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說苑(설원) 제13권 權謀(권모) 본문
權謀는 때와 상황에 따라 應變하는 책략을 말한다.
本篇에서 말하는 권모는 陰謀와 譎計가 아닌 규범에 부합하는 책략을 말한다.
본편에서 제시한 권모의 事例는 모두 君子의 권모로서 정당한 책략이지, 小人의 邪惡한 책략이 아니다.
劉向은 권모의 중요성으로 亂世에는 자신을 해롭게 하지 않고, 太平時代에는 천하의 권력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였다.
또한 가장 으뜸의 권모는 天命을 아는 것이고 次善의 권모는 일의 결과를 미리 아는 것이라 하였다.
이런 으뜸의 권모와 차선의 권모에 해당하는 사례를 열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였다.
1.
聖王之舉事,必先諦之於謀慮,而後考之於蓍龜。
聖王이 일을 거행함에 반드시 먼저 세밀하게 고려하고 그런 뒤에 시초점과 거북점으로 고찰하였다.
▶ 謀慮 : 考慮하다. 계획하다.
▶ 蓍龜 : 시초점에 쓰는 蓍草와 거북점에 쓰는 거북 등딱지이다. 여기서는 占卜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
白屋之士,皆關其謀;
芻蕘之役,咸盡其心。
가난한 평민의 선비도 그 계책에 관여하고,
꼴을 베고 나무하는 잡역부도 모두 마음을 다한다.
▶ 白屋之士 : 가난한 平民의 선비를 말한다. 白屋은 采色을 하지 않고 木材를 그대로 노출하여 지은 집을 말한다. 일설에는 흰 띠풀로 지붕을 이은 집이라고 한다. 《尸子 君治》‧《論衡 語增》‧《三國志 魏志 曹眞傳》
故萬舉而無遺籌失策。
그러므로 만사를 처리하여도 빠뜨리거나 잘못된 계책이 없다.
傳曰:
「眾人之智,可以測天,兼聽獨斷,惟在一人。」
此大謀之術也。
傳에 이르기를,
“뭇사람의 지혜는 하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으니, 광범위하게 듣고 독단함은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중대한 계책을 내는 방법이다.
謀有二端:上謀知命,其次知事。
계책에는 두 가지 등급이 있으니, 으뜸의 계책은 天命을 앎이고, 차선의 계책은 일을 앎이다.
▶ 端 : 等差, 等級
知命者預見存亡禍福之原,早知盛衰廢興之始,防事之未萌,避難於無形.
천명을 아는 사람은 存亡과 禍福의 근원을 미리 알고 盛衰와 廢興의 시초를 일찌감치 알아서, 사고가 싹트기 전에 막고 危難이 형성되기 전에 피한다.
若此人者,居亂世則不害於其身,在乎太平之世則必得天下之權;
彼知事者亦尚矣,見事而知得失成敗之分,而究其所終極,故無敗業廢功。
이 사람과 같은 자는 亂世에 살아도 그 몸을 해치지 않고, 태평한 세상에 있으면 반드시 천하의 권력을 얻으니,
저 일을 아는 사람도 숭상하니, 일을 만나면 得失과 成敗의 분별을 알아서 그 일의 최종 결과를 궁구하므로, 功業에 실패하거나 무너뜨리지 않는다.
孔子曰:
「可與適道,未可與權也。」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함께 道에 나아갈 수 있어도 함께 權道를 행할 수는 없다.”
▶ 可與適道 未可與權也 : 《論語》 〈子罕〉에 “함께 배울 수 있어도 함께 도에 나아갈 만하지 않으며, 함께 도에 나아갈 수 있어도 함께 설 만하지 않으며, 함께 설 수 있어도 함께 權道를 행할 만하지 아니하다.[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라고 보인다.
夫非知命知事者,孰能得權謀之術。
천명과 일을 모르면 누가 능히 權謀의 방법을 터득하겠는가?
夫權謀有正有邪;
君子之權謀正,小人之權謀邪。
권모에는 正과 邪가 있으니,
君子의 권모는 정당함이고 小人의 권모는 사악함이다.
夫正者,其權謀公,故其為百姓盡心也誠;
彼邪者,好私尚利,故其為百姓也詐。
저 正이란 그 권모가 공익을 도모하매 백성을 위함에 마음을 다함이 정성스럽고,
저 邪란 私利를 좋아하고 중히 여기매 백성을 위함이 거짓스럽다.
夫詐則亂,誠則平,是故堯之九臣誠而興於朝,其四臣詐而誅於野。
속이면 혼란해지고, 정성스러우면 태평하므로, 堯의 아홉 신하는 정성스러워 조정에서 重用되었고, 네 신하는 거짓스러워 들판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 九臣 : 堯임금 때의 舜‧契‧禹‧后稷‧夔‧倕‧伯夷‧皐陶‧益을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君道〉의 12 참고.
▶ 四臣 : 共工‧驩兜‧三苗‧鯀의 四凶을 이른다. 《書經 虞書 舜典》
誠者隆至後世;
詐者當身而滅。
성실한 사람은 후세에 이르도록 융성하였고,
거짓스러운 사람은 당연히 몸이 멸망하였다.
知命知事而能於權謀者,必察誠詐之原而以處身焉,則是亦權謀之術也。
천명을 알고 일을 알아서 권모에 능한 사람은 반드시 성실과 欺詐의 根源을 살펴서 처신하니, 이 역시 권모를 쓰는 방법이다.
夫知者舉事也,滿則慮謙,平則慮險,安則慮危,曲則慮直。
대저 지혜로운 사람은 일을 처리함에, 가득 차면 부족함을 생각하고, 태평하면 험난함을 생각하고, 편안하면 위난을 생각하고, 굽었으면 곧음을 생각한다.
▶ 謙 : 《荀子》 〈仲尼〉에 ‘嗛’자로 썼고, 楊倞의 注에 “嗛은 不足이다.”라고 함을 따라 ‘부족’으로 번역하였다.
曲重其豫,惟恐不及,是以百舉而不陷也。
곡진하고 신중하게 예견하여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매 이 때문에 온갖 일을 처리하여도 결함이 없다.
▶ 曲重其豫 : 저본에는 ‘由重其豫’이나, 《說苑校證》에 “‘由’는 마땅히 《荀子》를 따라 ‘曲’이 되어야 하니, 글자 모양이 비슷하여 잘못 쓴 것이다.”라고 함을 따라 ‘曲’으로 바로잡았다.
曲重其豫는 자세하고 신중하게 미리 대비한다는 뜻이다.
2.
楊子曰:
「事之可以之貧,可以之富者,其傷行者也;
事之可以之生,可以之死者,其傷勇者也。」
楊子가 말하였다.
“일이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고 부유하게도 함이 사람의 품행을 손상하는 것이고,
일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함이 사람의 용기를 손상하는 것이다.”
▶ 楊子 : 권7 〈政理〉 32 참고.
▶ 事之……其傷勇者也 : 《孟子》 〈離婁 下〉에 “취해도 될 듯하며 취하지 않아도 될 듯한 경우에 취하면 淸廉을 손상하며, 주어도 될 듯하고 주지 않아도 될 듯한 경우에 주면 恩惠를 손상하며, 죽어도 될 듯하고 죽지 않아도 될 듯한 경우에 죽으면 勇氣를 손상한다.[可以取 可以無取 取 傷廉 可以與 可以無與 與 傷惠 可以死 可以無死 死 傷勇]”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말과 비슷하다.
僕子曰:
「楊子智而不知命,故其知多疑.」
僕子가 말하였다.
“양자는 지혜로우나 天命을 알지 못하매 그의 지혜에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
▶ 僕子 : 사람 이름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語曰:
『知命者不惑。』
晏嬰是也。
옛말에 이르기를,
“천명을 아는 사람은 미혹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晏嬰이 이것이다.
▶ 晏嬰 : 권1 〈君道〉 19 참고.
3.
趙簡子曰:
「晉有澤鳴、犢犨,魯有孔丘,吾殺此三人,則天下可圖也。」
趙簡子가 말하였다.
“晉나라에는 澤鳴과 犢犨가 있고 魯나라에는 孔丘가 있으니, 내가 이 세 사람을 죽이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을 터이다.”
▶ 澤鳴犢犨(독주) : 이 두 사람은 춘추시대 晉나라의 大夫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於是乃召澤鳴、犢犨,任之以政而殺之。使人聘孔子於魯。
이에 택명과 독주를 불러 정치를 맡겼다가 살해하고, 魯나라에 사람을 보내 공자를 초빙하였다.
孔子至河,臨水而觀曰:
「美哉水!洋洋乎!
丘之不濟於此,命也夫!」
공자가 황하에 이르러 물가에 가서 물을 보면서 말씀하였다.
“아름답구나. 넓게 흐르는구나.
내가 이 물을 건너가지 못함이 天命일 터이다.”
子路趨進曰:
「敢問奚謂也?」
子路가 달려와서 물었다.
“무슨 뜻인지 감히 묻습니다.”
孔子曰: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夫澤鳴、犢犨,晉國之賢大夫也。
“택명과 독주는 진나라의 賢大夫이다.
趙簡子之未得志也,與之同聞見,及其得志也,殺之而後從政.
조간자가 뜻을 얻기 전에는 그들과 함께 政事를 듣고 처리하였는데, 뜻을 얻고 나서는 그들을 죽인 뒤에 정사를 처리하였다.
故丘聞之:刳胎焚夭,則麒麟不至;
乾澤而漁,則蛟龍不遊;
覆巢毀卵,則鳳凰不翔。
그러므로 내가 들으니, 새끼 밴 짐승의 배를 갈라 胎를 꺼내고 어린 짐승 새끼를 불에 구우면 麒麟이 오지 않고,
연못의 물을 말려서 물고기를 잡으면 蛟龍이 놀지 않으며,
새 둥지를 엎어버리고 알을 깨뜨리면 鳳凰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 則蛟龍 : 저본에는 ‘則’자가 없으나, 上下의 文例를 따라 보충한 《說苑校證》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 夭 : 막 태어난 동물의 새끼를 말한다. 《禮記 王制》‧《國語 魯語 上》‧《淮南子 時則訓》
丘聞之:君子重傷其類者也。」
내가 들으니, 君子는 同類가 불행을 당하면 매우 가슴 아파한다고 하였다.”
4.
孔子與齊景公坐,左右白曰:
「周使來言廟燔。」
孔子가 齊 景公과 앉아 있는데, 측근의 신하가 여쭈었다.
“周나라 사신이 와서 ‘廟堂이 불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齊景公出問曰:
「何廟也?」
제 경공이 나와서 물었다.
“누구의 廟堂일까요?”
孔子曰:
「是釐王廟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釐王의 사당입니다.”
▶ 釐(희)王 : 周나라 제16대 왕이다. 이름은 胡齊이고, 莊王의 아들이다. 5년간 在位하였으며, 僖王으로도 쓴다.《史記 周本紀》
景公曰:
「何以知之?」
경공이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그것을 아십니까?”
孔子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詩》云:
『皇皇上帝,其命不忒;
天之與人,必報有德。』
禍亦如之。
“《詩經》에 이르기를,
‘위대한 上帝는 그 명령이 어긋나지 않네.
하늘이 사람을 대할 적에 반드시 덕이 있는 사람에게 보답하네.’라고 하였으니,
재앙도 이와 같습니다.
▶ 詩云……必報有德 : 《詩經》에는 없는 逸詩이다.
夫釐王變文武之制而作玄黃, 宮室輿馬奢侈,不可振也。
저 희왕이 文王‧武王의 제도를 고쳐 검은색과 노란색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宮室과 輿馬는 사치하니 구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 夫釐王變文武之制……不可振也 : 玄黃은 검고 노란색으로 화려하게 꾸민 일을 말한다.
《孔子家語》 〈六本〉에 “희왕이 문왕‧무왕의 제도를 바꾸어 검고 노란색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궁실을 드높게 지으며, 輿馬는 사치하니, 구제할 수 없었습니다.[夫釐王變文武之制 而作玄黃華麗之飾 宮室崇峻 輿馬奢侈 而弗可振也]” 라고 하였다.
故天殃其廟,是以知之。」
그러므로 하늘이 그 묘당에 재앙을 내렸음을 이 때문에 압니다.”
景公曰:
「天何不殃其身而殃其廟乎?」
경공이 말하였다.
“하늘은 어찌하여 그의 몸에 재앙을 내리지 않고 그의 묘당에 재앙을 내렸습니까?”
子曰:
「天以文王之故也。
若殃其身,文王之祀,無乃絕乎?
故殃其廟以章其過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문왕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그의 몸에 재앙을 내리면 문왕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의 묘당에 재앙을 내려 그의 잘못을 드러내었습니다.”
左右入報曰:
「周釐王廟也。」
측근이 들어와서 보고하였다.
“주 희왕의 묘당입니다.”
景公大驚,起拜曰:
「善哉!聖人之智,豈不大乎!」
경공이 매우 놀라면서 일어나 절하고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성인의 지혜여.
어찌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5.
齊桓公與管仲謀伐莒,謀未發而聞於國。
齊 桓公이 管仲과 莒나라를 공격하기를 모의하여 아직 계획을 발표하지도 않았는데, 국내에 알려졌다.
▶ 莒 : 西周 때 分封한 제후국이다. 己姓인데, 일설에는 曹姓이라고도 한다.
처음에 計斤(介根이라고도 쓰며, 지금의 山東省 膠州市 서남쪽에 있었다.)에 도읍하였다가 춘추 초기에 莒(지금의 산동성 莒縣)로 옮겼다. 뒤에 楚나라에 멸망되었다가 齊나라에 소속되었다.
桓公怪之,以問管仲。管仲曰:
「國必有聖人也。」
환공이 괴이하게 여겨 관중에게 묻자, 관중이 말하였다.
“나라에 필시 聖人이 있을 터입니다.”
桓公歎曰:
「歖!日之役者,有執柘杵而上視者,意其是邪!」
환공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아, 어느 날인가 服役하는 사람 중에 산뽕나무 공이를 들고 위에 올라 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혹시 그 사람인가?”
▶ 柘杵 : 산뽕나무로 만든 공이이다. 공이는 흙담이나 土城을 쌓을 때 흙을 다지는 공구의 하나이다.
乃令復役,無得相代。少焉,東郭垂至。
환공이 이에 복역하되 서로 교대하지 못하게 했는데, 조금 지나자 東郭垂가 당도하였다.
▶ 東郭垂 : 춘추시대 齊나라의 處士인데, 행적은 본문과 같다. 《呂氏春秋》 〈重言〉에는 ‘東郭牙’로 되어 있다.
管仲曰:
「此必是也。」
관중이 말하였다.
“필시 이 사람일 터입니다.”
乃令儐者延而進之,分級而立。
곧 儐者를 시켜 그를 이끌어 나오게 하여 계단을 나누어 따로 섰다.
▶ 分級而立 : 東階와 西階로 각기 나누어 따로 섬을 말한다.
옛날 예법에 주인은 동계, 손님은 서계를 이용하여 서거나 오르내리고 같은 계단을 쓰지 않았다.《禮記 曲禮 上》
管仲曰:
「子言伐莒者也?」
관중이 말하였다.
“그대가 거나라 토벌을 말한 사람이오?”
對曰:
「然。」
동곽수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管仲曰:
「我不言伐莒,子何故言伐莒?」
관중이 말하였다.
“내가 거나라를 토벌한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무슨 근거로 거나라를 토벌할 것이라 말했소?”
對曰:
「臣聞君子善謀,小人善意,臣竊意之也。」
동곽수가 대답하였다.
“臣이 듣건대, 君子는 계책을 잘 세우고 小人은 남의 뜻을 잘 이해한다고 하니, 臣은 삼가 그것을 이해하였습니다.”
管仲曰:
「我不言伐莒,子何以意之?」
관중이 말하였다.
“나는 거나라를 토벌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무슨 근거로 이해하였소?”
對曰:
동곽수가 대답하였다.
「臣聞君子有三色:
優然喜樂者,鐘鼓之色;
愀然清淨者,縗絰之色;
勃然充滿者,此兵革之色也。
“臣이 듣기에, 군자에게 세 가지 顔色이 있다고 하니,
여유롭게 기쁘고 즐거워함은 音樂을 감상할 때의 안색이고,
슬프고 청정함은 喪을 당해 喪服을 입었을 때의 안색이며,
발끈 노한 감정이 충만함은 바로 戰爭을 하려는 안색입니다.
▶ 縗絰 : 喪服을 이른다.
縗는 삼베로 만들어 상복의 가슴 부위에 붙이는 것이고, 絰은 삼을 꼬아 둥글게 만들어 머리에 쓰는 首絰과 허리에 띠는 腰絰을 이른다.
日者,臣望君之在臺上也,勃然充滿,此兵革之色也.
일전에 臣이 君主께서 누대에 있음을 바라보았는데, 발끈 노한 감정이 충만하였으니 이는 전쟁을 하려는 안색입니다.
君吁而不吟,所言者莒也,君舉臂而指所當者莒也。
주군께서 아! 하고 탄식하면서 입을 다물지 않음은 거나라를 말한 것이고, 주군께서 팔을 들어 가리킨 것은 거나라입니다.
▶ 吁而不吟 : ‘아’ 하며 탄식하느라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함을 말한다.
臣竊慮小諸侯之未服者,其惟莒乎?
臣이 삼가 생각해보니, 작은 제후국 중에 臣服하지 않는 나라는 단지 거나라 뿐이 아니겠습니까?.
臣故言之。」
臣은 그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君子曰:
君子가 말하였다.
「凡耳之聞,以聲也。
“귀는 소리로써 듣는다.
今不聞其聲而以其容與臂,是東郭垂不以耳聽而聞也。
그런데 그 소리를 듣지 않고 그 안색과 팔을 의거하였으니, 동곽수가 귀로 듣지 않고 안 것이다.
桓公、管仲雖善謀不能隱, 聖人之聽於無聲,視於無形,東郭垂有之矣。
환공과 관중이 계책을 잘 세웠지만 숨기지 못하였으니, 성인이 소리 없는 데서 들으며, 형체 없는 데서 봄을 동곽수가 소유하였다.
故桓公乃尊祿而禮之。」
그러므로 환공이 이에 높은 녹봉을 주어 예우하였다.”
6.
晉太史屠餘見晉國之亂,見晉平公之驕而無德義也,以其圖法歸周。
晉나라 太史 屠餘가 진나라가 혼란스럽고 晉 平公이 교만하여 德行과 道義가 없음을 보고 진나라의 圖籍과 法典을 가지고 周나라에 귀순하였다.
▶ 屠餘 : 《呂氏春秋》 〈先識〉에는 ‘屠黍’로 되어 있다. 또 高誘 注에 晉 出公의 太史라고 하였다.
▶ 晉平公 : 平公은 《呂氏春秋》 〈先識〉의 高誘 注에 ‘出公’이라 하고, “出公은 頃公의 손자이고, 定公의 아들이다. 《史記》에 ‘智伯이 出公을 공격하자, 출공이 齊나라로 달아나다가 길에서 죽었다.’라고 하였다.”
▶ 圖 : 저본에는 ‘國’으로 되어 있으나, 《呂氏春秋》 〈先識〉에 의거하여 ‘圖’로 바로잡았다.
周威公見而問焉,曰:
「天下之國,其孰先亡。」
周 威公이 만나서 물었다.
“천하의 제후국 중에 어느 나라가 먼저 망하겠소?”
▶ 周威公 : 본서 권3 〈建本〉 20 참고.
對曰:
「晉先亡。」
도여가 대답하였다.
“진나라가 가장 먼저 망할 터입니다.”
威公問其說。對曰:
위공이 그 이유를 묻자, 도여가 대답하였다.
「臣不敢直言,示晉公以天妖,日月星辰之行多不當,曰:
『是何能然?』
示以人事多不義,百姓多怨,曰:
『是何傷?』
示以鄰國不服,賢良不與,曰:
『是何害?』
是不知所以存,所以亡。
故臣曰:
『晉先亡。』」
“臣이 감히 솔직하게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晉公께 하늘의 災異 현상을 가지고 日月星辰의 운행이 대부분 정상이 아니라고 제시했더니, 晉公이 말하기를
‘어째서 그러한가?’라고 하였습니다.
人情 事理에 不義가 많아서 백성에 원망이 많다고 제시했더니, 晉公이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문제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웃 나라가 복종하지 않고 어진 사람이 참여하지 못한다고 제시했더니, 晉公이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해롭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국가가 존속하는 원인과 멸망하는 원인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신이 진나라가 가장 먼저 망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居三年,晉果亡。
3년이 지나자 진나라가 과연 망하였다.
威公又見屠餘而問焉。曰:
「孰次之。」
위공이 또 도여를 만나 물었다.
“다음은 어느 나라가 망하겠소?”
對曰:
「中山次之。」
도여가 대답하였다.
“中山國이 그 다음입니다.”
威公問其故。對曰:
위공이 그 까닭을 묻자, 도여가 대답하였다.
「天生民,令有辨,有辨,人之義也。
“하늘이 사람을 냄에 분별을 가지게 하였으니, 분별이 있음이 사람의 도의입니다.
所以異於禽獸麋鹿也,君臣上下所以立也。
禽獸나 麋鹿과 다른 까닭이고, 君臣과 上下의 관계를 확립하는 수단입니다.
中山之俗,以晝為夜,以夜繼日,男女切踦,固無休息.
中山國의 풍속은 낮을 밤으로 삼고 밤으로 낮에 이어서 男女가 무람없이 친밀하여 방탕한 생활을 그칠 때가 없습니다.
▶ 切踦 : 부딪치고 기댄다는 뜻으로, 무람없이 친밀하고 가까이함을 이른다. 切倚로도 쓴다. 《呂氏春秋 先識》‧《淮南子 齊俗訓》
淫昏康樂,歌謳好悲,其主弗知惡,此亡國之風也。
음란하고 혼미하게 향락하면서 슬픈 노래를 부르기 좋아하는데 그 임금은 이를 싫어할 줄 모르고 있으니, 이는 나라가 망할 풍조입니다.
臣故曰:
『中山次之。』」
그러므로 신은 중산국이 그다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居二年,中山果亡。
2년이 지나 중산국이 과연 망하였다.
威公又見屠餘而問曰:
「孰次之。」
위공이 또 도여를 만나 물었다.
“어느 나라가 그다음이겠소?”
屠餘不對。威公固請。
도여가 대답하지 않자, 위공이 한사코 물었다.
屠餘曰:
「君次之。」
도여가 대답하였다.
“君主가 그다음일 터입니다.”
威公懼,求國之長者,得錡疇、田邑而禮之,又得史理、趙巽以為諫臣,去苛令三十九物,以告屠餘。
위공이 두려워하여 나라 안의 德과 人望이 높은 사람을 찾아 錡疇와 田邑을 얻어 예우하고, 또 史理와 趙巽을 얻어 諫臣으로 삼았으며, 가혹한 법령 39건을 폐지하고 도여에게 그 사실을 말하였다.
▶ 錡疇田邑 : 周 威公 때의 두 賢臣이다. ‘錡疇’는 《呂氏春秋》 〈先識〉에는 ‘義蒔’로 되어 있다.
▶ 史理趙巽 : 周 威公 때 直諫하던 두 신하이다. 《呂氏春秋》 〈先識〉에는 ‘史驎’, ‘趙騈’으로 되어 있다.
屠餘曰:
도여가 말하였다.
「其尚終君之身。
“아마 군주 살아생전에는 망하지 않겠습니다.
臣聞國之興也,天遺之賢人,與之極諫之士;
國之亡也,天與之亂人與善諛者。」
臣이 들으니, 나라가 흥성할 때는 하늘이 賢人을 보내며 있는 極力으로 諫하는 사람을 주고,
나라가 망할 때는 하늘이 亂人과 아첨을 잘하는 사람을 준다고 합니다.”
威公薨,九月不得葬, 周乃分而為二.
위공이 죽자 아홉 달이 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고, 주나라가 마침내 둘로 쪼개졌다.
▶ 九月不得葬 : 周 威公이 죽은 뒤에 작은 아들 公子 根이 太子 朝와 王位 쟁탈전을 벌여 내란이 일어나 아홉 달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假埋葬하였다.
이때 韓나라와 趙나라가 공자 근을 도와 鞏(지금의 河南省 鞏縣 서남쪽)에서 독립하니, 이 때문에 西周가 분열하여 東周와 서주의 두 小國이 되고 국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史記 周本紀》
故有道者言,不可不重也。
그러므로 道德이 있는 사람의 말은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7.
齊侯問於晏子曰:
「當今之時,諸侯孰危?」
齊 景公이 晏子에게 물었다.
“현재 諸侯 중에 누가 위험합니까?”
對曰:
「莒其亡乎?」
안자가 대답하였다.
“莒나라가 아마 망할 터입니다.”
公曰:
「奚故?」
景公이 물었다.
“무슨 까닭입니까?”
對曰:
「地侵於齊,貨竭於晉,是以亡也。」
안자가 대답하였다.
“국토는 제나라에 점거당하고 財貨는 晉나라에 몽땅 빼앗기고 있으니, 이 때문에 망하겠습니다.”
8.
智伯從韓、魏之兵以攻趙,圍晉陽之城而溉之,城不沒者三板。
智伯이 韓과 魏의 군대를 거느리고 趙를 공격하여 晉陽城을 포위하고 물을 대니 물에 잠기지 않은 성의 높이가 3板 뿐이었다.
▶ 智伯從韓魏之兵以攻趙 : 智伯은 본서 권3 〈建本〉 30 참고.
從은 ‘따르게 하다’, ‘거느리다’의 뜻이다. 韓魏는 춘추전국시대 晉나라의 卿으로, 여기서는 韓康子와 魏宣子를 말한다. 趙는 趙襄子를 말한다. 본서 권3 〈建本〉 30 참고.
▶ 晉陽 : 본서 권2 〈臣術〉 10 참고.
▶ 三板 : 古代의 城이나 담을 쌓을 때 사용하던 널빤지 세 개를 합한 높이를 말한다.
1板의 높이는 2尺으로 3板이면 6尺이 되는데, 先秦시대의 1척은 23.1㎝였다고 한다. 《戰國策 趙策 1》
絺疵謂智伯曰:
「韓、魏之君必反矣。」
絺疵가 지백에게 말하였다.
“한‧위의 군주가 틀림없이 배반하겠습니다.”
▶ 絺疵 : 智伯의 家臣인데,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智伯曰:
「何以知之?」
지백이 말하였다.
“어떻게 그걸 아느냐?”
對曰:
치자가 대답하였다.
「夫勝趙而三分其地,今城未沒者三板,臼竈生鼃,人馬相食,城降有日矣。
“조를 이기고 그 땅을 셋으로 나누기로 했는데, 지금 성의 잠기지 않은 곳이 3板 정도이라, 아궁이에 〈물에 잠겨〉 개구리가 새끼를 낳고 사람이 말을 잡아먹고 있으니, 성이 항복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臼竈生鼃 : 부엌이 물에 잠기어 개구리가 아궁이에 새끼를 낳는다는 뜻으로, 오랫동안 물에 잠기어 고통이 심함을 이른다.
而韓、魏之君無喜志而有憂色,是非反何也?」
그러나 한‧위의 주군에게 기뻐하는 뜻이 없고 근심하는 기색이 있으니, 이것이 배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明日,智伯謂韓、魏之君曰:
「疵言君之反也。」
이튿날 지백이 한‧위의 주군에게 말하였다.
“치자가 그대들이 배반하겠다고 말하였소.”
韓、魏之君曰:
한‧위의 군주가 말하였다.
「必勝趙而三分其地,今城將勝矣。
“기어이 조씨를 이기고 그 땅을 셋으로 나누기로 하여, 지금 성을 거의 함락하였소.
夫二家雖愚,不棄美利而偝約為難不可成之事,其勢可見也。
우리 두 집안이 어리석기는 하지만, 좋은 이익을 버리고 盟約을 위배하여 이룰 수 없는 일로 난처하게 하지 말아야 함을 형세상 알고 있소.
▶ 為難 : 난처하다. 곤란하다. 딱하다. (=犯难)
是疵必為趙說君,且使君疑二主之心,而解於攻趙也。
이는 치자가 틀림없이 조씨를 위해 그대에게 遊說하고, 또 그대에게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을 의심하게 하여 조씨를 공격함을 해이하게 하려는 것이오.
今君聽讒臣之言而離二主之交,為君惜之。」
그런데도 그대는 참소하는 신하의 말을 듣고 우리 두 사람의 交情을 離散시키니, 그대를 위해 애석하오.”
智伯出,欲殺絺疵,絺疵逃。韓、魏之君果反。
지백이 나가 치자를 죽이려 하니 치자가 달아났고, 한‧위의 주군은 정말 배반하였다.
▶ 解 : ‘해이하다, 게을리하다’의 뜻이다. ‘懈’와 통용이다.
9.
魯公索氏將祭而亡其牲。
魯나라의 公索氏가 제사를 지내려 함에 제사에 쓸 희생을 잃어버렸다.
▶ 公索氏 : 魯나라 사람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孔子聞之,曰:
「公索氏比及三年必亡矣。」
孔子께서 아시고 말씀하셨다.
“공색씨는 3년쯤 되어 필시 망할 터이다.”
▶ 比及 : ...의 때에 이르다
後一年而亡。
1년 후에 망하였다.
弟子問曰:
「昔公索氏亡牲,夫子曰:
『比及三年必亡矣。』
今期年而亡。
夫子何以知其將亡也。」
제자가 물었다.
“종전에 공색씨가 희생을 잃자 선생님께서
‘3년쯤 되어 틀림없이 망할 터이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1년 만에 망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그가 망할 줄 아셨습니까?”
孔子曰:
「祭之為言索也,索也者盡也,乃孝子所以自盡於親也。
至祭而亡其牲,則餘所亡者多矣。
吾以此知其將亡矣。」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祭는 索의 뜻이고 索은 다한다는 말이니, 孝子가 부모에게 자신을 다 바치는 것이다.
제사할 때가 되어 그 희생을 잃었다면 그 외에도 잃은 것이 많을 터이매, 나는 이 때문에 그가 장차 망할 줄 알았노라.”
10.
蔡侯、宋公、鄭伯朝於晉。蔡侯謂叔向曰:
「子亦奚以語我?」
蔡侯‧宋公‧鄭伯이 晉나라에 가서 朝見하함에, 채후가 叔向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무엇을 나에게 말해주시겠소?”
▶ 叔向 : 본서 권5 〈貴德〉 14 참고.
對曰:
「蔡支地計眾,不若宋鄭。
其車馬衣裘侈於二國,諸侯其有圖蔡者乎?」
숙향이 대답하였다.
“채나라는 토지를 기재하고 백성을 계산해도 송나라나 정나라만 못합니다.
그 車馬와 의복은 두 나라보다 사치스러우니, 제후 중에 아마 채나라를 도모하려는 자가 있을 터입니다.”
▶ 支 : 저본에는 ‘言’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言’은 ‘支’자인 듯하다.”라고 하였고, 본서 권8 〈尊賢〉 05 ‘燕校地計衆’의 《說苑校證》에 “《大戴禮記》 〈保傅〉에 ‘校’자는 ‘支’로 썼는데, 注에 ‘支’는 ‘計’와 같다.”라고 함을 따라 ‘支’로 바로잡았다.
處期年,荊伐蔡而殘之。
1년이 지나자 荊(楚)나라가 채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11.
白圭之中山,中山王欲留之,固辭而去。
白圭가 中山國에 갔을 적에 中山王이 그를 머무르게 하려 하였으나 굳이 거절하고 떠났다.
▶ 白圭 : 전국시대 周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丹이고 圭는 字인데, 孟子와 同時代 사람으로, 魏 惠王의 相國을 지냈다. 治水와 제방 축조에 능하였다. 《孟子 告子 下》‧《史記 貨殖列傳》
又之齊,齊王亦欲留之,又辭而去,人問其辭。
또 齊나라에 갔을 적에 齊王이 그를 머무르게 하려 하였으나 또 거절하고 떠나니, 어떤 이가 그의 거절한 이유를 물었다.
白圭曰:
「二國將亡矣。
백규가 대답하였다.
“두 나라는 장차 망할 터이다.
所學者國有五盡,故莫之必忠,則言盡矣;
莫之必譽,則名盡矣;
莫之必愛,則親盡矣;
行者無糧,居者無食,則財盡矣;
不能用人又不能自用,則功盡矣;
國有此五者,毋幸,必亡。
배운 대로라면, 예로부터 나라에는 다섯 가지 다함이 있다.
충성하는 사람이 없으면 忠言이 다 없어지고,
기림이 없으면 名聲이 다 없어지며,
사랑이 없으면 친근한 사람이 다 없어지고,
길을 가는 사람에게 양식이 없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음식이 없으면 재물이 다 없어지며,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하지 못하고 자신의 재능도 쓰지 못하면 功業이 다하여 없어지게 된다.
나라에 이 다섯 가지가 있으면 요행이 없으며 틀림없이 멸망할 터이다.
中山與齊皆當此。」
중산국과 제나라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若使中山之與齊也,聞五盡而更之,則必不亡也,其患在不聞也,雖聞又不信也。
만일 중산국과 제나라가 이 다섯 가지 다함을 듣고 고치면 절대로 멸망하지 않겠지만, 그들의 병폐는 들지 않음에 있고, 듣더라도 또 믿지 않음이다.
然則人主之務,在善聽而已矣。
그러므로 임금의 할 일은 잘 들음에 있을 뿐이다.
12.
下蔡威公閉門而哭,三日三夜,泣盡而繼以血,旁鄰窺牆而問之。曰:
「子何故而哭,悲若此乎?」
下蔡의 威公이 문을 닫고 곡하기 사흘 밤낮, 눈물이 다하여 피가 뒤이으니, 이웃에 사는 사람이 담 너머에서 보고 물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곡하기에 이처럼 슬프오?”
▶ 下蔡威公 : 下蔡는 지금의 安徽省 鳳臺縣의 地名이다. 蔡는 본래 周 武王의 아우 叔度를 봉한 나라인데, 武庚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周公에게 放逐되었다.
뒤에 그의 아들 蔡仲(이름은 胡)을 다시 蔡에 봉하여 上蔡(지금의 河南省 上蔡縣 서남쪽)에 도읍을 정하였다. 춘추시대에 楚나라의 계속된 핍박으로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昭侯 때 州來(鳳臺縣)로 옮기고 하채라 하였다. 威公의 행적은 미상이다. 《春秋左氏傳 哀公 2년》‧《漢書 地理志 上》
對曰:
「吾國且亡。」
위공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는 곧 망할 터이오.”
曰:
「何以知也?」
이웃 사람이 말하였다.
“어떻게 아시오?”
應之曰:
「吾聞病之將死也,不可為良醫;
國之將亡也,不可為計謀;
吾數諫吾君,吾君不用,是以知國之將亡也。」
위공이 응답하였다.
“내가 들으니, 병으로 곧 죽게 됨에는 良醫라 해서는 안 되고,
나라가 곧 망함에는 계책이라 해서는 안 되오.
내가 여러 차례 우리 임금께 諫言을 올렸으나, 우리 임금은 내 말을 쓰지 않았소.
이 때문에 나라가 장차 망할 줄 아오.”
於是窺牆者聞其言,則舉宗而去之楚。
이에 담 너머에서 보던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종족을 거느리고 채나라를 떠나 楚나라로 갔다.
▶ 擧宗 : 모든 종족을 거느린다는 말이다.
居數年,楚王果舉兵伐蔡。
몇 년이 지나, 楚王이 과연 군대를 일으켜 채나라를 공격하였다.
窺牆者為司馬,將兵而往, 束虜甚眾。
담 너머에서 살펴보던 사람이 司馬가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다.
▶ (來)[束] : 저본에는 ‘來’로 되어 있으나, 《說苑校證》에 “《太平御覽》 권450에 의거하여 ‘束’으로 고쳤다.”라고 함을 따라 ‘束’으로 바로잡았다.
問曰:
「得無有昆弟故人乎?」
포로에게 물었다.
“혹시 나의 형제나 친구는 없는가?”
見威公縛在虜中,問曰:
「若何以至於此?」
위공이 결박당한 채 포로들 속에 있음을 발견하고 물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소?”
應曰:
위공이 대답하였다.
「吾何以不至於此?
“내 어찌 이 지경에 이르지 않겠소?
且吾聞之也,言之者行之役也,行之者言之主也。
또 내가 들으니 말하는 사람은 실행하는 사람의 奴僕이고, 실행하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主人이라 하였소.
汝能行我言,汝為主,我為役,吾亦何以不至於此哉?」
그대는 실행을 잘하고 나는 말만 잘하매, 그대는 주인이 되고 나는 노복이 되었을 뿐, 내가 또한 어찌 이 지경에 이르지 않겠소?”
窺牆者乃言之於楚王,遂解其縛,與俱之楚。
담 너머에서 살펴보던 사람이 초왕에게 말하여 마침내 그의 결박을 풀어주고 함께 초나라로 갔다.
故曰:
「能言者未必能行,能行者未必能言。」
그러므로 나(劉向)는 말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꼭 실행을 잘하지는 않고, 실행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꼭 말을 잘하지는 않는다.”
13.
管仲有疾,桓公往問之,曰:
「仲父若棄寡人,豎刁可使從政乎?」
管仲의 병이 위중할 때, 桓公이 가서 물었다.
“仲父께서 만일 과인을 버린다면, 豎刁에게 政事를 처리하게 해도 되겠소?”
▶ 豎刁 : 본서 권5 〈貴德〉 07 참고.
對曰:
「不可。
豎刁自刑以求入君,其身之忍,將何有於君。」
관중이 대답하였다.
“안 됩니다.
수조는 자신에게 宮刑을 가하여 군주께 들어가기를 구하였으매, 자기 몸을 잔인하게 대하는 사람이 장차 임금을 대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 自刑 : 스스로 宮刑하여 去勢하였다는 말이다.
公曰:
「然則易牙可乎?」
환공이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면 易牙는 可當하겠소?”
▶ 易牙 : 본서 권5 〈貴德〉 07 참고.
對曰:
관중이 대답하였다.
「易牙解其子以食君,其子之忍,將何有於君.
“역아는 그 아들을 해체하여 임금에게 먹였으니, 자기 아들을 잔인하게 대한 사람이 장차 임금에게 무슨 일인들 어려워하겠습니까?
▶ 解其子以食(사)君 : 자기 자식의 사지를 해체하여 요리한 음식을 임금에게 먹였다는 말이다.
若用之必為諸侯笑。」
만일 이들을 등용하시면 틀림없이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될 터입니다.”
及桓公歿,豎刁易牙乃作難。桓公死六十日,蟲出於戶而不收。
환공이 죽음에, 수조와 역아가 난을 일으키니, 환공이 죽은 지 60일이 되어 시신에서 생긴 구더기가 문밖으로 나오도록 시체를 거두지 않았다.
14.
石乞侍坐於屈建。屈建曰:
「白公其為亂乎?」
石乞이 屈建을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굴건이 말하였다.
“白公이 장차 난을 일으키겠는가?”
▶ 石乞 : 춘추시대 楚나라의 勇士이다.
▶ 屈建 : 본서 권3 〈建本〉 28 참고.
▶ 白公 : 춘추시대 楚나라의 公族이다. 이름은 勝으로, 平王의 손자이고 太子 建의 아들이다.
伍子胥를 따라 吳나라로 도망쳤다가 惠王 때 본국으로 돌아와 白公에 봉해졌다.
뒤에 난을 일으켜 子西와 子期 형제를 죽이고 혜왕을 습격하였으나, 子固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자살하였다. 《春秋左氏傳 哀公 16‧17년》‧《國語 楚語 下》
石乞曰:
석걸이 말하였다.
「是何言也?
“이 무슨 말씀입니까?
白公至於室無營, 所下士者三人, 與己相若臣者五人,所與同衣食者十人。
白公之行若此,何故為亂?」
백공은 집을 지은 적이 없고, 자신의 몸을 굽히는 선비가 세 사람이고, 자기와 대등하게 대하는 이가 다섯 사람이며, 衣食을 함께하는 이가 열 사람입니다.
백공의 행위가 이와 같은데, 무엇 때문에 난을 일으키겠습니까?”
▶ 臣 : 저본에는 ‘臣’자가 있으나, 《說苑校證》에 “《渚宮舊事》에 ‘臣’자가 없는 것을 따라야 한다.”라고 함을 따라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 十 : 저본에는 ‘千’으로 되어 있으나, 《說苑校證》에 “孫詒讓은 ‘千人은 너무 많으니, 《渚宮舊事》 권2의 ‘十人’이 옳을 듯하다.’ 하였다.”라고 함을 따라 ‘十’으로 바로잡았다.
屈建曰:
굴건이 말하였다.
「此建之所謂亂也。
“그것이 내 소위 ‘亂’이다.
以君子行則可, 於國家行過禮則國家疑之.
君子로서는 행위가 괜찮지만, 국가에는 행위가 과한 禮義이라서 국가는 의심한다.
且苟不難下其臣,必不難高其君矣, 建是以知夫子將為亂也。」
더구나 진실로 신하에게 몸을 낮춤을 어려워하지 않으면, 필시 그 임금의 위에 있음도 어려워하지 않으매, 나는 이 때문에 백공이 장차 난을 일으킬 줄 아노라.”
處十月,白公果為亂。
10개월이 지나자 백공이 정말 난을 일으켰다.
15.
韓昭侯造作高門。屈宜咎曰:
「昭侯不出此門。」
韓 昭侯가 높고 큰 宮門을 짓자, 屈宜咎가 말하였다.
“昭侯는 이 문을 나가지 못할 터이다.”
曰:
「何也?」
누군가 물었다.
“무엇 때문이오?”
曰:
굴의구가 대답하였다.
「不時。吾所謂不時者,非時日也。
“때에 맞지 않으니, 내 所謂 ‘때에 맞지 않음’은 時日이 아니오.
人固有利不利,昭侯嘗利矣,不作高門。
사람에겐 본래 이로움과 불리함이 있는데, 소후가 일찍이 이로울 때는 높은 궁문을 짓지 않았소.
往年秦拔宜陽,明年大旱民飢.
지난 연도에 秦나라가 宜陽을 함락시켰고, 그 이듬해에는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리었소.
不以此時恤民之急也,而顧反益奢,此所謂福不重至,禍必重來者也!」
이런 때에 백성을 구휼함을 서두르지 않고 도리어 더욱 사치하니, 이것이 이른바 ‘복은 거듭 오지 않고, 재앙은 항상 거듭 온다.’이오.”
高門成,昭侯卒。竟不出此門。
높은 궁문이 완성되었을 때, 소후가 죽으매 끝내 그 문을 나가지 못하였다.
16.
田子顏自大術至乎平陵城下,見人子問其父,見人父問其子。
田子顔이 大術로부터 平陵城에 가서, 남의 아들을 만나서는 그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남의 아버지를 만나서는 그 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田子方曰:
田子方이 말하였다.
「其以平陵反乎?
“그가 혹 평릉을 근거로 반란하려 함인가?
吾聞行於內,然後施於外。
내 들으니 속에서 행하고 난 뒤에 겉으로 시행한다고 한다.
子顏欲使其眾甚矣。」
자안이 그의 백성을 부리려는 마음이 심하구나.”
後果以平陵叛。
뒤에 자안이 정말 평릉을 근거로 謀叛하였다.
17.
晉人已勝智氏,歸而繕甲砥兵。楚王恐,召梁公弘曰:
「晉人已勝智氏矣。歸而繕甲兵,其以我為事乎?」
晉의 군주가 智氏를 이기고 돌아가서 갑옷을 수선하고 무기를 갈아 정비하매, 楚王이 두려워하여 梁公弘을 불러서 물었다.
“晉의 군주가 지씨를 이기고 나서 돌아가서 갑옷과 무기를 수선하고 정비하니, 혹 우리와 전쟁하려 함인가?”
▶ 晉人已勝智氏 : 전국시대 晉나라의 趙襄子가 韓康子‧魏宣子와 함께 智氏(智伯)를 멸망시킨 일을 말한다.
智伯은 본서 권3 〈建本〉 30 참고.
단 이 내용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宋나라 葉大慶의 《攷古質疑》 권4에는 “杜預가 주석한 《春秋左氏傳》의 晉人이 智氏에게 승리한 일은 春秋 이후 27년에 있으니, 춘추 이후라고 말하는 것은 哀公 17년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闔廬가 郢에 들어간 일은 바로 定公 4년이니, 54년의 시간 차이가 있다. 더구나 지백이 망함은 吳나라가 멸망한 지 벌써 오래되었으니, 이 일은 잘못되었다.”라고 하였다.
또 淸나라 陳厚耀의 《春秋戰國異事》 권29에는 “진인이 지씨를 평정한 것은 합려가 郢을 습격한 뒤에 있었던 일로 楚 惠王 때에 해당하니, ‘智氏’ 두 글자는 잘못되었다.”라고 하였다.
▶ 梁公弘 : 춘추시대 楚 昭王의 大夫이다.
梁公曰:
양공이 대답하였다.
「不患.
“晉나라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 不患 : 《太平御覽》 권450의 인용문에는 ‘患’자 아래 ‘晉’자가 있다.
害其在吳乎?
재앙은 아마 吳나라에 있을 터입니다.
夫吳君恤民而同其勞,使其民重上之令,而人輕其死以從上,使如虜之戰.
저 오나라 임금은 백성을 보살피고 그 勞苦를 함께하여, 백성이 군주의 명령을 존중하여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고 군주를 따르게 하여, 마치 노예를 전장에 내몰듯이 하고 있습니다.
臣登山以望之,見其用百姓之信必也, 勿已乎?
臣이 산에 올라가 바라보면서, 저들이 백성의 신뢰를 틀림없이 사용할 터임을 알았고, 그만두지 않을 터입니다.
其備之若何?」
그것을 대비함이 어떻겠습니까?”
不聽,明年,闔廬襲郢。
듣지 않더니 그 이듬해에 吳王 闔廬가 楚나라 수도 郢을 습격하였다.
▶ 闔廬 : 본서 권8 〈尊賢〉 05 참고.
18.
楚莊王欲伐陳,使人視之。使者曰:
「陳不可伐也。」
楚 莊王이 陳나라를 공격하려고 사람을 시켜 시찰하였더니, 使者가 보고하였다.
“陳나라는 정벌할 수가 없습니다.”
莊王曰:
「何故?」
莊王이 물었다.
“무슨 이유인가?”
對曰:
「其城郭高,溝壑深,蓄積多,其國寧也。」
사자가 대답하였다.
“그 성곽이 높고 해자가 깊으며, 쌓아둔 재물이 많고 나라가 평안하였습니다.”
▶ 溝壑 : 垓子를 말한다. 人工으로 성곽의 둘레를 파서 만든 도랑으로, 성곽의 방어용으로 쓴다.
護城河라고도 한다.
王曰:
장왕이 말하였다.
「陳可伐也。
“진나라는 정벌할 만하다.
夫陳,小國也,而蓄積多,蓄積多則賦斂重,賦斂重則民怨上矣。
진나라는 小國인데 쌓아둔 재물이 많다 하되, 쌓아둔 재물이 많음은 세금 부과가 무거웠기 때문이고, 세금 부과가 무거웠으면 백성이 윗사람을 원망할 터이다.
城郭高,溝壑深,則民力罷矣。」
성곽이 높고 해자가 깊으면 백성의 힘이 피폐할 터이다.”
興兵伐之,遂取陳。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여 마침내 진나라를 취하였다.
19.
石益謂孫伯曰:
「吳將亡矣!
吾子亦知之乎?」
石益이 孫伯에게 일렀다.
“吳나라는 장차 망할 터이오!
그대도 알고 있소?”
孫伯曰:
「晚矣,子之知之也。
吾何為不知?」
손백이 말하였다.
“늦구려, 그대가 앎이.
내 어찌 모르겠소.”
石益曰:
「然則子何不以諫?」
석익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찌하여 諫하지 않았소?”
孫伯曰:
손백이 말하였다.
「昔桀罪諫者,紂焚聖人,剖王子比干之心。
“예전에 夏桀은 간하는 사람을 죄로 다스렸고, 商紂는 聖人을 불태워 죽이고 王子 比干의 심장을 갈랐지요.
袁氏之婦,絡而失其紀,其妾告之,怒棄之。
袁氏의 부인은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을 적에 그 방법을 잊어버렸는데, 妾이 그녀에게 방법을 말해주자, 노하여 첩을 버렸지요.
夫亡者,豈斯人知其過哉?」
저 나라를 망치는 자, 그 사람이 어찌 자신의 잘못을 알겠소?”
20.
孝宣皇帝之時,霍氏奢靡,茂陵徐先生曰:
孝宣皇帝 때 霍氏들이 사치하여 재물을 낭비하니, 茂陵 사람 徐先生이 말하였다.
▶ 霍氏 : 霍光의 일족을 말한다.
곽광은 漢나라 河東 平陽(지금의 山西省 臨汾縣 서남) 사람으로, 霍去病의 이복동생이다. 武帝 때 奉車都尉가 되어 무제의 깊은 신임을 받았고, 무제가 죽은 뒤 어린 昭帝를 보필하였다.
燕王의 난을 기회로 上官桀‧桑弘羊 등의 정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여 전후 20여 년간 권력을 독점하였다. 博陸侯에 봉해졌고, 벼슬은 大司馬大將軍이었으며, 시호는 宣成이다. 《漢書 霍光傳》
▶ 茂陵徐先生 : 茂陵은 漢 武帝의 陵으로, 宣帝 때 縣을 두어 右扶風에 소속시켰다. 현재의 陝西省 興平市 동북쪽이다.
徐先生은 아래 글에서 말한 徐福으로 무릉 사람인데, 행적은 알 수 없다.
「霍氏必亡。
“곽씨는 틀림없이 멸망할 터이다.
夫在人之右而奢,亡之道也。
대저 남보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사치함은 멸망하는 도리이다.
孔子曰:
『奢則不遜。』
孔子께서
‘사치하면 겸손하지 못하다.’라고 말씀하셨다.
▶ 奢則不遜 : 《論語》 〈述而〉에 보인다.
단 ‘遜’이 현재의 《論語》에는 ‘孫’으로 되어 있는데, 통용한다.
夫不遜者必侮上,侮上者,逆之道也。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틀림없이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윗사람을 업신여김은 반역하는 도리이다.
出人之右,人必害之。
남보다 높은 자리에 나서면 남들이 틀림없이 謀害하게 된다.
今霍氏秉權,天下之人疾害之者多矣。
지금 곽씨가 집권하고 있으니, 천하 사람으로 질투하여 해치는 사람이 많을 터이다.
夫天下害之而又以逆道行之,不亡何待?」
천하 사람이 해치려 하고, 게다가 반역하는 도리를 행하니 망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乃上書言
霍氏奢靡,陛下即愛之,宜以時抑制,無使至於亡。
이내 上書하여 말하였다.
“곽씨가 사치하여 재물을 낭비하니, 폐하께서 만일 이들을 사랑하신다면 의당 때때로 억제하시어 멸망에 이르지 않게 하십시오.”
書三上,輒報:
「聞。」
세 차례 상소를 올리자 그때마다
“알겠다.”라는 批答을 내렸다.
其後霍氏果滅。
뒤에 곽씨는 정말 멸망하였다.
董忠等以其功封。人有為徐先生上書者,曰:
董忠 등이 그 功으로 侯에 봉하여지니, 어떤 사람이 서선생을 위해 上書하여 말하였다.
▶ 董忠 : 漢나라 穎川 陽翟 사람이다.
漢 宣帝 地節 4년(66)에 霍光의 아들 霍禹가 선제를 폐위하려고 음모를 꾸미자, 동충이 이를 알고 고발하여 그 공으로 高昌侯에 봉해졌다. 《漢書 霍光金日磾傳》
「臣聞客有過主人者,見竈直堗,傍有積薪。
“臣이 이렇게 들었습니다.
나그네가 주인집을 들렀을 적에 부엌의 곧은 구들과 곁에 쌓인 땔나무를 보았습니다.
客謂主人曰:
『曲其堗,遠其積薪,不者將有火患。』
나그네가 주인에게 말하기를,
‘구들을 굽게 만들고 쌓아놓은 땔나무를 멀리 옮기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차 화재가 있을 터이오.’라고 말하였습니다.
主人默然不應,居無幾何,家果失火。
그러나 주인은 잠자코 응하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에 정말 불이 났습니다.
鄉聚里中人哀而救之,火幸息。
마을 사람들이 애처롭게 여겨 불을 꺼서 다행히 불이 꺼졌습니다.
於是殺牛置酒,燔髮灼爛者在上行,餘各用功次坐,而反不錄言曲堗者。
이에 소를 잡아 술자리를 마련하고 머리카락이 타고 불에 데인 자들은 윗줄에 앉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각기 공에 따라 차례대로 앉혔으나, 구들을 굽게 만들라고 조언한 사람은 도리어 챙기지 않았습니다.
▶ 不錄 : 살피지 않았다는 말이다. 곧 초청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向使主人聽客之言,不費牛酒,終無火患。
만일 주인이 나그네의 조언을 들었더라면 소와 술을 허비하지 않고, 끝내 화재도 없었을 터입니다.
今茂陵徐福數上書言霍氏且有變,宜防絕之。
한편 무릉 사람 徐福이 여러 차례 상서하여 말하기를, 곽씨에게 장차 변고가 있을 터이니 마땅히 방비하여 단절하라고 하였습니다.
向使福說得行,則無裂地出爵之費,而國安平自如。
만일 서복의 말을 실행했더라면 땅을 分封하고 爵位를 주는 비용이 들지 않고 나라도 예전처럼 평안하였을 터입니다.
今往事既已,而福獨不得與其功,惟陛下察客徙薪曲堗之策,而使居燔髮灼爛之右。」
지금 지나간 일은 그만이지만 서복만 그 공로에 포함되지 못하였으매, 폐하께서는 섶나무를 옮기고 구들을 굽게 만들라던 계책을 살피시어 머리카락을 태우고 불에 데인 사람들의 윗자리에 앉게 하십시오.”
書奏,上使人賜徐福帛十匹,拜為郎。
상서를 올리자, 황제가 사람을 보내 서복에게 비단 열 匹을 하사하고 郎官에 임명하였다.
21.
齊桓公將伐山戎、孤竹,使人請助於魯。
齊 桓公이 山戎과 孤竹을 공격하려고 使者를 魯나라에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 山戎孤竹 : 山戎은 춘추시대 河北省 지역에 있던 夷族 나라의 하나이다. 北戎이라고도 한다.
孤竹은 商나라 때부터 춘추시대까지 하북성 盧龍縣 지역에 있던 나라 이름이다.
魯君進群臣而謀,皆曰:
「師行數十里,入蠻夷之地,必不反矣。」
魯君이 群臣을 나오게 하여 의논하자, 모두 말하였다.
“군대가 수천 리를 행군하여 오랑캐 지역에 들어가면 절대로 돌아오지 못할 터입니다.”
於是魯許助之而不行。
이에 노나라는 도와주겠다고 허락하였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다.
齊已伐山戎、孤竹,而欲移兵於魯。管仲曰:
「不可。
제나라가 산융과 고죽을 정벌하고 나서 군대를 이동시켜 노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管仲이 말하였다.
“안 됩니다.
諸侯未親,今又伐遠而還誅近鄰,鄰國不親,非霸王之道.
제후들이 우리와 친하지 않은데도, 먼 곳을 치고 돌아와서 또 가까운 이웃을 주벌하면 이웃 나라가 우리와 친하지 않을 터이니, 이것은 霸王의 도리가 아닙니다.
君之所得山戎之寶器者,中國之所鮮也,不可不進周公之廟乎?」
임금께서 얻은 산융의 寶物은 中原에는 드문 것이니, 周公의 사당에 바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桓公乃分山戎之寶,獻之周公之廟。
환공이 이에 산융에서 얻은 보물을 나누어 주공의 사당에 바쳤다.
明年起兵伐莒。魯下令丁男悉發,五尺童子皆至。
이듬해 군대를 일으켜 莒나라를 정벌함에 노나라가 명령을 내려 丁壯을 모두 징발하니, 五尺童子도 모두 나왔다.
孔子曰:
「聖人轉禍為福,報怨以德。」
此之謂也。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인은 환난을 바꾸어 복을 만들고, 원한을 德으로 갚는다.”라고 하셨으니,
이것을 이름이다.
▶ 聖人 轉禍爲福 : 《孔子家語》 〈辯政〉에 나오는 말이다.
▶ 報怨以德 : 《論語》 〈憲問〉에 이 말이 나오지만, 孔子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論語》에는 “혹자가 말하기를 ‘德(은덕)으로써 원한을 갚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자, 孔子께서 말씀하시길 ‘무엇으로써 德을 갚을꼬? 정직함으로써 원한을 갚고, 德으로써 德을 갚아야 한다.’라고 하였다.[或曰 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고 되어 있다.
22.
中行文子出亡至邊,從者曰:
「為此嗇夫者君人也,胡不休焉,且待後車者。」
中行文子가 도망쳐서 변경에 당도하니, 從者가 말하였다.
“이곳의 嗇夫는 主君의 사람인데, 어찌 이곳에서 쉬지 않으십니까? 잠시 뒤에 오는 수레를 기다리십시오.”
▶ 中行(항)文子 : 춘추시대 晉나라 卿 荀寅이다. 본서 권6 〈復恩〉 13 참고.
▶ 嗇夫 : 농지를 관리하는 낮은 벼슬이다. 《韓非子 說林 下》
文子曰:
중항문자가 말하였다.
「異日吾好音,此子遺吾琴,吾好佩,又遺吾玉,是不非吾過者也,自容於我者也。
“이전에 내가 음악을 좋아하니 이 사람이 나에게 琴을 주었고, 내가 佩玉을 좋아하니 또 玉을 주었으매 나의 잘못을 그릇되었다고 여기는 자가 아니고, 나에게 자신을 잘 보이려는 자이다.
吾恐其以我求容也.」
나는 그가 나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할까 걱정스럽다.”
遂不入。
마침내 들어가지 않았다.
後車入門,文子問嗇夫之所在,執而殺之。
뒤에 오는 수레가 문에 진입하자, 중항문자가 색부가 있는 곳을 물어서 그를 잡아 죽였다.
仲尼聞之,曰:
「中行文子背道失義以亡其國,然後得之,猶活其身,道不可遺也,若此。」
孔子께서 아시고 말씀하였다.
“중항문자가 도덕을 위배하고 恩義를 상실하여 나라에서 도망친 뒤에 도리를 터득하여 오히려 자신의 몸을 살렸으니, 이처럼 도리를 버려서는 안 된다.”
23.
衛靈公襜被以與婦人遊,子貢見公。公曰:
「衛其亡乎?」
衛 靈公이 襜被를 입고 부인들과 놀고 있는데, 子貢이 영공을 알현하자 영공이 물었다.
“위나라가 망할까요?”
▶ 襜被 : 곧 襜褕로, 고대의 길이가 조금 긴 홑옷의 한 가지이다. 정식 朝服이 아닌 남녀가 공통으로 입는 평상복이다. 여기서는 동사로 쓰여 ‘입다’의 뜻이다. 《史記 魏其武安侯列傳》‧《漢書 雋不疑傳》
對曰:
「昔者夏桀,殷紂不任其過故亡;
成湯、文武知任其過故興,衛奚其亡也?」
자공이 대답하였다.
“예전에 夏桀과 殷紂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하였고,
成湯과 文王‧武王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興盛하였습니다.
위나라가 어찌 망하겠습니까?”
24.
智伯請地於魏宣子,宣子不與。
智伯이 魏宣子에게 땅을 나누어달라고 청하자, 宣子가 주지 않았다.
▶ 智伯請地於魏宣子 : 智伯은 본서 권3 〈建本〉 30 참고. 魏宣子는 본서 권10 〈敬愼〉 18 참고.
任增曰:
「何為不與?」
任增이 말하였다.
“무엇 때문에 주지 않으십니까?”
▶ 任增 : 전국시대 魏宣子의 家臣이다. 智謀가 있어서 魏宣子를 핍박하는 智伯을 망하게 하였다.
‘任增’은 주로 ‘任章’으로 쓴다. 《戰國策 魏策 1》
宣子曰:
「彼無故而請地,吾是以不與。」
위선자가 말하였다.
“저자가 아무 까닭 없이 땅을 나누어달라고 청하니, 내가 이 때문에 주지 않았다.”
任增曰:
「彼無故而請地者,無故而與之,是重欲無厭也。
彼喜,必又請地於諸侯,諸侯不與,必怒而伐之。」
임증이 말하였다.
“그가 아무 까닭 없이 땅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였으니, 아무 까닭 없이 땅을 주면, 이는 그의 만족함이 없는 탐욕을 가중시킵니다.
그는 기뻐하여 틀림없이 또 제후들에게 땅을 청할 터이고, 제후가 주지 않으면 틀림없이 노하여 공격할 터입니다.”
宣子曰:
「善。」
위선자가
“좋은 말이다.”
遂與地。
이어 지백에게 땅을 주었다.
智伯喜,又請地於趙,趙不與,智伯怒,圍晉陽。
지백이 기뻐하여 또다시 趙(襄子)에 땅을 나누어달라고 청하였으나 조가 주지 않으니, 지백이 노하여 晉陽을 포위하였다.
▶ 晉陽 : 본서 권3 〈建本〉 30 참고.
韓、魏合趙而反智氏,智氏遂滅。
韓과 위가 조와 연합하여 智氏를 배반하니, 지씨가 마침내 멸망하였다.
25.
楚莊王與晉戰,勝之,懼諸侯之畏己也,乃築為五仞之臺,臺成而觴諸侯,諸侯請約。
楚 莊王이 晉나라와 전쟁하여 승리하되, 제후들이 자기를 두려워할까 걱정하여 다섯 길 높이의 누대를 짓고, 누대가 완성되자 제후들에게 잔치를 열었는데, 제후들이 장왕에게 盟約을 주재하라고 청하였다.
莊王曰:
「我薄德之人也。」
장왕이 말하였다.
“나는 德이 적은 사람이오.”
諸侯請為觴。乃仰而曰:
「將將之臺,窅窅其謀.
我言而不當,諸侯伐之。」
제후들이 장왕에게 술을 권하자, 장왕이 고개를 젖혀 마시고는 말하였다.
“높고 장엄한 누대요, 깊고 원대한 智謀로다.
내 말이 합당치 않거든 제후들은 나를 토벌하시오.”
於是遠者來朝,近者入賓。
이에 먼 지방의 제후는 와서 朝見하고, 가까운 지방의 제후는 들어와 賓服하였다.
26.
吳王夫差破越,又將伐陳。楚大夫皆懼,曰:
「昔闔廬能用其眾,故破我於柏舉。
今聞夫差又甚焉。」
吳王 夫差가 越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또 陳나라를 공격하려 하니, 楚나라 大夫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말하였다.
“예전에 闔廬는 군대를 잘 운용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를 柏擧에서 패배시켰다.
그런데 듣자니, 그 아들 부차가 또한 그보다 심하다고 한다.”
▶ 柏擧 : 춘추시대 楚나라 땅으로, 지금의 湖北省 麻城縣에 있었다.
B.C.506년에 蔡나라를 포위한 초나라 군대가 채나라를 구원하러 온 吳나라 군대에게 대패한 곳이다. 《春秋左氏傳 定公 4년》‧《呂氏春秋 首時》
子西曰:
子西가 말하였다.
▶ 子西 : 춘추시대 楚나라 公子 申의 字이다.
平王의 庶長子로서 令尹 子常이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昭王을 세우고 영윤이 되었다. 뒤에 白公 勝의 난에 죽었다. 《春秋左氏傳 成公 6‧15‧17년, 襄公 2년, 哀公 6년》
「二三子,恤不相睦也,無患吳矣.
“그대들은 서로 화목하지 못함을 근심하되 吳나라를 걱정하지 마시오.
昔闔廬食不貳味,處不重席,擇不取費。
옛적에 합려는 밥을 먹음에 두 가지 반찬을 먹지 않고, 거처함에 자리를 겹으로 깔지 않았으며, 물건을 선택함에 재물을 허비하지 않았소.
▶ 擇不取費 : 《春秋左氏傳》 哀公 元年에 ‘衣服財用 擇不取費’라 하여 ‘衣服財用’의 네 글자가 더 있다.
在國,天有災,親巡乏困而供之;
在軍,食熟者半而後食, 其所嘗者,卒乘必與焉。
도성에 있음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친히 곤궁한 사람들을 巡視하여 부족한 물품을 공급하고,
軍中에 있음에 반수 이상의 병사들이 음식을 먹은 뒤에 먹었으며, 그가 맛본 음식을 병사들도 반드시 맛보게 하였소.
▶ 親巡乏困而供之 : 저본에는 ‘戚’으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 哀公 元年에 “親巡孤寡而共其乏困(친히 순행하면서 고아와 과부를 위무하고 그들에게 부족한 물품을 공급하였다.)”라고 함을 따라 ‘巡’으로 바로잡았다.
是以民不罷勞,死知不曠。
이 때문에 백성들이 피로하다고 여기지 않고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알았소.
今夫差,次有臺榭陂池焉;
宿有妃嬙嬪御焉。
그러나 부차는 3일 이상 머무는 곳에는 누대와 연못을 두고,
잠자리에는 妃嬪이 모시오.
一日之行,所欲必成,玩好必從,珍異是聚.
하루의 행차에도 원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고, 玩好品을 반드시 거느리고 진기한 물건을 모으고 있다고 하오.
夫差先自敗已,焉能敗我?」
부차는 먼저 자기를 패망시킬 뿐, 어찌 능히 우리를 패망시키겠소?”
27.
越破吳,請師於楚以伐晉。楚王與大夫皆懼,將許之。
越이 吳를 격파하고 楚에게 군대를 내어 晉나라를 토벌하자고 요청하니, 楚王과 大夫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허락하려고 하였다.
左史倚相曰:
左史 倚相이 말하였다.
▶ 左史倚相 : 楚 靈王 때의 史官으로, 倚相은 이름이다.
周代에 左史와 右史의 두 史官을 두었는데, 左史는 王에 관한 일을, 右史는 왕의 말을 기록하였다. 영왕은 좌사였던 의상을 《三墳》‧《五典》‧《八索》‧《九丘》의 古書를 읽었다고 칭찬하였다. 《春秋左氏傳 昭公 12년》‧《禮記 玉藻》‧《漢書 藝文志》
「此恐吾攻己,故示我不病。
“이것은 우리가 자기를 공격할까 걱정하여 우리에게 지치지 않았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請為長轂千乘,卒三萬,與分吳地也。」
長轂 1천 乘과 步兵 3만을 출동시켜 월나라와 오나라 땅을 나누어 가지자고 청하십시오.”
▶ 長轂 : 본서 권8 〈尊賢〉 14 참고.
莊王聽之,遂取東國。
楚 莊王이 그의 말을 따라 마침내 東國의 땅을 차지하였다.
▶ 莊王 : 《說苑校證》에 《史記》 〈楚世家〉의 “楚 惠王 44년에 越나라가 吳나라를 멸하였다.”라는 사실을 들어 ‘莊王’을 ‘惠王’이라고 하였다.
▶ 東國 : 楚나라의 동부 지역인 淮河 북쪽 지역을 말한다.
《韓非子》 〈說林 下〉에 “노산의 북쪽 500리 땅을 떼어 楚나라에 주었다.[乃割露山之陰五百里以賂之]”라고 하였는데, 노산은 長江과 淮河 사이에 있다.
또 《史記》 〈楚世家〉에는 “이때 월나라가 이미 오나라를 멸하였으나 장강과 회하 북쪽에서는 우두머리 노릇을 하지 못하자 초나라가 동쪽을 침략하여 사수 가까지 땅을 넓혔다.[是時越已滅吳 而不能正江淮北 楚東侵 廣地至泗上]”라고 하였다.
28.
陽虎為難於魯,走之齊,請師於魯,齊侯許之。
陽虎가 魯나라에서 난을 일으키고 齊나라로 달아나서 齊侯에게 노나라에 出兵하기를 청하니, 齊侯가 허락하려 하였다.
▶ 陽虎 : 본서 권6 〈復恩〉 22 참고.
鮑文子曰:
鮑文子가 말하였다.
▶ 鮑文子 : 춘추시대 齊나라 大夫 鮑國이다.
鮑叔牙의 증손으로 魯나라에 가서 施孝叔의 家臣이 되었는데, 그의 형 鮑牽이 참소를 받아 형벌을 받자, 齊人이 포국을 불러서 포씨의 후계자로 삼았다. 文子는 그의 시호이다. 《春秋左氏傳 成公 17년, 定公 9년》
「不可也。
“안 됩니다.
陽虎欲齊師破,齊師破,大臣必多死,於是欲奮其詐謀。
양호는 齊軍을 격파하려 하니, 齊軍을 깨뜨리면 大臣에 필시 죽는 자가 많을 터이매, 그때 그의 간사한 계책을 펼치려 합니다.
夫虎有寵於季氏而將殺季孫,以不利魯國而容其求焉。
저 양호는 季氏에게 총애를 입었으면서도 季孫을 죽이려 하다가, 노나라에서 不利하매 〈제나라에 와서〉 용납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 季氏 : 춘추시대 魯나라의 正卿 季孫氏이다. 여기서는 季平子(公孫意如)를 말한다.
魯 昭公이 군사를 일으켜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齊나라로 쫓겨났다.《春秋左氏傳 昭公 10‧11‧13년》
今君富於季氏而大於魯國,茲陽虎所欲傾覆也。
지금 임금께서는 계씨보다 부유하시고 제나라는 노나라보다 크니, 이것이 陽虎가 제나라를 傾覆시키려는 원인입니다.
魯免其疾,而君又收之,毋乃害乎?」
노나라는 양호의 재난[疾]에서 벗어났는데, 임금께서 도리어 그를 거두신다면 해로움이 없겠습니까?”
齊君乃執之,免而奔晉。
齊君이 곧 양호를 잡으려 하자, 면하고 晉나라로 달아났다.
29.
湯欲伐桀。伊尹曰:
「請阻乏貢職以觀其動。」
湯王이 夏桀을 치려고 하자, 伊尹이 말하였다.
“桀에게 바치는 貢物을 정지시켜서 그의 반응을 관찰하십시오.”
桀怒,起九夷之師以伐之。
걸이 노하여 九夷의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伊尹曰:
「未可。
彼尚猶能起九夷之師,是罪在我也。」
이윤이 말하였다.
“아직 안 되겠습니다.
저들이 아직도 구이의 군대를 일으킬 수 있으니, 잘못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湯乃謝罪請服,復入貢職。
탕왕이 곧 謝罪하고서 歸復하기를 청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明年,又不供貢職。桀怒,起九夷之師,九夷之師不起。
이듬해에 다시 공물을 바치지 않자, 걸이 노하여 구이의 군대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구이의 군대가 출병하지 않았다.
伊尹曰:
「可矣。」
이에 이윤이 말하였다.
“가능합니다.”
湯乃興師,伐而殘之。遷桀南巢氏焉。
탕왕이 이에 군대를 일으켜 걸을 토벌하여 夏나라를 殘滅시키고 桀을 南巢氏의 지역으로 放逐[遷]하였다.
30.
武王伐紂,過隧斬岸,過水折舟,過谷發梁,過山焚萊,示民無返志也。
武王이 殷紂를 토벌할 적에, 통로를 통과하면 언덕을 깎아 길을 메우고, 물을 통과하면 배를 부수고, 골짜기를 통과하면 다리를 제거하고, 산을 통과하면 萊草를 불태워 없앰으로써, 백성에게 승리하지 않으면 돌아올 뜻이 없음을 보였다.
▶ 萊 : 藜藿 등속의 풀이름으로, 연한 잎은 먹을 수 있다.
▶ 發: 通“撥( bō)”。除去;錯亂 [cast away;clean;mix up]
居幹之道,菑慄不迤,則弓不發。——《周禮·考工記·弓人》
至於有戎之隧,大風折旆。散宜生諫曰:
「此其妖歟?」
有戎 지역의 통로에 당도했을 때 大風이 불어 旗幟를 부러뜨리니, 散宜生이 諫하였다.
“이것이 아마 상서롭지 못한 징조일 듯합니다.”
▶ 有戎 : 山東省 濟寧市에 있었던 나라 이름이다.
有窮의 侯 澆가 夏의 帝相을 멸망시키자, 제상의 妃 后緡이 임신한 채 친정인 유융으로 도망쳐 少康을 낳았다. 有仍이라고도 한다. 《春秋左氏傳 哀公 元年》‧《竹書紀年 上》
▶ 散宜生 : 武王을 도와 殷紂를 멸한 十亂(열 명의 잘 다스리는 신하) 중의 한 사람이다.
文王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소문을 듣고 閎夭 등과 함께 귀의하여 문왕의 벗이 된 네 사람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書經 周書 君奭》‧《孟子 盡心 下》
武王曰:
「非也。
天落兵也。」
무왕이 말하였다.
“아니오.
하늘이 군대를 내려주는 것이오.”
風霽而乘以大雨,水平地而嗇。
散宜生又諫曰:
「此其妖歟?」
바람이 멎고 이어서 큰비가 내려 물이 땅에 범람하여 길이 막히니, 산의생이 또 간하였다.
“이는 아마 상서롭지 못한 징조일 듯합니다.”
武王曰:
「非也.
天灑兵也。」
무왕이 말하였다.
“아니오.
하늘이 병기를 씻어주는 것이오.”
卜而龜熸。散宜生又諫曰:
「此其妖歟?」
점을 치려고 거북 등딱지를 불에 지지는데 불이 꺼지자, 산의생이 또 간하였다.
“이는 아마 상서롭지 못한 징조일 듯합니다.”
武王曰:
「不利以禱祠,利以擊眾,是熸之已。」
무왕이 말하였다.
“제사하여 기도하는 일은 不利하고, 적의 군대를 공격하는 일은 이로우니, 이것이 불이 꺼진 뜻이오.”
故武王順天地,犯三妖而禽紂於牧野,其所獨見者精也。
그러므로 무왕이 천지의 뜻에 순응하고 세 가지 상서롭지 못한 징조를 범하면서 牧野에서 殷紂를 사로잡았으니, 그만의 독특한 견해가 精深하다.
▶ 牧野 : 지금의 河南省 淇縣 서남쪽에 있던 옛 땅 이름이다. 周 武王이 殷紂를 크게 패배시킨 곳이다. 《書經 周書 牧誓》‧《後漢書 郡國志 1》
31.
晉文公與荊人戰於城濮,君問於咎犯。咎犯對曰:
「服義之君,不足於信;
服戰之君,不足於詐,君其詐之而已矣。」
晉 文公이 荊(楚)나라 군주와 城濮에서 전쟁할 적에 문공이 咎犯에게 계책을 묻자, 구범이 대답하였다.
“正義를 마음에 두고 있는 임금은 信義 대비에 부족하고,
전쟁을 마음에 두고 있는 임금은 詐術 대비에 부족하니, 임금께서는 아마 사술을 쓰면 그만입니다.”
▶ 晉文公與荊人戰於城濮 : 晉 文公이 楚나라 사람과 싸워 크게 이긴 城濮의 전쟁을 말한다. 진 문공은 본서 권1 〈君道〉 22 참고.
荊人은 楚나라 사람이니, 楚王을 말한다. 城濮은 춘추시대 衛나라 땅으로, 지금의 山東省 鄄城縣의 서남쪽 臨濮鄕이다.
▶ 咎犯 : 본서 권6 〈復恩〉 03 참고.
▶ 〈君其〉 : 저본에는 ‘君其’ 두 글자가 없으나, 《群書拾補》와 《說苑校證》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君問於雍季,雍季對曰:
문공이 雍季에게 계책을 묻자, 옹계가 대답하였다.
▶ 雍季 : 晉 文公의 아들 公子 雍이다. 《春秋左氏傳 文公 6년》
「焚林而田,得獸雖多,而明年無復也;
乾澤而漁,得魚雖多,而明年無復也。
詐猶可以偷利,而後無報。」
“숲에 불을 질러 사냥하면 잡는 짐승이 비록 많으나, 다음 해에는 다시 잡을 수 없고,
연못의 물을 말려 물고기를 잡으면 잡는 물고기가 비록 많으나, 다음 해에는 다시 잡을 수 없습니다.
欺詐로도 구차한 이득을 챙기겠으나, 뒤에는 좋은 보답이 없을 터입니다.”
遂與荊軍戰,大敗之。
이리하여 초나라 군대와 교전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及賞,先雍季而後咎犯。侍者曰:
「城濮之戰,咎犯之謀也!」
行賞함에 문공이 옹계를 앞에 두고 구범은 뒤에 두니, 侍者가 말하였다.
“성복의 전쟁은 구범의 계책이었습니다.”
君曰:
「雍季之言,百世之謀也;
咎犯之言,一時之權也,寡人既行之矣。」
임금이 말하였다.
“옹계의 말은 百世를 위한 계책이고,
구범의 말은 한때 임시방편이라서, 寡人이 이미 그렇게 행상하였다.”
32.
城濮之戰,文公謂咎犯曰:
城濮의 전쟁에 晉 文公이 咎犯에게 말하였다.
「吾卜戰而龜熸。
“내가 전쟁의 길흉을 점쳤는데 거북 등딱지를 지지는 불이 꺼졌소.
,
我迎歲,彼背歲。
우리는 歲星(木星)을 마주하고 있는데 적군은 세성을 등지고 있소.
▶ 我迎歲 彼背歲 : 우리 군대는 歲星(木星)을 향하고 있고, 敵의 군대는 세성을 등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두 군대가 있는 地理의 위치로 말한 것이다.
彗星見,彼操其柄,我操其標。
彗星이 나타남에 적군은 그 자루 부분을 잡고 우리는 그 끝부분을 잡았소.
▶ 彗星見……我操其標 : 적의 군대는 혜성의 자루 부분을, 우리 군대는 혜성의 끝을 잡고 있다는 말이다. 이 구절도 두 군대가 있는 지리의 위치로 말한 것이다.
吾又夢與荊王搏,彼在上,我在下.
내가 또 꿈속에서 荊王(楚王)과 치고 박고 싸울 적에 초왕은 위에 있고 나는 아래에 있었소.
吾欲無戰,子以為何如?」
나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咎犯對曰:
구범이 대답하였다.
「卜戰龜熸,是荊人也。
“전쟁의 길흉을 점치는데 거북 등딱지를 지지는 불이 꺼진 것은 바로 초나라 사람이 실패함입니다.
我迎歲,彼背歲,彼去我從之也。
우리는 歲星을 마주하고 있는데 적군은 세성을 등지고 있음은 달아나는 적군을 우리가 추격함입니다.
彗星見,彼操其柄,我操其標,以掃則彼利,以擊則我利。
彗星이 나타나자 적군은 그 자루 부분을 잡고 우리는 그 끝부분을 잡음은 땅을 쓸기에는 적군이 유리하고 공격함에는 우리가 유리한 것입니다.
君夢與荊王搏,彼在上,君在下,則君見天而荊王伏其罪也。
임금께서 꿈에 형왕과 치고 박고 싸울 때 형왕은 위에 있고 임금께서 아래에 있음은 임금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형왕은 머리를 숙여 자기의 죄를 인정함입니다.
▶ 見 : 《春秋左氏傳》 僖公 28년에는 ‘得’으로 되어 있다.
且吾以宋衛為主,齊秦輔我,我合天道.
더구나 우리는 宋나라와 衛나라를 主力으로 삼고 齊나라와 秦나라가 우리를 돕고 있으니, 우리는 天道에 부합합니다.
獨以人事固將勝之矣。」
人事만으로도 우리가 승리할 터입니다.”
文公從之,荊人大敗。
문공이 구범의 말을 따르자, 형나라 군주가 크게 패배하였다.
33.
越饑,句踐懼。四水進諫曰:
「夫饑,越之福也,而吳之禍也。
夫吳國甚富而財有餘,其君好名而不思後患。
若我卑辭重幣以請糴於吳,吳必與我,與我則吳可取也。」
越나라에 饑饉이 들어 句踐이 걱정하니, 四水가 諫言을 올렸다.
“饑饉은 越나라의 복이고 吳나라의 재앙입니다.
오나라는 매우 부유하여 재물이 넉넉하고 그 임금은 虛名을 좋아하여 後患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겸손한 말과 많은 예물로 오나라에 양식을 팔라고 청하면 오나라는 틀림없이 우리에게 줄 터이니, 우리에게 양식을 주면 오나라를 취할 수 있습니다.”
▶ 四水 : 춘추시대 越王 句踐의 신하이다. 《呂氏春秋》 〈長攻〉에는 ‘范蠡’로 되어 있다.
越王從之。
越王이 그 말을 따랐다.
吳將與之,子胥諫曰:
오나라가 양식을 주려고 하자, 伍子胥가 諫하였다.
「不可。
“안 됩니다.
夫吳越接地鄰境,道易通,仇讎敵戰之國也。
오나라와 월나라는 땅이 연접하고 국경을 이웃하여 도로가 쉽게 통하고 원수 관계로 敵이 되어 交戰하는 나라입니다.
非吳有越,越必有吳矣,夫齊晉不能越三江五湖以亡吳越.
오나라가 월나라를 점유하지 않으면 월나라가 반드시 오나라를 점유할 뿐, 齊나라와 晉나라는 三江과 五湖를 넘어와서 오나라나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합니다.
▶ 三江五湖 : 三江은 吳越 지역을 흐르는 세 강인데, 이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① 韋昭의 吳江‧錢塘江‧浦陽江이라는 설, ②郭璞의 岷江‧松江‧浙江이라는 설, ③ 陸德明의 松江‧婁江‧東江이라는 설, ④ 顔師古의 北江‧中江‧南江이라는 설 등이다.
五湖는 오월 지역에 있는 호수를 말하는데, 이에 대한 여러 설이 있다.
① 太湖의 별명이라는 설, ② 太湖와 그 주변의 胥湖‧蠡湖‧洮湖‧滆湖를 합하여 五湖라는 설, ③ 太湖 부근의 다섯 호수라는 설 등이다.
不如因而攻之,是吾先王闔廬之所以霸也。
이 기회를 틈타 공격함이 나으니, 이것이 우리 先王 闔廬께서 霸業을 이룬 방법입니다.
且夫饑何哉?亦猶淵也.
게다가 흉년이란 무엇입니까? 역시 한량이 없는 깊은 연못과 같습니다.
敗伐之事,誰國無有?
정벌하되 실패하는 일이 어느 나라에 없겠습니까?
君若不攻而輸之糴,則利去而凶至,財匱而民怨,悔無及也。」
임금께서 공격하지 않고 양식을 팔아 보내주시면, 유리함은 가고 흉함이 도래하고 재물이 결핍되어 백성들이 원망할 터이니 뉘우쳐도 미치지 못할 터입니다.”
吳王曰:
「吾聞義兵不攻服, 仁人食饑餓,今服而攻之, 雖得十越,吾不為也。」
오왕이 말하였다.
“내 들으니, 義兵은 복종한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 仁人은 굶주린 사람을 먹여준다고 하매, 복종하는데도 그를 공격하여 비록 열 개의 월나라를 얻더라도 나는 하지 않겠소.”
▶ 不攻服 : 저본에는 ‘攻’자가 없으나, 元本과 《呂氏春秋》 〈長攻〉에 의거하여 보충한 《群書拾補》와 《說苑校證》을 따라 보충하였다.
▶ 食饑餓 今服而攻之 : 저본에는 ‘不以餓饑而攻之’로 되어 있으나, 《呂氏春秋》에 의거하여 ‘食饑餓 今服而攻之’로 바로잡았다.
遂與糴,三年,吳亦饑,請糴於越,越王不與而攻之,遂破吳。
그러고는 양식을 팔더니, 3년이 지나 오나라도 흉년이 들어 월나라에 양식을 팔라고 청하였으나, 월왕은 양식을 주지 않고 공격하여 마침내 오나라를 격파하였다.
34.
趙簡子使成何、涉他與衛靈公盟於鄟澤。
趙簡子가 成何와 涉他를 보내 衛 靈公과 剸澤에서 맹약하게 하였다.
▶ 成何涉他 : 成何와 涉他는 모두 춘추시대 晉나라 대부이다. 《春秋左氏傳》 定公 8년에는 涉佗‧成何로 되어 있다.
▶ 剸澤 : 춘추시대 衛나라의 땅 이름이다. ‘鄟澤’으로도 쓴다.
靈公未喋盟。成何、涉他捘靈公之手而撙之,靈公怒,欲反趙。
靈公이 피를 마셔 맹약하지 않으매, 성하와 섭타가 영공의 손을 밀치고 내리누르자 영공이 노하여 趙氏를 배반하려고 하였다.
▶ 撙 : 저본에는 ‘樽’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와 《說苑校證》에 의거하여 ‘撙’으로 바로잡았다.
王孫商曰:
「君欲反趙,不如與百姓同惡之。」
王孫商이 말하였다.
“임금께서 조씨를 배반하려고 하시면 백성과 함께 조씨를 미워함이 낫습니다.”
▶ 王孫商 : 춘추시대 衛나라 大夫이다. 《春秋左氏傳》에는 ‘商’이 ‘賈’로 되어 있는데 ‘商’은 字인 듯하다.
公曰:
「若何?」
영공이 말하였다.
“어떻게 하면 되겠소?”
對曰:
「請命臣令於國曰:
『有姑姊妹女者家一人,質於趙。』
百姓必怨,君因反之矣。」
공손상이 대답하였다.
“臣에게 명하여 나라에 명령하기를 ‘고모‧누이‧누이동생‧딸이 있으면 집집마다 한 사람을 조씨에게 인질로 보내겠다.’라고 하십시오.
백성이 틀림없이 조씨를 원망할 터이니, 임금께서 그 틈을 타서 배반하십시오.”
君曰:
「善。」
영공이 맣라였다.
“좋소.”
乃令之三日,遂徵之五日,而令畢國人巷哭。
이에 명령하고 3일이 지나자, 인질을 徵集하기를 5일 만에 마치게 하여, 國人들이 거리에서 통곡하게 하였다.
君乃召國大夫而謀曰:
「趙為無道,反之可乎?」
영공이 곧 국내의 大夫들을 소집하고 의논하였다.
“조씨가 무도한 짓을 하니, 배반해도 되겠소?”
大夫皆曰:
「可。」
대부들이 모두 말하였다.
“배반해도 됩니다.”
乃出西門,閉東門.
이에 西門으로만 출입하고 晉나라와 통하는 東門을 폐쇄하였다.
越王聞之,縛涉他而斬之,以謝於衛,成何走燕。
조왕이 듣고 섭타를 결박해 죽여서 위나라에 사과하자, 성하는 燕나라로 달아났다.
子貢曰:
「王孫商可謂善謀矣。
憎人而能害之;
有患而能處之;
欲用民而能附之;
一舉而三物俱至,
可謂善謀矣。」
子貢이 말하였다.
“왕손상은 계책을 잘 쓴다고 이를 만하다.
사람을 미워하여 살해하고,
환난이 있을 적에 잘 처리하며,
백성을 이용하고자 하면서도 歸附하게 하고,
한 번의 일로 세 가지 일을 모두 이루었으니,
계책을 잘 쓴다고 이를 만하다.”
35.
楚成王贊諸屬諸侯,使魯君為僕,魯君致大夫而謀曰:
「我雖小,亦周之建國也。
今成王以我為僕,可乎?」
楚 成王이 예속된 제후들을 소집하고 魯君을 마부로 삼으려 하자, 노군이 大夫들을 불러 의논하였다.
“우리나라가 작지만 그래도 周나라가 세워준 나라이다.
지금 초 성왕이 나를 마부로 삼으려 하니, 되겠는가?”
大夫皆曰:
「不可。」
대부들이 모두 말하였다.
“안 됩니다.”
公儀休曰:
「不可不聽楚王,身死國亡.
君之臣乃君之有也;
為民,君也!」
公儀休가 말하였다.
“楚王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따르지 않으면〉 몸은 죽고 나라는 멸망할 터입니다.
임금의 신하는 곧 임금의 소유이고, 백성을 위하여 군림합니다.”
魯君遂為僕。
노군이 이에 마부가 되어 수레를 몰았다.
36.
齊景公以其子妻闔廬,送諸郊。泣曰:
「余死不汝見矣。」
齊 景公이 딸을 闔廬에게 시집보내면서 교외에 나가 전송함에 울면서 말하였다.
“내가 죽을 때까지 너를 보지 못하겠구나.”
▶ 不汝見 : ‘不見汝’의 倒置이다.
高夢子曰:
「齊負海而縣山,縱不能全收天下,誰干我君?
愛則勿行!」
高夢子가 말하였다.
“齊나라는 바다를 등지고 산에 걸쳐 있으니, 천하를 완전히 점유하지는 못하더라도 누가 우리 임금을 범하겠습니까?
딸을 사랑하신다면 보내지 마십시오.”
▶ 高夢子 : 사람 이름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 負海而縣山 : 바다가 뒤에 있고 산이 높게 솟아 있다는 말이다. ‘縣’은 ‘懸’과 통용이다.
公曰:
경공이 말하였다.
「余有齊國之固,不能以令諸侯,又不能聽,是生亂也。
寡人聞之,不能令則莫若從.
且夫吳若蜂蠆然,不棄毒於人則不靜,余恐棄毒於我也。」
“내가 險固한 제나라를 소유하고 있으나 제후를 호령하지 못하면서, 명령을 따르지 않음은 난을 일으키는 것이다.
寡人이 들으니, 남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하면 남의 명령을 따름이 낫다고 한다.
게다가 吳나라는 벌이나 전갈과 같아서 남에게 독을 쏘지 않고는 그치지 않을 터이니, 나는 나에게 독을 쏠까 걱정된다.”
遂遣之。
그러고는 마침내 딸을 보냈다.
37.
齊欲妻鄭太子忽,太子忽辭,人問其故,太子曰:
「人各有偶,齊大,非吾偶也。
《詩》云:
『自求多福。』
在我而已矣。」
齊侯가 鄭나라 太子 忽을 사위 삼으려 하니, 태자 홀이 사양하매 누군가 그 까닭을 묻자, 태자가 말하였다.
“사람은 각기 자기에게 맞는 짝이 있으나, 제나라는 强大하니 나의 짝이 아니다.
《詩經》에 이르기를, ‘스스로 복이 많기를 구한다.’라고 하니, 나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後戎伐齊,齊請師于鄭。
훗날, 北戎이 齊나라를 침공하니, 齊나라가 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鄭太子忽率師而救齊,大敗戎師,齊又欲妻之。
정나라 태자 홀이 군대를 이끌고 齊나라를 구원하여 北戎의 군대를 패배시키자, 齊侯가 또 정나라 태자 홀을 사위 삼으려 하였다.
太子固辭,人問其故。對曰:
「無事於齊,吾猶不敢。
今以君命救齊之急,受室以歸,人其以我為師婚乎?」
태자가 완강히 사양하여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으매, 태자가 대답하였다.
“齊나라에 사고가 없을 적에도 내가 감히 장가들지 못하였다.
그런데 君命으로 齊의 위급을 구원하면서 아내를 맞아 귀국한다면 사람들은 내가 전쟁을 틈타 혼인했다고 여길 터이다.”
終辭之。
끝내 사양하였다.
38
孔子問漆雕馬人曰:
「子事臧文仲、武仲、孺子容,三大夫者,孰為賢?」
孔子께서 漆雕馬人에게 물으셨다.
“그대가 臧文仲‧臧武仲‧孺子容을 섬겼는데, 세 大夫 중에 누가 현명한가?”
▶ 漆雕馬人 : 漆雕는 複姓으로, 孔子 제자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 漆雕의 姓을 가진 사람이 모두 셋인데, 漆雕開‧漆雕哆‧漆雕徒父(《孔子家語》 〈弟子解〉에는 漆雕從)가 그들이다. 이 중 칠조개가 대표적인데, 漆雕馬人은 칠조개와 같은 때의 집안사람인 듯하다. 《孔子家語》 〈好生〉에는 漆雕憑이란 사람도 있다.
▶ 臧文仲武仲孺子容 : 臧文仲은 춘추시대 魯나라의 正卿 臧孫辰이니, 文仲은 字이다.
臧孫達의 손자인데, 孔子는 그를 ‘三不仁’‧‘三不知’라 평하였다. 《春秋左氏傳 莊公11년, 僖公 20‧24‧31년, 文公 2년》
武仲은 춘추시대 魯나라 大夫 臧孫紇의 字이다. 臧孫許의 아들로, 벼슬은 司寇인데, 執政인 季武子의 정사를 자주 비판하다가 뒤에 계무자의 공격을 받아 齊나라로 망명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 18년‧襄公 14년》
孺者容은 武仲의 後代인 듯한데, 행적은 미상이다.
漆雕馬人對曰:
칠조마인이 대답하였다.
「臧氏家有龜焉,名曰蔡;
文仲立三年為一兆焉;
武仲立三年為二兆焉;
孺子容立三年為三兆焉,馬人立之矣。
“藏氏 집안에 거북이 있어 蔡라고 부르는데,
장문중이 執政한 지 3년 동안에 〈이 거북으로〉 한 번 점을 쳤고,
장무중은 집정한 지 3년 동안에 두 번 점을 쳤으며,
유자용은 집정한 지 3년 동안에 세 번 점을 쳤으니, 제가 직접 본 일입니다.
▶ 蔡 : 占卜에 사용하는 큰 거북이다.
《春秋左氏傳 襄公 23년》‧《論語 公冶長》
若夫三大夫之賢不賢,馬人不識也。」
세 대부의 현명함이라면 제가 알지 못합니다.”
孔子曰:
공자께서 말씀하였다.
「君子哉!漆雕氏之子.
“君子로구나, 칠조씨의 아들이여!
其言人之美也,隱而顯;
其言人之過也,微而著。
그가 남의 아름다움을 말함에 숨기되 환히 드러나고,
그가 남의 잘못을 말함이 隱微하지만 밝게 드러난다.
故智不能及,明不能見,得無數卜乎?」
그러므로 지혜가 미치지 못하고, 총명으로 예견하지 못하면 자주 점을 치지 않겠는가?”
39.
安陵纏以顏色美壯,得幸於楚共王。
安陵纏은 안색이 아름답고 신체가 건장하여 楚 共王에게 사랑을 받았다.
▶ 安陵纏 : 곧 安陵君이다. 容貌가 아름답고 신체가 건강하여 楚 共王이 좋아하던 男寵이다.
안릉은 地名으로, 지금의 河南省 郾城縣 동남쪽에 있는데 바로 安陵纏의 封邑이다. 《戰國策 楚策 1》
▶ 楚共王 : 춘추시대 楚나라 임금이다. 그러나 年代를 고찰하면 共王은 당연히 전국시대의 宣王이 되어야 한다. 이는 《戰國策》 〈楚策 1〉에 楚 宣王과 江乙이 問對한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共王은 강을보다 200년 전의 인물이기 때문에 宣王이 되어야 한다. 선왕은 楚 肅王의 아우로 이름은 熊良夫인데, 숙왕에게 아들이 없자 웅량부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說苑校證》
江乙往見安陵纏,曰:
「子之先人豈有矢石之功於王乎?」
江乙이 안릉전을 찾아가 만나서 말하였다.
“그대의 先人이 혹 왕에게 矢石을 무릅쓴 戰功이 있었소?”
▶ 江乙 : 전국시대 楚 宣王 때의 大夫이다. 본래 魏나라 사람으로, 초나라에서 벼슬하였다.
일명 江一, 또는 江尹이라고도 한다. 《戰國策 楚策 1》‧《渚宮舊事 3》
▶ 矢石之功 : 矢는 화살, 石은 던져서 적군을 공격하는 큰 돌인데, 모두 城을 지키는 무기이기 때문에 城을 방어하여 지킨 공을 말한다. 《史記 晉世家》‧《抱朴子 逸民》
曰:
「無有。」
안릉전이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江乙曰:
「子之身豈亦有乎?」
江乙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대에게 혹 그런 공이 있소?“
曰:
「無有。」
안릉전이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江乙曰:
「子之貴何以至於此乎?」
강을이 말하였다.
“그대의 존귀함이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 이르렀소?”
曰:
「僕不知所以。」
안릉전이 대답하였다.
“저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합니다.”
江乙曰:
「吾聞之,以財事人者,財盡而交疏;
以色事人者,華落而愛衰。
今子之華,有時而落,子何以長幸無解於王乎?」
강을이 말하였다.
“내 들으니, 재물로써 남을 섬기는 자는 재물이 떨어지면 交情이 성글어지고, 美色으로 남을 섬기는 자는 화려한 얼굴색이 시들면 사랑이 쇠퇴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대의 화려한 안색도 때가 되면 시들 텐데, 그대는 무엇으로 초왕에게서 장구한 사랑이 식지 않게 하겠소?”
安陵纏曰:
「臣年少愚陋,願委智於先生。」
안릉전이 대답하였다.
“저는 나이가 어리고 어리석으니, 선생의 지혜에 맡기겠습니다.”
江乙曰:
「獨從為殉可耳。」
강을이 말하였다.
“단지 초왕을 따라 죽겠다고 표명함이 좋을 뿐이오.”
安陵纏曰:
「敬聞命矣!」
안릉전이 말하였다.
“삼가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江乙去。
강을이 떠났다.
居朞年,逢安陵纏,謂曰:
「前日所諭子者,通於王乎?」
1년이 지나 강을이 안릉전을 만나 말하였다.
“지난날 그대에게 타이른 말을 왕에게 알렸소?”
曰:
「未可也。」
안릉전이 말하였다.
“미처 하지 못하였습니다.”
居朞年。江乙復見安陵纏曰:
「子豈諭王乎?」
1년이 지나 강을이 다시 안릉전을 만나 말하였다.
“그대는 혹 왕에게 말씀드렸소?”
安陵纏曰:
「臣未得王之間也。」
안릉전이 말하였다.
“왕의 한가한 틈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江乙曰:
「子出與王同車,入與王同坐。居三年,言未得王之間,子以吾之說未可耳。」
강을이 말하였다.
“그대가 외출할 적에는 왕과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와서는 왕과 함께 자리하는데, 3년이 지나도록 왕의 한가한 시간을 얻지 못했다고 말하니, 그대가 나의 설득을 옳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오.”
不悅而去。
기분이 나빠 떠나버렸다.
其年,共王獵江渚之野,野火之起若雲蜺,虎狼之嗥若雷霆。
그해에 공왕이 강가의 들판에서 사냥함에, 들불이 일어남이 무지개 같고, 호랑이와 이리의 울부짖음이 우레 같았다.
▶ 雲蜺 : 무지개를 뜻한다. 蜺는 霓와 같다.
有狂兕從南方來,正觸王左驂,王舉旌旄,而使善射者射之,一發,兕死車下.
그때 미쳐 날뛰는 외뿔소가 남쪽에서 달려와서 왕의 左驂을 들이받으려 할 때, 왕이 깃발을 들어 활 잘 쏘는 사람에게 쏘게 하니, 한발에 코뿔소가 수레 아래에서 죽었다.
▶ 左驂 : 古代 수레를 끄는 세 마리의 말 중 좌측의 말을 말한다. 후대에는 네 마리의 말을 사용했는데 이 경우에도 네 마리의 말 중 좌측의 말을 가리킨다. 《儀禮 覲禮》‧《春秋左氏傳 僖公 33년》
王大喜,拊手而笑,顧謂安陵纏曰:
「吾萬歲之後,子將誰與斯樂乎?」
왕이 크게 기뻐하여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안릉전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내가 죽고 난 뒤에 그대는 이 즐거움을 누구와 함께하겠느냐?”
安陵纏乃逡巡而卻,泣下沾衿,抱王曰:
「萬歲之後,臣將從為殉,安知樂此者誰?」
안릉전이 머뭇거리며 물러나고,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면서 왕을 안고 말하였다.
“대왕이 돌아가신 뒤에 臣은 대왕을 따라 죽을 텐데, 이것을 즐길 자가 누구일지 어찌 알겠습니까?”
於是共王乃封安陵纏於車下三百戶。
이에 공왕이 곧 수레 앞에서 안릉전에게 300戶를 封하였다.
故曰:
「江乙善謀,安陵纏知時。」
그러므로 말하였다.
“강을은 계책을 잘 세우고, 안릉전은 시기를 안다.”
40.
太子商臣怨令尹子上也。
太子 商臣이 令尹 子上을 원망하였다.
▶ 商臣怨令尹子上 : 商臣은 춘추시대 楚 成王의 아들 穆王이다. 太子가 되었을 때 廢位될까 두려워 宮中 守衛兵을 거느리고 성왕을 포위하고, 아버지를 핍박하여 자살하게 한 뒤에 스스로 즉위하였다. 令尹은 당시 초나라의 최고 관직으로, 軍政大權을 장악하였다. 子上은 초 성왕 때의 영윤으로, 이름은 鬪勃이다. 성왕이 상신을 태자로 삼으려 할 때 이를 저지한 일로 상신에게 원한을 샀다가 뒤에 晉나라와의 전투에서 뇌물을 받고 패배하였다는 상신의 무고로 살해되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33년‧文公 元年》
楚攻陳,晉救之。夾泜水而軍。
楚나라가 陳나라를 공격하자 晉나라가 陳나라를 구원하여 兩軍이 泜水를 사이에 두고 주둔하였다.
▶ 泜水 : 古代의 강 이름이다. 곧 滍水로, 지금의 이름은 沙河이다. 河南省 魯山縣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葉縣을 지나 북쪽의 汝河로 흘러든다. 《春秋左氏傳 僖公 33년》
陽處父知商臣之怨子上也,因謂子上曰:
「少卻,吾涉而從子。」
陽處父가 상신이 자상을 원망함을 알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상에게 말하였다.
“조금 후퇴하면 나는 저수를 건너 그대를 따라 交戰하겠다.”
▶ 陽處父(보) : 춘추시대 晉나라 太傅이다. 襄公 때 蔡나라를 정벌하고, 江나라가 楚나라에 포위당했을 때 이를 구원하였다. 양공이 죽은 뒤 양처보에 의해 中軍帥에서 中軍佐로 강등당하여 원한을 품은 賈季의 사주를 받은 續鞫居에게 암살당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 6년》‧《國語 晉語 5》
子上卻。因令晉軍曰:
「楚遁矣。」
자상이 후퇴하자, 양처보가 晉나라 군대에 명령하여 말하였다.
“초나라 군대가 달아났다.”
使人告商臣曰:
「子上受晉賂而去之。」
사람을 보내 상신에게 말하였다.
“자상이 晉나라의 뇌물을 받아먹고 물러갔다.”
商臣訴之成王,成王遂殺之。
상신이 楚 成王에게 보고하니, 성왕은 마침내 자상을 죽였다.
41.
智伯欲襲衛,故遺之乘馬,先之一璧,衛君大悅,酌酒,諸大夫皆喜。南文子獨不喜,有憂色。
智伯이 衛나라를 습격하려 하매, 衛君에게 乘馬를 보내면서 먼저 碧玉 한 개를 보내니, 위군이 크게 기뻐하여 술자리를 열자 大夫들이 모두 기뻐하는데, 南文子만 홀로 기뻐하지 아니하고 근심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 智伯 : 본서 권3 〈建本〉 30 참고.
▶ 南文子 : 전국시대 衛나라 大夫 甯文子이다. 본서 권6 〈復恩〉 20 참고.
衛君曰:
「大國禮寡人,寡人故酌諸大夫酒,諸大夫皆喜,而子獨不喜,有憂色者,何也?」
위군이 말하였다.
“大國이 寡人을 예우하매 과인이 대부들에게 술잔치를 베풀어서 대부들이 모두 기뻐하는데, 그대만 기뻐하지 않고 근심스러운 기색이 있음은 무엇 때문이오?”
南文子曰:
「無方之禮,無功之賞,禍之先也。
我未有往,彼有以來,是以憂也。」
남문자가 말하였다.
“도리에 맞지 않는 예물과 공로도 없이 받는 賞은, 재앙이 일어날 조짐입니다.
우리가 저들에게 예물을 보낸 일이 없는데 저들이 우리에게 예물을 보내왔으니, 이 때문에 근심합니다.”
▶ 無方之禮 : 정당하지 않은 예물을 이른다. 《戰國策》 〈衛策〉에는 ‘無力之禮’로 되어 있으니, 곧 노력하지 않고 받는 예물이다.
於是衛君乃修梁津而擬邊城。智伯聞衛兵在境上,乃還。
이에 위군이 곧 橋梁과 나루를 修築하고 변방의 성곽을 점검하니, 지백이 위나라 군대가 국경에 있음을 알고 돌아갔다.
▶ 擬邊城 : 변경의 성곽을 修築할 준비를 하는 것으로, 擬는 준비하다의 뜻이다.
42.
智伯欲襲衛,乃佯亡其太子顏,使奔衛。
智伯이 衛나라를 습격하려고 그의 맏아들 顔을 거짓으로 망명하여 위나라로 달아나게 하였다.
▶ 太子顔 : 춘추시대 智伯의 장남이다. 顔은 이름이다.
南文子曰:
「太子顏之為其君子也,甚愛。
非有大罪也,而亡之?必有故!
然人亡而不受不祥。」
南文子가 말하였다.
“太子 顔은 군주의 아들로서 심히 사랑하는 자이다.
큰 죄를 짓지 않았는데 망명한다고? 틀림없이 까닭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남이 망명하는데 받아주지 않음은 吉하지 못하다.”
使吏逆之,曰:
「車過五乘,慎勿內也。」
관리를 보내 맞이하게 하고 분부하였다.
“그의 수레가 다섯 채가 넘거든 모쪼록 받아들이지 말라.”
智伯聞之,乃止。
지백이 듣고 이내 그 계획을 중지하였다.
43.
叔向之殺萇弘也,數見萇弘於周。
因佯遺書曰:
「萇弘謂叔向曰:
『子起晉國之兵以攻周,吾廢劉氏而立單氏。』」
叔向이 萇弘을 죽이려고 함에 수차 周나라에 가서 장홍을 만났는데, 이 틈에 편지를 유실한 듯이 가장하였는데, 그 편지에 일렀다.
“장홍이 숙향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晉나라의 군대를 출동시켜 주나라를 공격하면 나는 劉氏를 폐하고 單氏를 세우겠다.’라고 하였다.”
▶ 叔向之殺萇弘 : 叔向은 춘추시대 晉나라 大夫 羊舌肸의 字이다. 본서 권5 〈貴德〉 15 참고.
萇弘은 춘추시대 周 敬王 때 晉나라 劉文公의 大夫이다. 字가 叔이기 때문에 萇叔이라고도 한다. 博學하고 음악에 밝아 孔子께서 周나라에 갔을 때 음악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한다. 晉 六卿의 內訌 중에 范氏와 中行氏를 방조한 죄로 周나라 사람에게 살해당하였는데, 그때 흘린 피가 3년 뒤에 푸른 옥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일설에는 趙簡子가 叔向을 파견하여 周王에게 反間計를 써서 살해하였다 한다. 《春秋左氏傳 哀公 3년》‧《莊子 外物》
▶ 廢劉氏而立單(선)氏 : 劉氏는 당시 周나라 王室의 執政 卿士인 劉文公으로, 이름은 狄‧卷‧蚠(伯蚠) 등 여럿이다. 單氏는 周나라 王室의 卿士인 單穆公으로, 이름은 旗이다. 《春秋左氏傳 昭公 22‧23‧24‧26‧32년, 定公 4년》‧《國語 周語 下》
劉氏請之君 曰:
「此萇弘也。」
유씨가 周王에게 뵈기를 청하여 말하였다.
“이는 장홍의 서신입니다.”
乃殺之。
이에 주왕이 장홍을 죽였다.
44.
楚公子午使於秦,秦囚之.
楚나라 公子 午가 秦나라에 사신으로 가니, 진나라는 그를 囚禁하였다.
▶ 楚公子午……楚獻晉賦三百車 : 저본에 이 章은 위의 章과 이어져 있었으나, 《群書拾補》와 《說苑校證》에 따라 章을 달리하였다.
▶ 公子午 : 춘추시대 楚 莊王의 아들이다. 子庚‧司馬子庚이라고도 하는데 令尹을 지냈다. 《春秋左氏傳 襄公 15년》‧《春秋 襄公 18년》
其弟獻三百金於叔向,叔向謂平公曰:
그의 아우가 300金을 叔向에게 바치자, 숙향이 晉 平公에게 말하였다.
「何不城壺丘?
“어찌 壺丘에 城을 쌓지 않습니까?
▶ 壺丘 : 춘추시대 陳나라 邑 이름이다. 지금의 河南省 新蔡縣 동남쪽에 있었다. 《春秋左氏傳 文公 9년》
秦楚患壺丘之城。
秦나라와 楚나라는 우리가 호구에 성을 쌓을까 근심하고 있습니다.
若秦恐而歸公子午,以止吾城也,君乃止.
만일 秦나라가 우리를 두려워하면 공자 오를 귀국시켜 우리의 성 쌓는 일을 저지할 터이니, 임금님께서는 바로 성 쌓는 일을 중지하십시오.
難亦未構,楚必德君。」
그러면 禍難도 발생하지 않고, 초나라는 틀림없이 임금님의 은덕이라 여길터입니다.”
平公曰:
「善。」
晉 平公이 말하였다.
“좋소.”
乃城之。
곧 성을 쌓았다.
秦恐,遂歸公子午使之晉,晉人輟城,楚獻晉賦三百車。
秦나라가 두려워하여 공자 오를 돌려보내어 晉나라로 가게 하자, 晉나라 군주가 성 쌓는 일을 철회하니, 초나라는 징수한 세금 300수레를 晉나라에 바쳤다.
45.
趙簡子使人以明白之乘六,先以一璧,為遺於衛。
趙簡子가 사람을 파견하여 광택이 빛나는 수레 여섯 채를 衛나라에 보내면서 먼저 玉璧 하나를 보냈다.
▶ 明白之乘六 : 關嘉의 《說苑纂註》에는 “광택이 밝게 빛나는 수레 여섯 채”라고 하였고, 《說苑校證》에는 “《太平御覽》 권450에 ‘明月’로 되어 있다. ‘명월’은 善馬의 이름이니, 唐나라 사람들이 詩에 많이 썼다.” 하였다. 여기서는 앞의 주석을 따라 번역하였다.
衛叔文子曰:
「見不意,可以生故, 此小之所以事大也。
今我未以往,而簡子先以來,必有故。」
위나라의 叔文子가 말하였다.
“不意의 일을 당하면 이것 때문에 변고가 발생할 수 있으니, 이것이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방법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조간자가 먼저 예물을 보내 왔으니, 틀림없이 까닭이 있응 터입니다.”
於是斬林除圍,聚斂蓄積,而後遣使者。
이에 수풀을 베어내고 짐승 기르는 울타리를 제거하며, 재물을 모아 축적한 뒤에 使臣을 파견하여 사례하였다.
▶ 斬林除圍 : 나무를 베어내고, 사냥하기 위하여 짐승을 기르는 울타리[圍]를 제거함이다.
簡子曰:
「吾舉也,為不可知也。
今既已知之矣.」
조간자가 말하였다.
“나의 거사를 알지 못하리라 여겼는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구나.”
乃輟圍衛也。
이에 위나라 포위를 파하였다.
46.
鄭桓公將欲襲鄶,先問鄶之辨智果敢之士,書其名姓,擇鄶之良田而與之,為官爵之名而書之,因為設壇於門外而埋之。釁之以猳,若盟狀。
鄭 桓公이 鄶나라를 습격하려 함에, 먼저 회나라의 총명하고 용감한 사람을 물어서, 그들의 성명과 회나라의 좋은 田地를 가려서 줄 것과 그들을 임명할 官爵의 이름을 써서, 성문 밖에 壇을 설치하고 그것을 묻고, 수퇘지의 피를 바르니, 마치 盟約한 형상이었다.
▶ 鄭桓公將欲襲鄶 : 鄭 桓公은 周나라의 師徒로 鄭나라에 始封된 君主이다. 이름은 友인데, 周 厲王의 아들이자 宣王의 庶弟이다. 周 幽王이 失政하여 諸侯들이 배반했을 때, 자기의 백성들을 鄶와 東虢 사이에 이주시켜 정나라 건국의 기초를 다졌다. 犬戎의 침공을 막다가 유왕과 함께 죽었다. 《春秋左氏傳 莊公 14년》‧《國語 鄭語》‧《韓非子 內儲說 下》
鄶는 西周시대의 諸侯國이다. 妘姓으로, 祝融의 후예라고 한다. 뒤에 鄭 武公에게 멸망당하였다. 지금의 河南省 鄭州市 남쪽에 있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33년》‧《國語 鄭語》
▶ 田 : 저본에는 ‘臣’으로 되어 있으나, 《說苑校證》에 “《韓非子》 〈內儲說 下〉에 ‘良田’으로 되어 있다. 이 ‘臣’자는 당연히 ‘田’자가 되어야 하니, 아래 글의 ‘良臣’ 두 글자에 관련되어 잘못되었다.”라고 함을 따라 ‘田’으로 바로잡았다.
鄶君以為內難也,盡殺其良臣。桓公因襲之,遂取鄶。
鄶君은 內亂이라고 여겨 그 나라의 良臣을 모조리 죽이매, 정 환공이 기회를 타서 습격하여 마침내 회나라를 빼앗았다.
47
鄭桓公東會封於鄭.
鄭 桓公이 동쪽으로 가서 鄭에 會封받으려 하였다.
▶ 會封 : 諸侯 혹은 신하가 天子나 盟主에게 朝會하여 封爵이나 封土를 받는 일을 이른다.
暮舍於宋東之逆旅,逆旅之叟從外來,曰:
「客將焉之?」
저물녘에 宋나라 동쪽의 여관에 묵으니, 여관의 늙은이가 밖에서 들어와 말하였다.
“손님은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曰:
「會封於鄭。」
정 환공이 말하였다.
“천자를 조현하고 정나라 땅을 봉지로 받으러 가오.”
逆旅之叟曰:
「吾聞之:時難得而易失也。
今客之寢安,殆非會封者也。」
여관의 늙은이가 말하였다.
“내가 듣기에, 時機는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쉽다고 합니다.
지금 손님이 편안히 잠을 잔다면, 아마 천자를 조현하여 봉지를 받지 못할 터입니다.”
▶ 殆非〈會〉封〈者〉 : 저본에는 ‘會’자와 ‘者’자가 없으나, 《群書拾補》에서 《太平御覽》 권198에 의거하여 두 글자를 보충하였고, 《說苑校證》에 “《太平御覽》 권195에는 ‘殆非就封也’로 되어 있고, 권450에는 지금의 저본과 같이 ‘殆非封也’로 되어 있다.”
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鄭桓公聞之,援轡自駕,其僕接淅而載之,行十日夜而至。
정 환공이 이 말을 듣고 말고삐를 잡고 직접 수레를 메워 떠나니, 그의 奴僕은 쌀을 일어 손에 받쳐 들고 함께 수레에 싣고서 밤낮으로 열흘 동안을 달려가서 당도하였다.
▶ 接淅而載之 : 밥을 지으려고 쌀을 일었으나, 미처 밥을 지을 겨를이 없어 손에 받쳐 들고 수레에 실었다는 말이다. 《孟子 萬章 下》
釐何與之爭封。
이 당시에 釐何가 鄭 桓公과 봉지를 다투고 있었다.
▶ 釐何與之爭封 : 釐何는 사람 이름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關嘉의 《說苑纂註》에 “釐何는 ‘萊侯’의 잘못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史記》 〈齊世家〉에 의하면 姜太公과 封地를 다툰 것으로 되어 있고, 鄭 桓公과 다툰 것이 아니매 믿을 수 없다.
故以鄭桓公之賢,微逆旅之叟,幾不會封也。
그러므로 정 환공의 현명함으로도 여관 늙은이의 깨우침이 아니었다면 천자를 조현하고 봉지를 받지 못할뻔하였다.
48.
晉文公伐衛,入郭,坐士令食,曰:
「今日必傅大垣。」
晉 文公이 衛나라를 정벌할 적에 위나라의 外城[郭]에 進入하여 군사들에게 앉은 채로 밥을 먹게 하고 말하였다.
“오늘은 반드시 內城[大垣]에 바싹 다가가 공격할 터이다.”
▶ 傅 : 저본에는 ‘得’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傅’자로 고치고 “傅의 音은 附이니, 바싹 다가감[薄]이다.” 하였고, 《說苑校證》에 “宋本‧明鈔本에 모두 ‘傅’로 되어 있다.”라는 함을 따라 ‘傅’로 바로잡았다.
公子慮俛而笑之。文公曰:
「奚笑?」
公子 慮가 머리를 숙이고 웃자, 문공이 말하였다.
“어찌 웃느냐?”
▶ 公子慮 : 慮는 사람 이름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列子》 〈說符篇〉에는 ‘慮’가 ‘鋤’로 되어 있다.
對曰:
「臣之妻歸,臣送之,反見桑者而助之。
顧臣之妻則亦有送之者矣。」
공자 여가 대답하였다.
“臣의 아내가 친정에 간다기에 신이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뽕을 따는 여인을 만나 그녀를 도와주었습니다.
신의 아내를 돌아보았더니, 그녀에게도 바래다주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 <열자> <설부편>에는 다음과 같다 “人有送其妻適私家者, 道見桑婦, 悅而與言. 然顧視其妻, 亦有招之者矣.”
文公懼,還師而歸,至國,而貉人攻其地。
문공이 두려워하여 군대를 돌려 도성에 당도해보니 貉人이 그의 도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 貉人 : 古代 중국 북방의 부족을 두루 이르던 명칭이다. 貉은 貊과 같다. 《山海經 海內西經》‧《書經 周書 武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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