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전체 글 (4889)
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劉忠定公見溫公 問盡心行己之要可以終身行之者 公曰 其誠乎. 劉忠定公이 溫公을 뵙고, 마음을 다하고 자신을 행하는 요점으로,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을 묻자, 溫公이 말하였다. “그것은 誠일 터이다.” 劉公 問 行之何先? 劉公이 물었다. “이것을 행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公曰 自不妄語始 《宋名臣言行錄》 溫公이 말하였다. “함부로 말하지 않음으로부터 시작한다.” 【集說】 陳氏曰 忠定 元城先生諡也. 陳氏가 말하였다. “忠定은 元城先生[劉安世]의 시호이다.” 朱子曰 溫公所謂誠 卽大學所謂誠其意者 指人之實其心而不自欺也 朱子가 말씀하였다. “溫公이 말한 誠은 바로 《大學》에 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이니, 사람이 그 마음을 성실히 하여 스스로 속이지 않음을 가리킨다. 劉公初甚易之 及退而自檃栝日之所行 與..
明道先生 作字時 甚敬 嘗謂人曰 非欲字好 卽此是學 《二程全書》〈遺書〉 明道先生은 글자를 쓸 때 매우 공경하셨는데,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글자를 좋게 하려고 함이 아니라, 곧 이것이 배움이기 때문이다.” 【集說】 朱子曰 此亦可以收放心. 朱子가 말씀하였다. “이것으로도 放心을 거둘 수 있다.”
明道先生 終日端坐 如泥塑人 及至接人 則渾是一團和氣 《二程全書》〈外書〉 明道先生은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어서 마치 진흙으로 만든 사람과 같았는데, 사람을 접함에 이르러는 완전히 한 덩어리의 온화한 기운이었다. 【正誤】終日端坐 如泥塑人 敬也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진흙으로 만든 사람과 같다고 함이 敬이다. 【集解】 所謂望之儼然 卽之也溫 《論語》〈子張〉에 이른바 ‘바라봄에 엄숙하고, 나아감에 온화하다.’이다.
呂正獻公自少 講學卽以治心養性爲本 寡嗜慾 薄滋味 無疾言遽色 無窘步 無惰容. 呂正獻公은 어릴 적부터 講學하되 곧 마음을 다스리고 德性을 기름을 근본으로 삼아, 嗜慾을 적게 하고, 滋味[맛좋은 음식]를 적게 하였으며, 말을 빨리하거나 얼굴빛을 급히 변함이 없었으며, 촉박한 걸음걸이가 없었으며, 게으른 모양이 없었다. 凡嬉笑俚近之語 未嘗出諸口 於世利紛華聲伎遊宴 以至於博奕奇玩 淡然無所好 《呂氏家傳》 무릇 희롱하며 웃거나 비속하고 淺近한 말을 입에서 낸 적이 없었고, 세상의 이익과 紛華[화려함]와 음악과 놀이와 遊宴[놀고 잔치함]과 장기·바둑과 기이한 노리개에 이르기까지 담박하여 좋아하는 바가 없었다. 【集說】 吳氏曰 治心 收其放心也 養性 養其德性也. 自寡嗜慾以下 皆治心養性之事. 遽 急遽也 窘 迫促也 俚 鄙俗也 聲..
管寧嘗坐一木榻 積五十餘年 未嘗箕股 其榻上當膝處皆穿 《三國志魏志》〈管寧列傳〉 管寧은 일찍이 하나의 나무 평상에 앉았었는데, 50여 년이 되도록 다리를 뻗은 적이 없어서, 그 평상 위에 무릎이 닿는 곳이 모두 뚫어졌다. 【集解】 寧字幼安 漢末避亂 依公孫度於遼東 日講詩書 所居成邑 民化其德 魏文帝立召寧 浮海以還. 寧은 字가 幼安이니, 漢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하여 遼東의 公孫度에게 의지해 있으면서 날마다 詩·書를 강론하니, 거주하는 곳이 邑을 이루어 백성들이 그 德에 감화되었는데, 魏나라 文帝가 즉위하여 管寧을 부르자, 管寧은 바다를 항해하여 돌아왔다. 文帝明帝皆召之使仕 寧陳情不仕而終 文帝와 明帝가 모두 불러 벼슬하게 하였으나 管寧은 陳情하여 벼슬하지 않고 죽었다.
司馬溫公 嘗言 吾無過人者 但平生所爲 未嘗有不可對人言者耳 《宋名臣言行錄》 司馬溫公이 일찍이 말하였다. “나에게 남보다 나은 것이 없거니와, 다만 평소 행함에 남을 대하여 말하지 못할 것이 없었을 뿐이다.” 【集說】 公 平生誠實不欺 故不可對人言者 則不爲也 公은 평소 성실하여 속이지 않으므로 남을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은 하지 않았다.
范文正公 少有大節 其於富貴貧賤毁譽歡戚 不一動其心 而慨然有志於天下. 范文正公[范仲淹]은 젊어서 큰 절개가 있어, 富貴貧賤毁譽歡戚에 대하여 한 번도 그 마음을 동요하지 않고, 慨然히 천하에 뜻을 두었다. 嘗自誦曰 士當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也 《歐陽文忠公文集》〈碑銘〉 일찍이 스스로 말하였다. “선비는 마땅히 천하 사람들의 근심에 앞서서 근심해야 하고, 천하 사람들의 즐거움에 뒤서서 즐거워해야 한다.” 【增註】 不一動其心 謂富貴不慕 貧賤不厭 毁之不怒 譽之不喜 得而不歡 失而不戚也. 不一動其心은 부귀를 사모하지 않고 빈천을 싫어하지 않으며, 비방해도 노여워하지 않고 칭찬해도 기뻐하지 않으며, 얻어도 즐거워하지 않고 잃어도 근심하지 않음을 이른다. 天下未憂而先憂 天下已樂而後樂 천하가 근심하기 전에 먼저 근심하고..
王文正公 發解南省廷試 皆爲首冠 或之曰 壯元試三場 一生喫著 不盡. 王文正公이 發解·南省·廷試에서 모두 首冠[수석]이 되었는데, 혹자가 희롱하였다. “三場에서 시험을 보아 장원하였으니, 일생토록 먹고 입음이 다하지 않겠다.” ▶ 發解南省廷試 : 發解는 州縣의 시험에서 우수자가 있으면, 그 지방관청으로부터 解라는 공문서를 중앙에 발송하고, 다시 그 사람들을 서울에서 시험을 보게 하는 것으로, 明·淸代에는 鄕試에 합격함을 곧바로 칭하기도 하였다. 南省은 尙書省의 별칭으로 궁궐의 남쪽에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인데, 여기서는 尙書省에서 보이는 省試를 가리키는바, 후일의 會試에 해당하며, 廷試는 조정에서 시행하는 시험으로 후일의 殿試와 朝考에 해당한다. 公正色曰 曾平生之志不在溫飽 《宋名臣言行錄》 公은 정색하고 말하였다..
柳玭曰 王相國涯方居相位 掌利權 竇氏女歸 請曰 玉工貨一釵 奇巧 須七十萬錢. 王曰 七十萬錢 我一月俸金耳 豈於女惜 但一釵七十萬 此妖物也 必與禍相隨. 女子不復敢言 《柳氏家訓》 柳玭이 말하였다. “王相國 涯가 정승 지위에 있으면서 利權을 관장하였는데, 竇氏에게 시집간 딸이 歸省하여 청하였다. ‘玉工이 한 비녀를 파는데 기이하고 정교한바, 70만 전을 받으려 합니다.’ 王相國은 말하였다. ‘70만 전은 나의 한달 봉급이니, 어찌 너에게 아깝겠는가마는 다만 비녀 한 개가 70만 전이면, 이는 요망한 물건이니, 반드시 禍가 서로 따르리라.’ 이에 딸은 다시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集解】 王涯 字廣津 唐文宗朝 拜相. 王涯는 字가 廣津이니, 唐나라 文宗朝에 정승에 제수되었다. 掌利權 謂居相位 又兼度支, 鹽鐵, 榷茶等使也..
柳仲郢 以禮律身 居家無事 亦端坐拱手 出內齋 未嘗不束帶. 柳仲郢은 禮로써 몸을 다스려 집에 있을 적에 일이 없더라도 또한 단정히 앉아 拱手하며, 中門 안의 서재에서 나올 때는 띠를 묶지 않은 적이 없었다. 三爲大鎭 廐無良馬 衣不薰香 公退 必讀書 手不釋卷 《柳氏家訓》 세 번 큰 藩鎭을 맡았으나 마구간에는 좋은 말이 없었고, 옷은 향내를 풍기지 않았으며, 공무에서 물러 나오면 항상 책을 읽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集解】 仲郢 嘗爲山南劍南天平三道節度使 故 曰三爲大鎭. 仲郢이 일찍이 山南·劍南·天平 3道의 절도사가 되었으므로, 세 번 큰 藩鎭을 맡았다고 하였다. 家法 在官不奏祥瑞 不度僧道 不貸贓吏法. 家法에 관직에 있음에 상서로움을 아뢰지 않으며, 중과 도사에게 度牒을 발부하지 않았으며, 不正한 관리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