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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by 古岸子 郭丹約關- 郭丹이 函谷關에서 스스로 포부를 밝히다 後漢郭丹字少卿 南陽穰人. 後漢의 郭丹은 字가 少卿이니 南陽 穰人이다. 幼孤 孝順.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고 효도하고 柔順하였다. 後母哀憐之 爲鬻衣裝買産業. 繼母가 그를 불쌍히 여겨 자기 옷을 팔아서 살림살이를 장만하여 그를 길렀다. 後從師長安 買符入函谷關. 뒤에 스승을 좇아 長安에 가며 符信을 사서 函谷關에 들어갔다. 乃慨然歎曰 丹不乘使者車 終不出關. 慨然히 탄식하였다. “나는 사신의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끝내 關을 나가지 않겠다.” 旣至京師 常爲都講. 諸儒咸敬重之. 京師에 도착하고는 항상 都講(박사를 도와 경서를 강의하는 유생)이 되었는데 유생들이 모두 공경하고 소중히 여겼다. ▶都講: 古代学舍中协助博士讲经的儒生。选择高材者充之 後更始徵爲諫議..

by 古岸子 祖逖誓江- 祖逖이 강을 두고 救國의 뜻을 맹세하다 晉書 의 記事이다. 祖逖字士稚 范陽遵人. 祖逖의 字는 士稚이니 范陽 遵人이다. 博覽書記 該涉古今. 서적을 널리 보아, 두루 古今의 일을 섭렵하였다. 京師亂 避地淮泗. 京師의 난리에 피하여 淮泗 지방으로 갔다. 元帝以爲軍諮祭酒. 元帝는 그를 軍諮祭酒로 삼았다. 逖以社稷傾覆 常懷振復之志. 祖逖은 社稷이 기울고 쓰러진다고 여겨, 항상 이를 구하여 회복할 뜻을 품고 있었다. 遷奮威將軍‧豫州刺史. 奮威將軍에 豫州刺史로 옮겼다. 仍將本流徙部曲百餘家渡江. 본래 피난하여 떠돌던 부하 백여 가(家)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게 되었다. 中流擊楫而誓曰 祖逖不能淸中原而復濟者 有如大江. 강 가운데에서 노로 뱃전을 두드리면서 맹세하였다. “祖逖이 中原을 맑게 하지 못한다..

by 古岸子 賈逵問事- 賈逵는 일에 대하여 묻기를 쉬지 않았다. 後漢賈逵字景伯 扶風平陵人. 後漢의 賈逵는 字가 景伯이니 扶風 平陵人이다. 弱冠能誦左氏傳及五經本文. 弱冠에 능히 및 五經의 本文을 암송하였다. 以大夏侯尙書敎授 兼通五家穀梁之說. 大夏侯가 註釋한 를 학생에게 가르치는 尙書敎授로서 겸하여 五家의 의 학설에도 능통하였다. 自爲兒童 常在大學 不通人間事. 兒童일 때부터 장성하기까지 항상 大學에 있어서 인간의 일에는 통달하지 못하였다. 身長八尺二寸. 키가 8척 2촌이나 되었다. 諸儒爲之語曰 問事不休賈長頭. 선비들이 그를 가리켜 말하였다. “일에 대해 묻는 것을 쉬지 않는 賈長頭로다.” 性愷悌 多智思 俶儻有大節. 성질이 화락하고 평이하며 지혜가 많았고, 뜻이 크고 재주가 뛰어나면서도 큰 절개가 있었다. ▶..

許愼無雙- 許愼은 五經의 해석에 둘도 없는 학자이었다. 後漢許愼字叔重 汝南召陵人. 後漢의 許愼은 字가 叔重이니 汝南 召陵人이다. 性淳篤 博學經籍. 성질이 순박하고 독실하며 널리 經書를 배웠다. 馬融敬之. 馬融이 그를 공경하였다. 時人爲之語曰 五經無雙許叔重. 당시 사람들이 그를 두고 말하였다. “五經의 학문에 둘도 없는 許叔重이다.“ 爲郡功曹 擧孝廉. 郡의 功曹가 되었다가 孝廉으로 천거되었다. 再遷除洨長 卒于家. 다시 豫州 沛國 汶縣의 長으로 옮겼다가 집에서 卒하였다. 初愼以五經傳說臧否不同 撰爲五經異義 又作說文解字. 皆傳於世. 처음에 허신은 五經의 傳注의 평론이 같지 않다고 하여 를 지었고 또 를 지었는데 모두 세상에 전하고 있다. ▶臧否: 褒贬,评论 [註解] ▶後漢- 69 儒林傳의 기사임. ▶功曹- 郡의..

婁敬和親- 婁敬이 單于와 화친을 주장하다 前漢高祖在洛陽. 前漢의 高祖가 洛陽에 있을 때다. 婁敬說曰 陛下都洛陽 豈欲與周比隆哉. 然取天下與周異. 臣竊以爲不侔矣. 且秦地被山帶河 四塞以爲固. 卒然有急 百萬之衆可具. 因秦之故資 甚美膏腴之地 此所謂天府. 陛下入關而都之 山東雖亂 秦故地可全而有. 此亦扼天下之亢而拊其背也. 婁敬이 아뢰었다. “폐하께서 洛陽에 도읍하시어 周나라와 융성함을 비교하시려 합니까? 그러나 천하를 얻은 것이 周나라와 다릅니다. 臣이 삼가 생각하건대 주나라와 漢나라는 같지 않습니다. 또 秦나라 땅은 산에 의지하고 물이 둘러 있어서 사방으로 막히어 견고합니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도 백만의 군사를 갖출 수가 있습니다. 秦나라에서 넘겨받은 자산은 몹시 아름답고 기름지고 살진 땅이니, 이것이 이른바 天..

白起坑降 - 白起가 항복한 조나라 군사를 땅에 묻다 史記 史記>의 記事이다. 白起郿人.白起는 郿縣 사람이다. 善用兵 事秦昭王 號武安君.用兵을 잘하여 秦昭王을 섬겼는데 武安君이라 불렀다. 秦攻趙壘 數挑戰. 趙將廉頗堅壁不出.진나라가 趙나라의 陣을 공격하여 자주 싸움을 걸었으나 조나라 장수 廉懶가 성벽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秦使人爲反間曰 秦獨畏馬服子趙括將耳.진나라는 사람을 시켜 반간하며 말하였다.“진나라는 오직 馬服君의 아들 趙括이 將軍이 됨을 두려워한다.” 廉頗易與.염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趙王旣怒頗數敗 又聞反間之言 因使括代頗.趙王은 염파가 자주 敗戰하였음을 노여워한 데다, 또 離間하는 말을 들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조괄로 염파를 대신하게 하였다. 秦使起爲上將軍.진나라에서는 백기를 上將軍으로..

簫史鳳臺- 簫史가 봉황을 위하여 鳳臺를 세우다 列仙傳 의 記事이다. 簫史者秦穆公時人. 簫史는 秦穆公 때의 사람이다. 善吹簫 能致孔雀‧白鶴. 퉁소를 잘 불어서 孔雀과 白鶴을 부를 수 있었다. 居數年 吹似鳳聲. 몇년이 지나자 퉁소 부는 소리가 봉황의 소리와 유사하였다. 鳳凰來止其屋. 봉황이 와서 그 집에 머물렀다. 爲作鳳臺 夫婦止其上 不下數年. 봉황을 위하여 鳳臺를 짓고 부부가 그 위에서 거처하며 몇 해를 내려오지 않았다. 一曰 妻子弄玉. 一日皆隨鳳凰飛去. 故秦人作鳳女祠雝宮中. 時有簫聲. 어떤 책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내는 弄玉인데, 어느 날 모두 봉황을 따라 날아갔다. 그러므로 진나라 사람들이 鳳女祠를 雝宮 안에 지었다. 때때로 퉁소 소리가 났다. [註解] ▶穆公- 秦나라 제9대 군주. ▶弄玉- 목..

宋宗雞窗- 宋宗의 雞窗 ▶雞窗: 書齋 幽冥錄 의 記事이다. 晉兗州刺史沛國宋處宗. 嘗買一長鳴雞 愛養甚至. 晉나라 兗州刺史로서 沛國 출신인 宋處宗이 일찍이 長鳴雞 1마리를 사서 몹시 사랑하며 길렀다. 常籠著窓間. 항상 닭장을 창문 사이에 설치해 두었다. 後雞作人語 與處宗談論 極有玄致 終日不輟. 닭이 사람의 말을 하여 송처종과 이야기하는데 몹시 깊은 이치가 있어서 종일 그치지 않았다. 處宗因此 功業大進. 송종은 이로 인하여 공훈과 사업이 크게 진보하였다. [註解] ▶窗閒- 窗은 窓과 같으며 窓의 本字임. 이 故事에서 서재를 鷄窓이라고 한다.

王陽囊衣- 王子陽은 한 자루의 옷만 가지고 轉任하였다. 前漢王吉字子陽 子駿 孫崇並至御史大夫. 前漢 王吉의 字는 子陽이니, 아들 王駿과 손자 王崇이 모두 御史大夫에 이르렀다. 崇平帝時爲大司空. 왕숭은 平帝 때 大司空이 되었다. 自吉至崇 世名淸廉. 王吉로부터 왕숭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청렴하다고 이름났다. 然材器名稱稍不能及父. 而祿位彌隆. 재주와 器局과 명칭은 다소 아버지에 미치지 못했으나, 祿俸과 지위는 조금 높았다. 皆好車馬衣服 其自奉養極爲鮮明 而亡金銀錦繡之物. 모두 車馬와 의복을 좋아하여, 그들 자신을 장식함은 몹시 아름다웠으나, 金銀이나 비단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及遷徙去處 所載不過囊衣 不蓄積餘財. 轉任하여 任地를 떠날 때 수레에 실은 것이 한 자루의 옷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 재물은 축적하지 않았..

馬援薏苡- 馬援은 薏苡(율무)를 가져와서 참소를 임었다. 後漢馬援在交阯 常餌薏苡實 能輕身省慾 以勝瘴氣. 後漢 馬援이 交阯에 있을 때 항상 율무의 씨를 먹었는데, 몸을 가볍게 하고 욕심을 덜어주어 이로써 瘴氣를 이겼다. 南方薏苡實大 援欲以爲種 軍還載之一車. 남쪽 지방의 율무는 씨가 굵은데, 馬援이 종자로 쓰고자 하여, 군대가 돌아올 때 한 수레를 싣고 왔다. 時人以爲南土珍怪 權貴皆望之. 당시 사람들이 남쪽 지방의 珍貴하고 괴이한 물건이라 여겼고, 권세있는 貴人들이 모두 그것을 원하였다. 援時方有寵 故莫以聞. 마원은 그때 천자의 총애가 두터웠으므로 그가 탐욕스럽다며 의심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감히 上奏하는 사람은 없었다. 卒後有上書譖之者. 그가 卒한 뒤에 글을 올려 참소하는 자가 있었다. 以爲前所載還 皆明珠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