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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溫公曰 國朝公卿 能守先法 久而不衰者 唯故李相家. 子孫 數世 至二百餘口 猶同居共爨. 田園邸舍所收 及有官者俸祿 皆聚之一庫 計口日給餉 婚姻喪葬所費皆有常數 分命子弟 掌其事 其規模 大抵出於翰林學士宗諤所制也 《溫公集》 溫公이 말하였다. “國朝의 公卿 중에 옛법을 지켜 오래도록 쇠하지 않은 자는 오직 돌아가신 李相의 집안이다. 자손이 몇 대에 걸쳐 2백여 식구가 되었는데, 오히려 함께 살면서 함께 밥을 지어 먹었다. 田園과 邸舍[객점]의 수입과 관직이 있는 자의 봉록을 모두 한 창고에 모아, 식구를 헤아려 날로 양식을 공급하였으며, 혼인과 초상과 장례의 비용이 모두 일정한 액수가 있어, 자제들을 나누어 명하여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으니, 그 규모는 대체로 李相의 아들인 한림학사 宗諤이 만든 바에서 나왔다.” 【集說】..
江州陳氏 宗族七百口 每食 設廣席 長幼以次坐而共食之. 江州陳氏는 종족이 7백 식구나 되었는데, 매양 밥을 먹을 때마다 넓은 자리를 펴고 어른과 어린이가 차례로 앉아 함께 먹었다. 有畜犬百餘 共一牢食 一犬 不至 諸犬 爲之不食 《五代史》〈南唐世家〉 기르는 개 백여 마리가 있어 함께 한 우리에서 먹었는데, 한 마리 개라도 이르지 않으면 개들이 그를 위하여 먹지 않았다. 【集說】 陳氏曰 江州 今九江府. 陳氏 名褒 南唐人 十世同居. 犬知愛其類 和順之所感也 陳氏가 말하였다. “江州는 지금의 九江府이다. 陳氏는 이름이 褒요, 南唐 사람이니, 10代가 함께 살았다. 개가 그 族類를 사랑할 줄 알았음은 和順에 감화됨 때문이다.”
唐河東節度使柳公綽 在公卿間 最名有家法 《溫公》〈家範〉 唐나라 河東節度使 柳公綽은 公卿간에 가법이 있기로 이름이 났다. 【集解】 公綽 字子寬 公綽은 字가 子寬이다. 中門東有小齋 自非朝謁之日 每平旦 輒出至小齋 諸子仲郢皆束帶 晨省於中門之北. 中門 동쪽에 작은 방이 있었는데, 자신이 조회에 알현하는 날이 아니면 平旦[이른 새벽]마다 나가 작은 방에 이르거든, 아들들과 仲郢은 모두 띠를 묶고 중문 북쪽에서 새벽 문안을 올렸다. 公綽決私事 接賓客 與弟公權及群從弟 再會食 自旦至莫 不離小齋. 柳公綽은 사사로운 일을 결정하거나 빈객을 접대하고, 아우인 公權 및 여러 從弟과 하루에 두 번 모여 식사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은 방을 떠나지 않았다. 燭至則命一人子弟 執經史 躬讀一過訖 乃講議居官治家之法 或論文 或聽琴 至人定鍾..
韓文公作董生行曰 淮水出桐柏山 東馳遙遙 千里不能休 淝水出其側 不能千里 百里入淮流. 壽州屬縣有安豊 唐貞元年時 縣人董生召南 隱居行義於其中. 刺史不能薦 天子不聞名聲 爵祿不及門 門外 惟有吏日來徵租更索錢 《昌黎集》 韓文公이 董生行을 지어 일렀다. “淮水는 桐柏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멀리 달려 천 리를 쉬지 못하는데, 淝水는 그 옆에서 나와 천 리를 못 가고, 백리에서 淮水로 들어가 흐르도다. 壽州의 속현에 安豊이 있으니, 唐나라 貞元 年間에 그 縣 사람 董生 召南이 그곳에 은거하며 義를 행하도다. 刺史가 천거하지 못하니, 天子가 그의 명성을 듣지 못하여 爵祿이 문에 미치지 못하고, 문밖에는 오직 관리들이 날마다 와서 조세를 징수하고 다시 돈을 요구할 뿐이로다. 【集說】 陳氏曰 公 名愈 字退之 諡文 昌黎人. 董生 名召..
張公藝九世同居 北齊隋唐 皆旌表其門. 張公藝는 9대가 함께 사니, 北齊와 隋·唐에서는 모두 그의 문에 정표를 하였다. 麟德中 高宗封泰山 幸其宅 召見公藝 問其所以能睦族之道 公藝請紙筆以對 乃書忍字百餘 以進. 麟德 年間에 高宗이 泰山에 封하고, 그의 집에 가서 張公藝를 불러 보고 종족을 화목하게 하는 방법을 묻자, 張公藝는 종이와 붓으로 대답하겠다고 청하고는 마침내 忍字 백여 자를 써서 올렸다. 其意以爲宗族所以不協 由尊長衣食 或有不均 卑幼禮節 或有不備 更相責望 遂爲乖爭 苟能相與忍之 則家道雍睦矣 《舊唐書》〈孝友列傳〉,《溫公家範》 그 뜻은 종족이 화목하지 못하는 까닭은 尊長이 옷과 밥을 나누어줌에 혹 고르지 못함이 있으며, 낮은 자와 어린 자의 예절이 혹 갖춰지지 못함이 있으면, 번갈아 서로 책망하여 마침내 어긋나..
王凝常居 慄如也. 王凝은 평소 거처할 때에 근엄하였다. 子弟非公服不見 閨門之內 若朝廷焉 《文中子》〈關郞篇〉 자제들은 公服[관복]이 아니면 뵙지 못하여, 閨門 안이 마치 조정과 같았다. 【集解】 凝 字叔恬 文中子之弟. 凝은 字가 叔恬이니, 文中子의 아우이다. 慄 嚴謹貌. 慄은 근엄한 모양이다. 子弟非公服不敢見 處閨門如處朝廷 其嚴謹可知矣 자제들이 公服이 아니면 감히 뵙지 못하여, 閨門에 처하기를 마치 조정에 처하듯이 하였으니, 그 근엄함을 알 수 있다. 御家以四敎 勤儉恭恕 正家以四禮 冠婚喪祭. 집을 다스리되 네 가지 가르침으로 하였으니, 근면·검소·공손·관용이요, 집을 바루되 네 가지 예절로 하였으니, 관례·혼례·상례·제례였다. 【增註】 御 治也 御는 다스림이다. 聖人之書及公服禮器 不假 垣屋什物 必堅朴 曰 ..
崔孝芬兄弟孝義慈厚. 崔孝芬 형제는 효도하고 의로우며 인자하고 후덕하였다. 弟孝暐等 奉孝芬 盡恭順之禮 坐食進退 孝芬不命則不敢也. 아우 孝暐 등이 孝芬을 받들되 恭順한 禮를 다하여 앉으며 먹으며 나아가고 물러감에 孝芬이 명령하지 않으면 감히 하지 않았다. 鷄鳴而起 且溫顔色 一錢尺帛 不入私房 吉凶有須 聚對分給. 닭이 울면 일어나서 우선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며, 一錢의 돈과 한 자의 비단을 개인적인 방에 들이지 않고, 길흉사로 씀이 있을 때는 모여 마주하여 나누어주었다. 諸婦亦相親愛 有無共之 《北史》〈崔挺列傳〉 아내들도 또한 서로 친애하여 있고 없음을 함께 하였다. 【集說】 陳氏曰 孝芬 北朝博陵人 陳氏가 말하였다. “孝芬은 北朝[北魏] 博陵 사람이다.” 孝芬叔振 旣亡後 孝芬等 承奉叔母李氏 若事所生 旦夕溫凊 出入..
陶淵明爲彭澤令 不以家累自隨. 送一力 給其子書曰 汝旦夕之費 自給爲難 今遣此力 助汝薪水之勞. 此亦人子也 可善遇之 《晉書》〈逸民列傳〉 陶淵明이 彭澤의 令이 되어 家累[처자]로써 자신을 따르게 하지 않았다. 일꾼 하나를 보내어 그의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 일렀다. “네가 아침저녁의 비용을 스스로 충족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이제 이 일꾼을 보내어 너의 땔나무를 하고 물긷는 수고로움을 돕게 한다. 이 또한 사람의 자식이니, 그를 잘 대우하라.” 【集解】 淵明 字元亮. 淵明은 字가 元亮이다. 家累 妻子也. 家累는 처자식이다. 力 僕也 力은 종이다.
龐公未嘗入城府 夫妻相敬如賓. 龐公이 城府[성안]에 들어간 적이 없고, 夫妻가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처럼 하였다. 劉表候之 龐公釋耕於壟上 而妻子耘於前. 劉表가 방문하자, 龐公은 밭둔덕 위에서 밭갈기를 멈추었고, 妻子는 앞에서 김매고 있었다. 表指而問曰 先生苦居畎畝而不肯官祿 後世 何以遺子孫乎? 劉表는 그의 妻子를 가리키며 물었다. “선생이 畎畝[농토]에서 괴롭게 살면서 관청의 녹을 즐기지 않으니, 후세에 무엇을 자손에게 남겨주려 하시오?” 龐公曰 世人 皆遺之以危 今獨遺之以安. 雖所遺不同 未爲無所遺也. 龐公이 말하였다. “세인은 모두 자손에게 위태로움을 남겨주는데, 나는 지금 홀로 자손에게 편안함을 남겨줍니다. 비록 남겨주는 것이 같지 않으나, 남겨주는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 表嘆息而去 《後漢書》〈逸民列傳〉 ..
疏廣 爲太子太傅 上疏乞骸骨 加賜黃金二十斤 太子贈五十斤. 疏廣이 太子太傅가 되어 上疏하여 해골[은퇴]을 빌자, 上은 황금 20근을 加賜[특별히 많게 下賜함]하였고, 태자는 황금 50근을 하사하였다. 歸鄕里 日令家 供具設酒食 請族人故舊賓客 相與娛樂 數問其家 金餘尙有幾斤? 趣賣以共具 《漢書》〈疏廣列傳〉 疏廣이 향리로 돌아와 날마다 집안에 명령하여 술과 밥을 장만하고 族人과 故舊와 빈객을 초청하여 서로 함께 즐겼으며, 자주 집안 식구에게 물었다. “黃金이 아직도 몇 근이 남았는가? 빨리 팔아서 음식을 장만하라.” 【集說】 陳氏曰 廣 字仲翁 東海蘭陵人. 太傅 官名. 上疏乞骸骨 猶今之告老也. 娛 歡也. 趣與促同 共與供同 言促賣餘金 以供酒食之具也. 陳氏가 말하였다. “廣은 字가 仲翁이니, 東海 蘭陵 사람이다. 太傅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