賢士는 국가의 棟樑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篇의 大義이다.
임금으로서 천하를 태평스럽게 다스려 後世에 榮名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어진 이를 존경하고 선비를 예우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尊賢에 대한 史料를 많이 뽑아 이를 설명하였다.
대체로 어진 이는 출신이 미천한 경우가 많으니 임금은 사람을 알아보는 眼目으로 출신의 貴賤高下로써 人才를 단정해서는 안 됨을 천명하였다.
어진 이가 중요한 것은 임금의 결함을 메워주어 功業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임금이 어진 이를 대할 적에는 깊이 믿어 의심하지 않고 전력으로 지지해야 하며, 平時에 어진 이를 厚待하여야 급박한 일이 닥쳤을 때 죽음을 아끼지 않고 보답하며, 어진 이를 쉽게 죽여서는 안 되며, 어진 이가 망명하는 임금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원망하지 말고 자신이 어진 이의 의견을 따르지 않아 도망하게 된 것을 반성해야 한다는 등의 사례를 모아 어진 이를 존중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1. 賢臣을 존중하고 선비를 겸허하게 대하여야 한다.
人君之欲平治天下而垂榮名者,必尊賢而下士。
군주로서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려 榮名을 후세에 드리우려는 자는 반드시 賢者를 존중하고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易》曰:
「自上下下,其道大光。」
又曰:
「以貴下賤,大得民也。」
<周易>에
“지위가 높은 사람이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몸을 낮추니 그 道가 크게 빛난다.”라고 하였고,
또 “존귀한 사람이 미천한 사람에게 몸을 낮추니 백성의 마음을 크게 얻는다.”라고 하였다.
夫明王之施德而下下也,將懷遠而致近也。
현명한 임금이 은덕을 베풀면서 아랫사람에게 몸을 낮춤은 遠方의 사람을 懷柔하고 근방의 사람을 오게 함이다.
夫朝無賢人,猶鴻鵠之無羽翼也,雖有千里之望,猶不能致其意之所欲至矣
조정에 賢人이 없음은 기러기와 고니에 날개가 없음과 같아서, 비록 천 리를 날아가려는 소망이 있어도, 그 마음이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 이를 수 없음과 같다.
是故游江海者託於船,致遠道者託於乘,欲霸王者託於賢;
伊尹、呂尚、管夷吾、百里奚,此霸王之船乘也。
이 때문에 강과 바다를 유람하는 자는 배에 의지하고, 먼길을 가는 사람은 수레에 의지하며, 霸王이 되려는 사람은 현인에 의지하나니,
伊尹‧呂尙‧管夷吾‧百里奚는 霸王의 배와 수레이었다.
釋父兄與子孫,非疏之也;
任庖人釣屠與仇讎僕虜,非阿之也;
持社稷立功名之道,不得不然也。
父兄과 자손을 임용하지 않음은 疎遠하게 대함이 아니며,
요리사‧낚시꾼‧백정과 원수‧노예‧포로까지도 임용함은 그들에게 아부함이 아니니,
사직을 유지하고 공명을 세우는 方道로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猶大匠之為宮室也,量小大而知材木矣,比功效而知人數矣。
뛰어난 목수가 집을 지을 때 집의 크기를 헤아려 재목을 파악하고, 효능을 측정하여 인원수를 앎과 같다.
是故呂尚聘而天下知商將亡,而周之王也;
管夷吾,百里奚任,而天下知齊秦之必霸也,豈特船乘哉!
이 때문에 呂尙을 초빙하자 천하 사람들이 商나라가 장차 망하고 周나라가 왕 노릇할 줄을 알았으며,
管夷吾와 百里奚를 임용하자 천하 사람들이 齊나라와 秦나라가 반드시 霸者가 될 줄 알았으니 어찌 단지 배와 수레이었겠는가!
夫成王霸固有人,亡國破家亦固有人;
왕업과 霸業을 이룸에 본래 사람이 있었고, 나라와 집을 망침에도 본래 사람이 있었다.
桀用于莘,紂用惡來,宋用唐鞅,齊用蘇秦,秦用趙高,而天下知其亡也;
桀이 于莘을 등용하고, 紂가 惡來를 등용하고, 宋나라가 唐鞅을 등용하고, 齊나라가 蘇秦을 등용하고, 秦나라가 趙高를 등용하자, 천하 사람이 그들이 망할 줄 알았다.
非其人而欲有功,譬其若夏至之日而欲夜之長也,射魚指天而欲發之當也;
적임자가 아닌데도 공로가 있기를 원함은, 비유하자면 夏至날에 밤이 길기를 바라고, 하늘을 향해 물고기를 쏘면서 發射가 적중하기를 바람과 같다.
雖舜禹猶亦困,而又況乎俗主哉!
비록 舜과 禹조차도 곤란할 텐데 더구나 세속의 군주임에랴!
▶ 垂榮名者 : 영광된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람.
▶ 尊賢而下士 : 賢臣을 존중하고 선비를 겸허하게 대하다. ‘下’는 자기를 낮추다.
▶ 士 : 士人. 학식이 있되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
▶ 自上下下, 其道大光 : <周易> 64괘 중 42괘인 益卦의 彖傳에서 인용한 것이다.
“益,損上益下,民說无疆. 自上下下,其道大光. : <益>은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해주니 백성이 기뻐함에 끝이 없고,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니 그 도가 크게 빛난다.”
▶ 以貴下賤, 大得民也 : <周易> 屯卦 初九의 象傳에서 인용한 것이다.
“象曰 雖磐桓 志行正也. 以貴下賤 大得民也. : 상에 가로대 비록 제자리에서 맴도나 뜻이 바른 것을 행하며 ‘귀함으로써 천한 데에 내리니 크게 백성을 얻도다.’”
▶ 鴻鵠 : 큰 기러기와 고니.
▶ 百里奚 : 춘추시대 秦나라의 재상으로, 字는 井伯이며 宛 사람이다. 맹자 만장에 ‘백리해는 스스로 진나라의 희생을 기르는 사람에게 다섯 마리의 羊의 가죽을 받고 자기를 팔아, 소먹이는 자가 되어서 秦 穆公에게 벼슬을 구하였다.’라고 하였다. <孟子 萬章上 9>
▶ 釋 : 버리고 돌보지 않다. 곧 멀리하여 중용하지 않음을 말한다.
▶ 任庖人釣屠與仇讐僕虜 : 요리사‧낚시꾼‧백정‧원수‧노예‧포로를 임용하다. 伊尹은 탕왕의 대신인 庖人였으며, 呂尙은 渭水에서 낚시질하였던 낚시꾼이며 한때 백정 일을 했었다. 管仲은 일찍이 齊桓公을 죽이려고 환공의 띠쇠[鉤]를 활로 쏘아 맞혔다 하여 원수로 삼았고, 百里奚는 포로로 잡혔었고 또 시집가는 晉獻公의 딸을 모시고 가는 종[잉신]이었기 때문에 僕虜라 하였다.
▶ 比 : 측정하다.
▶ 功效 : 수량과 길이. <여씨춘추>에는 ‘功丈’으로 기록하고 있다.
▶ 于莘 : 干辛. 夏 桀王 때의 奸臣.
▶ 惡來 : 은나라 말기 紂王의 佞臣으로 힘이 세었고 자신이 가진 재주로 비렴과 함께 제신을 섬겼으며, 남을 헐뜯기를 좋아해서 제신과 제후 간의 관계가 갈수록 멀어졌다고 한다. 주 무왕이 은나라를 공격하자 출정하였다. 목야대전에서 패하고 붙잡혀 처형되었다.
▶ 唐鞅 : 전국시대 宋康王의 재상.
▶ 蘇秦 : 전국시대의 종횡가. 齊나라의 재상이었다.
▶ 趙高 : 秦나라 때의 宦官.
2-1. 춘추시대의 賢臣
春秋之時,天子微弱,諸侯力政,皆叛不朝;
춘추시대에 천자가 미약하고 제후들이 무력으로 정치하니, 모두 천자를 배반하고 朝見하지 않았으며,
眾暴寡,強劫弱,南夷與北狄交侵,中國之不絕若線。
군사가 많은 자는 적은 자를 업신여기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겁박하고, 南夷와 北狄이 번갈아 침입하매 중국이 멸망하지 않음이 실낱같았다.
桓公於是用管仲、鮑叔、隰朋、賓胥無、甯戚,三存亡國,一繼絕世,救中國,攘戎狄,卒脅荊蠻,以尊周室,霸諸侯。
齊桓公이 이때 管仲‧鮑叔‧隰朋‧賓胥無‧甯戚 등을 등용하여 망해가는 나라를 세 번 존속시키고 끊어지는 세대를 한 번 이어주었으며, 中原의 제후국을 구원하고 戎狄을 물리쳤으며, 마침내 荊蠻을 압박하여 주나라 왕실을 높이고 제후의 霸者가 되었다.
晉文公用咎犯、先軫、陽處父,強中國,敗強楚,合諸侯,朝天子,以顯周室。
晉文公이 咎犯‧先軫‧陽處父 등을 등용하여, 중원의 제후국을 강력하게 하고 강대한 초나라를 패퇴시키고, 제후와 연합하여 천자에게 조회하여, 주나라 왕실을 顯彰하였다.
楚莊王用孫叔敖、司馬子反、將軍子重,征陳從鄭,敗強晉,無敵於天下。
楚莊王은 孫叔敖‧司馬子反과 장군 子重 등을 등용하여 陳나라를 토벌하고 鄭나라를 복종시켰으며, 강성한 晉나라를 패배시켜 천하에 상대할 적수가 없었다.
秦穆公用百里子、蹇叔子、王子廖及由余,據有雍州,攘敗西戎。
秦穆公은 百里子‧蹇叔子‧王子廖와 由余 등을 등용하여 雍州를 차지하고 西戎을 물리쳤다.
吳用延州萊季子,并翼州,揚威於雞父。
吳나라는 延州來季子를 등용하여 冀州를 겸병하고 雞父에서 위세를 떨쳤다.
鄭僖公富有千乘之國,貴為諸侯,治義不順人心,而取弒於臣者,不先得賢也。
鄭僖公의 부유함은 千乘의 나라를 소유하였고, 존귀함은 제후이었으나, 정치의 뜻이 백성의 마음을 따르지 않아 신하에게 시해당하였음은 賢者를 얻음을 우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至簡公用子產、裨諶、世叔、行人子羽,賊臣除,正臣進,去強楚,合中國,國家安寧,二十餘年,無強楚之患。
鄭簡公에 이르러 子産‧裨諶‧世叔과 行人 子羽를 등용하여 賊臣을 제거하고 正臣을 임용하여 강한 초나라를 물리치고 중원의 제후국과 연합하니, 국가가 평안하여 20여 년 동안 강한 초나라의 환란이 없었다.
故虞有宮之奇,晉獻公為之終夜不寐;
楚有子玉得臣,文公為之側席而坐,遠乎賢者之厭難折衝也。
그래서 虞나라에 宮之奇가 있음에 晉獻公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초나라에 子玉得臣이 있음에 晉文公이 그 때문에 자리의 옆에 앉았으니,
심원하구나. 어진 이가 환난을 극복하고 적을 제압함이여!
夫宋襄公不用公子目夷之言,大辱於楚;
曹不用僖負羈之諫,敗死於戎。
宋襄公은 公子目夷의 말을 채용하지 않아 초나라에 큰 치욕을 당했고, 曹나라 군주는 僖負羈의 간언을 쓰지 않아 戎에게 패하여 죽고 말았다.
故共惟五始之要,治亂之端,在乎審己而任賢也。
그래서 五始의 요체와 治亂의 단서를 공손히 생각해야 하니, 그것은 자신을 자세히 살피고 어진 이를 임용함에 달려 있다.
國家之任賢而吉,任不肖而凶,案往世而視己事,其必然也,如合符.
국가가 賢者를 임용하면 길하고 불초한 사람을 임용하면 흉하니, 지나간 왕조를 고찰하고 자신의 일을 살펴보면 그 必然은 符節을 맞춘 듯하다.
此為人君者,不可以不慎也。
이것이 군주 된 자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 南夷 : 남쪽 변방 지역의 소수 민족.
▶ 北狄 : 西戎이라고 하며 주로 감숙성 일대에 거주하던 이민족.
▶ 隰朋 : 제나라의 대부.
▶ 賓胥無 : 賓須無. 춘추시대 齊桓公 때의 현신.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죄 없는 사람을 무함하지 않았다.
▶ 甯戚 : 전국시대 衛나라 사람으로 제나라 관중의 도움으로 제환공을 만나 공경의 벼슬하게 되었다. 甯戚이 쇠뿔을 두드리며 商歌(:飯牛歌)를 부르다가 齊桓公에게 인정을 받아 등용되었다.
▶ 三存亡國 : 망해가는 세 나라를 존속시키다. 세 나라는 魯‧衛‧邢나라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19년>
▶ 一繼絶世 : 제환공이 실권을 잃어버린 東周 왕실을 대신해 회맹을 거행하였다.
▶ 戎狄 : 중국의 서쪽 이민족을 戎이라 하고, 북쪽 이민족을 狄이라 하였다.
▶ 荊蠻 : 楚나라의 본래 이름으로 현재의 湖北省이 있는 장강 중류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나라.
▶ 咎犯 : 舅犯. 진문공 중이의 외삼촌 狐偃. 重耳의 어머니는 翟나라 狐氏의 딸이다. 문공이 망명하여 여러 나라를 떠돌 때 19년 동안 고락을 함께하였으며, 문공이 즉위하여 霸者가 될 때까지 많은 공을 세웠다.
▶ 先軫 : 晉나라 下軍의 副將 原軫. 晉나라의 뛰어난 전략가이자 책사. 晉文公이 망명함에 보필한 신하이며, 군사와 전술 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유명한 城濮 전에서 成得臣이 이끈 초나라의 대군을 궤멸시킴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 陽處父 : 춘추시대 晉나라 太傅. 진양공 때 중군좌가 되었는데 양공이 죽은 뒤 中軍師 賈季(:狐射姑)에게 살해되었다.
▶ 孫叔敖 : 楚나라 期思縣 潘鄉 사람으로 蒍敖, 蒍艾獵, 蒍饒라고도 일컬어진다. 姓은 羋, 씨는 蔿, 이름은 敖, 자는 孫叔이다. 春秋 시기 楚나라의 명재상으로 水利兵法에 모두 큰 공헌을 남겼다. <史記 循吏列傳>
▶ 司馬子反 : 子反. 초장왕의 동생으로 초나라의 司馬. 이름은 側, 字는 子反이다. 莊王을 따라 晉나라 군대를 邲에서 패배시켰다.
▶ 將軍子重 : 子重. 초목왕의 아들이며 楚莊王의 아우인 公子嬰齊로 字가 子重이다. 초장왕17년(기원전 597년) 자중이 초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와의 邲전투에서 진나라를 대패시켰다.
▶ 百里子 : 百里傒 또는 百里奚. 춘추시대 虞나라 출신으로 자는 井伯이다. 우나라의 大夫로 있다가 晉獻公이 우나라를 멸망시키자 포로가 되어 晉나라에 들어왔다. 晉나라가 穆姬를 秦나라에 시집보낼 때 陪臣으로 따라갔다가 楚나라 宛 땅으로 달아났다는데 초나라 사람에게 잡혔다. 秦穆公이 소식을 듣고 五羖羊皮(검은 양 다섯 마리의 가죽)을 주고 사서 국정을 맡겼다. 이로 인해 ‘五羖大夫’로도 불린다. 이때 그의 나이 일흔이었다. 蹇叔을 목공에게 추천하고, 由餘 등과 함께 목공의 패업 성취를 도왔다.
▶ 蹇叔子 : 蹇叔. 제나라 출신의 현인. 百里奚의 비범함을 첫눈에 간파하고 그를 오랫동안 거두어주었다. 백리해가 주인을 찾아 나설 때마다 신중하기를 거듭 충고했고 秦穆公에게 발탁되자 그의 추천으로 역시 진목공을 섬기었다.
▶ 王子廖 : 춘추시대 晉穆公의 內史. 西戎에서 사신으로 온 由余를 항복하게 하는 꾀를 내어 진목공을 도왔다.
▶ 由余 : 춘추시대 秦나라의 명재상이다. 본래 晉나라 사람으로 西戎에 들어가 戎王에게 등용되었다가 戎王의 사신이 되어 秦나라에 왔었는데, 穆公이 그의 유능함을 알아보고 계략을 써서 억류하고 융왕과 틈이 벌어지게 한 다음 재상으로 발탁하였다. 由余는 이에 穆公을 도와 西戎을 정벌해서 20여 개의 나라를 얻고 국토를 천 리나 넓혀 秦나라는 서쪽 일대의 패자가 되었다. <史記 秦本紀>
▶ 延州來季子 : 춘추시대 오나라 공자 季札. 吳王 壽夢의 넷째 아들이다. 延陵에 봉해졌기 때문에 延陵季子라고 하며, 또 오나라가 초나라의 州來를 빼앗아 계찰을 봉했으므로 延陵來季子, 또는 延州來季子라고 하는데 줄여서 季子라고도 한다.
▶ 鄭僖公 : 춘추시대 정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髡頑 또는 惲이다. 기원전 581년 공자 繻가 시해된 후 신료들에 의해 임시로 추대되었다가 이후 아버지 成公이 晉나라에서 귀국하여 복위하였고, 성공이 죽자 뒤를 이어 정나라 군주가 되었다.
즉위한 뒤에 晉나라가 제후들과 정나라에서 회합할 때 子駟가 보좌하였는데 또 예우하지 않자 자사가 사람을 시켜 시해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 7년>
▶ 簡公 : 鄭簡公. 춘추시대 정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嘉이고, 僖公의 아들이다. 처음 즉위했을 때 公子들이 재상 子駟를 죽이려고 하자 자사가 공자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자사와 子孔이 번갈아가며 執政하였다. 晉나라가 정나라를 치니 진나라와 동맹하고, 楚나라가 치니 초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 子產 : 공손교. 姓은 公孫, 이름은 僑, 字는 子産 또는 子美로 鄭子產으로 일컬어진다. 鄭나라의 현명한 大夫로 春秋時代 후기의 뛰어난 정치가이다.
▶ 裨諶 : 춘추시대 鄭나라 大夫. 子産이 집정할 때 정사에 관한 文辭의 초안은 늘 맡아 작성하였다
▶ 世叔 : 子大叔. 춘추시대 鄭나라 大夫 游吉. 字가 子太叔이다. 世叔 또는 太叔으로도 불린다. 簡公과 定公 때 正卿을 지냈다.
▶ 行人子羽 : 公孫揮. 춘추시대 鄭나라 大夫로 字가 子羽이다. 외교 응대에 능하여 외교관이 되었다. 行人은 외교를 맡는 使者의 통칭이다.
▶ 虞 : 주나라 太王의 둘째아들인 仲雍의 둘째아들 虞仲에게 봉해 준 나라이다. 괵나라가 우나라의 남쪽에 있어 晉나라가 괵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나라를 경유해야 하였다.
▶ 宮之奇 : 춘추시대 虞나라의 대부이다. 晉나라가 虢나라를 치려면 虞나라를 통과해야 하므로 晉나라에서는 虞나라 군주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때 宮之奇는 脣亡齒寒의 이치를 들어 길을 빌려주지 말라고 간하였다.<史記 世家 권39.晉世家>
▶ 晉獻公 : 춘추시대 진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詭諸이고, 武公의 아들이다. 士蔿의 계책을 써서 진나라의 公子들을 모두 죽이고 처음으로 絳에 도읍을 정하였다. 헌공 16년 二軍을 설치해 霍나라와 魏나라, 耿나라를 멸망시켰다. 22년 虞나라에게 길을 빌려 虢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멸망시켰다.
▶ 子玉得臣 : 子玉. 楚나라의 令尹 成得臣. 楚成王에게 공자 중이를 죽이라고 간하였었다.<史記 世家 권39.晉世家>
▶ 宋襄公 : 춘추시대 송나라의 군주로 史家에 따라서는 춘추시대 五霸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기원전 638년 양공은 적은 병력으로 초나라와 싸웠는데, 초나라의 군대가 泓水를 반쯤 건넜을 때 司馬인 子魚(:목이)가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양공은 正道가 아니라며 듣지 않았고, 초나라 군대가 홍수를 건너고 나서 미처 대열을 정리하기 전에 다시 공격할 것을 청했으나 역시 듣지 않다가, 초나라의 군대가 대열을 갖추기를 기다려 싸웠으나 부상하고 크게 패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宋襄之仁’이라 하여 이를 비웃었다. <춘추좌씨전 노희공 22년>
▶ 公子目夷 : 송 환공의 아들. 송 양공의 어머니가 다른 형으로 字는 子魚이다. 송 환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目夷는 측실 소생이고, 작은아들 玆父는 정실 출생이어서 당연히 자보가 후계의 자격이 있었다. 두 형제는 비록 신분 차이가 있을망정 우애가 깊어 자보가 목이에게 후계자 자리를 양보하려 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玆父는 후일의 송 양공이 되며, 目夷는 송 양공의 재상이 된다.
▶ 僖負羈 : 曹나라 사람으로 春秋 시기 曹나라의 大夫이다. 晉나라의 重耳(:文公)가 망명하면서 曹나라에 갔을 때 曹伯이 목욕하는 重耳를 몰래 훔쳐보는 무례를 범하자 희부기가 諫한 일이 있다. 중이가 즉위한 뒤 조나라를 토벌하여 조백을 잡아 宋나라에 주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24‧28년> <國語·晉語>
▶ 五始 : 《春秋》의 記事는 元年‧春‧王‧正月‧公卽位 등의 다섯 가지 일로 시작하는데, 이를 五始라 한다. 《漢書》 〈王褒傳〉에 “공손히 생각건대 《춘추》에서 다섯 가지 시작의 중요함을 법으로 삼았으니, 자신을 성찰하여 왕통을 바로잡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共惟春秋法五始之要 在乎審己正統而已]”라 하였는데, 顔師古 注에 “元은 氣의 시작, 春은 四時의 시작, 王은 受命의 시작, 正月은 正敎의 시작, 公卽位는 一國의 시작이다.”라 하였다.
▶ 如合符 : 如合符節. 符節을 맞추는 것과 같이 사물이 꼭 들어맞음.
2-2. 춘추시대의 賢臣
國家惛亂而良臣見,魯國大亂,季友之賢見.
국가가 혼란함에 뛰어난 신하가 나타나니, 노나라가 크게 혼란함에 季友 같은 어진 이가 나타났다.
僖公即位而任季子,魯國安寧,外內無憂,行政二十一年,季子之卒後,邾擊其南,齊伐其北,魯不勝其患,將乞師於楚以取全耳.
魯 僖公이 즉위하면서 계우를 등용하자 노나라가 평안해져서 국내외에 근심이 없었으며 21년 동안 정치를 행하였는데, 계우가 죽고 나서 邾나라가 노나라의 남쪽을 공격하고 齊나라가 북쪽을 공격하니, 노나라는 그 우환을 견디지 못하여 초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여 보전하려고 하였다.
故傳曰:
患之起必自此始也。
그 때문에 <春秋公羊傳>에 일렀다.
“환란이 필시 이로부터 시작될 터이다.”
公子買不可使戍衛,公子遂不聽君命而擅之晉,內侵於臣下,外困於兵亂,弱之患也。
公子買에게 衛나라를 지키게 해서는 안 되었고, 公子遂는 君命을 듣지 않고 멋대로 晉나라에 가서, 안으로는 신하에게 능멸을 당하고 밖으로는 전쟁에 시달렸으니, 국력이 약함의 환란이었다.
僖公之性,非前二十一年常賢,而後乃漸變為不肖也.
魯 僖公의 본성이 앞 21년은 항상 현명하다가 뒤에 차츰 변하여 불초하게 된 것이 아니다.
此季子存之所益,亡之所損也。
이것은 季子의 생존이 도움이 되다가, 그의 사망이 손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夫得賢失賢,其損益之驗如此,而人主忽於所用,甚可疾痛也。
어진 이를 얻고 잃음에 따라 그 손익의 결과가 이러한데, 군주로서 사람을 등용함에 소홀하니 매우 가슴 아파할 만하다.
夫智不足以見賢,無可奈何矣,若智能見之,而強不能決,猶豫不用,而大者死亡,小者亂傾,此甚可悲哀也。
지혜가 현자를 알아보기에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지혜로 현자를 알아볼 수 있는데도 강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며 등용하지 못하면, 크게는 자신이 죽고 나라가 멸망하며, 작게는 나라가 혼란하여 기우니 이것은 매우 슬퍼할 만하다.
以宋殤公不知孔父之賢乎.
宋殤公이 孔父가 현명한 줄을 몰랐겠는가?
安知孔父死,己必死,趨而救之.
어찌 공보가 죽으면 자기도 반드시 죽을 줄 알아서 달려가 구했겠는가?
趨而救之者,是知其賢也。
달려가서 그를 구했음은 그가 현명함을 알았다는 증거이다.
以魯莊公不知季子之賢乎.
魯 莊公이 季子가 현명한 줄을 몰랐겠는가?
安知疾將死,召季子而授之國政.
어찌 병들어 죽을 때 季子를 불러 국정을 맡길 줄을 알았겠는가?
授之國政者,是知其賢也。
국정을 맡김은 그가 현명함을 알았다는 증거이다.
此二君知能見賢而皆不能用,故宋殤公以殺死,魯莊公以賊嗣.
이 두 군주는 현자를 알아보는 지혜는 있으나 모두 중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宋殤公은 죽임을 당하였고, 魯 莊公은 후사를 죽게 하였다.
使宋殤蚤任孔父,魯莊素用季子,乃將靖鄰國,而況自存乎!
만일 송상공이 일찍 孔父를 임용하고 노장공이 평소에 季子를 중용했더라면 이웃 나라까지도 안정시켰을 터이니, 하물며 자신을 보존함이랴!
▶ 良臣 : 선량한 신하.
▶ 季友 : 季友는 춘추시대 魯 莊公의 아우이다. 成季라고도 한다. 장공이 죽은 뒤 公子般을 세웠는데 慶父가 般을 죽이자 陳나라로 달아났다. 경보가 장공의 아들 啓方을 세워 閔公이 되었는데, 계우가 魯나라로 돌아오자 경보는 또 민공을 죽였다. 계우는 다시 민공의 형 申을 데리고 도망쳤다가 경보가 백성들에게 용납받지 못하여 莒로 달아나자 돌아와 申을 세워 僖公으로 삼으니 경보는 자살하였다. 뒤에 費에 봉해지고 相이 되었는데, 그의 자손이 季孫氏로 魯나라 국정을 전담하였다. 《春秋左氏傳 莊公 27‧32년》‧《史記 魯周公世家》
▶ 僖公 : 魯 釐公/魯 僖公. <사기>에서는 사마천의 할아버지의 이름을 피하여 釐公으로 표기하였다. 춘추시대 노나라의 제19대 군주로 이름은 申이다. 莊公의 아들이며 閔公의 庶兄이다. 민공이 피살되자 季友가 받들어 노나라로 들어와 즉위시켰다. 계우를 汶陽과 費 두 邑을 봉지로 주고 재상으로 삼으니, 계우가 公族 季孫氏가 되었다. <史記 世家 권33.魯周公世家>
▶ 邾 : 춘추시대 周나라의 제후국으로, 국성은 曹이며, 작위는 子爵이다. 전국시대에는 국명이 鄒나라로 변경되었다. 孟子가 태어난 나라이다.
▶ 患之起必自此始也 : <春秋公羊傳> 僖公 26년에 “公以楚師伐齊,取穀。公至自伐齊。此已取穀矣,何以致伐?未得乎取穀也。曷為未得乎取穀?曰:患之起,必自此始也。”라고 기록하엿다.
▶ 公子買 : 公子買가 衛나라 변경을 지키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공자매는 魯나라의 大夫로, 字는 子叢이다. 당시 晉‧楚는 서로 사이가 나빴고, 楚‧魯‧衛는 우호적인 관계였는데, 魯 僖公이 공자매를 파견하여 衛나라를 지키게 하였다. 晉나라가 衛나라를 공격하자 楚나라가 구원에 나섰으나 패배하니, 晉나라의 미움을 받게 될까 두려워한 희공이 공자매를 죽여서 해명한 일을 이른다. 《春秋左氏傳 僖公 28년》
▶ 公子遂 : 魯 莊公의 아들로 僖公‧文公 때 卿이 되어 국정을 맡았다. <춘추좌씨전>에 의하면 공자수는 희공 30년과 31년 두 차례 晉나라에 갔고 모두 희공의 명으로 갔는데 大夫가 군주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 독단으로 일을 처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 宋殤公 : 宋 殤公은 춘추시대 宋나라 군주로, 이름은 與夷이며, 宣公의 아들이다. 孔父는 宋나라 大司馬로, 이름은 嘉이고, 孔子의 6대조이다. 상공이 전쟁을 좋아하여 10년 동안 11번이나 전쟁을 하자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다. 太宰 華父督이 미모가 뛰어난 공보의 아내를 보고 전쟁의 책임이 공보에게 있다 선언하고 공보를 살해한 다음 그의 아내를 취하였다. 이에 상공이 노하자 화보독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상공마저 시해하였다. 《春秋左氏傳 隱公 3년, 桓公 2년》
▶ 孔父 : 孔父嘉. 춘추시대 송나라의 대사마. 자는 孔父이며 이름은 嘉이다. 孔子의 6祖다. 穆公 때 大司馬가 되었는데, 목공이 죽자 목공의 遺囑을 받아 殤公을 세웠다. 상공이 재위하는 10년 동안 11번이나 전쟁을 일으켜 백성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太宰 華父督이 그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민생을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공보가를 살해하고 공보가의 아내를 차지하였다. 이에 상공이 노하자 화보독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상공마저 시해하였다.
▶ 魯莊公 : 춘추시대 노나라 군주로, 이름은 同이고, 桓公의 아들이다. 즉위 후 9년에 齊桓公의 요청으로 노나라에 도망 온 환공의 형 子糾를 죽이고 管仲을 齊나라로 돌려보냈다. <春秋左氏傳 莊公 9년>
▶ 使 : 만일.
03.鄒陽獄中上梁王書
-이 글은 추양의 <옥중상양왕서> 일부를 인용한 글이다.
鄒子說梁王曰:
鄒子(:鄒陽)가 梁孝王에게 유세하였다.
「伊尹故有莘氏之媵臣也,湯立以為三公,天下之治太平。
“伊尹은 원래 有莘氏의 媵臣이었으나 湯王이 등용하여 三公으로 삼자 천하를 다스림이 태평하였습니다.
管仲故成陰之狗盜也,天下之庸夫也,齊桓公得之以為仲父。
管仲은 원래 成陽의 좀도둑으로 천하의 용렬한 사내였으나 齊桓公이 얻어서 仲父로 삼았습니다.
百里奚道之於路,傳賣五羊之皮,秦穆公委之以政。
百里奚는 길에서 밥을 빌어먹다가 다섯 마리 양가죽에 몸이 팔렸으나 秦穆公이 정치를 맡겼습니다.
甯戚故將車人也,叩轅行歌於康之衢,桓公任之以國。
甯戚은 원래 수레를 몰던 사람인데 수레 끌채를 두드리며 큰 거리를 가면서 노래하자 齊桓公이 나라를 맡겼습니다.
司馬喜髕腳於宋,而卒相中山。
司馬喜는 송나라에서 무릎 뼈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으나 마침내 中山國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范睢折脅拉齒於魏而後為應侯。
范睢는 魏나라에서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가 깨졌으나 뒷날 應侯가 되었습니다.
太公望故老婦之出夫也,朝歌之屠佐也,棘津迎客之舍人也,年七十而相周,九十而封齊。
太公望은 원래 늙은 부인이 쫓아낸 사내이고 朝歌에서 백정의 일을 도왔으며 棘津에서 손님이나 맞이하는 시종이었으나 나이 일흔 살에 周나라의 재상이 되고 아흔 살에 齊나라에 봉해졌습니다.
故《詩》曰:
『綿綿之葛,在於曠野,
良工得之,以為絺紵,
良工不得,枯死於野。』
이 때문에 <詩經>에 일렀습니다
‘길게 뻗은 칡덩굴, 넓은 들판에서 자라는구나.
좋은 직공이 이를 얻어, 갈포와 마포를 만들었지.
좋은 직공이 이를 얻지 않았다면, 들에서 말라 죽었을 거야.’
此七士者,不遇明君聖主,幾行乞丐,枯死於中野,譬猶綿綿之葛矣。」
이 일곱 선비가 명철하고 거룩한 군주를 만나지 못했던들 아마 길에서 밥을 빌어먹다가 들판에서 말라 죽었을 터이니, 비유하자면 ‘길게 뻗은 칡덩굴’과 같습니다.”
▶ 鄒子 : 鄒陽. 前漢 齊郡 臨淄 사람으로 景帝 때 吳王 劉濞를 섬겼다. 오왕이 한나라에 반란을 획책하자 景帝의 동생 梁孝王의 문객이 되었다가 羊勝 등의 참소로 투옥되었는데, 간곡한 상소문을 올려 석방되었다. 후에 양효왕에게 上客의 대우를 받았다. 이 상소문을 <獄中上梁王書>라 하며 명문으로 일컬어진다.
“한쪽의 말만 들으면 간사함이 생겨나고 한 사람에게 권력을 맡기면 난이 이루어지게 偏聽生姦 獨任成亂.”라는 유명한 글을 남겼다.[史記列傳] 권83 魯仲連鄒陽列傳
▶ 梁王 : 梁孝王 劉武, 前漢의 황족으로 제후왕이다. 前漢 문제의 둘째아들이며 전한 경제의 친동생으로, 오초칠국의 난 진압에서 큰 공을 세웠다.
▶ 伊尹 : 이름은 阿衡이다. 湯을 만나고자 했으나 구실이 없었다. 이에 有莘氏의 폐백인 媵臣이 되어 솥과 도마를 메고 와서는 음식의 맛으로 유세하여 왕도에 이르게 하였다. <史記 卷3 殷本紀>
▶ 有莘氏 : 중국 고대의 部族.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商나라 때 지금의 陝西省 合陽縣 지역에 정착하여 有莘國이 되었다.<史記 殷本紀>
▶ 媵臣 : 고대 제후의 딸이 시집갈 때 데리고 가던 하인이나 몸종
▶ 三公 : 周나라 때에는 太師, 太傅, 太保의 관직
▶ 成陰 : ‘陰’은 ‘陽’의 誤字로, 成陽은 지금의 山東省 荷澤市 지역.
▶ 狗盜 : 좀도둑.
▶ 道之 : 저본에는 ‘道之’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太平御覽》에 따라 ‘乞食’으로 고쳤고, 《說苑校證》에는 “《文選》 〈上梁王書〉에 ‘百里奚乞食於道路’로 되어 있고, 李善 注에 本書를 인용하면서 역시 ‘乞食’으로 썼다.” 함에 의거하여 ‘乞食’으로 해석하였다.
▶ 寧戚 :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제나라 관중의 도움으로 제 환공을 만나 공경의 벼슬을 하게 되었으며, 제환공을 만날 때 甯戚이 쇠뿔을 두드리며 商歌(:飯牛歌)를 부르다가 齊桓公에게 인정을 받아 등용되었다.
▶ 將車人 : 수레를 모는 사람.
▶ 轅行歌 : 商歌(:飯牛歌)
▶ 任之: 저본에는 ‘之’가 없으나, 《群書拾補》에 《太平御覽》을 따라 ‘之’자를 보충하였고, 《說苑校證》에는 “《文選》 李善 注의 인용에도 ‘之’자가 있다.” 함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 司馬喜 : 中山國의 신하. 전국시대 때 宋나라에서 종지뼈가 잘려나가는 형벌을 받은 뒤에 세 번이나 中山國의 재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엄청난 고난을 당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노력하여 결국 크게 성공한 인물이다.<戰國策·中山策>
▶ 髕 : 무릎의 종지뼈를 도려내는 고대의 형벌.
▶ 范睢 : 전국시대 魏나라 사람이다. 처음에 魏나라 中大夫 須賈를 따라 사신의 일행으로 齊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뒤에 魏나라 재상 魏齊는 그가 齊나라와 내통하였다고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혹독하게 매를 때려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빨이 다 빠졌는데 측간에다 던져버렸다. 범수는 그 뒤에 가까스로 진나라로 도망하여 성명을 바꾸고 재상이 되어 應侯에 봉해졌다. <사기 권79 범수채택열전>
▶ 拉脅 : 摺脅. 갈비뼈가 부러지다.
▶ 朝家之屠佐 : 조가에서 백정 일을 돕다. 朝家는 은나라 때의 국도. 屠佐는 白丁의 조수.
▶ 棘津 : 지금의 河南省 滑縣 남서쪽에 있던 옛 黃河의 나루 이름
▶ 舍人 : 侍從
▶ 綿綿之葛 : 현재의 <시경>에는 없는 逸詩. 綿綿은 나무의 가지와 잎이 길게 뻗어가고 넓게 무성함
▶ 絺紵 : 칡베와 모시.
▶ 幾行乞丐 : 아마 길에서 밥을 빌어먹다. 乞丐는 거지.
4.작은 부분을 보고도 전체를 알 수 있다.
眉睫之微,接而形於色;
聲音之風,感而動乎心。
눈썹과 속눈썹은 미세하지만 접하면 顔色이 드러나고,
목소리는 바람결 같지만 느끼면 마음을 움직인다.
甯戚擊牛角而商歌,桓公聞而舉之;
甯戚이 쇠뿔을 두드리며 商歌를 처량하게 부르자 齊桓公이 듣고 그를 등용하였고,
鮑龍跪石而登嵼,孔子為之下車;
鮑龍이 돌 위에 꿇어앉아 登嵼이란 시를 읊자 공자가 그를 위해 수레에서 내리셨고,
堯、舜相見不違桑陰,文王舉太公不以日久。
堯와 舜이 만나서 뽕나무 그늘이 옮겨가지 않은 짧은 시간에 이양하였으며, 周文王이 太公을 등용할 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故賢聖之接也,不待久而親;
能者之相見也,不待試而知矣。
그래서 현인과 聖人이 만남에, 오래 걸리지 않고도 친근해지며,
능력 있는 사람이 서로 만남에, 시험하지 않고도 알아본다.
故士之接也,非必與之臨財分貨,乃知其廉也;
非必與之犯難涉危,乃知其勇也。
그러므로 선비가 만남에 함께 재물을 나눌 필요 없이 그의 청렴함을 알고,
함께 어렵고 위험함을 겪을 필요 없이 그의 용감함을 안다.
舉事決斷,是以知其勇也;
取與有讓,是以知其廉也。
일 처리에 결단하기 때문에 그의 용감함을 알고,
받고 줌에 양보가 있으매 그의 청렴함을 안다.
故見虎之尾,而知其大於貍也
見象之牙,而知其大於牛也。
그래서 호랑이의 꼬리만 보고도 살쾡이보다 큼을 알 수 있고,
코끼리의 어금니만 보고도 소보다 큼을 알 수 있다.
一節見則百節知矣。
한 마디만 보고도 백 마디를 알 수 있다.
由此觀之,以所見可以占未發,睹小節固足以知大體矣。
이로써 관찰하건대 이미 본 것을 가지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일을 점칠 수 있고, 작은 부분을 보고 본래 대체를 알기에 족하다.
▶ 眉睫 : 눈썹과 속눈썹. 눈앞을 비유한 것이다.
▶ 之微 : 미세한 것. 원문에는 ‘徵’으로 되어 있으나 오류로 보아 ‘微’로 수정하였다.<劉子 卷四 知人第十八>
▶ 甯戚 : 전국시대 衛나라 사람으로 제나라 관중의 도움으로 제 환공을 만나 공경의 벼슬을 하게 되었으며, 환공을 만날 때 甯戚이 쇠뿔을 두드리며 商歌(:飯牛歌)를 부르다가 齊桓公에게 인정을 받아 등용되었다.
▶ 商歌 : 商은 樂調의 명칭으로 슬프고 처량한 노래이다.
▶ 鮑龍 : 춘추시대 말기의 역사학자이며 사상학자.
▶ 跪石而登嵼 : <劉子> ‘知人’에는 ‘鮑龍跪石而吟’으로 기록하고 있다. 嵼은 뾰족하게 솟은 산.
▶ 舜 : 虞舜. 제순 帝舜有虞氏. 중국 신화 속 군주의 이름으로, 중국의 三皇五帝 신화 가운데 오제의 마지막 군주이다. 주로 선대의 堯와 함께 이른바 '堯舜'이라 하여 聖君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 不違桑陰 : 뽕나무의 그늘이 아직 옮겨가지 않은 짧은 시간. 違는 移의 뜻이다. <戰國策·趙策>에 “옛날 요임금이 순임금을 초야에서 만나 밭두둑에 자리를 깔고 뽕나무가 가려주는 곳에 앉아 뽕나무 그늘이 옮겨가자 천하를 받았다.[昔者 堯見舜於草茅之中 席隴畝而蔭庇桑 陰移而受天下]”라 하였다.
5-1. 인재의 임용이 중요하다
禹以夏王,桀以夏亡;
湯以殷王,紂以殷亡。
禹는 夏나라를 가지고 왕노릇하였고, 桀은 夏나라를 가지고 멸망하였으며,
湯은 殷나라를 가지고 왕노릇하였고, 紂는 殷나라를 가지고 멸망하였다.
闔廬以吳戰勝無敵於天下,而夫差以見禽於越,文公以晉國霸,而厲公以見弒於匠麗之宮,威王以齊強於天下,而湣王以弒死於廟梁,穆公以秦顯名尊號,而二世以劫於望夷.
闔廬는 吳나라를 가지고 전쟁에 승리하여 천하에 적수가 없었으나, 夫差는 그것으로 越나라에 사로잡혔고, 晉文公은 晉나라를 가지고 霸者가 되었으나, 晉厲公은 그것으로 匠麗氏의 집에서 시해당하였고, 齊威王은 齊나라를 가지고 천하에 강한 나라가 되었으나, 齊湣王은 그것으로 종묘의 들보에 매달려 심줄이 뽑혀 시해당하였고, 秦穆公은 秦나라를 가지고 이름을 드날려 존귀해졌으나, 二世는 그것으로 望夷宮에서 겁박을 받고 살해되었다.
其所以君王者同,而功跡不等者,所任異也!
그들이 君王이었음은 같으나 功跡이 같지 않음은 임용한 자가 달랐기 때문이다!
是故成王處襁褓而朝諸侯,周公用事也。
그래서 周成王은 포대기에 있으면서 제후를 朝會하고, 周公이 정사를 맡아 처리하였다.
趙武靈王五十年而餓死於沙丘,任李兌故也。
趙武靈王이 50세에 沙丘에서 굶어 죽음은 李兌를 임용했기 때문이다.
桓公得管仲,九合諸侯,一匡天下,失管仲,任豎刁易牙,身死不葬,為天下笑,一人之身,榮辱俱施焉,在所任也。
齊桓公이 管仲을 얻어서 제후를 아홉 번 회합하여 한 번에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았는데, 관중을 잃고 豎刁와 易牙를 임용하였다가 자기가 죽은 뒤에는 장사지내지 못하여 천하 사람의 비웃음을 받았으니, 한 사람의 몸에 영광과 치욕이 함께 나타남은 임용한 사람에 달려 있다.
故魏有公子無忌,削地復得;
趙任藺相如,秦兵不敢出鄢陵;
任唐睢,國獨特立。
그래서 魏나라에 公子 無忌가 있어서 깎였던 땅을 다시 찾았고,
趙나라가 藺相如를 임용하자 秦나라 군대가 감히 鄢陵을 나오지 못했고,
唐雎를 임용하자 나라가 우뚝 서게 되었다.
楚有申包胥,而昭王反位;
齊有田單,襄王得國。
楚나라에 申包胥가 있어서 昭王이 복위하였고,
齊나라에 田單이 있어서 襄王이 나라를 얻었다.
由此觀之,國無賢佐俊士,而能以成功立名,安危繼絕者,未嘗有也。
이에 따라 살펴보면, 나라에 현명한 보좌와 뛰어난 인재가 없이, 공적을 이루고 명예를 세우며 위태로운 나라를 안정시키고 끊어지는 세대를 이음은 지금까지 없었다.
故國不務大而務得民心;
佐不務多,而務得賢俊。
그래서 나라를 크게 함에 힘쓰지 말고 민심을 얻음에 힘써야 하고,
보좌하는 신하가 많음에 힘쓰지 말고 현명하고 뛰어난 인재를 얻음에 힘써야 한다.
得民心者民往之,有賢佐者士歸之,文王請除炮烙之刑而殷民從,湯去張網者之三面而夏民從,越王不隳舊冢而吳人服,以其所為之順於民心也。
민심을 얻은 사람에게 백성이 가고, 현명한 보좌를 둔 사람은 인재들이 歸附하나니, 文王이 炮烙刑을 없애자고 청하자 殷나라 백성이 따랐고, 湯王이 사방의 그물 중 3면을 제거하자 夏나라 백성이 따랐으며, 越王이 吳나라 조상의 묘를 훼손하지 않자 오나라 백성이 복종하였으니, 그들의 행위가 민심에 순응했기 때문이다.
▶ 厲公以見弑於匠麗之宮 : 厲公은 춘추시대 晉나라 군주로 이름은 壽曼이다. 匠麗는 여공의 총신이다. 여공은 전횡을 일삼고 교만하며 사치하였는데, 장려의 집에서 술 마시며 놀다가 欒書와 中行偃 등에게 사로잡혀 살해되었다.<史記 晉世家>
▶ 湣王以弑死於廟梁 : 湣王은 전국시대 齊나라 군주로, 田氏이며, 宣王의 아들이다. 燕나라 장군 樂毅에게 수도 臨淄가 함락되어 민왕이 莒로 달아나자, 楚 頃襄王이 淖齒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민왕은 요치를 중용하여 재상으로 삼았는데, 齊나라 정치는 어지럽게 되었고 민왕은 宗廟의 대들보에 매달려 심줄이 뽑혀 죽었다. 《戰國策 楚策》‧《史記 田敬仲完世家‧田單列傳》
▶ 二世以劫於望夷 : 二世는 진시황의 막내 아들로 二世皇帝 胡亥이다. 二世 3년에 趙高가 望夷宮에서 胡亥를 겁박하여 살해하였다.<史記 秦始皇本紀>
▶ 趙武靈王 : 전국시대 조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雍이고, 肅侯의 아들이다. 무령왕은 胡服을 입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시행해 유목 부족을 방어하였다. 中山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林胡와 樓煩을 격파하는 등 국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무령왕 27년 둘째 아들 何(:趙惠文王)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主父라 불렀다. 맏아들 章을 代安陽君에 봉하자 장이 불만을 품고 병사를 일으켜 왕위를 다투다 실패하고 달아나 주보가 사는 沙丘宮에 머물렀다. 李兌가 주보의 저택을 석 달 동안 포위하자 공자 장이 먼저 죽고 무령왕도 자신의 궁에 유폐된 채 굶어죽고 말았다.<史記 권43. 趙世家>
▶ 九合諸侯 : 九合은 ‘구합’으로 읽어 ‘아홉 번 회합하다’라고 풀이하기도 하고, ‘규합’으로 읽어 ‘감독하여 회합하다’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아홉 번은 軍用 수레로 모인 것이 세 번이고 乘用 수레로 모인 것이 여섯 번이다.”라고 하였다.(論語 憲問) 合은 會盟으로 제후와 제후가 만나서 맹약을 맺는다는 뜻.
▶ 豎刁 : 豎刀. 宦官으로 寺人을 지냈다. 齊桓公의 총애를 받았다. 管仲이 생각이 정상적이지 않다면서 마땅히 멀리하고 배척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환공이 듣지 않았다. 관중이 죽자 易牙와 開方 등과 함께 권력을 독차지했고, 다섯 公子가 태자가 되겠다며 다투었다.
▶ 易牙 : 狄牙. 齊桓公의 음식을 만들던 요리사로, 당대 제일가는 요리 솜씨를 지녔다고 한다. 환공이 늘 새롭고 기이한 음식을 맛보기를 원하자 나중에는 자기 자식을 죽여서 음식을 만들어 바쳤다.
▶ 身死不葬 : 관중이 죽자 환공은 관중이 천거한 濕朋을 쓰지 않고 자신이 신임한 內侍 竪刁를 기용하였다. 그러나 수조는 개방과 역아 등과 공모하여 난을 일으키고 환공을 남문 寢殿 수위의 방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하였다. 환공의 아들들이 환공의 뒤를 이으려고 서로 싸우는 바람에 환공의 시체는 석 달이나 방치되었고 시체에서 생긴 벌레가 문밖에까지 기어 나왔다. 환공이 관중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는 참담하였다.
▶ 公子無忌 : 전국시대 四公子의 한 사람이다. 魏나라의 귀족으로 이름은 魏無忌이며, 魏 釐王의 아우이다. 信陵에 封해졌기 때문에 信陵君이라 부른다. 선비를 우대하여 食客이 3천 명이나 되었다 한다. 秦나라가 趙나라의 수도 邯郸을 포위했을 때 대장 晉鄙의 兵符를 훔쳐 그 군대를 거느리고 조나라를 구원하였다. 뒤에 秦나라가 魏나라를 공격했을 때 上將軍이 되어 다섯 나라와 연합해 秦나라 군대를 河外에서 격파하였다. 《史記 魏公子列傳》
▶ 藺相如 : 전국시대 趙나라의 재상으로서, 秦나라가 속임수를 써서 뺏으려던 和氏璧을 지켜내고, 趙나라 장수 廉頗와 합심하여 趙나라를 굳건하게 지켜낸 일로 유명하다. 인상여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화씨의 벽을 되찾아옴에 공을 세워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나, 이를 시기한 염파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負荊請罪로 刎頸之交가 된 고사는 유명하다.<史記列傳 권81 廉頗藺相如列傳(염파·인상여열전>
▶ 唐睢,唐雎 : 唐且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魏나라 사람으로 安陵君의 신하. 당시 齊나라와 楚나라가 魏나라를 공격하자 당저가 90세의 나이로 秦王을 설득하여 魏나라를 구원하는 병력을 출동시켰다.<史記 魏世家>
▶ 昭王 : 楚昭王. 춘추시대 초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珍이었다가 즉위 후 軫으로 고쳤고, 이후 다시 壬으로 고쳤다. 재위 중에 吳나라가 여러 차례 초나라를 패배시켰다. 10년 伍子胥가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의 수도 郢을 공격하니 달아났다. 大夫 申包胥가 秦나라로부터 구원병을 얻어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오나라가 다시 초나라를 공격하니 도읍을 鄀으로 옮겼다. 27년 오왕 夫差가 陳나라를 공격하자 초나라가 가서 구원했는데, 軍中에서 병사하였다.
▶ 田單 : 전국시대 齊나라 장군으로 제나라가 燕나라 樂毅의 침공을 받아 72개 성이 함락되고 莒와 卽墨만 함락되지 않았다. 전단은 종족들을 거느리고 성을 지키며 항전하다가 火牛計를 써서 연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달아났던 襄王을 맞이해 복위시켰다.<史記 田敬仲完世家‧田單列傳>
▶ 文王請除炮烙之刑 : 殷의 紂王이 炮烙이라는 酷刑을 쓰니 文王이 洛西의 땅을 바치면서 중지할 것을 요청하자 주왕이 허락한 일을 가리킨다. 炮烙은 기름칠을 한 구리기둥을 세우고 그 아래에 숯불을 피운 다음, 죄인이 구리기둥을 타고 오르다가 숯불 위로 떨어져 타죽게 하는 형벌이라 한다. 《史記 殷本紀》‧《史記 周本紀》‧《列女傳 孼嬖傳 殷紂妲己》
▶ 湯去張網者 : 탕이 사냥을 하러 나갔을 때 들판 사방에 그물을 친 사람을 보았는데 탕이 세 면의 그물을 거두게 하고 축원하여 말하였다.
“왼쪽으로 가려고 하는 것은 왼쪽으로 가게하고, 오른쪽으로 가고자 하는 것은 오른쪽으로 가게 하소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바로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 제후들이 이 소문을 듣고 “탕의 은덕이 지극하여 禽獸에까지 이르렀다.”라고 하였다.<史記 권03. 殷本紀>
▶ 越王不隳舊冢 : 越王 句踐이 吳王 夫差를 격파한 후 吳王 선대의 묘소를 파헤치지 않고 계속하여 제사를 받들게 한 일이다.
5-2. 인재의 임용이 중요하다 2/2
故聲同則處異而相應,德合則未見而相親,賢者立於本朝,則天下之豪,相率而趨之矣,何以知其然也?
그러므로 소리가 같으면 처지가 달라도 서로 호응하고, 도덕이 일치하면 만나지 않고도 서로 친근하며, 현자가 조정에 있으면 천하의 호걸이 서로 연이어 달려오나니, 무엇으로 그렇게 됨을 아는가?
曰:
管仲,桓公之賊也,鮑叔以為賢於己而進之為相,七十言而說乃聽,遂使桓公除報讎之心而委國政焉。
이러하다.
管仲은 桓公의 적이었지만 鮑叔이 자기보다 현명하다고 말하며 재상이 되게 추천하자, 70마디의 말에 환공이 기뻐하고 그 말을 따르며, 환공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을 없애게 하고 국정을 맡겼다.
桓公垂拱無事而朝諸侯,鮑叔之力也;
管仲之所以能北走桓公無自危之心者,同聲於鮑叔也。
환공이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팔짱을 낀 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제후들을 조회함은 포숙의 공이요,
관중이 환공에게 패주하면서 자신을 위태로워하는 마음이 없었음은 포숙과 같은 소리로 반응하였기 때문이다.
紂殺王子比干,箕子被髮而佯狂,陳靈公殺泄冶而鄧元去陳
自是之後,殷兼於周,陳亡於楚,以其殺比干、泄冶而失箕子與鄧元也。
紂가 왕자 比干을 죽이자 箕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 미친 체하였고, 陳 靈公이 泄冶를 죽이자 鄧元이 陳나라를 떠나버렸으니,
이후에 殷나라는 周나라에 병탄되었고, 陳나라는 楚나라에 멸망했으니, 비간과 설야를 죽여서 기자와 등원을 잃었기 때문이다.
燕昭王得郭隗,而鄒衍、樂毅以齊趙至,蘇子、屈景以周楚至,於是舉兵而攻齊,棲閔王於莒,燕校地計眾,非與齊均也,然所以能信意至於此者,由得士也。
燕 昭王이 郭隗를 얻자 鄒衍과 樂毅가 齊나라와 趙나라에서 찾아왔고, 蘇秦과 屈景은 周나라와 楚나라에서 오매, 이에 군사를 일으켜 齊나라를 공격하여 齊閔王을 莒에 머물게 하였으니, 燕나라의 땅과 인구를 따져보면 齊나라와 대등하지 않았으나, 뜻을 폄이 여기에 이를 수 있었음은 賢士를 얻었기 때문이다.
故無常安之國,無恒治之民;
得賢者則安昌,失之者則危亡,自古及今,未有不然者也。
그러므로 항상 안정된 나라는 없고, 언제나 잘 다스려지는 백성은 없으니,
현자를 얻으면 안정되고 번창하며, 현자를 잃으면 위태로워지고 멸망함은 예부터 지금까지 그렇지 않음이 없었다.
明鏡所以昭形也,往古所以知今也.
밝은 거울이란 형체를 비춰보는 수단이고, 지나간 옛일은 지금을 알게 해주는 근거이다.
夫知惡往古之所以危亡,而不務襲跡於其所以安昌,則未有異乎卻走而求逮前人也.
옛날의 위태롭고 멸망한 원인을 알기 싫어하고, 안정되고 번창한 원인을 따라 행함에 힘쓰지 않으면, 뒷걸음질 치면서 앞사람을 따라잡기를 구함과 다름이 없다.
太公知之,故舉微子之後而封比干之墓,夫聖人之於死尚如是其厚也,況當世而生存者乎!
太公은 이런 이치를 알았기 때문에 微子의 후손을 천거하였고, 比干의 묘의 봉분을 만들었으니, 聖人은 죽은 사람에게조차 이렇게 후하였는데, 하물며 당세에 살아 있는 자임에랴!
則其弗失可識矣。
그러니 그들이 어진 이를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聲同則處異而相應 : 소리가 서로 같으면 있는 곳이 달라도 서로 호응한다.
“同聲相應, 同氣相求 : 소리가 같으면 서로 응하며,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따른다.”<周易·乾卦·文言傳〉
▶ 相率 : 잇따르다. 연잇다.
▶ 北走 : 패배하여 달아나다.
▶ 垂拱 :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팔짱을 끼다.
▶ 比干 : 殷나라 紂王의 숙부. 주왕의 음란함을 간한다고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비간은 箕子와 微子와 아울러 은나라의 三仁으로 꼽힌다.
▶ 箕子 : 殷나라의 폭군 紂王의 숙부로 이름은 胥餘이고 벼슬은 太師에 이르렀으며, 箕나라에 봉해졌다. 紂왕이 포악한 것을 보고 간했지만 듣지 않자, 머리를 풀고 미친 척 가장하여 남의 노예가 되었다가 紂왕에 의해 구금되었다. 周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紂왕을 죽인 뒤에 箕子를 석방하고 그를 朝鮮에 책봉하였다.
▶ 陳靈公 : 춘추시대 陳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平國이다. 大夫 孔寧, 儀行父와 함께 대부 御叔의 아내 夏姬와 사통하였다. 세 사람이 하씨 집에서 술을 마시고는 하희의 아들 夏徵舒를 욕보였다. 화가 난 하징서가 弓手를 매복시켜 살해하였다. 15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靈이다.
▶ 泄冶 : 洩冶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陳나라의 대부. 영공 14년(기원전 600년)에 영공과 대부 孔寧, 儀行父가 함께 夏姬와 간통하고서 그녀의 속옷을 입고 조정에서 서로 희롱하였다. 泄冶가 간언하였다.
“군주와 신하가 음란한 짓을 하면 백성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영공이 두 사람에게 이 말을 고하자, 두 사람이 설야를 죽이기를 청하는데도 영공은 말리지 않으니 마침내 설야를 죽이고 말았다.<春秋左氏傳 宣公 9년>
▶ 鄧元 : 춘추시대 陳 靈公의 신하.
▶ 燕昭王 : 전국시대 연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平이다. 시호는 昭襄王이지만, 약칭 시호로는 昭王 혹은 襄王으로도 불린다. 郭隗와 鄒衍, 樂毅 등 어진 선비를 초빙하여 父王 때 잃었던 땅을 齊나라로부터 되찾았고 제나라의 수도 臨淄에 진입하고 莒와 卽墨을 제외한 제나라의 70여 성을 점령하여 연나라가 가장 강성한 시기를 이루었다.<史記 燕召公世家>
▶ 郭隗 : 전국시대 燕나라 사람. 연나라 昭王이 齊나라에 복수하고자 인재를 구할 때 賢士를 초빙하는 방법을 알려주어 樂毅와 鄒衍, 劇辛 등의 인재들이 다투어 찾아와 국력이 부강해졌다.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先從隗始이다.
▶ 蘇子、屈景以周楚至 : 蘇秦이 東周로부터 연나라에 귀의하고, 鄒衍이 제나라로부터 연나라에 귀의하였으며, 樂毅가 趙나라로부터 연나라에 귀의하고, 屈景이 초나라로부터 연나라에 귀의하였다.
▶ 棲閔王於莒 : 湣王은 전국시대 齊나라 군주로 燕나라 장군 樂毅에게 수도 임치가 함락되자 莒로 달아났다.<史記 齊太公世家>
▶ 信意 : ‘자기의 뜻을 펴다’라는 뜻이다. ‘信’은 ‘伸’과 통용된다.
▶ 明鏡所以昭形也 : 밝은 거울이란 형체를 비춰보는 것이다.
※ <孔子家語 觀周>
“謂從者曰:
「此周公所以盛也。夫明鏡所以察形,往古者所以知今;人主不務襲迹於其所以安存,而急急所以危亡,是猶未有以異於卻走而欲求及前人也,豈不惑哉!」”
“공자가 수행하는 제자에게 말하였다. ‘이것이 주공이 성대한 까닭이다. 밝은 거울이란 얼굴을 비춰보는 것이며, 지나간 옛일이란 오늘의 일을 알도록 해주는 것이다. 군주 된 사람이 옛날에 편안히 다스렸던 자취를 따르고자 힘쓰지 아니하고 위태롭고 망한 원인에 급급하다면, 이것은 비유하건대 마치 뒷걸음질을 치면서 앞사람을 따라잡겠다고 함과 다름이 없다. 그러니 어찌 미혹된 일이 아니겠느냐?’”
▶ 卻走 : 퇴각하다. 뒷걸음치다.
▶ 微子之後 : 주공은 微子 開를 은나라의 후손으로 대체하여 은나라 선조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史記 권38.宋微子世家>
▶ 太公知之 : <史記 殷本紀>에 “주 무왕은 紂王에게 간언하다 가슴을 찢겨 죽은 비간의 무덤에 봉분을 덮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6.진목공이 覇者가 된 이유
齊景公問於孔子曰:
「秦穆公其國小,處僻而霸,何也?」
齊景公이 공자에게 물었다.
“秦穆公은 그의 나라가 작고 궁벽한 곳에 있었는데도 霸者가 됨은 무엇 때문입니까?”
對曰:
「其國小而志大,雖處僻而其政中,其舉果,其謀和,其令不偷;
親舉五羖大夫於係縲之中,與之語三日而授之政,以此取之,雖王可也,霸則小矣。」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 나라는 작지만 품은 뜻은 크고, 비록 처지는 궁벽하였으나 정치는 알맞았고, 그의 거사는 과감했고 그의 謀略은 조화로웠으며 그의 명령은 구차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있는 五羖大夫를 직접 뽑아서 더불어 대화한 지 3일에 국정을 맡겨, 이로써 천하를 얻었으니, 왕자라면 가당하나 霸者라면 작은 편입니다.”
▶ 齊景公 : 춘추시대 제나라의 국군 姜杵臼. 景은 시호이다. 齊莊公의 이복동생으로 장공을 살해한 대부 崔杼에 의해 옹립되었다. 궁실을 짓고 사냥개와 말을 모으기를 좋아하였으며 세금과 형벌을 무겁게 하며 사치가 끝이 없었다. 재위 동안 제나라의 公室이 쇠퇴하고 田氏 세력이 대두하였다.
▶ 秦穆公 : 秦穆公 嬴任好. 진나라의 군주. 繆은 穆으로도 쓴다. 이름은 任好이고, 秦德公의 셋째 아들이며, 春秋五覇의 한 사람이다. 재위 기간 동안 어진 인재를 힘써 구해 百里奚과 蹇叔 등을 등용해 謀臣으로 삼았고, 올바른 정치에 전력을 기울여 국세가 날로 강해졌다.
▶ 偷 : <공자가어>에는 구차할 ‘愉’로 기록하고 있다.
▶ 係縲 : 결박의 뜻으로, 구속됨을 이른다.
▶ 五羖大夫 : 百里奚. 양 가죽 다섯 장으로 모셔온 대부라는 뜻.
※ 百里奚 : 춘추시대 虞나라 출신으로 자는 井伯이다. 百里氏로도 불린다. 일설에는 성이 百씨고, 이름은 奚며, 자가 里라고도 한다. 우나라의 大夫로 있다가 晉獻公이 우나라를 멸망시키자 포로가 되어 晉나라에 들어왔다. 晉나라가 穆姬를 秦나라에 시집보낼 때 陪臣으로 따라갔다가 楚나라 宛 땅으로 달아났다는데 초나라 사람에게 잡혔다. 秦穆公이 소식을 듣고 五羖羊皮(검은 양 다섯 마리의 가죽)를 주고 사서 국정을 맡겼다. 이로 인해 ‘五羖大夫’로도 불린다. 이때 그의 나이 일흔이었다. 蹇叔을 목공에게 추천하고, 由餘 등과 함께 목공의 패업 성취를 도왔다.[史記 本紀] 권05. 秦本紀
7-1. 賢臣의 임용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或曰: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將謂桓公仁義乎?
“齊桓公을 인의롭다고 하겠는가?
殺兄而立,非仁義也;
형을 죽이고 즉위하였으니 인의롭다고 할 수 없다.
將謂桓公恭儉乎?
환공을 공손하고 검소하다고 하겠는가?
與婦人同輿,馳於邑中,非恭儉也.
부인과 함께 수레를 타고 도성 안을 달렸으니 공손하고 검소함이 아니다.
將謂桓公清潔乎?
환공을 맑고 깨끗하다고 하겠는가?
閨門之內,無可嫁者,非清潔也。
閨門 안에 시집보낼 만한 여자가 없었으니 맑고 깨끗하다고 할 수 없다.
此三者亡國失君之行也,然而桓公兼有之,以得管仲隰朋,九合諸侯,一匡天下,畢朝周室,為五霸長,以其得賢佐也
이 세 가지는 나라를 망치고 군주의 덕을 잃는 행위이고, 환공은 이를 모두 가지고 있었으나 管仲과 隰朋을 얻어서 제후를 규합하여 단번에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고 제후를 모두 周나라 왕실에 조현하게 하여 五霸 중의 으뜸이 되었으니, 그가 현신의 보좌를 얻었기 때문이다.
失管仲隰朋,任豎刁易牙,身死不葬,蟲流出戶。
관중과 습붕을 잃고 豎刁와 易牙를 임용하자, 자신이 죽은 뒤에 장사지내지 못해 시체에서 나온 벌레가 문밖으로 나왔다.
一人之身,榮辱俱施者,何者?
한 사람의 몸에 영광과 치욕이 함께 나타남은 무엇 때문인가?
其所任異也。」
그가 임용한 사람이 달랐기 때문이다.”
由此觀之,則任佐急矣。
이에 따라 살펴보면 보좌의 임용이 중요하다.
▶ 殺兄而立 : 형은 齊 桓公의 형 公子 糾이다. 공자 규가 公子 小白(桓公)과 王位를 다투다가 실패하여 魯나라로 달아났는데, 환공이 즉위한 뒤 노나라를 협박하여 공자 규를 죽이게 하였다. 《春秋左氏傳 莊公 8년》‧《論語 憲問》‧《史記 齊太公世家》
▶ 閨門之內, 無可嫁者 : 齊 桓公이 好色하여 고모[姑]‧누님[姊]‧누이동생[妹]과 음란한 생활을 함으로써 집안에 출가하지 못한 고모‧누님‧누이동생이 7인이었다 한다. 《管子 小匡》‧《荀子 仲尼》 閨門은 婦女가 거처하는 안방.
▶ 豎刁 : 豎刀. 宦官으로 寺人을 지냈다. 齊桓公의 총애를 받았다. 管仲이 그의 생각이 정상적이지 않다면서 마땅히 멀리하고 배척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환공이 듣지 않았다. 관중이 죽자 易牙와 開方 등과 함께 권력을 독차지했고, 다섯 公子가 태자가 되겠다며 다투었다.
▶ 易牙 : 狄牙. 齊桓公의 음식을 만들던 요리사로, 당대 제일가는 요리 솜씨를 지녔다고 한다. 환공이 늘 새롭고 기이한 음식을 맛보기를 원하자 나중에는 자기 자식을 죽여서 음식을 만들어 바쳤다.
▶ 急 : 중요하다.
7-2. 선비들을 예우해야 한다.
周公旦白屋之士,所下者七十人,而天下之士皆至
晏子所與同衣食者百人,而天下之士亦至
仲尼修道行,理文章,而天下之士亦至矣。
周公 旦이 빈천한 선비에게 몸을 낮추어 예우한 자가 70명이었는데 천하의 선비들이 모두 왔고,
晏子가 옷과 음식을 같이한 사람이 백 명이었는데 역시 천하의 선비들이 왔으며,
仲尼가 도덕과 품행을 수양하고 예악과 법도를 정리하자 역시 천하의 선비들이 왔다.
▶ 白屋 : 초라한 초가집. 옛날에 평민들의 집에는 아무런 색도 칠하지 않고 목재의 결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에 백옥이라 하였다.
7-3. 伯牙絶絃
伯牙子鼓琴,鍾子期聽之,方鼓而志在太山,鍾子期曰:
「善哉乎鼓琴!巍巍乎若太山。」
伯牙가 거문고를 연주함에 鍾子期가 듣고 있었는데, 백아가 막 연주하면서 마음이 太山에 가 있자 종자기가 말하였다.
“훌륭하구나, 거문고를 연주함이여! 높고 높은 태산과 같구나.”
少選之間,而志在流水,鍾子期復曰:
「善哉乎鼓琴!湯湯乎若流水。」
잠깐 사이에 백아의 마음이 흐르는 물에 있자 종자기가 다시 말하였다.
“훌륭하구나, 거문고를 연주함이여! 넘실넘실 흐르는 물과 같구나.”
鍾子期死,伯牙破琴絕絃,終身不復鼓琴,以為世無足為鼓琴者。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부숴 弦을 끊어버리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으니, 세상에 거문고를 연주하여 줄 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非獨鼓琴若此也,賢者亦然,雖有賢者而無以接之,賢者奚由盡忠哉!
단지 거문고를 연주함만 이와 같을 뿐 아니라 賢者도 이러하니, 비록 현자가 있더라도 대우하지 못하면 현자가 무슨 연유로 충성을 다하겠는가!
驥不自至千里者,待伯樂而後至也。
천리마는 스스로 천 리를 가지 못하니, 伯樂을 기다려서 천리마가 될 수 있다.
▶ 伯牙子 : 兪伯牙. 춘추 시대 楚나라의 樂士. 성은 兪씨다. 成連에게 거문고를 배워 거문고의 대가가 되었다. 그가 연주한 음악은 친구인 鍾子期만 이해할 수 있었는데,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 鍾子期 :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徽이고, 자는 子期이다. 나무꾼이었던 그는 음률에 정통해 당시 거문고의 명수인 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가장 잘 알아들었다고 한다. 전설에는 백아가 강변에서 거문고를 치고 있었는데, 우연히 종자기를 만났다고 한다. 이때 종자기가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에 흥취하여 서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 巍巍 : 높고 큰 모양.
▶ 少選 : ‘少時’와 같다. 잠깐. 잠시.
※ 知音 : 자신의 속마음까지 알아주는 친구. 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이르는 말로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伯牙와 그의 친구 鍾子期와의 故事에서 비롯된 말이다.[列子 湯問篇] 知音/伯牙絶絃
▶ 驥 : 준마. 천리마.
▶ 伯樂 : 춘추시대 秦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孫陽이다. 말의 相을 잘 보았다고 한다. <莊子 馬蹄>
8. 인재가 있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인재를 잃으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다.
周威公問於甯子曰:
「取士有道乎?」
周威公이 甯子에게 물었다.
“인재를 뽑음에 방도가 있소?”
對曰:
甯子가 대답하였다.
「有.
窮者達之,亡者存之,廢者起之;
四方之士,則四面而至矣。
“있습니다.
곤궁한 사람을 顯達하게 하고, 도망하는 사람을 존치하며 파면된 사람을 기용하시면,
사방의 인재들이 사면에서 올 터입니다.
窮者不達,亡者不存,廢者不起;
四方之士,則四面而畔矣。
곤궁한 사람을 현달하게 하지 않고, 도망하는 사람을 있게 하지 않으며, 파면된 사람을 기용하지 않으면, 사방의 인재들이 사면팔방에서 반란을 일으킬 터입니다.
夫城固不能自守,兵利不能自保,得士而失之,必有其間.
성은 견고하나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무기는 날카로우나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며, 인재를 얻었으나 다시 잃음은 필시 빈틈이 있기 때문입니다.
夫士存則君尊,士亡則君卑。」
인재가 있으면 군주가 존중받게 되고, 인재를 잃으면 군주는 비천하게 됩니다.”
周武公曰:
「士壹至如此乎?」
주 위공이 물었다.
“인재는 이처럼 한결같이 귀중한 것입니까?”
對曰:
영자가 대답하였다.
「君不聞夫楚平王有士,曰楚傒胥, 丘負客,王將殺之,出亡之晉;
晉人用之,是為城濮之戰。
“군주께서는 듣지 못했습니까? 楚王에게 楚傒胥와 丘負客이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초왕이 죽이려고 하매 晉나라로 망명하니, 晉文公이 이들을 등용하여 〈초나라를 격파하였으니〉 이것이 城濮戰爭입니다.
又有士曰苗賁皇,王將殺之,出亡走晉;
晉人用之,是為鄢陵之戰。
또 苗賁皇이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초왕이 죽이려 하매 晉나라로 망명하니 晉厲公이 등용하여 鄢陵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又有士曰上解于,王將殺之,出亡走晉;
晉人用之,是為兩堂之戰。
또 上解于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초왕이 죽이려 하매 晉나라로 망명하니, 晉君이 등용하여 兩堂의 전쟁이 되었습니다.
又有士曰伍子胥,王殺其父兄,出亡走吳;
闔閭用之,於是興師而襲郢,故楚之大得罪於梁鄭宋衛之君,猶未遽至于此也。
또 伍子胥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초왕이 그의 아버지와 형을 죽이자 吳나라로 망명하니,
吳王 闔閭가 기용하자 군사를 일으켜 郢을 습격하니, 초나라가 梁‧鄭‧宋‧衛의 군주에게 큰 죄를 지었으나 아직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此四得罪於其士,三暴其民骨,一亡其國。
이렇게 그의 선비에게 네 번 죄를 지어, 세 번이나 백성의 해골이 들판에 나뒹굴게 하였고 한 차례 국도를 잃었습니다.
由是觀之,士存則國存,士亡則國亡
子胥怒而亡之,申包胥怒而存之 士胡可無貴乎!」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인재가 있으면 나라가 보존되고 인재가 없으면 나라가 망합니다.
伍子胥가 노하여 초나라 국도를 잃게 하였고 申包胥가 노하여 초나라를 보존하였으니, 인재를 귀중하게 여기지 않아서 되겠습니까!”
▶ 周威公 : 주나라 위공. 주공의 후손. 성은 姬 이름은 竈. 시호는 威이다.
▶ 甯子 : 甯越. 전국시대 趙나라 사람이다. 농사짓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15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출세하여 주 위공의 스승이 되었다. <呂氏春秋 博志>
▶ 周武公 : 주위공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 楚平王 : 城濮의 전쟁은 楚成王 때의 일이니 平王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說苑校證>
▶ 楚傒胥, 丘負客 :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 이름인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 城濮之戰 : 城濮戰鬪. 춘추시대 기원전 632년에 晉나라를 중심으로 한 제후 연합군과 초나라를 중심으로 한 제후 연합군이 성복에서 싸운 사건이다. 이 전투에서 진나라가 초나라를 이김으로써 晉文公은 覇者가 되었고 중원에 대한 초나라의 압박을 꺾어냈다.
▶ 苗賁皇 :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令尹 鬪椒의 아들이다. 투초가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楚莊王이 약오씨의 종족을 멸하자 賁皇이 晉나라로 달아났다. 진 晋 景公이 苗邑에 봉했기 때문에 苗씨가 되었다.
▶ 鄢陵之戰 : 기원전 575년에 晉厲公이 鄭나라를 치자 楚共王이 정나라를 구원하려고 출병하여 언릉에서 격전을 벌여 晉나라 군대가 크게 승리하였다. 이 전쟁에서 苗賁皇이 晉厲公에게 계책을 제공하여 승리하였다. <史記 권39.晉世家>
▶ 鄢陵 : 지금의 하남성 鄢陵 북쪽 지역.
▶ 上解于 : 사람 이름인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 兩堂之戰 : 邲之戰. ‘堂’은 ‘棠’과 통용한다. 兩棠은 邲을 말한다. 초 장왕17년(기원전 597년) 자중이 초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晉나라와의 邲전투에서 진나라를 대패시켰다.
▶ 伍子胥 : 초나라 출신이나 아버지가 費無忌의 흉계로 인하여 楚平王의 노여움을 사 아버지와 형이 처형되어 초나라를 탈출하였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오나라로 망명하여 오왕 闔閭에게 등용되어 손무와 함께 초나라를 격파하고 복수하였다.
▶ 暴骨 : 뼈를 들에 노출시키다.
▶ 申包胥 : 초소왕 10년 伍子胥가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의 수도 郢을 공격하니 달아났다. 大夫 申包胥가 秦나라로부터 구원병을 얻어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9.인재를 뽑아 쓰는 방법
哀公問於孔子曰:
「人若何而可取也?」
魯 哀公이 공자에게 물었다.
“사람이 어떠하면 뽑아 쓸 수 있습니까?”
孔子對曰:
「毋取拑者,無取健者,毋取口銳者。」
공자가 대답하였다.
“남의 입을 다물게 하는 사람을 뽑지 말고, 강건한 사람을 뽑지 말고, 말솜씨가 좋은 사람을 뽑지 말아야 합니다.”
哀公曰:
「何謂也?」
노 애공이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孔子曰:
공자가 대답하였다.
「拑者大給利不可盡用
“남의 입을 다물게 하는 사람은 큰 이익을 주기를 바라니 끝까지 다 쓸 수 없고,
健者必欲兼人,不可以為法也
강건한 사람은 반드시 남을 이기려고 하니 본보기로 삼을 수 없고,
口銳者多誕而寡信,後恐不驗也。
말솜씨가 좋은 사람은 허황하여 믿음이 적으니 뒤에 그 말이 부합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夫弓矢和調而後求其中焉
활과 화살이 조화를 이룬 뒤에야 적중하기를 바라고,
馬愨愿順,然後求其良材焉
말은 온순하게 잘 길들여진 뒤에야 훌륭한 재주를 구할 수 있고,
人必忠信重厚,然後求其知能焉。
사람은 반드시 충신하고 정중한 연후에야 지혜와 재능을 구할 수 있습니다.
今有人不忠信重厚而多智能,如此人者,譬猶豺狼與,不可以身近也。
만일 어떤 사람이 충신하지 않고 정중하지 않으면서 지혜와 재능이 많으면, 이런 사람은 비유하면 승냥이나 이리 같은 사람이니, 그런 사람을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是故先其仁義之誠者,然後親之
於是有知能者,然後任之
故曰:親仁而使能。
이 때문에 먼저 그 사람이 仁義를 성실히 행하는 사람인지를 살펴보고 난 연후에 친해야 하고, 여기에 지혜와 재능이 있는 사람인지를 안 연후에 임용합니다.
그래서 ‘인의를 행하는 사람을 친히 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부려야 된다.’라고 말합니다.
夫取人之術也,觀其言而察其行,夫言者所以抒其匈而發其情者也,能行之士必能言之.
인재를 뽑아 쓰는 방법은 그의 말을 들어보고 그의 행위를 살펴봐야 하니,
말은 가슴속의 생각을 표현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잘 실천하는 사람은 말도 신뢰할 수 있게 합니다.
是故先觀其言而揆其行,夫以言揆其行,雖有姦軌之人,無以逃其情矣。」
이 때문에 먼저 그의 말을 들어보고 그의 행위를 가늠해야 하니, 그가 한 말을 가지고 그의 행위를 가늠하면 법을 어기고 난을 일으키는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진정을 숨기지 못할 터입니다.”
哀公曰:
「善。」
애공이 말하였다.
“좋습니다.”
▶ 魯哀公 : 춘추시대 말기 노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蔣 또는 將이고, 定公의 아들이다. 삼환이 강해지는 것을 걱정하여 제후의 힘을 빌려 이를 억제하려고 하다 거꾸로 삼환의 공격을 받아 衛나라로 달아났고, 鄒를 거쳐 越로 갔다. 나중에 나라 사람들이 맞아들여 有山氏 집에서 죽었다.<史記 권33.魯周公世家>
▶ 拑 : 입 다물다.
▶ 健者 : 강건하고 힘이 센 사람.
▶ 口銳 : 말솜씨가 좋다.
▶ 誕 : 속이다. 현혹하다.
▶ 愨 : 성실하다.
▶ 愿順 : 순종하다.
▶ 揆 : 헤아리다. 가늠하다.
▶ 姦軌 : 밖에서 일어나는 亂과 안에서 일어나는 亂. 난이 밖에서 일어나는 것을 姦이라 하고,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軌라 한다.
10.녹봉만 먹는 신하는 군주를 보전할 수 없다.<尸位素餐>
周公攝天子位七年,布衣之士,執贄所師見者十二人,窮巷白屋所見者四十九人,時進善者百人,教士者千人,官朝者萬人。
周公이 천자의 지위를 섭정하기 7년, 평민 중에 폐백을 가지고 스승으로 모시며 만난 이가 12명이고, 궁벽한 거리의 초라한 집에서 만난 이가 49명이며, 때때로 좋은 말을 올린 이가 100명이고, 교화를 받은 선비가 천 명이며, 조정에서 벼슬한 이가 만 명이었다.
當此之時,誠使周公驕而且吝,則天下賢士至者寡矣,苟有至者,則必貪而尸祿者也,尸祿之臣,不能存君矣。
그때 만약 주공이 교만하고 또 인색하였다면 천하의 賢士로서 온 사람이 적었을 터이고, 간신히 온 사람이 있더라도 필시 탐욕스럽고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먹는 자이었을 터이니,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먹는 신하는 군주를 보전하지 못한다.
▶ 周公攝天子之位 : 주 성왕이 어리고 주나라가 막 천하를 평정했기에 周公은 제후들이 주나라를 배반할까 두려워서 국정을 대리하였다.
▶ 布衣 : 평민.
▶ 贄 : 幣帛. 제자가 처음 뵙는 선생에게 올리는 禮物
▶ 白屋 : 초라한 초가집. 옛날에 평민들의 집에는 아무런 색도 칠하지 않고 목재의 결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에 백옥이라 하였다.
▶ 誠 : 만약.
▶ 尸祿 :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받다.
▶ 尸位素餐 : 尸童의 공짜밥이란 뜻으로 하는 일 없이 국가의 녹을 축내는 정치인을 비유한 말. 옛날 중국에서는 제사지낼 때 조상의 혈통을 이은 어린아이를 조상의 신위에 앉혀 놓는 풍습이 있었다. 영혼이 어린아이의 입을 통해 마음껏 먹고 마시게 하려는 신앙에서 나온 풍습이었다. 이때 신위에 앉아 있는 아이를 시동이라 한다. 尸位는 그 시동이 앉아 있는 자리이고, 素餐은 맛없는 반찬이란 뜻으로 공짜로 먹음을 말한다. 즉, 아무것도 모르면서 남이 만들어 놓은 자리에 앉아 공짜밥이나 먹고 있다는 뜻으로 하는 일 없이 국가의 녹을 축내는 관리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漢書 朱雲傳> [史記 本紀] 권04. 周本紀
11. 횃불을 밝혀놓고 인재를 구하다 (庭燎求賢)
齊桓公設庭燎,為士之欲造見者,期年而士不至.
齊桓公이 宮庭에 횃불을 밝힘은, 선비로서 와서 만나고자 하는 자를 위함인데, 1년이 되도록 선비가 찾아오지 않았다.
於是東野鄙人有以九九之術見者,桓公曰:
「九九何足以見乎?」
이때 東野의l 촌사람으로 九九法을 가지고 뵈려는 자가 있어서, 환공이 말하였다.
“구구법으로 어떻게 만나기에 족하겠느냐?”
鄙人對曰:
촌사람이 대답하였다.
「臣非以九九為足以見也,臣聞主君設庭燎以待士,期年而士不至.
“신은 구구법을 가지고 뵙기에 충분하다고 여긴 것이 아니지만, 신이 듣기에, 주군께서 궁정에 횃불을 밝혀놓고 인재를 기다리셨으나 1년이 되도록 인재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夫士之所以不至者,以君、天下賢君也;
四方之士,皆自以爲不及君,故不至也。
어진 인재가 오지 않음은 주군이 천하의 賢君이기 때문이니, 사방의 선비가 모두 스스로 주군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매 찾아오지 않습니다.
夫九九薄能耳,而君猶禮之,況賢於九九者乎?
구구법은 하찮은 재능일 뿐이지만 주군께서 그런 사람조차 예우하시는데, 하물며 구구법을 하는 자보다 나은 현자이겠습니까?
夫太山不辭壤石,江海不逆小流,所以成大也.
태산은 흙과 돌 하나라도 사양하지 않고 강과 바다는 작은 물도 거절하지 않으니, 그것이 크게 된 까닭입니다.
《詩》云:
『先民有言,詢于芻蕘。』
言博謀也。」
<詩經>에 이르기를,
‘옛 현인의 말에 나뭇꾼에게 물으라 하셨네.’
라고 하니, 의견을 널리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桓公曰善,乃因禮之。
환공이 좋다고 말하고 그를 예우하였다.
期月四方之士,相攜而並至.
한 달이 되자 사방의 선비가 서로 손을 잡고 몰려왔다.
《詩》曰:
「自堂徂基,自羊徂牛。」
言以內及外,以小及大也。
<詩經>에 이르기를,
“묘당에서 내려와 문전으로 가서 양과 소를 살펴보시네.”
라고 하였으니, 안에서 밖에 미치며 작은 것에서 큰 것에 미친다는 말이다.
▶ 庭燎 : 宮庭에 밝힌 횃불로 군주가 정사에 근면함을 말한다.
※ 庭燎之光 : 庭燎求賢. 인재를 구하기 위해 뜰에 횃불을 매달아 밝게 비춘다는 고사성어.
▶ 鄙人 : 시골사람.
▶ 先民有言,詢于芻蕘 : <詩經 大雅 板>에 “내 직책이 비록 그대들과 다를지라도 그대와 같은 동료라네. 내가 계책을 말해도, 그대들은 귀 기울이지 않고 있네. 내 말은 잘 들어야하니 그대는 비웃지 말라. 옛 현인들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무꾼에게도 물으라 我雖異事、及爾同僚。我即而謀、聽我囂囂。我言維服、勿以為笑。先民有言、詢于芻蕘.”라고 하였다. 이 시의 題名은 ‘무심한 하늘’로 걱정스러운 세상의 일에서 느끼는 감회를 노래한 것이다. 芻蕘는 땔나무를 하는 사람
▶ 自堂徂基,自羊徂牛 : <詩經 周頌 絲衣>에 “祭服은 정결하고 머리에 쓴 관은 공손하기도 하네. 묘당에서 내려와 문전으로 가서 양과 소 잡아놓은 것과 크고 작은 솥의 음식을 둘러보시네. 구부정한 소뿔 잔에 맛나고 향기로운 술이 담겨있고, 시끄럽지도 오만하지도 않으니 장수하는 복 받으시리라 絲衣其紑、載弁俅俅。自堂徂基、自羊徂牛。鼐鼎及鼒、兕觥其觩。旨酒思柔。不吳不敖、胡考之休.”라고 하였다. 이 시의 제목은 ‘제사에 입는 옷’이며, 제사를 지낸 다음날 작은 제사를 지내는 행사를 노래한 것이다.
12.군주가 현명하면 신하가 충성한다.
齊景公伐宋,至於岐隄之上,登高以望,太息而歎曰:
「昔我先君桓公,長轂八百乘以霸諸侯,今我長轂三千乘,而不敢久處於此者,豈其無管仲歟!」
齊景公이 宋나라를 토벌하고 岐隄에 이르러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고 한숨을 쉬며 탄식하였다.
“옛날 나의 先君 桓公께서는 長轂 8백 대로 제후의 패자가 되셨는데, 그런데 나는 長轂이 3천 乘인데도 감히 여기에 오래 머물지 못함은 管仲이 없어서일 터이다!”
弦章對曰:
弦章이 대답하였다.
「臣聞之,水廣則魚大,君明則臣忠
“신이 듣기에 ‘물이 넓으면 물고기가 크고, 군주가 현명하면 신하가 충성한다.’라고 합니다.
昔有桓公,故有管仲
예전에 환공이 있으매 관중이 있었습니다.
今桓公在此,則車下之臣盡管仲也。」
그러니 환공께서 여기에 계신다면 수레 아래의 신하가 모두 관중일 터입니다.”
▶ 岐隄 : 땅 이름. 춘추시대 송나라의 도읍.
▶ 長轂 : 兵車. 수레바퀴의 중심이 되는 굴대 통나무로 적군을 타격하는 데 쓴다.
▶ 弦章 : 춘추시대 齊나라의 大夫로, 景公 때 大理가 되어 獄事를 공정하게 판결하였다. [說苑] <제1권 君道>
13. 趙簡子의 현명한 인재
趙簡子游於河而樂之,歎曰:
「安得賢士而與處焉!」
趙簡子가 西河에서 뱃놀이하며 즐기다가 탄식하였다.
“어찌하면 현명한 인재를 얻어 함께 있을까!”
舟人古乘跪而對曰:
「夫珠玉無足,去此數千里而所以能來者,人好之也;
今士有足而不來者,此是吾君不好之乎!」
뱃사공 古乘이 무릎을 꿇고 대답하였다.
“珠玉에 발이 없고 거리가 수천 리나 되어도 이곳까지 올 수 있음은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비에게는 발이 있으나 오지 않음은 우리 군주께서 선비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趙簡子曰:
「吾門左右客千人,朝食不足,暮收市征,暮食不足,朝收市征,吾尚可謂不好士乎?」
조간자가 말하였다.
“내 門下의 측근 문객이 천 명이라 아침밥이 부족하면 저녁에 시장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저녁밥이 부족하면 아침에 시장에서 세금을 징수하는데, 내가 그래도 선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느냐?”
舟人古乘對曰:
뱃사공 고승이 대답하였다.
「鴻鵠高飛遠翔,其所恃者六翮也.
“고니가 높이 날아 멀리 오름에 믿는 것은 날갯죽지입니다.
背上之毛,腹下之毳,無尺寸之數,去之滿把,飛不能為之益卑, 益之滿把, 飛不能為之益高。
등 위의 털과 배 밑의 솜털에는 尺寸으로 계산할 것이 없으매, 한 줌 가득 그것을 뽑는다고 더 낮게 날지는 않고, 한 줌 가득 그것을 보탠다고 더 높게 날지는 못합니다.
不知門下左右客千人者,有六翮之用乎? 將盡毛毳也。」
문하의 측근 문객 천 명에 날갯죽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 모두 등 위의 털과 배 밑의 털일 터입니다.”
▶ 趙簡子 : 趙鞅. 춘추시대 말기 晉나라의 大夫. 趙孟 또는 志父로도 불린다. 진나라 내부에서 6卿이 세력 다툼을 벌일 때 2경인 范氏와 中行氏를 몰아내고 趙나라를 일으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 河 : 西河
▶ 古乘 : 사람 이름으로, 평생 행적은 미상이다.
▶ 珠玉無足 : 바다에서 나는 진주와 산에서 나는 玉에는 다리가 없다.
▶ 高飛遠翔 : 멀리 날아오르다.
▶ 鴻鵠 : 큰 기러기와 고니. 큰 새를 일컫는다.
▶ 六翮 : 양 날개의 날갯죽지. 翮(핵)은 깃의 뿌리 부위로 단단한 곳.
▶ 滿把 : 손 가득히 쥐다.
▶ 毳 : 솜털. 배 밑털.
14. 왕이 좋아하지 않는 것
齊宣王坐,淳于髡侍,宣王曰:
「先生論寡人何好?」
齊宣王이 앉아 있고 淳于髡이 모시고 있었는데 선왕이 물었다.
“선생은 과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말해보겠소?”
淳于髡曰:
「古者所好四,而王所好三焉。」
순우곤이 말하였다.
“옛사람은 좋아함이 네 가지였는데, 왕께서 좋아함은 세 가지입니다.”
宣王曰:
「古者所好,何與寡人所好?」
제 선왕이 말하였다.
“옛사람이 좋아함과 과인이 좋아함을 비교하면 어떠하오?”
淳于髡曰:
「古者好馬,王亦好馬
古者好味,王亦好味
古者好色,王亦好色
古者好士,王獨不好士。」
순우곤이 대답하였다.
“옛사람이 말을 좋아했는데 왕께서도 말을 좋아하시고,
옛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좋아했는데 왕께서도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시고,
옛사람이 여색을 좋아했는데 왕께서도 여색을 좋아하시며,
옛사람이 선비를 좋아했는데 왕께서만 유독 선비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宣王曰:
「國無士耳,有則寡人亦說之矣。」
선왕이 말하였다.
“나라에 어진 선비가 없을 뿐이니, 어진 선비가 있다면 과인도 그를 좋아할 터이오.”
淳于髡曰:
「古者驊騮騏驥,今無有,王選於眾,王好馬矣
古者有豹象之胎,今無有,王選于眾,王好味矣
古者有毛廧西施,今無有,王選於眾,王好色矣。
王必將待堯舜禹湯之士而後好之,則禹湯之士亦不好王矣。」
순우곤이 말하였다.
“옛날의 驊騮‧騏驥가 지금은 없는데 왕께서 여럿 중에서 골라 타시니 이는 왕께서 말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표범과 코끼리의 胎로 만든 요리가 지금은 없는데 왕께서 여럿 중에서 골라 드시니 이는 왕께서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毛廧과 西施가 지금은 없는데 왕께서 여럿 중에서 골라 취하시니 이는 왕께서 여색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왕께서 기어이 堯‧舜‧禹‧湯을 보필했던 어진 선비라야 좋아하신다면, 우‧탕을 보필했던 어진 선비가 또한 왕을 좋아하지 않을 터입니다.”
宣王嘿然無以應。
선왕은 잠자코 응답하지 않았다.
▶ 齊宣王 : 田辟疆. 전국시대 제나라의 군주로 威王의 아들이다. 재위 중에 田嬰과 儲子를 기용해 재상으로 삼고 匡章과 聲子를 장군으로 삼았다. 아버지 위왕의 뒤를 이어 稷下에 學宮을 설치하여 학자를 초빙하고 강학 토론하도록 하였다. 재위 기간은 19년이다.
▶ 淳于髡 : 익살과 다변으로 유명했던 전국시대 제나라의 변론가이며 滑稽를 잘하여 여러 차례 제후에게 사신으로 갔으나 굴욕을 당하지 않았다. 齊威王을 설득하여 따르게 하고, 제나라 주변의 제후들이 齊나라를 침략하자 기지로 이를 막아냈다.
“淳于髡은 齊나라 사람의 데릴사위였다. 키는 7척도 못되지만 익살스럽고 변설에 능해 제후들에게 자주 사신으로 갔으나 굴욕을 당한 적이 없었다. 제나라 威王 때 위왕이 수수께끼를 좋아했으며, 음탕하게 놀면서 밤새워 술 마시기를 즐겨하여 술에 빠져서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정사를 경대부에게 맡겼다. 문무백관들이 문란해지고 제후들이 잇따라 침입하여 나라의 멸망이 위기에 봉착하여 일순간에 놓여 있었으나 측근들은 감히 간언하지 못하였다.”<史記列傳 권126 滑稽列傳>
▶ 古者 : 古人. 옛사람.
▶ 驊騮騏驥 : 화류와 기기. 모두 준마이다.
▶ 毛廧 : 越王이 총애하던 嬖妾. 廧은 嬙으로도 쓴다.
▶ 西施 : 春秋時代 越나라의 미인. 越王 句踐이 會稽에서 패하자, 范蠡가 西施를 吳王 夫差에게 바쳐 吳나라의 政事를 어지럽게 하였는데, 오나라가 망하자 범려는 서시와 함께 五湖에 배를 띄워 海島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15. 인재가 오지 않는 이유
衛君問於田讓曰:
「寡人封侯盡千里之地,賞賜盡御府繒帛而士不至,何也?」
衛君이 田讓에게 물었다.
“과인이 封侯에 천 리의 땅을 다 썼고, 賞賜에 궁중의 창고의 비단을 다 썼는데도 선비들이 오지 않음은 무엇 때문이오?”
田讓對曰:
「君之賞賜,不可以功及也
君之誅罰,不可以理避也
猶舉杖而呼狗,張弓而祝雞矣
雖有香餌而不能致者,害之必也。」
전양이 대답하였다.
“군주의 賞賜는 樹功으로 미치지 못하고,
군주의 형벌은 정당한 이유로 피하지 못하여,
마치 몽둥이를 들고서 개를 부름과 같고, 활시위를 당기면서 닭을 ‘구구’하며 부름과 같습니다.
비록 향기로운 미끼가 있더라도 오게 하지 못함은, 해침이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 田讓 : 사람 이름으로, 평생 행적은 미상이다.
▶ 繒帛 : 비단.
▶ 祝雞 : ‘구구’하는 소리를 내며 닭을 부르다. ‘祝祝’은 닭을 부르는 소리.
16. 선비를 얻기는 쉬우나 쓰기는 어렵다.
宗衛相齊,遇逐罷歸舍,召門尉田饒等二十有七而問焉,曰:
「士大夫誰能與我赴諸侯者乎?」
宗衛가 齊나라에서 재상을 지내다가 면직되고 추방당하여 집에 돌아와서 門尉인 田饒 등 27명의 가신을 불러놓고 물었다.
“사대부 중에 누가 나와 함께 다른 제후의 나라로 갈 수 있겠는가?”
田饒等皆伏而不對。
전요 등이 모두 엎드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宗衛曰:
「何士大夫之易得而難用也!」
종위가 말하였다.
“사대부를 얻기는 쉬운데 쓰기는 어찌 이리도 어려운가!”
饒對曰:
「非士大夫之難用也,是君不能用也。」
전요가 대답하였다.
“사대부를 쓰기 어려움이 아니라, 주군께서 쓰지 못함입니다.”
宗衛曰:
「不能用士大夫何若?」
종위가 물었다.
“사대부를 쓰지 못함이란 어떠하오?”
田饒對曰:
전요가 대답하였다.
「廚中有臭肉,則門下無死士矣。
“부엌에 썩어서 냄새나는 고기가 있으면, 문하에 죽기로 주군을 위하는 사람이 없는 법입니다.
今夫三升之稷不足於士;
而君雁鶩有餘粟。
그런데 3되의 양식이 선비에게 부족하나,
주군의 기러기와 오리에게는 먹고 남는 곡식이 있습니다.
紈素綺繡, 靡麗堂楯, 從風而弊,而士曾不得以緣衣;
곱고 깨끗한 비단과 꽃무늬 비단이 화려하게 마루의 난간을 장식하여 비바람을 따라 낡아가나, 선비는 옷 끝 가장자리를 꿰매지 못하고 있으며,
果園梨粟,後宮婦人摭以相擿,而士曾不得一嘗.
과수원의 배와 밤을 후궁의 부인들이 주워서 서로 던지며 놀건만, 선비는 한 번 맛보지도 못합니다.
且夫財者,君之所輕也;
死者士之所重也,君不能用所輕之財,而欲使士致所重之死,豈不難乎哉?」
더구나 재물은 주군께서 가볍게 여기는 것이고, 죽음은 선비가 중히여기는 것인데, 주군께서는 가볍게 여기는 재물을 쓰지 않으면서 선비가 귀중하게 여기는 죽음을 바치게 하려 하시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於是宗衛面有慚色,逡巡避席而謝曰:
「此衛之過也。」
이에 종위가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우물쭈물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과하였다.
“이것은 나의 잘못이오.”
▶ 宗衛 : 사람 이름으로 평생 행적은 미상이다. <漢詩外傳>에는 ‘宋燕’으로 기록하고 있다.
▶ 田饒 : 사람 이름으로 평생 행적은 미상이다. <漢詩外傳>에는 ‘陳饒’로 기록하고 있다.
▶ 稷 : 기장. 조.
▶ 雁鶩 : 기러기와 오리.
▶ 紈素綺繡 : 흰 비단과 수놓은 비단.
▶ 麗 : 화려하다.
▶ 楯 : 난간.
▶ 緣衣 : 가장자리에 선을 둘러 장식한 옷.
▶ 摭以相擿 : 주워서 서로 던지다.
▶ 逡巡避席 : 우물쭈물하며 자리에서 물러나다.
17. 衛靈公이 현인인 까닭
魯哀公問於孔子曰:
「當今之時,君子誰賢?」
魯 哀公이 공자에게 물었다.
“오늘날 군주 중에 누가 현명합니까?”
對曰:
「衛靈公。」
공자가 대답하였다.
“衛 靈公입니다.”
公曰:
「吾聞之,其閨門之內,姑姐妹無別。」
애공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靈公은 閨門 안에서 고모‧누님‧누이의 분별이 없다고 합디다.”
對曰:
공자가 대답하였다.
「臣觀於朝廷,未觀於堂陛之間也。
“신은 조정에서 보았지, 후궁에서 보지 않았습니다.
靈公之弟曰公子渠牟,其知足以治千乘之國,其信足以守之,而靈公愛之。
영공의 아우는 公子 渠牟인데, 그의 지혜는 千乘의 제후국을 다스릴 만하고, 그의 신의는 나라를 지킬 만하매 영공이 그를 사랑합니다.
又有士曰王材,國有賢人,必進而任之,無不達也;
不能達,退而與分其祿,而靈公尊之。
또 선비에 王林이 있어서, 나라에 賢人이 있으면 항상 천거하고 임용하여 顯達하게 하지 않음이 없고, 현달하지 못하면 퇴임시키고 자신의 녹봉을 나누어주니 영공이 그를 존중합니다.
又有士曰慶足,國有大事,則進而治之,無不濟也,而靈公說之。
또 선비에 慶足이 있어서,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나서서 처리하여 도움이 되지 않음이 없으니, 영공이 그를 좋아합니다.
史鰌去衛,靈公邸舍三月,琴瑟不御,待史鰌之入也而後入,臣是以知其賢也。」
史鰌가 衛나라를 떠나려 하자, 영공이 客館에 묵으며 석 달 동안 음악을 연주하지 않다가, 사추가 들어와서야 궁궐에 들어왔습니다. 신은 이 때문에 그의 현명함을 압니다.”
▶ 魯哀公 : 춘추시대 말기 노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蔣 또는 將이고, 定公의 아들이다. 제나라 田常이 齊簡公을 죽이자 孔子가 田氏를 정벌할 것을 주장했지만 듣지 않았다. 재위 중 공자가 衛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왔지만 등용하지 못하였다. 삼환이 강해지는 것을 걱정하여 제후의 힘을 빌려 이를 억제하려고 하다 거꾸로 삼환의 공격을 받아 衛나라로 달아났고, 鄒를 거쳐 越로 갔다. 나중에 나라 사람들이 맞아들여 有山氏 집에서 죽었다.
▶ 衛靈公 : 춘추시대 衛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元이고, 獻公의 손자다.
혼군으로 이름 높았으며, 남색을 즐겼고 부인 南子는 이복오빠인 송조와 사통하면서 정치에 깊이 개입했으므로 아들인 태자 蒯聵가 영공의 부인 南子를 죽이려다 실패하자 영공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괴외가 宋나라로 달아났다가 얼마 뒤 진나라로 들어갔다.
▶ 閨門 : 부녀가 거처하는 안방.
▶ 姑姐妹無別 : 고모‧누님‧누이동생과 음란하게 지낸다는 뜻이다.
▶ 堂陛之間 : 대청과 섬돌의 사이라는 뜻으로, 宮內를 이른다. 여기서는 後宮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
▶ 史鰌 : 姓이 史, 이름이 鰌, 字는 子魚로 춘추 말기 衛나라의 대부로 전해진다. ≪論語≫ <衛靈公>에도 “정직하구나 史魚여.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도 화살과 같이 곧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도 화살과 같이 곧았다[直哉史魚 邦有道如矢 邦無道如矢].”라고 한 기록이 있다.
▶ 邸舍 : 1.古代专指货栈。 2.战国时的诸国客馆。 3.府第。 4.客店;客栈。
18. 초나라의 어린 재상
介子推行年十五而相荊,仲尼聞之,使人往視,還曰:
「廊下有二十五俊士,堂上有二十五老人。」
介子推가 15세에 楚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공자가 이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돌아와서 말하였다.
“廊下에는 25명의 뛰어난 사람이 있고, 堂上에는 25명의 노인이 있었습니다.”
仲尼曰:
「合二十五人之智,智於湯武
并二十五人之力,力於彭祖。
以治天下,其固免矣乎!」
공자가 말하였다.
“25명의 지혜를 합하면 湯·武보다 지혜롭겠고,
25명의 역량을 모으면 彭祖보다 강력하겠다.
이로써 천하를 다스리면 틀림없이 환난을 면할 것이다.”
▶ 介子推 : 介之推, 介推라고도 하는데 후일 존경의 의미에서 子를 더해 ‘개자추’가 되었다. 개자추는 진 문공을 따라 19년 동안 망명하였었다. 개차추가 초나라의 재상이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孔子家語> ‘육본’에는 개자추가 아니라 ‘荊公子’로 기록하고 있다.
▶ 荊 : 楚나라의 본래 이름, 荊蠻.
▶ 仲尼 : 孔子. 字는 仲尼이고 성은 孔氏이다.
▶ 彭祖 : 본명은 籛鏗으로 堯임금 때 彭城에 봉해진 뒤 夏‧殷‧周 三代에 걸쳐 8백 년을 살았다는 전설상의 인물
19. 銅鞮伯華의 겸손함
孔子閒居,喟然而歎曰:
「銅鞮伯華而無死,天下其有定矣。」
공자가 한가하게 지낼 때 탄식하였다.
“銅鞮伯華가 만일 죽지 않았더라면 천하가 대체로 안정을 얻었을 터이다.”
子路曰:
「願聞其為人也何若。」
子路가 말하였다.
“그 위인이 어떠한지 듣고 싶습니다.”
孔子曰:
「其幼也敏而好學,其壯也有勇而不屈,其老也有道而能以下人。」
공자가 말하였다.
“그가 어렸을 때는 총명하면서 학문을 좋아하였고, 장년일 때는 용기가 있어서 불의에 굽히지 않았으며, 늙어서는 도덕이 있으면서도 남에게 자신을 낮추었느니라.”
子路曰:
「其幼也敏而好學則可,其壯也有勇而不屈則可;
夫有道又誰下哉?」
자로가 말하였다.
“그가 어려서 총명하면서 학문을 좋아함은 그럴 만하고, 장년일 때 용기가 있어서 불의에 굽히지 않음도 그럴 만하지만,
도덕을 갖추고도 또 누구에게 자신을 낮추었습니까?”
孔子曰:
공자가 말하였다.
「由不知也。
“由가 모르는구나.
吾聞之,以眾攻寡而無不消也;
以貴下賤,無不得也。
내가 듣기에,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적은 사람을 공격하면 소멸시키지 못함이 없고,
귀한 신분으로 천한 사람에게 자신을 낮추면 얻지 못함이 없다고 하였다.
昔在周公旦制天下之政而下士七十人,豈無道哉?
옛날 周公 旦이 천하의 정치를 장악함에 자신을 낮추어 만난 선비가 70인이었는데 어찌 도가 없었겠느냐?
欲得士之故也,夫有道而能下於天下之士,君子乎哉!」
현사를 얻으려 했기 때문이니 도를 갖추고도 천하의 선비에게 자신을 낮출 수 있으니 군자일 터이다!”
▶ 喟然 : 한숨을 쉬며 서글프게 탄식하는 모양.
▶ 銅鞮伯華 : 춘추시대 晉나라의 대부 羊舌赤으로 铜鞮가 봉읍이었으므로 동제백화라 하였다. 伯華는 양설적의 字이다.
▶ 而 :而는 복합문의 상분구에 쓰여, 가설 접속사로 쓰인다. “만약 …한다면”
¶ 子産而死, 誰其嗣之? 《左傳 襄公30年》
○ 자산이 만약 죽는다면, 장차 누가 그를 이어받을 것인가? <허사 而 참조>
▶ 其 : 대체로. 아마
▶ 何若 : 何如와 같다. 어떠한가?
▶ 敏 : 총명하다.
▶ 消 : 소멸하다.
▶ 制 : 장악하다.
20. 빈궁한 사람이 남에게 교만할 수 있다.
魏文侯從中山奔命安邑,田子方從,太子擊過之,下車而趨,子方坐乘如故,告太子曰:
「為我請君,待我朝歌。」
魏文侯가 中山國에서 安邑으로 달려가 명령할 때 田子方이 隨從하였는데, 太子 擊이 지나다가 전자방을 만나 수레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달려갔으나, 전자방이 여전히 수레에 앉아 태자에게 고하였다.
“저를 대신하여 군주께 청하시기를, 朝歌에서 저를 기다리라고 하십시오.”
太子不說,因為子方曰:
「不識貧窮者驕人乎,富貴者驕人乎?」
태자가 불쾌하여 전자방에게 말하였다.
“모르겠습니다. 빈궁한 사람이 남에게 교만합니까? 부귀한 사람이 남에게 교만합니까?”
子方曰:
전자방이 말하였다.
「貧窮者驕人,富貴者安敢驕人,人主驕人而亡其國,吾未見以國待亡者也
“빈궁한 사람이 남에게 교만하지, 부귀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남에게 교만하겠습니까? 군주가 남에게 교만하면 그 나라를 망치는데, 저는 나라를 가지고 망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大夫驕人而亡其家,吾未見以家待亡者也。
대부가 남에게 교만하면 그의 가문을 잃는데, 저는 집을 가지고 망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貧窮者若不得意,納履而去,安往不得貧窮乎?
빈궁한 사람은 만약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신을 신고 떠나버리는 법이니, 어디로 간들 빈궁함을 누리지 못하겠소?
貧窮者驕人,富貴者安敢驕人。」
빈궁한 사람이 남에게 교만하지, 부귀한 사람이 어찌 감히 남에게 교만하겠습니까?”
太子及文侯道田子方之語,文侯歎曰:
태자가 문후에게 가서 전자방의 말을 이르자 문후가 탄식하였다.
「微吾子之故,吾安得聞賢人之言.
“나의 아들 때문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현인의 말을 들을 수 있었겠느냐?
吾下子方以行,得而友之。
내가 전자방에게 몸을 낮추어 행동하여 그를 얻어 벗하였다.
自吾友子方也,君臣益親,百姓益附,吾是以知友士之功
내가 전자방과 벗한 이래, 君臣이 더욱 친밀해지고 백성은 더욱 歸附하니, 나는 이 때문에 賢士를 벗한 功效를 알았다.
我欲伐中山,吾以武下樂羊,三年而中山為獻於我,我是以知友武之功。
내가 중산국을 토벌하고자 武勇 때문에 樂羊에게 몸을 낮추어 3년이 되자 중산국을 나에게 바쳤으니, 나는 이 때문에 武士를 벗한 功效를 알았다.
吾所以不少進於此者,吾未見以智驕我者也
내가 여기에서 좀 더 진보하지 못하였음은, 지혜를 가지고 나에게 교만한 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若得以智驕我者,豈不及古之人乎?」
지혜를 가졌다고 나에게 교만한 자를 얻었다면, 어찌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였겠느냐?”
▶ 魏文侯 : 전국시대 魏나라의 초대 제후로 성은 姬, 씨는 魏, 이름은 ‘斯’, 또는 ‘都’이다. 李悝·吳起·樂羊·西門豹 등 인재를 등용하였고, 위나라를 전국시대 최초로 패국으로 만들었다.
▶ 中山 : 周나라의 諸侯國 이름으로 전국시대에 中山國이었다. 趙武靈王에게 멸망되었다.
▶ 安邑 : 기원전 340년 魏나라는 齊와의 전쟁에 패하여 安邑에서 동쪽인 大梁으로 천도하게 되며, 그 이후 魏나라는 梁나라로 불리게 되었다.
▶ 子擊 : 위나라의 태자. 魏文侯의 아들로 이름은 擊이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대부로 훗날의 魏武侯이다
▶ 田子方 : 魏나라의 현인으로 이름은 無擇이며 魏文侯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데 공자의 제자인 子夏 계열의 유학자로 추정된다.
▶ 納履 : 신을 신다.
▶ 樂羊 : 기원전 408년에 魏文侯가 樂羊을 시켜 中山을 쳐부수게 하였다. 그때 악양의 아들이 중산국에 있었는데, 중산국의 군주가 악양의 아들을 삶아 그 국물을 악양에게 보냈다. 악양은 幕下에 앉아 이를 받아 한 그릇을 모두 마셔 버렸다. 결국 악양이 중산국을 깨뜨리자 문후는 그 공으로 상을 주면서도 악양의 마음을 의심하였다. <戰國策 魏策><史記 樂毅列傳>
21. 신하에게 잔인하게 대하는 군주
晉文侯行地登隧,大夫皆扶之,隨會不扶,文侯曰:
「會!夫為人臣而忍其君者,其罪奚如?」
晉文侯가 평지를 가다가 언덕길을 올라감에 대부들이 모두 수레를 밀었으나 隨會가 밀지 않자 문후가 말하였다.
“수회야! 남의 신하가 되어 그 군주에게 모질게 대함은 그 죄가 어떠한가?”
對曰:
「其罪重死。」
수회가 대답하였다.
“그 죄는 重死입니다.”
文侯曰:
「何謂重死?」
문후가 물었다.
“무엇을 重死라고 이르느냐?”
對曰:
「身死,妻子為戮焉。」
수회가 대답하였다.
“자신이 죽고, 처자가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합니다.”
隨會曰:
「君奚獨問為人臣忍其君者,而不問為人君而忍其臣者耶?」
수회가 말하였다.
“군주께서는 어찌 신하로서 그 군주에게 모질게 대함에 대하여만 물으시되, 군주로서 그의 신하에게 모질게 대함은 묻지 않으십니까?”
文侯曰:
「為人君而忍其臣者,其罪何如?」
문후가 물었다.
“군주로서 그의 신하에게 모질게 대함은 그 죄가 어떠한가?”
隨會對曰:
수회가 대답하였다.
「為人君而忍其臣者,智士不為謀,辨士不為言,仁士不為行,勇士不為死。」
“군주로서 그의 신하에게 모질게 대하면 智士는 군주를 위해 계책을 내지 않고, 辯士는 군주를 위해 말하지 않고, 仁士는 군주를 위해 덕을 행하지 않으며, 勇士는 군주를 위해 죽음을 바치지 않습니다.”
文侯援綏下車,辭大夫曰:
「寡人有腰髀之病,願諸大夫勿罪也。」
문후가 수레의 손잡이를 잡고 수레에서 내려 대부들에게 사과하였다.
“과인에게 허리와 넓적다리의 병이 있으니 대부들은 허물하지 마시오.”
▶ 晉文侯 : 晉文公.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인 晋 獻公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重耳이다. 헌공의 후처로 들어온 驪姬의 계략에 빠져 형인 申生이 사망하고 자신은 진나라를 떠나 狄나라로 망명하였다. 19년간 천하를 주유하였으며,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秦나라의 도움으로 군사를 이끌고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 登隧 : <新序>에는 ‘上羊腸之阪’으로 기록하고 있다. 험한 언덕을 오르다.
▶ 隨會 : 춘추시대 晉나라의 大夫인 士會를 말하며 봉토가 隨와 范이므로 隨會, 范會 등으로도 불린다. 晉나라 대신 趙盾이 雍을 옹립하기 위해서 隨會를 보내 맞아들이게 하였으나 晉나라가 양공의 아들 夷皐를 옹립하고 秦나라 군대를 공격하는 바람에 수회는 秦나라로 망명하였다.
▶ 忍 : 잔인하다. 동정심이 없다.
▶ 智士 : 지혜로운 선비
▶ 辨士不為言 : 변사는 군주를 위해 외교사절로 나가지 않는다는 뜻. 辨士는 입담이 좋은 선비.
▶ 仁士 : 어진 선비. 덕행이 있는 선비
▶ 綏 : 수레의 손잡이.
▶ 腰髀 : 허리와 넓적다리.
22. 권세를 가지고 교만을 부리지마라.
齊將軍田瞶出將,張生郊送曰:
「昔者堯讓許由以天下,洗耳而不受,將軍知之乎?」
齊將 田聵가 군대를 거느리고 출정함에, 張生이 교외에서 전송하며 말하였다.
“옛날 堯임금이 천하를 許由에게 양보하려고 하자 귀를 씻고 받지 않았는데 장군은 그 일을 알고 있소?”
曰:
「唯然,知之。」
전외가 말하였다.
“예, 그렇소, 알고 있습니다.”
「伯夷叔齊辭諸侯之位而不為,將軍知之乎?」
장생이 물었다.
“伯夷‧叔齊가 제후의 지위를 사양하고 제후가 되지 않았는데 장군은 그것을 알고 있소?”
曰:
「唯, 然,知之。」
전외가 말하였다.
“예, 그렇소, 알고 있습니다.”
「於陵仲子辭三公之位而傭為人灌園,將軍知之乎?」
장생이 물었다.
“그러면 於陵仲子는 三公의 지위를 사양하고 품팔이하여 남의 정원에 물을 주며 살았다는데 장군은 이를 알고 있소?”
曰:
「唯, 然,知之。」
전외가 말하였다.
“예, 그렇소, 알고 있습니다.”
「智過去君弟,變姓名,免為庶人,將軍知之乎?」
장생이 물었다.
“智過는 군주의 아우라는 지위를 버리고 성명을 바꾸고 귀족의 신분을 벗고 서인이 되었다는데 장군은 이를 알고 있소?”
曰:
「唯然,知之。」
전외가 말하였다.
「孫叔敖三去相而不悔,將軍知之乎?」
장생이 물었다.
“孫叔敖가 세 번 재상을 그만두면서 후회하지 않았다는데 장군은 이를 알고 있소?”
曰:
「唯然,知之。」
전외가 말하였다.
“예, 그렇소, 알고 있습니다.”
「此五大夫者,名辭之而實羞之。
“이 다섯 대부는 명분상 사양하였으나 실상 부끄러워하였소.
今將軍方吞一國之權,提鼓擁旗,被堅執銳,旋回十萬之師,擅斧鉞之誅,慎毋以士之所羞者驕士。」
그런데 장군은 바야흐로 온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북을 잡고 깃발을 세우며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10만의 군대를 지휘하여 주살하는 권한을 독점하고 있으니, 부디 조심하여 현사들이 부끄러워하는 권세를 가지고 현사에게 교만하지 마시오.”
田瞶曰:
「今日諸君皆為瞶祖道具酒脯,而先生獨教之以聖人之大道,謹聞命矣。」
전외가 말하였다.
“오늘 여러분이 모두 저를 위하여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길에서 전송하는데, 선생이 유독 聖人의 큰 도리를 가르쳐주시니 삼가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 田聵 : 齊나라의 장군. 자세한 인적사항은 알 수 없다.
▶ 張生 : 평생 행적은 미상이다.
▶ 堯讓許由以天下 : 중국 고대의 은자인 許由가 堯의 선양을 거절하고, 그 말이 귀를 더럽혔다고 여겨 潁水에서 귀를 씻었다.〈高士傳〉
▶ 伯夷叔齊 : 孤竹國 군주의 두 아들인 伯夷와 叔齊는 상나라가 망한 뒤에도 상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으며, 고죽군 영주로 받는 녹봉 역시 받을 수 없다며 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서 죽었다.<史記 권61 伯夷列傳>
▶ 於陵仲子 : 전국시대 제나라의 隱士인 陳仲子. 於陵은 제나라의 읍이다. 그의 형 戴가 제나라의 卿이 되어 食祿이 萬鍾이었으나 불의하다 하여 먹지 않고 초나라로 달아나 於陵에서 살며 남의 집 정원에 물 대는 일을 해주며 살았다.
▶ 智過 : 智果. 춘추시대 晉나라의 大夫로 智宣子의 동생이며 智文子의 아들이다.
▶ 孫叔敖 : 춘추시대 초나라의 令尹. 성은 羋, 씨는 蔿이며 휘는 敖 또는 艾獵이고 자는 孫叔이다. 손숙오는 장왕 때 令尹(:초나라의 재상) 우구자의 천거로 후임 영윤이 되었다. 백성을 교화시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화합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하여 정치는 느슨하였지만 간신도 도둑도 생기지 않았다. 晉나라의 士會는 손숙오의 치세를 크게 칭송하였다.<史記列傳 권119.循吏列傳>
▶ 祖道 : 멀리 떠나는 자를 길에서 송별하는 연회. 일설에는 옛날의 黃帝의 아들 累祖가 여행 중에 죽었으므로 후세 사람이 그를 도로의 신으로서 제사 지내고 그의 이름을 따서 송별하는 제사의 이름으로 하였다고도 한다.
▶ 酒脯 : 술과 안주.
23. 魏文侯가 段干木을 예우하다
魏文侯見段干木,立倦而不敢息;
及見翟璜,踞堂而與之言,翟璜不說。
魏文侯가 段干木을 접견함에 서 있느라 피곤하여도 감히 쉬지 못하되,
翟黃을 만나서는 당에 걸터앉아서 더불어 말하니 적황이 달가워하지 않았다.
文侯曰:
「段干木,官之則不肯,祿之則不受
今汝欲官則相至,欲祿則上卿
既受吾實,又責吾禮,毋乃難乎?」
문후가 말하였다.
“단간목은 벼슬을 주어도 하려 하지 않고 녹봉을 주어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는 벼슬을 원하여 재상에 이르렀고 녹봉을 원하여 上卿이 되었다.
나의 실속을 챙기고도 또 나의 예우를 요구하니 어렵지 않겠는가?”
▶ 魏文侯 : 전국시대 魏나라의 초대 제후로 성은 姬, 씨는 魏, 이름은 ‘斯’, 또는 ‘都’이다. 李悝·吳起·樂羊·西門豹 등 인재를 등용하였고, 위나라를 전국시대 최초로 패국으로 만들었다
▶ 段干木 : 段干生. 전국시대 초기 魏나라의 학자이며 성은 段干이고 이름은 木이다.。魏 文侯가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翟璜 : 翟黃, 翟觸으로도 쓴다. 狄族 출신으로 전국시대 초기의 魏나라의 상경이 되어 위 문후를 보좌하였다. 위 문후에게 吳起‧西門豹‧樂羊‧李克‧屈侯鮒 등을 추천하였고, 직언을 잘하였다. <史記 魏世家>
▶ 踞 : 걸터앉다. 침상의 가에 앉음을 踞라고 한다
▶ 無乃 : ~이 아니겠는가?
24. 큰 덕이 한계를 넘지 않으면 작은 덕은 융통성이 있어도 괜찮다
孔子之郯,遭程子於塗,傾蓋而語終日。
공자가 郯나라로 가다가 길에서 程子를 만나 수레의 덮개를 기울여놓고 종일 대화하였다.
有間,顧子路曰:
「取束帛一以贈先生。」
잠시 뒤에 子路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束帛 하나를 가져다가 선생께 드려라.”
子路不對。
자로가 대답하지 않았다.
有間,又顧曰:
「取束帛一以贈先生。」
잠시 후 또 자로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속백 하나를 가져다가 선생께 드려라.”
子路屑然對曰:
「由聞之,士不中間而見,女無媒而嫁,君子不行也。」
자로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말하였다.
“제가 듣기에, 선비가 소개하는 사람 없이 만나고, 여자가 중매하는 사람 없이 시집감은 군자가 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孔子曰:
공자가 말하였다.
「由,詩不云乎:
『野有蔓草,零露溥兮,有美一人,清揚婉兮,邂逅相遇,適我願兮。』
“由야! <시경>에 이르지 않았더냐?
‘들에 덩굴풀이 이슬에 흠뻑 젖었네. 한 아름다운 사람 맑은 눈 넓은 이마 예쁘기도 해라. 우연히 서로 만난 사이지만 바로 내가 바라던 사람.’
今程子天下之賢士也,於是不贈,終身不見。
그런데 정자는 천하의 현사이니 이때 드리지 않으면 종신토록 만나지 못할 터이다.
大德毋踰閑,小德出入可也。」
큰 덕이 한계를 넘지 않으면 작은 덕에 융통성이 있어도 괜찮다.”
▶ 郯 : 나라 이름. 춘추시대 노나라의 附庸國. 지금의 山東省 郯城縣 북쪽에 있었다.
▶ 程子 : 춘추시대 邢地中丘사람이며 본명은 程本이며 字는 子華이다. 박식하고 언변에 뛰어나 문도를 모으고 책을 쓰면서 스스로 號를 程子라 하였다. 저서에 <子華子>가 전해진다. <한시외전>에는 ‘정본자’라고 기록하였다.
▶ 傾蓋而語 : 傾蓋如故. 傾蓋相逢. 잠깐 만나도 오래된 사람처럼 친하다. 수레를 타고 가다가 서로 마주쳐 잠깐 차양을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치 오랜 친구인 것처럼 정감이 간다는 뜻이다. 傾蓋如舊라고도 한다. 蓋는 수레의 車篷를 말한다.
▶ 束帛 : 옛날 聘問하거나 교제할 때 보내는 예물. 비단 다섯 필을 각각 양끝에서 말아 한데 묶기 때문에 속백이라고 하였다.
▶ 屑然(설연) :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 野有蔓草,零露溥兮 : <詩經·鄭風·野有蔓草>에 “野有蔓草、零露漙兮。有美一人、清揚婉兮。邂逅相遇、適我願兮。: 들에 덩굴풀이 이슬에 흠뻑 젖었네. 한 아름다운 사람 맑은 눈 넓은 이마 예쁘기도 해라. 우연히 서로 만난 사이지만 바로 내가 바라던 사람.”이라고 하였다.
▶ 大德毋踰閑,小德出入可也 : <論語 子張>에 “子夏曰:「大德不踰閑,小德出入可也。」 : 자하가 말하였다. 큰 덕이 문지방을 넘지 않으면 작은 덕은 어느 정도 드나들어도 괜찮다.”라고 하였다. 즉 큰 덕이 한계를 넘지 않으면 작은 덕은 출입하여도 괜찮다는 뜻이다.
25. 齊桓公이 管仲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하다.
齊桓公使管仲治國,管仲對曰:
「賤不能臨貴。」
齊桓公이 管仲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하자 관중이 대답하였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 지위가 높은 사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桓公以為上卿而國不治,桓公曰何故?
환공이 관중을 上卿으로 임명하였으나 나라는 다스려지지 않았으므로 환공이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다.
管仲對曰:
「貧不能使富。」
관중이 대답하였다.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을 부릴 수 없습니다.”
桓公賜之齊國市租一年而國不治,桓公曰何故?
환공이 齊나라의 시장의 조세 1년 치를 관중에게 주었으나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자 환공이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다.
對曰:
「疏不能制親。」
관중이 대답하였다.
“군주와 소원한 사람이 군주와 친한 사람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桓公立以為仲父。齊國大安,而遂霸天下。
환공이 관중을 仲父로 존칭하니 제나라가 크게 안정되어 마침내 천하의 霸者가 되었다.
孔子曰:
「管仲之賢,不得此三權者,亦不能使其君南面而霸矣。」
공자가 말하였다.
“관중의 현명함으로도 이런 세 가지 권한을 얻지 못했으면, 그의 군주를 남면하여 패자가 되게 하지 못했을 터이다.”
▶ 仲父 : 제환공이 관중을 존대하여 부른 호칭. 父는 어버이와 같이 섬긴다는 뜻으로 ‘보’로 읽는다.
▶ 南面 : 옛날에 군주는 조정에서 북쪽에 앉아 얼굴을 남쪽으로 향하였다.
26. 霸業에 방해가 되는 일
桓公問於管仲曰:
「吾欲使爵腐於酒,肉腐於俎,得無害於霸乎?」
齊桓公이 管仲에게 물었다.
“나는 술이 술잔에서 썩고 고기가 도마에서 썩게 하려는데, 霸業에 해롭지 않겠소?”
管仲對曰:
「此極非其貴者耳;
然亦無害於霸也。」
관중이 대답하였다.
“이것이 지극히 고귀한 행위가 아닐 뿐이지,
역시 패업에는 해롭지 않습니다.”
桓公曰:
「何如而害霸?」
환공이 말하였다.
“어떻게 해야 패업에 해롭소?”
管仲對曰:
「不知賢,害霸;
知而不用,害霸;
用而不任,害霸;
任而不信,害霸;
信而復使小人參之,害霸。」
관중이 대답하였다.
“賢士를 몰라보면 패업에 해롭고;
알아보고도 기용하지 않음이 패업에 해롭고,
기용하되 위임하지 않음이
위임하되 믿지 않음이 패업에 해롭고,
믿되 다시 小人을 정사에 참여시킴이 패업에 해롭습니다.”
桓公:
「善。」
환공이 말하였다.
“좋은 말이오.”
▶ 爵腐於酒, 肉腐於俎 : <貞觀政要>에는 “酒腐於爵,肉腐於俎”로 기록하고 있다. <정관정요>의 서두에 “군주가 예를 다할 수 있고 신하가 충성을 다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안과 밖에 사심이 없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믿는 데에 달려 있으니, 윗사람이 믿음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아랫사람을 부릴 수 없고 아랫사람이 믿음을 갖고 있지 않으면 윗사람을 섬길 수가 없으니 믿음의 도리가 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27. 曾子가 죄라고 여긴 것
魯人攻鄪,曾子辭於鄪君曰:
「請出,寇罷而後復來,請姑毋使狗豕入吾舍。」
魯나라 군주가 鄪읍을 공격하자 曾子가 鄪君에게 하직하면서 말하였다.
“다른 곳으로 나갔다가 난리가 끝난 뒤에 다시 올 터이니, 잠시 개와 돼지가 저의 집에 들어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鄪君曰:
「寡人之於先生也,人無不聞;
今魯人攻我而先生去我,我胡守先生之舍?」
鄪君이 말하였다.
“과인이 선생을 대우함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노나라 군주가 우리를 공격함에 선생이 나를 버리시면, 내가 무엇 때문에 선생의 집을 지키겠습니까?”
魯人果攻鄪而數之罪十,而曾子之所爭者九。
노나라 군주가 鄪를 공격하여 책망하는 죄 열 가지에 증자가 諫爭했던 것이 아홉이었다.
魯師罷,鄪君復修曾子舍而後迎之。
노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비군이 증자의 집을 다시 수리한 뒤에 증자를 맞이하였다.
▶ 費 : 춘추시대 노나라 季氏의 采邑. 지금의 山東省 費縣 지역.
▶ 曾子 : 曾參.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 曾點의 아들로 字는 子輿이다. 지극한 효도로 부모를 섬겼으며,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아 공자의 손자 子思에게 전하였고, 자사가 孟子에게 그 도를 전하였다.
▶ 姑 : 잠시. 잠깐
28. 司城子罕의 편애
宋司城子罕之貴子韋也,入與共食,出與同衣
宋나라 司城 子罕이 子韋를 귀하게 여겨, 들어와서는 함께 밥을 먹고 나갈 때는 같은 옷을 입었다.
司城子罕亡,子韋不從,子罕來,復召子韋而貴之。
사성 자한이 망명함에 자위가 따라가지 않았는데, 자한이 돌아와서 다시 자위를 불러 귀하게 대하였다.
左右曰:
「君之善子韋也,君亡不從,來又復貴之,君獨不愧於君之忠臣乎?」
측근이 말하였다.
“주군이 자위를 잘 대하였으나 주군이 망명함에 자위가 따라가지 않았는데도 돌아와서 또다시 귀하게 대해주셨으니, 주군은 어찌 주군의 충신에게 부끄럽지 않습니까?”
子罕曰:
「吾唯不能用子韋,故至於亡;
今吾之得復也,尚是子韋之遺德餘教也,吾故貴之。
且我之亡也,吾臣之削跡拔樹以從我者,奚益於吾亡哉?」
자한이 말하였다.
“나는 단지 자위를 잘 쓰지 못해서 망명하기에 이르렀고,
지금 내가 돌아올 수 있었음도 오히려 자위가 남겨준 덕택과 가르침의 나머지이매, 내가 그 때문에 귀하게 대한다.
더구나 내가 망명함에, 내 신하로서 수레바퀴의 자취를 없애고 나무를 뽑는 지경에서 나를 따른 자들이 나의 망명에 무엇을 도왔느냐?”
▶ 司城 : 관직 이름으로 司空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宋나라는 武公의 이름 司空을 피하여 司城으로 고쳤다.
▶ 子罕 : 剔成君( ? ~ ?). 춘추전국시대 송나라의 제33대 임금이다. 성은 子, 씨는 戴 또는 皇, 휘는 剔成 혹은 喜, 자는 子罕이다. <한비자>에서는 戴歡과 皇喜가 총애를 다투다가 마침내 황희가 임금을 죽이고 정권을 빼앗았다고 한다. 또 司城 子罕이 송군을 대신하여 형벌을 행하니 마침내 임금을 침해하였다고 한다. 《고본죽서기년집증》에서는 이러한 송나라 임금을 침해하고 정권을 빼앗았다는 기록을 인용하고, 또 剔成은 司城의 음이 바뀐 것이고 罕과 肝은 통가자이므로 "사성자한"과 "황희"가 곧 "척성군"이라 하였다.<위키백과><史記권38.宋微子世家>
▶ 子韋 : 사람 이름. 평생 행적은 미상이다.
▶ 削迹拔樹 : 孔子가 곤경에 처했던 일을 비유한 말이다. 衛나라에서는 공자가 타고 지나간 수레의 자취를 삭제하여 다시 등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고, 宋나라에 가서는 큰 나무 밑에서 제자들과 예를 강습하고 있었는데 그 나무를 쓰러뜨려서 죽이려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 일을 빌려 곤경에 처한 상황을 말한 것이다.
29. 인재를 멀리하고 가까이하는 일
楊因見趙簡主曰:
「臣居鄉三逐,事君五去,聞君好士,故走來見。」
楊因이 趙簡主를 알현하려 말하였다.
“저는 마을에 살다가 세 번 쫓겨났고, 군주를 섬기다가 다섯 번 떠났으나, 군주께서 선비를 좋아함을 알았으매 달려와 뵙습니다.”
簡主聞之,絕食而歎,跽而行,左右進諫曰:
「居鄉三逐,是不容眾也;
事君五去,是不忠上也。
今君有士見過人矣。」
간주가 듣고 식사를 멈추고 탄식하면서 무릎걸음으로 나아가 맞자 측근들이 간하였다.
“마을에 살다가 세 번 쫓겨남은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함이요,
군주를 섬기다가 다섯 번 떠남은 윗사람에게 불충함입니다.
그런데 주군께서 선비를 접견함이 남보다 심합니다.”
簡主曰:
「子不知也。
夫美女者,醜婦之仇也;
盛德之士,亂世所疏也
正直之行,邪枉所憎也。」
조간주가 대답하였다.
“그대들이 알지 못하는구나!
미녀는 추녀의 원수이고,
덕이 높은 선비는 난세가 멀리하는 존재이고,
정직한 행실은 사악한 사람이 미워하는 바이다.”
遂出見之,因授以為相,而國大治。
이어 나가서 접견하고, 인하여 직위를 주어 재상으로 삼으니, 나라가 매우 잘 다스려졌다.
由是觀之,遠近之人,不可以不察也。
이것을 따라 살펴보면 사람을 멀리하고 가까이함은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 趙簡主 : 趙簡子. 趙鞅. 춘추시대 말기 晉나라의 大夫. 趙孟 또는 志父로도 불린다. 진나라 내부에서 6卿이 세력 다툼을 벌일 때 范氏와 中行氏를 몰아내고 趙나라를 일으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 楊因 : 춘추시대 晉나라 사람으로 일설에는 楊回가 옳다는 주장이 있다.
▶ 跽 : 윗몸을 세우고 무릎을 꿇다. 일종의 공경의 표시이다.
▶ 邪枉 : 바르지 않다.
30. 거문고 소리가 슬픈 이유
應侯與賈午子坐,聞其鼓琴之聲,應侯曰:
「今日之琴,一何悲也?」
應侯가 賈午子와 앉아 있다가 그가 거문고를 타는 소리를 듣고 응후가 말하였다.
“오늘의 거문고 소리는 어찌 한결같이 슬프오?”
賈午子曰:
「夫急張調下,故使人悲耳。
急張者,良材也;
調下者,官卑也。
取夫良材而卑官之,安能無悲乎!」
가오자가 대답하였다.
“거문고의 현을 팽팽히 하여 곡조가 가라앉으매 사람을 슬프게 하였을 뿐입니다.
현을 팽팽히 함은 총명한 인재를 말하고,
곡조가 가라앉음은 벼슬이 낮음을 표시합니다.
총명한 인재를 취하여 낮은 벼슬을 맡겼는데 어찌 슬픔이 없겠습니까!”
應侯曰:
「善哉!」
응후가 말하였다.
“좋도다!”
▶ 應侯 : 전국시대의 范睢가 응후인데 여기서 말하는 응후로 확정할 수는 없다. 범수는 전국시대 魏나라 사람으로 처음에 魏나라 中大夫 須賈를 따라 사신의 일행으로 齊나라에 갔다가 귀국한 뒤에 魏나라 재상 魏齊는 그가 齊나라와 내통하였다고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혹독하게 매를 때려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빨이 다 빠졌는데 측간에다 던져버렸다. 범수는 그 뒤에 가까스로 진나라로 도망하여 성명을 바꾸고 재상이 되어 應侯에 봉해졌다. <사기 권79 범수채택열전>
▶ 賈午子 : 사람 이름. 평생 행적은 미상이다.
31. 淳于髡의 지혜2
十三年,諸侯舉兵以伐齊,齊王聞之,惕然而恐,召其群臣大夫告曰:
「有智為寡人用之。」
13년에 제후들이 군사를 일으켜 齊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齊王이 듣고 두려워하여 群臣과 大夫들을 불러 일렀다.
“지혜가 있으면 과인을 위해 써주시오.”
於是博士淳于髡仰天大笑而不應.
이때 博士 淳于髡이 仰天大笑하고 응답하지 않았다.
王復問之,又大笑不應,三笑不應,王艴然作色不悅曰:
「先生以寡人語為戲乎?」
왕이 다시 물었으나 또 크게 웃으면서 응답하지 않으며, 세 번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자 왕이 발끈 화를 내며 안색이 변하고 불쾌히 여기면서 말하였다.
“선생은 과인의 말을 장난으로 여기오?”
對曰:
순우곤이 대답하였다.
「臣非敢以大王語為戲也.
“신은 감히 대왕의 말씀을 장난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臣笑臣鄰之祠田也,以一奩飯,一壺酒,三鮒魚,祝曰:
『蟹堁者宜禾,洿邪者百車,傳之後世,洋洋有餘。』
신은 비웃었으니, 신의 이웃 사람이 농지의 신에게 제사 지냄에 한 그릇의 밥, 한 병의 술, 세 마리의 붕어를 제물로 써서 축원하였습니다.
‘높은 곳의 농지에는 벼가 잘 자라고 낮은 곳의 나쁜 농지에는 백 수레를 수확하여, 후세에 전하여 많고 많아 넉넉함이 있게 해주오.’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臣笑其賜鬼薄而請之厚也。」
신은 그가 귀신에게 줌은 박하고 축원함은 후함을 비웃었습니다.”
於是王乃立淳于髡為上卿,賜之千金,革車百乘,與平諸侯之事;
諸侯聞之,立罷其兵,休其士卒,遂不敢攻齊,此非淳于髡之力乎?
이에 왕이 곧 순우곤을 上卿으로 삼고 천금과 전차 일백 대를 주어 제후와 화평하는 일을 맡기니, 제후들이 듣고 즉시 군대를 철수하고 사졸을 쉬게 하여 마침내 감히 제나라를 공격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순우곤의 공이 아니겠는가?
▶ 十三年 : <史記·滑稽列傳>에는 “威王八年”으로 기록하고 있다.
▶ 齊王 : 齊威王. 전국시대 제나라의 군주로 성은 媯이고, 씨는 田, 이름은 因齊이다. 齊桓公 午의 아들이다. 재임 중에 개혁을 통하여 부국강성한 나라를 만들었고, 스스로 稱王하였다. 魏나라를 포위하여 趙나라와 韓나라를 구원하여 覇主로 일컬어졌다.
▶ 惕然 :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모양.
▶ 艴然作色 : 발끈 화를 내며 안색이 변하다.
▶ 博士 : 고대의 學官 이름.
▶ 淳于髡 : 익살과 다변으로 유명했던 전국시대 제나라의 변론가이며 滑稽를 잘하여 여러 차례 제후에게 사신으로 갔으나 굴욕을 당하지 않았다. 齊威王을 설득하여 따르게 하고, 제나라 주변의 제후들이 齊나라를 침략하자 기지로 이를 막아냈다.[史記列傳] 권126 滑稽列傳
▶ 奩飯 : 한 그릇의 밥
▶ 汙邪 : 움푹 패인 논밭. 토질이 나쁜 농지.
▶ 蟹堁 : 蟹螺. 지세가 높은 땅.
▶ 革車 : 보급 전차. 운반용 수레.
32. 초나라가 제나라에 대처하는 방법
田忌去齊奔楚,楚王郊迎至舍,問曰:
「楚,萬乘之國也,齊亦萬乘之國也,常欲相并,為之奈何?」
田忌가 齊나라를 떠나 楚나라로 달아났는데, 楚王이 교외에서 맞이하고 역관에 당도하여 물었다.
“楚는 萬乘의 나라이고, 齊 역시 만승의 나라인데 항상 서로 상대를 병탄하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對曰:
전기가 대답하였다.
「易知耳,齊使申孺將,則楚發五萬人,使上將軍將之,至禽將軍首而反耳。
“알기 쉽습니다. 제나라가 申孺를 장수로 삼으면 초나라는 군사 5만 명을 發兵하되 상장군이 거느리게 하면, 제나라 장군의 머리를 획득하여 돌아오게 되겠습니다.
齊使田居將,則楚發二十萬人,使上將軍將之,分別而相去也。
제나라가 田居를 장수로 삼으면 楚는 군사 20만 명을 발병하되 상장군이 거느리게 하면, 승부가 나지 않아 서로 나뉘어 떠날 터입니다.
齊使眄子將,楚發四封之內,王自出將而忌從,相國上將軍為左右司馬,如是則王僅得存耳。」
齊가 眄子를 장수로 삼으면 楚는 국내의 모든 군사를 발병하되 왕께서 직접 나서 군사를 거느리시고 저도 따르고, 相國과 上將軍을 左右司馬로 삼으면 왕께서는 가까스로 생존할 수 있겠습니다.”
於是齊使申孺將,楚發五萬人,使上將軍至,擒將軍首反.
이때 齊가 申孺를 장수로 삼자 楚는 군사 5만 명을 발병하되 상장군을 보내니, 제나라 장군의 머리를 획득하여 돌아왔다.
於是齊王忿然,乃更使眄子將,楚悉發四封之內,王自出將,田忌從,相國上將軍為左右司馬,益王車屬九乘,僅得免耳。
이에 齊王이 분노하여 眄子를 장수로 바꾸자, 楚는 국내의 군사를 모두 발병하되 왕이 직접 나서 군사를 거느리고 田忌가 따랐으며, 相國과 上將軍을 左右司馬로 임명하고, 왕의 수레에는 아홉 대의 전차를 더 소속시키니,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至舍,王北面正領齊袪,問曰:
「先生何知之早也?」
관사에 도착하여 왕이 북면하여 옷깃과 소매를 整齊하고 물었다.
“선생은 어찌 그리 일찍 알았소?”
田忌曰:
전기가 말하였다.
「申孺為人,侮賢者而輕不肖者,賢不肖者俱不為用,是以亡也
“申孺의 사람됨은 현자를 업신여기고 불초자를 경시하매 현자와 불초자가 모두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망하였습니다.
田居為人,尊賢者而賤不肖者,賢者負任,不肖者退,是以分別而相去也
田居의 사람됨은 현자를 존경하지만 불초자를 천시하니 현자는 임용되고 불초자는 퇴출되매 승부가 나지 않아 서로 나뉘어 떠나갔습니다.
眄子之為人也,尊賢者而愛不肖者,賢不肖俱負任,是以王僅得存耳。」
眄子의 사람됨은 현자를 존중하고 불초자를 사랑하여 현자와 불초자가 모두 임용되었기 때문에 왕께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였습니다.”
▶ 田忌 : 田期, 田期思, 陳忌 등으로 되어 있다.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威王 때 장수가 되어 孫臏을 왕에게 추천하였다. 鄒忌와 알력이 생겨 초나라로 달아났다가 齊宣王이 즉위한 뒤에 다시 장수로 기용되었다.<史記·田敬仲完世家>
▶ 申孺 : 전국시대 齊나라의 장군. <戰國策>에는 ‘申縛’으로, <史記 田敬仲完世家>에는 ‘申紀’로 기록하고 있다.
▶ 眄子 : 田盼子. 齊宣王 때의 장군. <史記 田敬仲完世家>에는 盼子로 기록하고 있다.
33-1. 도덕을 지닌 군주는 누가 충신인 줄 모른다.
魏文侯觴大夫於曲陽,飲酣,文侯喟然歎曰:
「吾獨無豫讓以為臣。」
魏文侯가 曲陽에서 大夫들에게 주연을 베풀었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문후가 한숨을 쉬고 탄식하였다.
“나만 豫讓 같은 사람을 신하로 삼지 못했구나.”
蹇重舉酒進曰:
「臣請浮君。」
蹇重이 술잔을 들고 올리며 말하였다.
“신이 벌주를 드리겠습니다.”
文侯曰:
「何以?」
문후가 말하였다.
“무엇 때문이오?”
對曰:
「臣聞之,有命之父母,不知孝子
有道之君,不知忠臣。
夫豫讓之君,亦何如哉?」
건중이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에 장수하는 부모는 효자를 모르고,
도덕이 있는 군주는 충신을 모른다고 합니다.
예양의 군주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文侯曰:
「善!」
문후가 말하였다.
“좋도다!”
受浮而飲之,嚼而不讓。曰:
「無管仲鮑叔以為臣,故有豫讓之功也。」
벌주를 받아 마시면서 사양하지 않고 한 번에 마셔버리고 말하였다.
“管仲과 鮑叔을 신하로 삼지 않았으매 예양의 공로가 있었다.”
▶ 曲陽 : 전국시대 趙나라 邑. 지금의 河北省 曲陽縣 서쪽에 있었다.
▶ 豫讓 : 晉나라 智伯의 가신으로 지백이 조양자에게 살해당하자 복수를 하기 위해 조양자를 죽이려다가 발각되어 자살한 충신이다.[史記列傳] 권86 刺客列傳
▶ 蹇重 : 전국시대 魏나라 大夫.
▶ 浮 : 벌주. 남에게 벌주를 마시게 하다.
▶ 有命之父母,不知孝子~ : 육친이 스스로 화목하고 나라가 저절로 다스려진다면 효도와 자애나 충신이라는 말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노자>는 나라가 혼란할 때 충신이 나타난다고 하였다.<淮南子 卷12 道應訓>
▶ 有命 : 長壽하다.
▶ 嚼(작) : 잔에 있는 술을 모두 마시다.
33-2. 史黶이 훌륭한 신하에 대해 논하다
趙簡子曰:
「吾欲得范中行氏之良臣。」
趙簡子가 말하였다.
“나는 范氏와 中行氏의 훌륭한 신하를 얻고 싶다.”
史黶曰:
「安用之?」
그러자 史黶이 말하였다.
“어디에 쓰시려고요?”
簡子曰:
「良臣,人所願也,又何問焉?」
조간자가 말하였다.
“훌륭한 신하는 사람마다 원하는 바인데 또 무엇을 묻는가?”
曰:
사염이 대답하였다.
「臣以無為良臣故也。
“신은 훌륭한 신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夫事君者,諫過而薦可,章善而替否,獻能而進賢
군주를 섬기는 사람은 잘못을 간하고 옳음을 권장하며 선행은 드러내고 非行은 폐기하고 능력자는 헌상하고 현자를 추천하며,
朝夕誦善敗而納之,聽則進,否則退。
아침저녁으로 잘함과 실패를 읊어 받아들이게 하여 들으면 벼슬에 나가고 따르지 않으면 물러나야 합니다.
今范中行氏之良臣也,不能匡相其君,使至於難;
出在於外,又不能入。
그런데 범씨와 중항씨의 良臣이란 자는 그의 군주를 도와서 바로잡지 못하여 환란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주군이 도망쳐 외국에 있는데도 들이지 못하였습니다.
亡而棄之,何良之為
군주가 망명하자 버렸으니 어찌 良臣의 행위입니까?
若不棄,君安得之。
만일 군주를 버리지 않는다면 주군께서 어떻게 그들을 얻겠습니까?
夫良將營其君,使復其位,死而後止,何曰以來,若未能,乃非良也。」
훌륭한 신하란 그 군주의 어려움을 구해 복위하게 하되 죽어서야 그치는데, 어느 날 오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훌륭한 신하가 아닙니다.”
簡子曰:
「善。」
간자가 말하였다.
“옳소.”
▶ 范中行氏 : 范吉射와 中行寅. 晉 혜공 5년(기원전 496년), 晉나라의 卿 中行氏와 范氏가 반란을 일으키자 智氏와 趙簡子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고, 범씨와 중항씨는 齊나라로 달아났다.<史記 권46.田敬仲完世家>
▶ 史黶 : 춘추시대 晉나라 太史. 춘추시대 말기 晉나라 사람으로 蔡史墨, 史黯이라고도 한다. 晉頃公 13년에 趙鞅이 刑鼎을 주조하고 范宣子가 刑書를 만들었다. 孔子가 晉나라가 원칙을 잃어 장차 망할 것이라고 하자 사묵이 덕을 닦는 것이 재앙을 피하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 君以無為良臣故也 : <國語 晉語 9>에는 “臣以為不良故也”로 기록하고 있다.
“신은 선량한 신하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 替否 : 献替可否. 선을 권장하고 잘못을 바로잡다.
▶ 何曰以來 : <國語 晉語 9>에는 ‘日’자로 기록하고 있다.
34. 범씨와 중항씨가 망한 이유
子路問於孔子曰:
「治國何如?」
子路가 공자에게 물었다.
“나라는 다스림은 어떠합니까?”
孔子曰:
「在於尊賢而賤不肖。」
공자가 대답하였다.
“현자를 존중하고 불초자를 천시함에 있다.”
子路曰:
「范中行氏尊賢而賤不肖,其亡何也?」
자로가 물었다.
“范氏와 中行氏는 현자를 존중하고 불초자를 천시하였는데 그들이 망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曰:
공자가 말하였다.
「范中行氏尊賢而不能用也,賤不肖而不能去也
“범씨와 중항씨는 현자를 존중하면서도 중용하지 못하였고, 불초자를 천시하면서도 퇴출하지 못하였다.
賢者知其不己用而怨之,不肖者知其賤己而讎之。
현자는 자기를 중용하지 않음을 알고 원망하고, 불초자는 자기를 천시함을 알고 원수로 여겼다.
賢者怨之,不肖者讎之;
怨讎並前,中行氏雖欲無亡,得乎?」
현자가 원망하고 불초자가 원수로 여기고,
원망하는 사람과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 함께 앞에 있는데 중항씨가 비록 망하지 않으려고 하나 가능하겠느냐?”
35. 전쟁에서 진 장수를 복위시키다.
晉荊戰於邲,晉師敗績,荀林父將歸請死,景公將許之.
晉나라와 楚나라가 邲에서 전쟁하여 晉나라 군대가 크게 패배하자, 荀林父가 돌아와 죽기를 청하니 晉景公이 허락하려 하였다.
士貞伯曰:
士貞伯이 말하였다.
「不可,城濮之役,晉勝于荊,文公猶有憂色,曰子玉猶存,憂未歇也,困獸猶鬥,況國相乎?
“안 됩니다. 城濮의 전쟁에서 진나라가 초나라에 승리하였으나, 晉文公은 오히려 걱정스런 안색으로 말하기를, ‘초나라에 子玉이 아직 살아 있으니 걱정이 끝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징슴조차 싸우려할 터인데 하물며 國相이랴?’라고 하였습니다.
及荊殺子玉,乃喜曰:莫予毒也。
초나라가 子玉을 죽이자 그제야 기뻐하면서 말하였습니다.
‘나를 해칠 사람이 없다.’
今天或者大警晉也.
오늘의 패배는 하늘이 아마 晉나라를 크게 경계한 듯합니다.
林父之事君,進思盡忠,退思補過,社稷之衛也,今殺之,是重荊勝也。」
순림보가 군주를 섬김에 조정에 나와서는 충성을 다하기를 생각하고, 물러가서는 군주의 잘못을 보완하기를 생각하매 사직의 호위인데, 그런데도 죽이면, 초나라의 승리에 더해주는 결과가 됩니다.”
昭公曰:
「善!」
乃使復將。
경공이 “좋은 말이오.”라고 하고는 곧 순림보를 장수로 복직시켰다.
▶ 晉荊戰於邲 : 춘추시대 晉나라와 楚나라가 邲에서 벌인 전쟁이다. 邲은 당시 鄭나라의 성읍이며, 지금의 河南省 鄭州市 서북쪽에 있었다. 荊은 楚나라의 본래 이름
▶ 敗績 : 대패하다.
▶ 荀林父 : 中行桓子. 춘추시대 晉나라의 정치가이며, 6卿의 일원으로 관위는 중군원수에 이르렀다. 中行: 진나라의 군대 편제의 한 단위의 대장을 맡은 고로 中行을 씨로 삼아, 진나라의 6경 중 중항씨의 시조가 되었다. 晉文公을 도와 성복의 전쟁에서 초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렀고, 晉景公 3년에 邲에서 초나라 군대와 싸워 크게 패배하였다.
▶ 昭公 : ‘昭’는 ‘景’의 誤字이다. 晉景公은 춘추시대 진나라의 제 26대 임금이다. 이름은 獳이다. 據라는 설도 있다. 진성공의 아들로 아버지가 초와 강화한 陳을 토벌하기 위해 연합군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史記 권39.晉世家>
▶ 士貞伯 : 춘추시대 晉나라의 대부. <사기 진세가>에는 隨會로 기록하고 있다.
▶ 城濮之役 : 기원전 632년에 晉나라와 초나라가 城濮에서 전쟁하여 晉나라가 크게 승리한 전쟁이다. 이 전쟁의 승리로 晉文公이 霸主가 되었다.
▶ 子玉 : 楚나라의 令尹 成得臣. 楚 成王에게 공자 중이를 죽이라고 간하였다.<史記 권39.晉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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