 손을 뒤집듯이 하겠소.”
▶ 夷滅 : 저본에는 ‘夷種’으로 되어 있으나, 《史記》 〈酈生陸賈列傳〉에 의거하여 ‘滅’로 바로잡았다.
▶ 殺王以降漢 : 저본에는 ‘殺王已降漢’이나, 《群書拾補》에 의거하여 ‘以’로 바로잡았다.
於是尉佗乃蹶然起坐,謝陸生曰:
「居蠻夷中久,殊失禮義。」
이에 위타가 벌떡 일어나 앉고 육가에게 사과하였다.
“蠻夷 속에서 산 지 오래되어 크게 예의를 잃었소.”
因問陸生曰:
「我孰與蕭何、曹參、韓信賢?」
인하여 육가에게 물었다.
“나와 蕭何‧曹參‧韓信을 비교하면 누가 낫습니까?”
▶ 蕭何曹參韓信 : 蕭何는 본서 권9 〈正諫〉 12 참고.
曹參은 漢나라 沛 땅 사람으로, 蕭何와 함께 漢 高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다.
처음에는 秦나라의 獄吏였는데, 뒤에 平陽侯에 봉해졌고, 소하의 추천으로 소하가 죽은 후 相國이 되었다. 소하의 정책을 따라 천하를 안정시켜 蕭‧曹라 병칭되었다. 《史記 曹相國世家》‧《漢書 蕭何曹參傳》
韓信은 漢나라 淮陽 사람으로, 한 고조를 도운 功臣의 한 사람이다.
처음에 항우를 섬기다가 중용되지 못하자 유방에게 귀의하여 소하의 추천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戰功을 세워 齊王이 되었다가 다시 楚王에 봉해졌다. 모반한다는 고발로 淮陰侯로 강등되고 무고당하여 呂后에게 살해되었다. 《史記 淮陰侯列傳》‧《漢書 韓彭英盧吳傳》
陸生曰:
「王似賢。」
육가가 대답하였다.
“군왕이 나은 듯합니다.”
復問:
「我孰與皇帝賢?」
위타가 다시 물었다.
“나와 황제를 비교하면 누가 낫습니까?”
陸生曰:
육가가 대답하였다.
「皇帝起豐沛,討暴秦,誅強楚,為天下興利除害,繼五帝三王之業,統理中國.
“황제는 豐沛에서 기병하시어 포악한 진나라를 토벌하고, 강력한 초나라를 誅滅하여 천하의 백성을 위해 이익을 일으키고 해를 제거하고, 五帝와 三王의 基業을 계승하시어 중국을 통치하시오.
▶ 豐沛 : 漢 高祖의 고향이 沛縣의 豐邑이기 때문에 일컫는 말이다. 이후 帝王의 고향을 일컫는 말로도 쓴다. 《論衡 命義》
▶ 五帝三王 : 고대의 聖德이 있는 제왕을 두루 이르는 말이다.
여러 가지 說이 있으나, 五帝는 黃帝(軒轅)‧顓頊(高陽)‧帝嚳(高辛)‧唐堯‧虞舜을 말하고, 三王은 夏禹‧商湯‧周 武王(또는 文王)을 말한다. 《大戴禮記 五帝德》‧《春秋穀梁傳 隱公 8년》‧《孟子 告子 下》
中國之人以億計,地方萬里,居天下之膏腴,人眾車輿,萬物殷富,政由一家,自天地剖判,未嘗有也。
중국의 인구는 억으로 헤아리고, 땅은 사방 1만 리이고, 천하의 비옥한 곳에 처하여 인구가 많고 수레를 타고 다니며, 온갖 물산이 매우 풍부하고 정치가 한 집에서 나오니, 천지가 개벽한 이후로 이런 적이 없었소.
今王眾不過數十萬,皆蠻夷,踦𨄅山海之間,譬若漢一郡,何遽乃比於漢王?」
그런데 군왕의 백성은 수십만에 지나지 않고 모두 미개한 蠻夷로서 험준한 산과 바닷가에 살고 있으니, 비유하면 漢나라의 1郡과 같은데, 漢王과 견줌이 어떠하겠소?”
▶ 數十萬 : 저본에는 ‘十’이 없으나, 《說苑校證》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 踦𨄅 : 崎嶇와 같다. 地勢나 도로가 평탄하지 않고 험함을 형용하는 말이다.
▶ 何遽 : 如何와 같다. 《史記》에는 ‘遽’가 ‘渠’로 되어 있는데, 뜻은 같다.
尉佗大笑曰:
「吾不起中國故王此,使我居中國,何遽不若漢。」
위타가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중국에서 기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왕 노릇하지만, 만일 중국에 있었다면 어찌 한왕보다 못하겠소.”
乃大悅陸生,留與飲數月。
이에 육가를 크게 좋아하여, 머물게 하고 함께 술을 마시기 몇 달이었다.
▶ 留與 : 저본에는 ‘與留’로 되어 있으나, 《史記》 〈酈生陸賈列傳〉과 《漢書》 〈酈陸朱劉叔孫傳〉에 ‘留與’ 임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曰:
「越中無足與語,至生來,令我日聞所不聞。」
위타가 말하였다.
“남월에 함께 談論할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선생이 오게 되어 나에게 날마다 듣지 못했던 말을 들려주었소.”
賜陸生橐中裝,直千金,佗送亦千金。
육가에게 자루에 담은 재물을 하사하니 가치가 천금이었고, 또 천금을 보내주었다.
▶ 橐中裝 : 주머니 안에 넣어 꾸린 물건이라는 뜻으로, 보물 따위의 재물을 이른다.
陸生拜尉佗為南越王,令稱臣,奉漢約。
육가가 위타를 임명하여 남월왕으로 삼아서, 稱臣하고 한나라와의 약속을 받들어 지키게 하였다.
歸報,高祖大悅,拜為太中大夫。
육가가 돌아가서 보고하자, 고조가 크게 기뻐하여 육가를 太中大夫에 임명하였다.
▶ 太中大夫 : 秦代에 두었던 벼슬 이름이다. 조정의 論議를 관장하였는데, 漢代 이후로 王朝마다 대부분 두었다. 《漢書 百官公卿表》
10.
晉楚之君相與為好會於宛丘之上。宋使人往之。
晉나라와 楚나라 임금이 서로 友好를 맺기 위하여 宛丘에서 會盟할 때 宋나라가 사람을 시켜 그곳에 가게 하였다.
▶ 宛丘 : 춘추시대 陳나라의 都邑이다. 지금의 河南省 淮陽縣에 있었다.
晉、楚大夫曰:
「趣以見天子禮見於吾君,我為見子焉。」
晉·楚의 大夫가 말하였다.
“그대가 속히 천자를 朝見하는 예로 우리 임금을 뵙는다면 우리들이 그대를 위해 우리 임금을 뵙게 해주겠소.”
使者曰:
「冠雖弊,宜加其上;
履雖新,宜居其下;
周室雖微,諸侯未之能易也。
師升宋城,猶不更臣之服也。」
宋나라 使臣이 말하였다.
“冠은 비록 해져도 머리 위에 써야 하고,
신은 비록 새것이라도 발밑에 신어야 하고,
周나라 王室이 비록 衰微하여도 諸侯가 그것을 바꿀 수는 없소.
당신의 군대가 宋나라의 성벽에 올라오더라도, 그래도 臣의 복장을 바꾸지 않을 터이오.”
▶ 臣猶不更臣之服也 : 나는 그래도 나의 복장을 바꾸지 않겠다는 뜻으로, 周 王室에 대한 신하의 태도를 바꾸지 않겠다는 말이다.
揖而去之,諸大夫懼然,遂以諸侯之禮見之。
揖하고 떠나니, 大夫들이 두려워하여 諸侯의 예를 갖추고 뵈었다.
▶ 懼然 : 저본에는 ‘懼然’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懼’로 고쳤고, 《說苑校證》에 “宋本에 ‘懼’로 되었다.”라고 함에 따라 ‘懼’로 바로잡았다.
11.
越使諸發執一枝梅遺梁王,梁王之臣曰韓子,顧謂左右曰:
「惡有以一枝梅,以遺列國之君者乎?
請為二三子慚之。」
越나라가 諸發을 시켜 一枝梅를 가지고 가서 梁王에게 드리니, 양왕의 신하 韓子가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어찌 一枝梅를 諸侯國의 군주에게 주는 경우가 있는가?
내가 그대들을 위해 그가 부끄러워하게 만들겠다.”
▶ 諸發 : 전국시대 越나라 사람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 韓子 : 전국시대 梁(魏)나라 大夫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出謂諸發曰:
「大王有命,客冠則以禮見,不冠則否。」
宮 밖으로 나가서 제발에게 말하였다.
“우리 대왕께서 명령하시기를 ‘손님이 冠을 썼거든 예의를 갖추어 만나고, 관을 쓰지 않았거든 만나지 말라.’라고 하셨소.”
諸發曰:
제발이 말하였다.
「彼越亦天子之封也。
“저희 월나라도 天子께서 封한 나라입니다.
不得冀、兗之州,乃處海垂之際,屏外蕃以為居,而蛟龍又與我爭焉。
冀州나 兗州 같은 中原을 얻지 못하고 바닷가 일대에 위치하여, 外族을 몰아내고 거주하자 蛟龍이 또 우리와 살 곳을 다툽니다.
是以剪髮文身,爛然成章以像龍子者,將避水神也。
이 때문에 머리를 짧게 깎고 文身하여 현란한 색채를 칠해 龍의 아들을 본뜸은 水神을 피하려는 것입니다.
今大國其命冠則見以禮,不冠則否。
그런데 大國에서 명령하기를, 관을 썼으면 예의를 갖추어 만나고 관을 쓰지 않았으면 만나지 말라고 하였다 합니다.
假令大國之使,時過弊邑,弊邑之君亦有命矣, 曰:
『客必剪髮文身,然後見之。』
於大國何如?
가령 대국의 사신이 한 때 우리나라를 방문함에 우리나라의 임금께서도 ‘손님은 반드시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한 다음에야 만나라.’라고 명령한다면 대국은 어떻겠습니까?
意而安之,願假冠以見,意如不安,願無變國俗。」
생각에 만일 편안하다면 관을 빌려 쓰고 만나려 하지만, 생각에 편안하지 않다면 나라의 풍속을 바꾸지 말기를 바랍니다.”
▶ 而 : ‘如’와 통용되니, 만약이라는 뜻이다.
梁王聞之,披衣出,以見諸發。令逐韓子。
양왕이 이 말을 듣고 옷을 걸치고 나와서 제발을 접견하고, 한자를 추방하라고 명령하였다.
《詩》曰:
「維君子使,媚于天子。」
若此之謂也。
《詩經》에 “君子가 사신 가서, 천자께 사랑받았네.”
라 하였으니, 이 같은 사람을 이른 것이다.
▶ 維君子使 媚于天子 : 《詩經》 〈大雅 卷阿〉에 보인다.
12.
晏子使吳,吳王謂行人曰:
「吾聞晏嬰蓋北方之辯於辭,習於禮者也.」
晏子가 吳나라에 사신으로 가니, 吳王이 行人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晏嬰은 言辭에 대개 북방의 말을 하고 禮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한다.”
▶ 行人 : 朝覲과 聘問하는 일을 관장하는 벼슬이다. 춘추전국시대 각 제후국에 두었다.
漢代에는 大鴻臚의 屬官에 行人이 있었는데, 뒤에 大行令으로 고쳤다.《周禮 秋官 訝士》‧《國語 晉語 8》
命儐者:客見則稱天子請見。
손님을 영접하는 관리에게 말하였다.
“손님을 만나거든 ‘天子가 만나기를 청한다’라고 말하여라.”
▶ 儐 : 옛날에 주인을 대신하여 손님을 접대하거나 禮를 돕는 사람을 말한다. 儐相이라고도 한다. 《禮記 文王世子》‧《周禮 春官 大宗伯》
▶ 〈請見〉 : 저본에는 ‘請見’ 두 글자가 없으나, 《晏子春秋》 〈內篇 雜 下〉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明日,晏子有事,行人曰:
「天子請見。」
이튿날 안자에게 일이 있는데 행인이 말하였다.
“천자께서 만나자고 청합니다.”
晏子憱然者三,曰:
「臣受命弊邑之君,將使於吳王之所,不佞而迷惑入于天子之朝,敢問吳王惡乎存?」
안자는 세 차례 안색이 변하더니 말하였다.
“臣이 우리 임금의 명을 받고 오왕의 처소에 사신 가려다가 불민하고 미혹되어 천자의 조정으로 들어왔습니다.
감히 묻나니 오왕은 어디에 계십니까?”
▶ 憱然 : 안색이 변하면서 얼굴 모습을 바꾸는 모양이다.
然後吳王曰:
「夫差請見。」
그 후로는 오왕이 이렇게 말하였다.
“夫差가 만나기를 청합니다.”
見以諸侯之禮。
제후의 예우로 안자를 접견하였다.
13.
晏子使吳,吳王曰:
「寡人得寄僻陋蠻夷之鄉,希見教君子之行,請私而毋為罪!」
晏子가 吳나라에 사신 갔는데, 吳王이 말하였다.
“寡人이 궁벽한 蠻夷의 지역에 살아서 君子의 품행을 배운 적이 드무니, 나의 사정을 이해하여 탓하지 마시오.”
▶ 僻陋 : 저본에는 ‘僻處’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陋’로 고쳤고, 《說苑校證》에 “明鈔本도 같고, 《晏子春秋》 〈外篇 下〉에도 같다.”라고 함을 따라 ‘陋’로 바로잡았다.
晏子憱然避位。
안자가 안색이 변하면서 자리에서 비켜 일어났다.
▶ 避位。吳 : 저본에는 ‘避位矣。’로 되어 있으나, 《晏子春秋》에 의거하여 ‘吳’로 바로잡았다.
吳王曰:
「吾聞齊君蓋賊以慢,野以暴,吾子容焉,何甚也?」
오왕이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齊나라 임금은 잔인하고 오만하며 거칠고 暴惡하다는데, 그대가 그것을 용인함이 어찌 그리 지나치시오?”
▶ 野以暴 : 저본에는 빠진 글자가 있으나, 《群書拾補》에 “印版에 탈락되었다.”하고, 《說苑校證》에 “宋本‧明鈔本에 모두 ‘暴’자로 썼는데, 《晏子春秋》와 부합한다.”라고 함을 따라 보충하였다.
晏子逡巡而對曰:
안자가 주저하다가 대답하였다.
「臣聞之,微事不通,麤事不能者必勞;
大事不得,小事不為者必貧;
大者不能致人,小者不能至人之門者必困,此臣之所以仕也。
“臣이 들으니, 미세한 일에 통하지 못하고 간략한 일에 능하지 못한 사람은 항상 고달프고,
큰일을 이루지 못하고 작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가난하고,
벼슬이 높은데 인재를 초치하지 못하고 벼슬이 낮은데 남의 집에 가지 않는 사람은 항상 곤경에 처한다고 하니, 이것이 신이 벼슬하는 방법입니다.
▶ 微事 : 저본에는 ‘精事’이고 《晏子春秋》에는 ‘微事’로 되어 있다.
▶ 仕 : 저본에는 ‘任’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仕’로 바로잡았고, 《說苑校證》에 “明鈔本도 같아 《晏子春秋》와 부합한다.”라고 함을 따라 ‘仕’로 바로잡았다.
如臣豈能以道食人者哉?」
신과 같으면 어떻게 도덕을 가지고 남의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晏子出。王笑曰:
「今日吾譏晏子也,猶裸而訾高撅者。」
안자가 밖으로 나가니, 오왕이 웃으며 말하였다.
“오늘 내가 안자를 기롱함은 옷을 벗은 자가 옷을 높이 걷어 올린 자를 꾸짖음과 같구나.”
▶ 撅 : 저본에는 ‘橛’로 되어 있으나, 《說苑校證》에 “兪樾의 《群書平議》에 橛은 撅의 誤字라고 하였다.”라고 한 것을 따라 ‘撅’로 바로잡았다.
‘撅’는 옷을 걷어 올린다는 뜻이다.
14.
景公使晏子使於楚。
齊 景公이 晏子를 시켜 楚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楚王進橘置削。晏子不剖而并食之。
楚王이 귤을 올리게 하면서 귤을 쪼개는 칼도 함께 두었으나 안자는 귤을 쪼개지 않고 껍질째 함께 먹었다.
楚王曰:
「橘當去剖。」
초왕이 말하였다.
“귤은 껍질을 벗기고 쪼개어 먹어야 하오.”
晏子對曰:
「臣聞之,賜人主前者,瓜桃不削,橘柚不剖。
今萬乘無教,臣不敢剖,然臣非不知也。」
안자가 대답하였다.
“臣이 들으니 임금의 앞에서 하사받으면 오이나 복숭아는 껍질을 벗기지 않고, 귤이나 유자[柚]는 쪼개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금 萬乘의 군주께서 명령하지 않으매 신이 감히 쪼개지 못하나, 신이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15.
晏子將使荊,荊王聞之,謂左右曰:
「晏子賢人也,今方來,欲辱之,何以也?」
晏子가 荊(楚)나라에 사신으로 가려고 함에, 楚王이 소식을 듣고 측근에게 말하였다.
“안자는 賢人으로 지금 곧 온다고 하니, 모욕을 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左右對曰:
측근의 신하가 대답하였다.
「為其來也,臣請縛一人過王而行。
“그가 왔을 적에 신이 한 사람을 결박하여 대왕의 앞을 지나가겠습니다.
▶ 爲 : ‘於’의 用法과 같다.
王曰
『何爲者?』
對曰
『齊人也.』
그때 왕께서 ‘무엇하는 사람인가?’ 하고 물으시면, 신이 ‘齊나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겠습니다.
王曰
『何坐?』
曰
『坐盜.』 」
왕께서 ‘무슨 죄를 지었는가?’ 하고 물으시면, 신이 ‘절도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대답하겠습니다.”
▶ 〈王曰……坐盜〉 : 저본에는 이 17자가 없으나, 《晏子春秋》 〈內篇 雜 下〉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於是荊王與晏子立語。有縛一人,過王而行。王曰:
「何為者也?」
이리하여 초왕과 안자가 서서 이야기를 나눌 때 한 사람을 결박하여 왕의 앞을 지나가자, 초왕이 물었다.
“무엇하는 자인가?”
對曰:
「齊人也。」
측근의 신하가 대답하였다.
“제나라 사람입니다.”
王曰:
「何坐?」
초왕이 물었다.
“무슨 죄를 지었는가?”
曰:
「坐盜。」
측근의 신하가 대답하였다.
“절도죄를 지었습니다.”
王曰:
「齊人固盜乎?」
초왕이 물었다.
“제나라 사람은 본래 도둑질을 잘하는가?”
晏子反顧之曰:
안자가 돌아보고 말하였다.
「江南有橘,齊王使人取之而樹之於江北,生不為橘,乃為枳,所以然者何?其土地使之然也。
“長江 남쪽에 귤나무가 있어서 齊王이 사람을 보내 그것을 가져다가 장강 북쪽에 심었는데, 생장하여 귤이 되지 않고 마침내 탱자가 되었는데, 그렇게 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곳의 토질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今齊人居齊不盜,來之荊而盜,得無土地使之然乎?」
그러니 제나라 사람이 제나라에서 살 때는 도둑질하지 않다가 楚나라에 오자 도둑질하였으니, 楚나라의 땅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겠습니까?.”
荊王曰:
「吾欲傷子而反自中也。」
초왕이 말하였다.
“내가 그대를 망신 주려고 하다가 도리어 자신을 맞혔소.”
16.
晏子使楚。
晏子短,楚人為小門於大門之側而延晏子。
晏子가 楚나라에 사신을 갔는데, 안자의 키가 작으매, 초나라 사람이 대문 곁에 작은 문을 만들어 안자를 맞아들이려 하였다.
晏子不入,曰:
「使至狗國者從狗門入。
今臣使楚,不當從此門入。」
안자가 들어가지 않고 말하였다.
“사자가 狗國에 가면 狗門으로 들어가겠지요.
그러나 臣은 초나라에 사신으로 왔으니, 이 문으로 들어감은 부당하오.”
▶ 門入 : 저본에는 ‘入’자가 없으나, 《晏子春秋》 〈內篇 雜 下〉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儐者更道從大門入見楚王。
儐者가 바꾸어 인도하기를 대문으로 들어가서 초왕을 뵙게 하였다.
▶ 儐者 : 본권 12 참고.
▶ 更道 : 저본에는 ‘道’자가 없으나, 《晏子春秋》 〈內篇 雜 下〉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道’는 ‘導’와 같다.
王曰:
「齊無人耶?」
초왕이 물었다.
“齊나라에는 사람이 없소?”
晏子對曰:
「齊之臨淄三百閭,張袂成帷,揮汗成雨。
比肩繼踵而在,何為無人?」
안자가 대답하였다.
“제나라 臨淄에는 300閭가 있으니, 사람들이 소매를 펼치면 장막을 이루고, 사람들이 흘리는 땀을 뿌리면 비를 이루며, 어깨와 어깨가 서로 부딪고 발꿈치와 발꿈치가 서로 닿을 정도로 많이 살고 있는데, 어찌 사람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 臨淄 : 춘추전국시대 齊나라의 수도이다. 옛터는 지금의 山東省 淄博市 臨淄北區에 있었다.
▶ 閭 : 옛날 백성들이 모여 사는 마을 거리로, 《周禮》 〈地官 閭胥〉와 《魏書》 〈元孝友傳〉에 “25家를 閭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尙書大傳》 권4에는 “8家가 隣이 되고, 3隣이 閭가 된다.”라고 하였다.
王曰:
「然則何為使子?」
초왕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대를 사신으로 보냈소?”
晏子對曰:
「齊命使各有所主。
其賢者使賢主,不肖者使不肖主。
嬰最不肖,故宜使楚耳。」
안자가 대답하였다.
“제나라는 사신을 임명할 적에 각각 주관하는 대상이 있으니, 현명한 사람은 현명한 군주에게 사신으로 가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현명하지 못한 군주에게 사신으로 갑니다.
저 嬰은 가장 현명하지 못하매 초나라에 사신으로 옴이 마땅합니다.”
17.
秦、楚轂兵,秦王使人使楚,楚王使人戲之曰:
「子來亦卜之乎?」
秦나라와 楚나라가 交戰할 때, 秦王이 사람을 파견하여 초나라에 사신을 보내니, 초왕이 사람을 시켜 진나라 사신을 희롱하였다.
“그대가 사신으로 올 때 점을 쳐보았소?”
▶ 轂(곡)兵 : 交戰한다는 뜻이다.
옛날 교전할 때 兵車의 수레바퀴 굴대가 서로 부딪치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다. 構兵이라고도 한다. 《孟子 告子 下》‧《孔子家語 賢君》
對曰:
「然!」
사신이 대답하였다.
“그렇소.”
「卜之謂何?」
다시 물었다.
“점을 친 결과가 어떠하였소?”
對曰:
「吉。」
사신이 대답하였다.
“吉하였소.”
楚人曰:
초나라 사람이 말하였다.
「噫!甚矣!子之國無良龜也。
“아, 심하구나. 그대의 나라에 좋은 거북이 없음이여!
王方殺子以釁鐘,其吉如何?」
우리 왕께서 그대를 죽여 釁鍾을 하려고 하는데, 그 길함이 어떻소?”
▶ 釁鐘 : 고대에 새로 鐘을 주조하면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종의 흠집이 있는 부분에 바르고 이어서 祭를 지내던 일을 말한다.《孟子 梁惠王 上》
使者曰:
사자가 말하였다.
「秦、楚轂兵,吾王使我先窺我死而不還,則吾王知警戒,整齊兵以備楚,是吾所謂吉也。
“진·초가 교전함에 우리 왕께서 나를 파견하여 먼저 敵情을 살피게 하였으매, 죽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 왕께서 경계해야 함을 알고 군대를 정돈하여 초나라를 방비할 터이니, 나의 소위 ‘길함’이오.
且使死者而無知也,又何釁於鐘,死者而有知也,吾豈錯秦相楚哉?
가령 죽어서 지각이 없는데 또 흔종한들 어떻고, 죽어서 지각이 있다면 내 어찌 진나라를 버려두고 초나라를 돕겠소?
我將使楚之鐘鼓無聲,鐘鼓無聲則將無以整齊其士卒而理君軍。
나는 장차 초나라의 鐘鼓를 소리가 나지 않게 할 터이니, 종고에 소리가 나지 않으면 장차 사졸들을 정돈하여 군주의 군대를 다스릴 방도가 없을 터이오.
夫殺人之使,絕人之謀,非古之通議也。子大夫試熟計之。」
남의 사신을 죽이고 남의 계책을 끊음은 옛날의 통용되는 의론이 아니니, 그대 大夫는 자세히 고려해 보시오.”
使者以報楚王。楚王赦之。此之謂「造命」。
초나라의 使者가 이 말을 초왕에게 보고하자 그를 사면하였으니, 이를 造命이라 이른다.
▶ 造命 : 命運을 고쳐 만들거나 장악한다는 말이다. 《新唐書 李泌列傳》
18.
楚使使聘於齊,齊王饗之梧宮。
楚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齊나라에 聘問하자, 齊王이 梧宮에서 잔치를 베풀어 사신을 접대하였다.
▶ 梧宮 : 齊나라의 궁전 이름인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使者曰:
「大哉梧乎!」
使者가 말하였다.
“크도다. 오동나무여!”
王曰:
「江漢之魚吞舟,大國之樹必巨,使何怪焉!」
제왕이 말하였다.
“長江과 漢水의 물고기는 커서 배를 삼키고, 大國의 나무는 거대하기 마련인데 사자는 어찌 괴이하게 여기는가?”
使者曰:
사자가 말하였다.
「昔燕攻齊,遵雒路,渡濟橋,焚雍門,擊齊左而虛其右,王歜絕頸而死於杜山, 公孫差格死於龍門.
“옛날에 燕나라가 齊나라를 공격할 적에 雒水 가의 길을 따라 進軍하여 濟水의 다리를 건너고 雍門을 불태우고서 제나라의 왼쪽을 습격하여 오른쪽을 텅 비게 하니, 王歜은 杜山에서 목이 잘려 죽었고 公孫差는 龍門에서 싸우다 죽었습니다.
▶ 燕攻齊 : 燕 昭王 28년(B.C.285)에 燕나라 장군 樂毅가 秦‧韓‧魏‧趙‧燕의 5국 연합군을 이끌고 齊나라를 공격하여 靈丘를 빼앗고, 이듬해에는 연나라 군대만을 거느리고 제나라 수도 臨淄까지 쳐들어가서 70여 城을 항복받은 일을 말한다.《史記 樂毅列傳》
▶ 雍門 : 齊나라 都城의 城門 이름이다. 燕나라 군대가 옹문 서쪽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옹문을 불태우고 수도 臨淄로 진입하였다.
▶ 王歜絶頸而死於杜山 : 王歜의 죽음은 본서 권4 〈立節〉의 21 참고. 杜山은 지금의 山東省 淄博市 臨淄 서쪽에 있는 社山이라고 한다.
▶ 公孫差格死於龍門 : 公孫差는 사람 이름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龍門은 여러 곳이 있으나,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飲馬乎淄、澠,定獲乎琅邪,王與太后奔于莒,逃於城陽之山.
연나라 군대가 淄水와 澠水에서 말에 물을 먹이고 琅邪에서 승리를 획득하니 왕과 太后가 莒로 달아나 城陽의 산중으로 도망쳤습니다.
▶ 淄澠(승) : 淄水와 澠水 두 물 이름이다.
치수는 지금의 山東省 淄博市 南魯山에서 발원하여 小淸河로 유입하는 淄河이다.
승수는 산동성 치박시 북동쪽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흘러 博興縣 남동쪽에서 時水로 흘러들었으나, 오래전에 없어졌다. 《讀史方輿紀要 山東 6 淸州府 淄水‧澠水》
▶ 琅邪 : 춘추시대 齊나라의 邑 이름이다. 秦代에는 郡을 두었다. 지금의 山東省 膠南市 琅邪臺 서북쪽에 있었다. ‘邪’는 ‘琊’로도 쓴다.《讀史方輿紀要 州域形勢 秦琅邪》
▶ 莒 : 춘추시대 齊나라의 邑 이름이다 지금의 山東省 莒縣에 있었다. 《春秋左氏傳 昭公 3년》
▶ 城陽 : 莒邑인데, 삼국시대 魏나라가 이 지역에 城陽郡을 두었다.《讀史方輿紀要 山東 淸州府》
當此之時,則梧之大何如乎?」
이때는 오동나무의 크기가 어느 정도였습니까?”
王曰:
「陳先生對之。」
제왕이 말하였다.
“陳선생이 대답하시오.”
▶ 陳先生 : 齊나라 大夫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陳子曰:
「臣不如刁勃。」
陳子가 말하였다.
“신은 刁㪍만 못합니다.”
▶ 刁㪍(조발) : 齊나라 大夫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王曰:
「刁先生應之。」
제왕이 말하였다.
“조선생이 응답하시오.”
刁勃曰:
조발이 말하였다.
「使者問梧之年耶?
“사자는 오동나무의 나이를 물으셨소?
昔者荊平王為無道,加諸申氏,殺子胥父與及兄。
옛날에 楚 平王이 무도하여 申氏들에게 몹쓸 짓을 하여 伍子胥의 아버지와 형을 죽였소.
▶ 荊平王 : 楚 平王이다. 본서 권4 〈立節〉 11 참고.
▶ 申氏 : 伍子胥이다. 子胥가 吳나라로 망명해오자, 吳王이 申 땅을 采邑으로 주어 申胥로 불렀기 때문에 이른다. 《國語》 〈吳語〉‧《越絶書》에는 모두 申胥로 일컬었다.
子胥被髮乞食於吳。闔廬以為將相。
오자서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吳나라에서 걸식하매, 吳王 闔閭가 將帥와 宰相으로 삼았지요.
三年,將吳兵復讎乎楚,戰勝乎柏舉,級頭百萬,囊瓦奔鄭,王保於隨。
3년이 되어, 吳軍을 거느리고 초나라에 복수하여 柏擧에서 싸워 승리하니, 백만 명의 머리를 베었고 대장 囊瓦는 鄭나라로 달아났으며, 초왕은 隨나라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소.
▶ 柏擧 : 춘추시대 楚나라의 땅 이름으로, 湖北省 麻城縣에 있었다.
B.C.506년에 초나라 군대가 吳나라 군대에게 대패한 곳이다. ‘擧’는 ‘莒’로도 쓴다.《春秋左氏傳 定公 4년》
▶ 囊瓦 : 춘추시대 楚 莊王의 아들로, 令尹을 지냈다. 昭王을 王으로 옹립하였고, 蔡‧唐‧吳와 전쟁하다가 패하여 鄭나라로 달아났다. 《春秋左氏傳 定公 4년》
▶ 隨 : 周나라에서 봉한 작은 나라 이름이다. 지금의 湖北省 隨州市에 있었다. 《春秋左氏傳 桓公 6년》
引師入郢,軍雲行乎郢之都。
군대를 이끌고 郢으로 들어가니 군대가 郢都에 구름처럼 몰려갔소.
▶ 郢 : 춘추시대 楚나라의 수도이다. 지금의 湖北省 荊州市 서북쪽 10리쯤의 紀南省에 있었다. 《春秋左氏傳 文公 10년》‧《史記 楚世家》
子胥親射宮門,掘平王冢,笞其墳,數其罪。曰:
『吾先人無罪而子殺之。』
오자서는 직접 초나라의 宮門에 사격하고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무덤의 시체에 매질하고 그의 죄를 책망하였소.
나의 先人에게 죄가 없는데 그대가 죽였다.’
士卒人加百焉,然後止。
사졸마다 백 번씩 때리게 하고 그만두었소.
當若此時,梧可以為其椨矣。」
이때는 오동나무의 크기가 활의 줌통을 만들 만하였겠지요.”
▶ 柎 : ‘弣’와 통용된다. 활의 줌통으로 활의 한가운데 손으로 쥐는 부분을 말한다.
19.
蔡使師強、王堅使於楚。
蔡나라가 師强과 王堅을 楚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 師强王堅 : 蔡나라의 두 신하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楚王聞之,曰:
「人名多章章者,獨為師強王堅乎?
趣見之,無以次.」
楚王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人名에는 분명하고 아름다운 것이 많은데, 유독 ‘군대가 강하고[師强]’ ‘왕이 굳세다[王堅]’인가?
빨리 접견하여 머물게 하지 말라.”
▶ 次 : ‘머물다, 지체한다’는 뜻이다.
視其人狀,疑其名而醜其聲,又惡其形。
그들의 모습을 보니 姓名이 의심스럽고 음성은 추하고 또 얼굴은 혐오스러웠다.
▶ 醜其聲 又惡其形 : 《說苑纂註》에 澀井孝德의 說을 인용하여 “‘聲’과 ‘形’의 두 글자가 잘못 놓였다.”라고 하였다.
楚王大怒曰:
「今蔡無人乎?國可伐也。
有人不遣乎?國可伐也。
端以此試寡人乎?國可伐也。」
초왕이 크게 노하여 말하였다.
“지금 채나라에는 인재가 없는가? 나라를 공격해야겠구나.
인재가 있는데도 보내지 않았는가? 나라를 공격해야겠구나.
도대체 이들로써 寡人을 떠보았는가? 나라를 공격해야겠구나.”
▶ 試寡 : 저본에는 ‘誡寡’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試’로 고쳤고, 《說苑纂註》에는 “一本에 ‘試’로 되어 있다.”라고 함에 의거하여 ‘試’로 고쳤다.
故發二使,見三謀伐者蔡也。
그러므로 두 사람의 사신을 파견하여, 세 가지 공격을 모의할 까닭을 제공한 것은 채나라이다.
20.
趙簡子將襲衛,使史黯往視之,期以一月六月而後反。
趙簡子가 衛나라를 장차 습격하려고 史黯을 보내어 정황을 시찰하게 하면서 한 달로 기약하였으나, 6개월이 되고 나서 돌아왔다.
▶ 趙簡子 : 본서 권1 〈君道〉 35 참고.
▶ 史黯 : 본서 권8 〈尊賢〉 36 참고.
▶ 月 : 저본에는 ‘日’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月’로 바로잡았고, 《說苑校證》에 “《北堂書鈔》 권40의 인용문에 ‘月’자로 되어 있고, 《呂氏春秋》 〈召類〉에도 ‘月’로 되어 있다.”라고 함에 의거하여 ‘月’로 바로잡았다.
簡子曰:
「何其久也?」
簡子가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래 걸렸소?”
黯曰:
사암이 말하였다.
「謀利而得害,由不察也。
“이익을 도모하나 손해를 얻음은 자세히 살피지 않기 때문입니다.
今蘧伯玉為相,史鰌佐焉,孔子為客,子貢使令於君前甚聽。
지금 蘧伯玉이 재상이고 史鰌가 보좌하며, 孔子가 賓客이 되고 子貢은 衛君의 앞에서 명령을 수행하여 그의 말을 잘 따르고 있습니다.
▶ 蘧伯玉 : 본서 권6 〈復恩〉 18 참고.
▶ 史鰌 : 본서 권2 〈臣術〉 22 참고.
《易》曰:
『渙其群,元吉。』
渙者賢也,群者衆也,元者吉之始也。
《周易》에
‘그 무리를 흩어버린지라 크게 吉하다.’라고 하였으니,
흩어버린 것은 賢者이고, 무리는 여러 사람이며, 元은 길한 시초입니다.
▶ 易曰……元吉 : 《周易》 渙卦 六四爻辭에 보인다.
▶ 衆 : 저본에는 ‘象’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衆’으로 바로잡았고, 《說苑纂註》에 “《呂氏春秋》 〈召類〉에 ‘衆’으로 되어 있다.”라고 함에 의거하여 ‘衆’으로 바로잡았다.
渙其群,元吉者,其佐多賢矣。」
‘그 무리를 흩어버린지라 크게 吉하다.’라 함은 보좌하는 사람 중에 賢者가 많다는 뜻입니다.”
簡子按兵而不動耳。
간자가 군사를 멈추고 출동하지 않았다.
21.
魏文侯使舍人毋擇,獻鵠於齊侯。
魏 文侯가 舍人 毋擇을 파견하여 齊侯에게 고니를 바치게 하였다.
▶ 魏文侯使舍人毋擇 : 魏 文侯는 본서 권1 〈君道〉 38 참고.
毋擇은 魏나라 사람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舍人은 본래 宮中의 일을 관장하는 官命이었으나, 전국시대와 漢나라 초기에 王公과 貴人의 私家에 두었던 벼슬이다.《周禮 地官 舍人》‧《戰國策 楚策 4》‧《史記 廉頗藺相如列傳》
毋擇行道失之。
무택이 가는 도중에 고니를 놓쳐버렸다.
徒獻空籠,見齊侯曰:
다만 빈 새장만 바치고 제후를 뵙고 말하였다.
「寡君使臣毋擇獻鵠,道飢渴,臣出而飲食之.
“우리 임금께서 臣 무택에게 고니를 바치게 하셨는데, 도중에 배가 고프고 목말라 하기에 신이 새장에서 꺼내어 물을 마시게 하고 모이를 먹였습니다.
而鵠飛沖天,遂不復反。
그러자 고니가 하늘로 날아올라 끝내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念思非無錢以買鵠也,惡有為其君使,輕易其弊者乎?
생각해보니, 돈이 없어서 고니를 사지 못함 아니지만, 어찌 임금의 사신으로서 그 폐백을 경솔히 바꾸겠습니까?
念思非不能拔劍刎頭,腐肉暴骨於中野也,為吾君貴鵠而賤士也。
생각해보니, 劍을 뽑아 목을 찌르지 못함은 아니지만, 들판에서 살을 썩히고 해골을 나뒹굴게 하면 우리 임금이 고니를 중시하고 사람을 천시한다고 여길 터입니다.
念思非敢走陳、蔡之間也,惡絕兩君之使.
생각해 보니, 감히 陳나라나 蔡나라로 달아나지 못함은 아니지만, 두 임금의 사신 왕래를 단절시킴을 싫어하였습니다.
故不敢愛身逃死,來獻空籠,唯主君斧質之誅。」
그 때문에 감히 몸을 아껴 죽음을 피하지 못하므로, 와서 빈 새장을 바치오니, 主君께서 斧鑕의 刑을 주시기 바랍니다.”
▶ 斧鑕 : 고대의 刑具로, 斧는 도끼이고, 鑕은 도끼 모탕이다.
죄인을 모탕 위에 올려놓고 도끼로 찍어 죽였다.
《晏子春秋 問 下》
齊侯大悅曰:
「寡人今者得茲言三, 賢於鵠遠矣。
寡人有都郊地百里,願獻於大夫以為湯沐邑。」
齊侯가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寡人이 지금 이 말을 들으니, 고니를 얻은 것보다 훨씬 낫구려.
과인에게 都城 교외에 사방 백 리의 땅이 있으니, 大夫에게 주어 湯沐邑으로 삼게 하고 싶소.”
▶ 湯沐邑 : 周나라 시대 諸侯가 天子를 朝見할 때 머물며 목욕재계하는 비용을 충당하라고 주던 封地이다. 《禮記 王制》
毋擇對曰:
「惡有為其君使而輕易其弊,而利諸侯之地乎?」
무택이 대답하였다.
“어찌 임금의 사신이 되어 그 폐백을 경솔히 바꾸고 諸侯의 땅을 私利로 챙기겠습니까?”
遂出不反。
마침내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說苑' 카테고리의 다른 글
說苑(설원) 제14권 至公(지공) (0) | 2023.12.15 |
---|---|
說苑(설원) 제13권 權謀(권모) (0) | 2023.12.12 |
說苑(설원) 제11권 善說(선설) (3) | 2023.12.03 |
說苑(설원) 제10권 敬愼(경신) (1) | 2023.11.28 |
說苑(설원) 제9권 正諫(정간) (2) | 2023.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