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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萬石君石奮 歸老于家 過宮門闕 必下車趨 見路馬 必軾焉. 萬石君 石奮이 벼슬을 하직하고 집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는데, 궁궐 문을 지날 때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걸었으며, 路馬를 보면 반드시 경례하였다. 子孫爲小吏 來歸謁 萬石君 必朝服見之 不名. 자손이 하급 관리가 되어 돌아와서 알현하면, 萬石君은 반드시 朝服을 입고 만났으며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子孫有過失 不誚讓 爲便坐 對案不食 然後 諸子相責 因長老 肉袒固謝罪改之 乃許 《漢書》〈萬石君列傳〉 자손에게 過失이 있으면 꾸짖지 않고, 한쪽에 있는 방에 앉아 밥상을 대하여도 밥을 먹지 않았는데, 이렇게 한 뒤에 아들들이 서로 꾸짖고, 연장자를 통하여 팔을 드러내고 두 번 세 번 사죄하고 고쳐야 허락하였다. 【集解】 漢石奮 四子 長建 次甲, 次乙, 次慶...
包孝肅公尹京時 民有自言以 白金百兩寄我者死矣 予身子 不肯受 願召其子 予之. 包孝肅公이 서울을 맡았을 때 백성이 스스로 말하였다. “白金 百兩을 저에게 寄託한 자가 죽었으므로 그 아들에게 주었는데, 받으려 하지 않으니, 그 아들을 불러 白金을 주소서.” 尹召其子 辭曰 亡父未嘗以白金委人也. 尹이 그 아들을 불렀으나 사양하여 말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白金을 남에게 맡긴 적이 없었습니다.” 兩人相讓久之 《童蒙訓》 두 사람이 서로 사양하기를 오랫동안 하였다. 【集說】 吳氏曰 公 名拯 字希仁 孝肅 諡也 廬州人. 尹京時 爲京尹之時也. 委人 委寄於人也 吳氏가 말하였다. “公의 이름은 拯이요 字는 希仁이며, 孝肅은 시호이니, 廬州 사람이다. 尹京時란 京兆尹이 되었을 때이다. 委는 남에게 맡김이다.” 呂滎公聞之 曰 ..
近世故家 惟晁氏因以道申戒子弟 皆有法度. 근세의 故家 중에 오직 晁氏 가문에 以道가 자제들을 거듭 훈계함으로 인하여, 모두 법도가 있었다. 群居相呼 外姓尊長 必曰某姓第幾叔若兄 諸姑尊姑之夫 必曰某姓姑夫, 某姓尊姑夫 未嘗敢呼字也. 모여 살면서 서로 부를 적에 外姓의 尊長에게는 반드시 ‘무슨 성 몇째 아저씨, 또는 몇째 형’이라 하고, 여러 고모와 대고모의 남편에게는 반드시 ‘무슨 성 고모부, 또는 무슨 성 대고모부’라 하여, 일찍이 감히 字를 부르지 않았다. 其言父黨交遊 必曰某姓幾丈 亦未嘗敢呼字也 當時故家舊族 皆不能若是 《童蒙訓》 父黨의 交遊[친구]를 말할 때는 반드시 ‘무슨 성 몇째 어른’이라 하고, 또한 일찍이 감히 字를 부르지 않았으니, 당시의 故家와 舊族들이 모두 이처럼 하지 못하였다. 【集說】 陳氏曰..
司馬溫公與其兄伯康 友愛尤篤. 司馬溫公은 그의 형 伯康과 우애가 특히 돈독하였다. 伯康年將八十 公奉之如嚴父 保之如嬰兒 每食少頃 則問曰 得無饑乎? 天少冷 則拊其背曰 衣得無薄乎? 《宋名臣言行錄》, 《范太史文集》 伯康의 나이가 80이 되려 하였는데, 溫公은 받들기를 엄한 아버지처럼 하고, 보호하기를 어린아이처럼 하여 매양 밥을 먹고 나서 조금 지나면 묻기를 “배고프시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으며, 날씨가 조금만 추우면 그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옷이 얇지 않습니까?” 【集解】 公兄 名旦 字伯康. 公의 兄은 이름이 旦이요 字가 伯康이다. 奉之如嚴公 敬之至也 保之如嬰兒 愛之至也. 奉之如嚴公은 공경함이 지극함이요, 保之如嬰兒는 사랑함이 지극한 것이다. 老人 膓胃弱 易飽易饑 氣體虛 易寒易熱 故 公撫問之勤 如此. ..
唐英公李勣 貴爲僕射 其姊病 必親爲然火煮粥. 唐나라 英公 李勣은 존귀함이 僕射가 되었는데도 그의 누님이 병을 앓으면 반드시 친히 누님을 위하여 불을 때어 죽을 끓였다. 火焚其鬚 姊曰 僕妾多矣 何爲自苦如此? 불이 그의 수염을 태우자, 누님이 말하였다. “종과 첩이 많은데 무엇 때문에 스스로 고생하기를 이처럼 하는가?” 勣曰 豈爲無人耶? 顧今姊年老 勣亦老 雖欲數爲姊煮粥 復可得乎 《唐書》〈李勣列傳〉 李勣이 말하였다. “어찌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습니까? 생각해 보건대 지금에 누님이 연로하고 저도 늙었으니, 비록 자주 누님을 위하여 죽을 끓이고자 한들, 다시 뜻대로 되겠습니까?” 【集說】 吳氏曰 勣本姓 徐 爲唐相 封英公 賜姓李 字懋功 曹州人. 吳氏가 말하였다. “李勣의 本姓은 徐氏이니, 唐나라 재상이 되어 英公에 ..
隋吏部尙書牛弘弟弼 好酒而酗. 隋나라 吏部尙書 牛弘의 아우 牛弼이 술을 좋아하고 주정을 하였다. 嘗醉 射殺弘駕車牛 弘還宅 其妻迎謂弘曰 叔射殺牛. 언젠가 취하여 牛弘의 수레를 끄는 소를 활로 쏘아 죽였는데, 牛弘이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아내가 牛弘을 맞이하며 말하였다. “시숙이 소를 쏘아 죽였습니다.” 弘聞 無所怪問 直答曰 作脯. 牛弘이 듣고 괴이하게 여겨 묻는 바가 없고 다만 대답하였다. “포를 만들라” 坐定 其妻又曰 叔射殺牛 大是異事. 牛弘이 좌정하자 그의 아내가 또다시 말하였다. “시숙이 소를 쏘아 죽였으니, 크게 이상한 일입니다.” 弘曰 已知. 顔色自若 讀書不輟 《隋書》〈牛弘列傳〉 牛弘이 말하기를 “이미 알고 있소.”라고 하고 안색이 태연자약하며 독서를 그치지 않았다. 【集說】 陳氏曰 弘 字里仁 安定..
楊播家世純厚 敦義讓 昆季相事有如父子. 楊播는 가문이 대대로 순후하고 의리와 겸양에 돈독하여, 형제가 서로 섬기기를 부자간처럼 하였다. 椿·津恭謙 兄弟旦則聚於廳堂 終日相對 未嘗入內 有一美味 不集不食. 楊椿과 楊津은 공손하고 겸손하여 형제가 아침이면 대청에 모여 종일토록 서로 마주하여 안에 들어간 적이 없었으며, 한 가지라도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형제들이 모이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 廳堂間 往往幃幔隔障 爲寢息之所 時就休偃 還共談笑 《北史》〈楊播列傳〉 대청마루 사이에 왕왕 휘장으로 칸막이를 막아 자거나 쉬는 장소로 삼고, 때로 나아가 쉬면서 눕고 또 함께 담소하곤 하였다. ▶ 還 : 다시, 또, 도리어 【集說】 陳氏曰 播 字延慶 北朝人. 昆季 兄弟也. 椿 字延壽 津 字羅漢. 偃 猶臥也 陳氏가 말하였다. “播..
晉咸寧中 大疫. 晉나라 咸寧 연간에 크게 역병아 돌았다. 庾袞二兄 俱亡 次兄毗復危殆 癘氣方熾 父母諸弟皆出次于外 袞獨留不去. 庾袞의 두 형이 함께 사망하고, 다음 형인 庾毗도 다시 위태하여 병의 기세가 한창 성하였으므로 부모와 아우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 머물렀으나 庾袞은 홀로 남아 떠나가지 아니하였다. 諸父兄 强之 乃曰 袞性不畏病. 父兄들이 떠나라고 강요하자, 말하였다. “저는 마음에 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遂親自扶持 晝夜不眠 其間復撫柩 哀臨不輟. 마침내 친히 형을 부축하여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았으며, 그동안에 또 죽은 형의 靈柩를 어루만져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如此十有餘旬 疫勢旣歇 家人乃反 毗病得差 袞亦無恙 《晉書》〈孝友列傳〉 이처럼 한지 十餘旬[백여 일] 만에 병의 증세가 이미 수그러들었..
晉右僕射鄧攸 永嘉末 沒于石勒 過泗水 攸以牛馬 負妻子而逃 又遇賊 掠其牛馬 步走 擔其兒及其弟子綏. 晉나라 右僕射 鄧攸는 永嘉 말년에 石勒에게 敗沒하여 泗水를 지났는데, 이때 鄧攸는 牛馬에 처자를 업히고 도망하다가 또 도적을 만나 그 牛馬를 약탈당하고 걸어 도망치면서 그의 아이와 및 그 동생의 아들 綏를 업고 갔다. 度不能兩全 乃謂其妻曰 吾弟早亡 唯有一息 理不可絶. 止應自棄我兒耳. 幸而得存 我後當有子. 두 아이를 온전히 보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에 그의 아내에게 말하였다. “내 아우가 일찍 죽고 오직 한 자식이 있으니, 도리상 후사를 끊을 수 없소.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우리 아이를 포기해야 하겠소. 다행히 우리가 생존하면 우리는 훗날 자식을 두면 될 터이오.” 妻泣而從之 乃棄其子而去之 卒以無嗣 《晉書》〈..
王祥 弟覽 母朱氏遇祥無道. 王祥의 아우인 王覽의 어머니 朱氏는 王祥을 대우하기에 無道하였다. 覽年數歲 見祥被楚撻 輒涕泣抱持. 王覽은 나이 몇 살에 王祥이 楚撻당함을 보면 그때마다 눈물을 흘려 울며 안고 붙잡았다. 至于成童 每諫其母 其母少止凶虐. 그리고 成童함에 이르러서는 매양 그 어머니에게 간언하니, 그 어머니도 흉학함을 조금 그쳤다. 朱屢以非理使祥 覽與祥俱 又虐使祥妻 覽妻亦趨而共之 朱患之 乃止 《晉書》〈王祥列傳〉 朱氏가 여러 번 도리가 아니게 王祥을 부리면 王覽은 王祥과 함께하고, 또 王祥의 아내를 학대하며 부리면 王覽의 아내 또한 달려가서 함께 하니, 朱氏는 이것을 걱정하여 마침내 王祥 內外에 대한 학대를 중지하였다. 【集解】 王覽 字玄通. 王覽은 字가 玄通이다. 覽年幼 見兄被楚撻 抱持泣諫 其友愛出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