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古岸子
庾敱墮幘- 庾敱가 머리싸개를 떨어뜨리다
晉書
<晉書>의 記事이다.
庾敱字子嵩 穎川鄢陵人.
庾敱의 字는 子嵩이니 穎川 鄢陵人이다
長不滿七尺 而腰帶十圍.
키가 7척이 되지 못하였으나 허리띠는 열 뼘이나 되었다.
雅有遠韻 參東海王越軍事 轉軍諮祭酒.
평소에 원대한 운치가 있었다. 東海王 司馬越의 軍事에 참여하였다가 軍諮祭酒로 옮겼다.
時劉輿見任於越 人士多爲所構.
이때 劉輿가 사마월에게 위임을 받아 권세를 휘두르자, 사람들이 많이 얽혀들었다.
惟敱縱心事外 無迹可間.
오직 庾敱는 마음을 世俗 밖에 두어 행적에 빈틈이 없었다.
▶事外: 尘世之外
後以其性儉家富
뒤에 그 성품은 검소하나 집은 부유하였다.
說越 令就換錢千萬 冀其有吝因此可乘.
劉輿는 사마월을 설득하기를, 유애에게서 천만 냥을 빌리되, 그가 인색한 마음을 가지기를 바라고 그것을 구실로 해치자고 하였다.
越於衆坐中問敱.
사마월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유애에게 물었다.
敱頹然已醉 幘墮机上.
유애는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이미 취하여 머리싸개가 책상 위에 떨어져 있었다.
以頭就穿取 徐答云
下官家故有兩千萬. 隨公所取矣.
머리로 그것을 쓰면서 서서히 대답하였다.
“下官의 집에 예로부터 2천만 냥이 있는데, 公을 따르며 가지게 된 것입니다.”
輿於是乃服.
유여는 이에 탄복하였다.
越甚悅. 因曰 不可以小人之慮度君子之心. 後石勒亂被害.
사마월도 몹시 기뻐하여 말하였다.
“小人의 생각으로써 君子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구나.”
後石勒亂被害.
뒤에 石勒의 난리에 해를 입었다.
[註解]
▶晉書- <晉書> <列傳> 21의 기사임. <世說新語> <雅篇篇>에도 있음.
▶石勒- 後趙를 創立한 임금으로 羯人이다. 본래 장사도 하고 도둑질도 하다가 劉淵의 부하로 들어간 것이 인연이 되어 뒤에 後趙를 세우고 帝라고 僭稱하였음. 五胡十六國 중에서 가장 강성하였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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