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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古者小學 始敎八歲之蒙 想其爲言易知而其爲敎易入也. 옛날 小學校에서는 8세의 어린이를 처음 가르쳤으니, 생각건대 그 글을 알기가 쉬워서, 그 가르침을 주입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三代之盛 其法必備 規模條制列於職官 而秦火之餘 其書不傳. 三代가 융성함에 그 법이 모두 갖추어져 규모와 조례·제도가 직관에 나열되었는데, 秦나라가 불태운 뒤에 그 책이 전해지지 않는다. 晦菴夫子憫人道之不立 歎爲學之無本 遂以聖人之敎之遺意 蒐輯經史 編爲小學之書. 晦菴夫子는 人道가 서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학문함에 근본이 없음을 탄식하여, 마침내 聖人이 가르치신 遺志를 따라 經書와 史書를 수집하고 편찬하여 《小學》을 만드셨다. 由是 小學之敎 復明於天下 誠垂世之大訓也. 이를 통하여 小學의 가르침을 다시 천하에 밝혔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리운..
汪信民嘗言 人常咬得菜根 則百事可做. 汪信民이 일찍이 말하였다.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먹으려 하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胡康侯聞之 擊節嘆賞. 《呂氏雜錄》 胡康侯가 이 말을 듣고 마디를 치면서 嘆賞하였다. 【集說】 陳氏曰 信民 名革 臨川人. 康侯 文定公字也. 人能甘淡泊而不以外物動心 則可以有爲矣. 擊節 一說 擊手指節 一說 擊品物爲節 皆通. 嘆 嗟嘆 賞 稱賞. 陳氏가 말하였다. “信民은 이름이 革이니, 臨川 사람이다. 康侯는 文定公[胡安國]의 字이다. 사람이 담박함을 달게 여겨 외물로써 마음을 동요하지 않으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 擊節은 일설에는 ‘손가락 마디를 치는 것이다.’라고 하고, 일설에는 ‘기물을 쳐서 節奏[가락]를 맞춘 것이다.’라고 하니, 모두 통한다. 嘆은 감탄함이요, 賞은 칭찬함..
溫公曰 吾家本寒族. 世以淸白相承 吾性不喜華靡 自爲乳兒時 長者加以金銀華美之服 輒羞赧棄去之. 年二十忝科名 聞喜宴獨不戴花 同年曰 君賜不可違也 乃簪一花. 平生 衣取蔽寒 食取充腹 亦不敢服垢弊 以矯俗干名 但順吾性而已 《溫公家範》 溫公이 말씀하였다. “우리 집안은 본래 빈한한 종족이었다. 대대로 淸白을 서로 계승하였으며, 내 성품이 華麗와 奢侈를 좋아하지 않아, 유아였을 때부터 長者가 금은과 화려한 옷을 더해 주면 곧 부끄러워하며 버렸다. 나이 20세에 외람되이 과거에 이름이 올랐는데, 聞喜 잔치에 홀로 꽃을 꽂지 않으니, 同年[동방급제한 자]이 말하기를 ‘임금이 주시는 것이니, 어겨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매 마침내 한 송이 꽃을 꽂았었다. 평소에 옷은 추위를 가림을 취하고 음식은 배를 채움을 취하였으며, 또한 ..
溫公曰 先公爲群牧判官 客至 未嘗不置酒 或三行 或五行 不過七行. 酒沽於市 果止梨栗棗枾 肴止脯醢菜羹 器用甆漆. 當時士大夫皆然 人不相非也. 會數而禮勤 物薄而情厚 《溫公家範》 溫公이 말씀하였다. “先公[先親]께서 群牧判官으로 계실 적에 손님이 오면 술자리를 베풀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혹 세 순배를 돌리고 혹 다섯 순배를 돌리되, 일곱 순배는 넘지 않았다. 술은 시장에서 사 왔고, 과일은 배·밤·대추·감뿐이었고, 안주는 다만 포와 젓갈·나물국뿐이었으며, 그릇은 자기와 칠기를 사용하였다. 당시의 사대부들도 모두 그렇게 하여 사람들이 서로 비난하지 않았다. 모임이 잦았으나 禮를 행하였고, 물건이 소박하였으나 精誠이 두터웠다. ▶ 群牧判官 : 地方官의 屬官으로 牧馬를 관장하였다. 【集解】 溫公父 名池 字和中 溫公의 ..
張文節公爲相 自奉如河陽掌書記時. 張文節公이 재상이 되어 자신을 받듦이 河陽의 掌書記로 있을 때와 같았다. 所親 或規之曰 今公受俸不少 而自奉若此 雖自信淸約 外人頗有公孫布被之譏 公宜少從衆. 친한 친구가 혹 간언하였다. “지금 公께서는 봉록을 받음이 적지 않은데 자신을 받듦이 이와 같으니, 비록 스스로 청렴하고 검약함을 믿더라도, 밖의 사람들에게 公孫弘이 삼베 이불을 덮음과 같다는 비난이 있으니, 公께서도 마땅히 조금은 시속을 따르셔야 합니다.” 公嘆曰 吾今日之俸 雖擧家錦衣玉食 何患不能? 顧人之常情 由儉入奢易 由奢入儉難 吾今日之俸 豈能常有 身豈能常存? 一旦 異於今日 家人習奢已久 不能頓儉 必至失所 豈若吾居位去位身存身亡 如一日乎 《溫公家範》 公이 탄식하였다. “내 오늘날의 봉급이 비록 온 집안 식구가 비단옷을 입..
李文靖公治居第於封丘門外 廳事前僅容旋馬. 李文靖公이 사는 집을 封丘門 밖에 지었는데, 청사 앞이 겨우 말 한 마리 돌릴만하였다. 或言其太隘 公笑曰 居第當傳子孫 此爲宰輔廳事誠隘 爲太祝奉禮廳事 則已寬矣 《宋名臣言行錄》 어떤 사람이 너무 좁다고 말하자, 公이 웃으며 말하였다. “사는 집은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하니, 이것은 재상의 廳事로는 진실로 협소하거니와, 太祝과 奉禮의 청사로 쓰기에는 너무 넓다.” ▶太祝奉禮廳事: 太祝과 奉禮는 재상의 자제들에게 내리는 蔭職인바, 李文靖公은 자신이 재상이므로 자기의 자제들이 이 벼슬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말한 것이다. 【集說】 陳氏曰 公 名沆 字太初 位宰相 諡文靖 洛州人. 封丘 宋都門名. 廳 所以治事 故曰廳事. 太祝, 奉禮 皆典祭祀者. 已 太也 陳氏가 말하였다 “公의 이름..
柳玭曰 高侍郞兄弟三人 俱居淸列 非速客 不二羹胾 夕食蔔匏而已 《柳氏家訓》 柳玭이 말하였다. “高侍郞 형제 세 분이 함께 깨끗한 벼슬에 있었는데, 손님을 초청하지 않고는 국과 썰어놓은 고기를 두 가지 이상 놓지 않았으며, 저녁 식사에는 무와 박뿐이었다.” 【集解】 高氏兄弟 唐人 長釴翰林學士 次銖給事中 次鍇禮部侍郞. 高氏의 兄弟는 唐나라 사람이니, 맏이인 釴은 한림학사였고, 다음인 銖는 급사중이었으며, 다음인 鍇는 예부시랑이었다. 速 召也. 速은 부름이다. 不貳 無兼味也. 不貳는 兼味[두 가지 이상의 진미]가 없음이다. 胾 切肉也. 胾는 썰어놓은 고기이다. 蔔匏 菜名 무와 박은 나물 이름이다.
文中子之服 儉以潔 無長物焉. 文中子의 의복은 검소하면서도 깨끗하였고, 長物[남은 물건]이 없었다. 綺羅錦繡 不入于室 曰 君子非黃白不御 婦人則有靑碧 《中說》〈事君篇〉 綺羅와 綿繡를 집안에 들이지 않고 말하였다. “君子는 황색과 백색이 아니면 입지 않고, 婦人에게는 청색과 벽색이 있다.” 【集解】 儉 謂不侈 潔 謂不汚. 儉은 사치하지 않음이요, 潔은 더럽지 않음이다. 無長物 謂稱用而已 無多餘者也 長物이 없다는 것은 씀에 알맞게 할 뿐이요, 많이 남는 것이 없음을 이른다. 【正誤】長 剩也 長은 남음이다.
徐積仲車初從安定胡先生學 潛心力行 不復仕進 其學以至誠爲本 事母至孝. 徐積 仲車가 처음에 安定胡先生[胡瑗]을 따라 배웠는데, 마음을 침잠하고 힘써 행하여 다시 벼슬에 나아가려 하지 않았으며, 그의 학문은 至誠을 근본으로 삼아 어머니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自言 初見安定先生 退頭容少偏 安定忽聲云 頭容直. 某因自思 不獨頭容直 心亦要直也. 自此 不敢有邪心. 스스로 말하였다. “처음 安定先生을 뵙고 물러 나올 때 머리 모양이 조금 기울었는데, 安定이 갑자기 큰 소리로 ‘머리 모양은 곧게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였다. 나는 인하여 스스로 생각하기를 ‘다만 머리 모양이 바를 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바루어야 한다.’라고 여겼다. 이로부터 감히 나쁜 마음을 갖지 않았다.” 卒 諡節孝先生 《宋名臣言行錄》,《童蒙訓》..
劉公見賓客 談論踰時 體無欹側 肩背直 身不少動 至手足 亦不移 《宋名臣言行錄》 劉公은 빈객을 만나 한동안 담론을 하되 몸을 기대거나 기울임이 없어 어깨와 등이 꼿꼿하고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손과 발에 이르러도 또한 옮기지 않았다. 【集說】 吳氏曰 劉公 卽忠定公也. 心爲一身之主 百體皆聽命. 劉公 心一於誠 故 見於外者如此 吳氏가 말하였다. “劉公은 바로 忠定公[劉安世]이다. 마음은 一身의 주장이 되어 온갖 몸이 모두 명령을 듣는다. 劉公은 마음이 誠에 한결같았으므로 외모에 나타남이 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