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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崔玄暐母盧氏嘗誡玄暐曰 吾見姨兄屯田郞中辛玄馭 曰 兒子從宦者 有人來云貧乏不能存 此 是好消息 若聞貲貨充足 衣馬輕肥 此 惡消息. 吾嘗以爲確論 《唐書》〈崔玄暐列傳〉 崔玄暐의 어머니 盧氏가 일찍이 玄暐를 훈계하여 말하였다. “내가 이종오빠인 屯田郞中 辛玄馭를 뵈니 말씀하였다. ‘아들로서 벼슬에 종사하는 자를 어떤 사람이 와서 가난하고 궁핍하여 생존할 수 없다고 말하면 이것은 좋은 소식이거니와, 만약 재화가 充足하며 옷과 말이 가볍고 살쪘다는 말이 들리면 이것은 나쁜 소식이다.’ 나는 항상 이것을 정확한 의논이라 여긴다. 【集說】 陳氏曰 玄暐 名曄 博陵人 仕至宰相. 姨兄 姨之子 長於我者也. 貧必廉 故曰好消息 富必貪 故曰惡消息. 陳氏가 말하였다. “玄暐는 이름이 曄이요, 博陵 사람이니,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다. 姨兄은..
李君行先生 名潛 虔州人. 入京師 至泗州 留止 其子弟請先往. 君行 問其故 曰 科場近 欲先至京師 貫開封戶籍 取應. 君行 不許曰 汝虔州人 而貫開封戶籍 欲求事君而先欺君 可乎? 寧遲緩數年 不可行也 《童蒙訓》 李君行先生은 이름이 潛이니, 虔州 사람이다. 京師에 들어갈 적에 泗州에 이르러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자제들이 먼저 가기를 청하였다. 李君行이 그 연고를 묻자 대답하였다. “科場이 가까우니, 먼저 京師에 가서 開封府에 호적을 올려 응시하겠습니다.” 李君行은 허락하지 않고 말하였다. “너는 虔州 사람인데 開封府의 호적에 올리면, 임금 섬기기를 구하고자 하면서 먼저 임금을 속이는 셈이니, 되겠느냐? 차라리 몇 년 늦을지언정 가서는 안 된다.” 【集說】 陳氏曰 君行 字. 虔州 今贛州府. 泗 郡名. 宋之京師 在開封府..
初 魏遼東公翟黑子 有寵於太武 奉使幷州 受布千疋 事覺. 처음에 魏나라 遼東公 翟黑子는 太武帝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幷州에 사신의 임무를 받들고 가서 베 1000필을 뇌물로 받았다가, 이 사실이 발각되었다. 黑子謀於著作郞高允曰 主上問我 當以實告 爲當諱之? 翟黑子는 著作郞 高允과 상의하였다. “主上께서 나에게 물으시면 마땅히 實告해야 하겠는가? 마땅히 숨겨야 하겠는가?” 允曰 公 帷幄寵臣 有罪首實 庶或見原 不可重爲欺罔也. 高允이 대답하였다. “공은 帷幄의 총애받는 신하이니, 죄가 있음에 사실을 자수하면 행여 혹 용서를 받을 터이니, 거듭 속여서는 안 됩니다.” 中書侍郞崔鑒公孫質曰 若首實 罪不可測 不如姑諱之. 中書侍郞 崔鑒과 公孫質은 말하였다. “만일 사실을 자수한다면 죄를 예측할 수 없으니, 우선 숨김만 못하..
汲黯景帝時 爲太子洗馬 以嚴見憚. 汲黯이 景帝 때에 太子洗馬가 되었는데 엄격함으로 꺼림을 받았다. 武帝卽位 召爲主爵都尉 以數直諫 不得久居位. 武帝가 즉위하자 급암을 불러 主爵都尉로 삼았는데, 자주 直諫하여 벼슬자리에 오래 있지 못하였다. 是時 太后弟武安侯田蚡爲丞相 中二千石拜謁 蚡弗爲禮. 이때 太后의 아우 武安侯 田蚡이 丞相이 되었는데, 연봉 2천 石의 관원들이 田蚡에게 절하고 알현하면 田蚡은 답례를 하지 않았다. 黯見蚡 未嘗拜 揖之 《漢書》〈汲黯列傳〉 그러나 汲黯은 田蚡을 봄에 절한 적이 없고 읍하였다. 【集說】 陳氏曰 黯字長孺 濮陽人. 太子洗馬 官名. 以嚴見憚 以正直 爲景帝所敬憚也. 主爵都尉 亦官名 中 滿也 中二千石 謂九卿之官 歲俸 滿二千石也. 蚡負貴而驕人 黯獨不爲之屈 但揖之而已 陳氏가 말하였다. “黯은..
霍光 出入禁闥二十餘年 小心謹愼 未嘗有過. 霍光이 禁闥[대궐문]에 드나들기 20여 년, 조심하고 삼가서 일찍이 지나침이 없었다. 爲人 沈靜詳審 每出入下殿門 進止有常處. 사람됨이 침착하고 안정되며 자상하고 살피니, 매양 출입함에 대궐 문에서 내릴 때 나아가고 머무름에 일정한 곳이 있었다. 郞僕射竊識視之 不失尺寸 《漢書》〈霍光列傳〉 郞官과 僕射들이 몰래 표시를 해놓고 살펴보니, 한 자나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集解】 光 字子孟 平陽人 官至大將軍. 光은 字가 子孟이요, 平陽 사람이니, 벼슬이 大將軍에 이르렀다. 禁闥 宮中小門也. 禁闥은 궁중의 작은 문이다. 沈靜 謂不浮躁也 詳審 謂不麤率也. 沈靜은 들뜨고 경박하지 않음이요, 詳審은 거칠고 경솔하지 않음이다. 郞·僕射 皆官名. 郞과 僕射는 모두 官名이다. 不失..
伊川先生家治喪 不用浮屠 在洛 亦有一二人家化之 《二程全書》〈遺書〉 伊川先生의 집안에서는 상사를 다스림에 浮屠의 법을 쓰지 않았는데, 洛水가에 계실 때에 또한 한두 집안이 교화됨이 있었다. 【集說】 陳氏曰 浮屠 佛氏也. 洛 水名 在河南. 陳氏가 말하였다. “浮屠는 佛氏이다. 洛은 물 이름이니, 河南에 있다.” 或問 治喪 不用浮屠 親在而親意欲用之 不知當如何. 혹자가 물었다. “상사를 치름에 浮屠의 법을 쓰지 말라 하였으니, 부모가 살아 계시고 부모의 뜻에 불교 의식을 쓰려고 한다면 마땅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朱子曰 且以委曲開釋爲先 如不可回 則又不可咈親意也. 朱子가 말씀하였다. “우선 곡진히 열어드림을 우선하되, 만약 돌릴 수 없다면 또한 부모의 뜻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
朱壽昌生七歲 父守雍 出其母劉氏 嫁民間 母子不相知者五十年. 朱壽昌이 태어난 지 7세에 아버지가 雍州 수령이 되자, 그의 어머니 劉氏를 내쫓아 민간에 시집가게 하니, 母子가 서로 알고 지내지 못한 지가 50년이었다. 壽昌行四方 求之不已 飮食罕御酒肉 與人言 輒流涕 《宋史》〈孝義列傳〉,《東坡集》 朱壽昌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찾아 마지않았으며, 음식을 먹을 적에 酒肉을 먹음이 드물고, 남과 말함에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集解】 壽昌 字康叔 楊州天長縣人. 壽昌은 字가 康叔이니, 楊州 天長縣 사람이다. 雍卽今西安府. 雍은 지금의 西安府이다. 壽昌年七歲 父巽爲壅州守 出其生母 嫁之民間. 壽昌의 나이 일곱 살에 아버지 巽이 雍州太守가 되었는데, 그의 生母를 내쫓아 민간에 시집가게 하였다. 熙寧初 棄官入秦 與家人訣 誓不見母..
海虞令何子平 母喪 去官 哀毁踰禮 每哭踊 頓絶方蘇. 海虞縣令 何子平이 어머니의 喪에 관직을 버리고 슬퍼하여 몸을 상함이 禮를 넘고, 매양 울고 발을 구름에 갑자기 기절했다가 비로소 깨어나곤 하였다. 屬大明末 東土饑荒 繼以師旅 八年 不得營葬. 마침 大明말기에 동쪽 지방에는 흉년이 들고 전쟁이 뒤따르기 8년, 장례를 치르지 못하였다. 晝夜號哭 常如袒括之日 冬不衣絮 夏不就淸凉. 何子平이 밤낮으로 울부짖어 항상 어깨를 드러내고 머리를 묶는 날[初喪]처럼 하였으며, 겨울에는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는 시원한 곳에 나아가지 않았다. 一日 以米數合爲粥 不進鹽菜. 하루에 쌀 몇 홉으로 죽을 만들어 먹고, 소금이나 채소도 밥상에 올리지 않았다. 所居屋敗 不蔽風日 兄子伯興 欲爲葺理 子平不肯曰 我情事未申天地 一罪人耳. 屋何宜..
南齊庾黔婁爲孱陵令 到縣未旬 父易在家遘疾. 黔婁忽心驚 擧身流汗 卽日棄官歸家 家人悉驚其忽至 《南史》〈庾黔婁列傳〉 南齊의 庾黔婁가 孱陵令이 되어 縣에 到任한 지 10일도 못 되어, 아버지 易가 본가에서 병에 걸렸다. 黔婁는 갑자기 마음에 놀라서 온몸에 땀이 흐르므로 當日로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 식구들이 모두 그가 갑자기 옴에 놀랐다. 【 集解】 南齊 蕭齊也. 南齊는 蕭齊이다. 黔婁 字子貞. 黔婁는 字가 子貞이다. 孱陵 縣名. 孱陵은 縣의 이름이다. 遘遇也. 遘는 만남이다. 父子一體而分 父疾而子心驚汗出 自然之理也. 父子는 한 몸인데 나누어졌으니, 아버지가 병듦에 자식의 마음이 놀라고 땀이 남은 자연의 이치이다. 黔婁卽棄官而歸 故家人 驚其至之速也. 庾黔婁가 즉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으므로 집안 식..
柳玭曰 崔山南 昆弟子孫之盛 鄕族 罕比. 山南 曾祖王母長孫夫人 年高無齒 祖母唐夫人 事姑孝 每旦 櫛縰笄 拜於階下 卽升堂 乳其姑. 長孫夫人 不粒食數年而康寧 《唐書》〈柳玭列傳〉,《柳氏家訓》 柳玭이 말하였다. “崔山南의 형제와 자손의 번성함은 지방 鄕族들 중에서 견줄만한 자가 드물었다. 山南의 증조할머니 長孫夫人은 나이가 많아 이[齒]가 없었는데, 할머니 唐夫人이 시어머니 섬기기에 효성스러워, 매일 아침 머리를 빗고 치포건을 쓰고 비녀를 꽂고는, 섬돌 아래에서 절하고 곧 堂으로 올라가 시어머니에게 젖을 먹였다. 그리하여 長孫夫人은 곡식을 먹지 않은 지 수년이 되었으나 강녕하였다.” 【集解】 山南 名琯 博陵人 爲山南西道節度使 故稱山南 山南의 이름은 琯이요 博陵 사람이니, 山南西道節度使가 되었으므로, 山南이라 칭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