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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9.隠遁性向(은둔성향)

구글서생 2023. 6. 10. 20:16

선비의 의식구조-9.隠遁性向(은둔성향)

 

□ 消遥巾과 混沌酒

 

조선왕조 중엽의 학자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어느 날 이 퇴계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조식(曺植)이 일찌기 정몽주의 진퇴에 관하여 의심을 하였읍니다만 제 생각에도 포은의 죽음이 자못 가소롭습니다. 공민왕조에 대신 노릇을 13년이나 하였으니 벌써 「불리하면 벼슬을 그만 둔다」는 옛 성현의 의리에 가히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읍니까. 』

 

여말에 야은 길재(冶隱 吉再)가 목은 이색(牧隱 李穡)에게 그의 거취에 대해 물은 일이 있다. 이때 목은은

『나 같은 무리는 대신이기 때문에 나라와 더불어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해야 하니 물러갈 수 없거니와 그대는 물러갈 만하다.』했다.

길재는 이 말을 듣고 거취를 결정하고 목은에게 돌아갈 것을 고하니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써 주었던 것이다.

 

『나는 기러기 한 마리 하늘 높이 떠 있네. (飛鴻一箇在寬寬)』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우고 태조가 된 이후 목은을 찾아가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도움을 청했을 때 그는,

『나는 앉을 곳이 없다. 망국의 대부는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못하고, 다만 마땅히 나의 해골을 가져다가 고산(故山)에 묻을 뿐이요. 』

했던 것이다.

 

이상의 몇 실례만을 미루어 봐도 선비는 의롭지 못한 일을 당했을 때는 서슴없이 벼슬을 버리고 산천에 은둔하는 도피사상의 체질화가 주요 요건이었음을 알게 된다.

 

『산에 고사리가 있으니 가히 굶주림이 없을 것이요, 집에 거문고와 책이 있으니 가히 스스로 즐길 수가 있는 것이다. 예물로 은근히 불러도 처사성(處士星)은 관온하였네. 천고에 빈 산중에 한 줄기 맑은 바람이 이는구나.』

 

이 글은 태종이 출세를 권하고저 직접 원주 치악산 중까지 찾아 왔으나 만나 보지도 않고 돌아가게 했던 고려 절신 원두표(節臣 元斗杓)의 무덤을 둔 한강(寒岡)의 시다.

 

서울 관악산과 동쪽으로 마주 보고 있는 산이 청량산이다. 그 산정에 오르면 널펀한 암반에 기둥을 세워 초막을 지었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유지가 바로 고려가 망하자 이곳에 은둔하고 살며 개성을 바라보며 살았던 조견(趙狷)의 유지인 것이다. 그는 은둔한 연후 이름을 바꾸어 견(狷)이라 하고 자를 종견(從犬)이라 고쳤는데 이것은 대개 나라가 망했는데도 죽지 않음은 개와 같고 개는 그 주인을 연모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태조가 그 절개를 칭찬하고 청계산을 찾아가 만났는데 그는 손을 올려 읍만하고 절을 하지 않았으며 할 말을 기탄없이 해버렸던 것이다. 태조가 이런 곤욕을 모두 용납하고 청계산에 돌집을 지어 주었는데 그는 끝내 그 집에 거처하지 않고 양주 송산으로 옮겨가 살았던 것이다.

 

이 고사로 청계산 정상을 지금도 망경봉(望京峰)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고려에 절개를 지키고 산속에 은둔한 사람은 허다하며 이 조선왕조 초의 은둔은 그 후의 선비들에게 막대한 정신적 양식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이 나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을 때 이 은둔의 곡선이 다시 폭을 이루었고 그중 대표적인 은둔 선비로서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여, 남효온 등이 손꼽히고 있다.

 

유명한 김시습의 방랑은 고사하고라도 주천현(酒泉縣) 산골 속에 숨어, 벼슬아치가 평복을 하고 찾아와도 마치 염병(染病)환자처럼 접하기를 거절했던 원호(元昊, ?~?), 선산 강정리(善山 綱正里)에 숨어 살면서 30년 동안 문밖을 나가지 않았던 이맹전(李孟專, 1392~1480), 해주 백이산(伯夷山)에 들어가 백이를 흠모하고 숨어 살았던 조려(趙旅, 1420~1489) 등은 이 은둔 사상을 실천한 손꼽히는 선비들이었다.

 

이 여말의 은둔 선비와 단종의 은둔 선비들의 영향이 주자학과 영합하여 토속화된 한국적 학문의 일파로 정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처신에 강한 구속력을 갖는 이 은둔 성향의 유학자를 「청담학파(淸談學派)」라 했는데 이들은 명리(名利)의 세상을 눈 아래 보는 초속적인 청담주의, 풍류주의에 경도(傾倒)하여 소위 晉나라의 죽림칠현(竹林七賢) 같은 처세를 자처한 것이다.

 

남효온, 홍유손 등을 중심으로 6~7명이 성종 13년에 일종의 모임을 조직, 동대문 밖의 성하 죽림동(城下 竹林洞)에 모여 소요건(逍遙巾)이라는 두건을 쓰고 술을 마시며 시가무답(詩歌舞踏)하고 때로는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시사를 비평하는 등 자기 도취와 자기 위안을 모색했던 것이다.

 

남효온은 재주와 행실은 뛰어났으나 벼슬을 거부하고 옷과 음식은 누추하였다. 항상 암말(雌馬)을 타고 다녔으므로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따라다니며 웃었지만 아랑곳이 없었다.

 

고양의 강촌에 살았던 그는 당대의 이름난 선비와 약속하고 한강의 압도(鴨島)에 가서 자면서 갈대로 불을 피우고 물고기와 게를 잡아 구워 먹으면서 시를 지어 즐기곤 했다. 매양 세상일에 비분하여 혹은 모악에 올라가서 큰소리로 넓게 울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과격한 논조로 바른말을 하여 비록 시국의 기휘에 저촉되어도 꺼려함이 없었으니 문우였던 정여창,김굉필이 경계하고 말려도 끝내 듣지 않았던 것이다.

곧 청담학풍은 벼슬을 처음부터 거절하고, 문재와 학식을 가꾸어 학덕과 인덕을 높여 당대의 명인과 교유하면서 반체제적인 언사와 행실을 대담히 하는 일종의 데카당풍이랄 수 있겠다. 이같은 풍조는 도교 및 노장사상과 야합하여 일시적이 아닌 본격적인 은둔선인 사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전형적인 인물로는 갑자사화에 화를 입은 정희량(鄭希良)을 들 수 있다.

그는 「混沌」이라고 자신이 이름을 지은 自家酒를 꼭 마셨는데 이는 거르지도 또 짜지도 않은 술이었다. 태고 때의 순박함을 숭상하기 위한 술이라 하고 술을 마시고 나면 다음과 같은 노래를 곧잘 불렀던 것이다.

 

나는 내가 빚은 탁주를 마시고,

 

나는 내가 타고 난 천진(天眞)을 온전히 한다.

나는 술을 스승으로 삼으니 성인도 현인도 내 스승이 아니다.

 

그는 이 같은 현세를 탈출하려는 몸부림 끝에 34세 되던 해, 덕수강변에 두 신짝만 남겨놓고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그 후 산중에 나타나 백발의 이름난 도사는 모두 정희량일 것이라는 추정 기록이 허다하게 나돌았었다.

 

이 퇴계가 산중에서 주역을 읽고 있는데 곁에 있던 한 늙은 선사가 구두(句讀)의 틀린 것을 고쳐주자 퇴계는 놀라 이분이 정희량이 아닌가고 엎드려 물었던 것이다.

 

이 선사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정희량은 어버이의 상중에 시묘살이를 하다가 상례를 마치지 못했으니 불효요, 임금의 명을 피해 도망갔으니 충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효도하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하여 죄가 크니 무슨 낯으로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겠읍니까』하고 조금 후에 작별하고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고 옛 문헌에 기록돼 있다.

 

이 같은 은둔사상이 노장(老莊)의 신선사상과 야합하여 속세를 떠나 선계에서 정주하는 풍조로 은둔사상이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 隠遁小史

 

이와 같은 철저한 은둔은 조선 왕조 중엽부터 혹심해진 당쟁 사화가 가속시켜던 것이다.

 

사회 당쟁에 있어 최대의 쟁점은 국역(國逆)이냐 아니냐에 있었다. 반역죄이기 때문에 극형에 처단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충성심의 유무처럼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은 없기에 뚜렷한 증거보다 임금의 총애를 잃어버린 측의 당이 패하는 것이 상례였다.

 

더우기 역대 임금은 이 모반이란 것에 필요 이상으로 과민하였으며, 따라서 간언에 놀아나기 쉬웠고, 정적을 모함하는데 이보다 편리한 수법이 없었기에 모든 것이 국역에 연관되지 않은 사회와 당쟁이 없을 정도다.

 

또한 조선왕조에서는 실없는 풍문에 과민하였고 또 지배철학인 주자학에서는 소학을 중요시 하여 개개인의 사소한 사행(私行)이나 약간의 실태 사회 당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이상과 같은 파쟁이 심하고 불안한 사회에 있어서는 자칫한 의외의 일로 逆臣이 되기 쉽고, 또 서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또 모함하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는 그런 벼슬생활이 괴롭고 긴장되는 나날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같은 현실에서 은둔생활을 희구하는 도피사상은 필연이며 자연스런 추세가 아닐 수 없다.

한국선비의 이상적 생활상태요, 세사로부터 도피, 산천에 묻혀 사는 드가쥬망의 사상은 신라말에 이미 싹텄었다.

 

은둔사상의 비조(鼻祖)로 예외 없이 신라말의 학자 최치원(崔致遠)을 들고 있다. 그는 열두 살에 당나라에 유학, 열여덟 살에 당나라의 進士科에 급제한 수재로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그 많은 당나라의 인재를 제치고 시벌장고병(試伐將 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참전, 그때 그가 지은 [격황소서(敷黄巢書)」는 온 당나라 사람을 울린 명문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가 고국인 신라에 돌아와 잠시 관계에서 일했으나, 중용되지 못했고 얼마 후 관직을 버리고 가야산에 숨어 여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가 은둔을 맘먹게 된 동기로서 다음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거론되고 있다.

 

이미 신라의 왕정이 돌이킬 수 없는 말세에 접어들었던 데 대한 실망 때문이라기도 하고, 그가 당나라에서 익혀온 경론이 난세의 조정에 먹혀들지 않은 데 대한 저항이라기도 하고, 또는 특출난 학식과 문명(文名)에 대한 기성층의 시기와 반발 때문이라기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최치원의 은거가 그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고 조정으로부터 연관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그 면관 이유는 신라의 멸망을 예언하고 고려 태조가 될 왕건에게 글을 보내어 천명이 태조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의견을 밝힌 데 원인이 있다 했다.

 

또는 최치원이 평소 도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 평소에 도피사상을 품고 있었음을 그의 문집의 글을 인용 제시하고 그야말로 도학(道學)의 비조(鼻祖)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이상 최치원이 은둔을 하게 된 것은 이상 열거한 원인 중의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모두가 복합된 것으로 보이며 다만 고려조에 들어가 그의 후손들이 현달하였고 고려 현종(顯宗)은 최치원이 태조에게 보낸 밀서의 공로는 잊을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내사령(內史令)이란 관직을 증직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한 것 등으로 미루어 최치원은 고려조정의 두터운 숭배를 받았고 이 숭배는 자연히 엘리트층에 전도되어 그의 도피생활을 모방하는 문인 학자가 속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같은 은둔사상은 항상 난세나 악정 때 선비들의 보신책으로 노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은둔사상은 1170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후 최충헌(崔忠獻)에 의한 무인정치가 확립된 그 시대에 가장 왕성했었다.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에 보면 그 당시의 은둔실태를「모두들 마치 호랑이 굴을 빠져 나오듯 궁벽한 산속에 숨어 들어 관대를 벗고 여생을 마쳤다」했다.

 

한성한(韓性漢)도 그런 은둔자 가운데 한 분으로 최충헌의 폭정을 보고 처자를 거느린 채 지리산에 들어가 세속과 인연을 끊었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진주 지리산기사에 보면 국왕의 사신을 보내어 그를 끌어내려 했을 때의 얘기가 적혀 있다.

「왕명이라도 손쉽게 받아드릴 수 없다.」

하고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는지라 사신이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벽상에 글이 한 귀절 씌어 있는데

「一片紙綸來入洞 始知名字落人間」

이라 쓰여 있었다.

 

이같은 은둔자는 비단 한성한(韓性漢) 이뿐 아니라 당대 뜻 높은 문인에게 공통된 정신이었던 것이다.

 

고려말기에 이르러 이성계 일당이 정권을 넘나보면서부터 뜻있는 선비들은 난세를 피해 산천에 숨으려는 취향이 농후하였다. 포은, 목은, 야은 등 아호에 숨을 「은(隱)」자를 즐겨 쓴 것도 이 시대 조류의 한 반영이라고 보아진다.

 

이 은둔사상은 조선왕조를 겪어오면서 은둔문학이라는 한 문학의 유량을 형성해 놓았고 또 한국인의 정신체질로도 정착하여 오늘날까지 그 사상의 연장을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이다.

 

■ 울트라·앙가쥬망과 울트라·드가쥬망

 

조광조(趙光祖)가 중종 때에 임금의 마음과 행동을 바로 잡는 것으로써 자기의 직책을 삼아서 임금에게 간할 때에는 허락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면 그만두지 아니하였고 또 악한 자를 미워하고 착한 이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회피함이 없었다.

한 친구가 말하기를,

『자네가 비록 충성스럽고 곧기는 하나 명철하게 몸을 보전하는 도리에 어김이 없는가.』

하니 정암(조광조의 아호)이 말하기를,

『내가 곧은 도리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다행히 살면 살고 혹 불행하여 죽으면 죽을 것이다. 화(禍)와 복(福)은 하늘에 있는 것이니 내가 어찌 두려워하리오.』

하였다.

 

선조가 이퇴계를 대접하는 것이 예우가 극히 융숭하였는데도 퇴계가 조정에 들어오는 것이 드물고 와도 또한 곧 돌아가므로 어떤 사람이 묻기를,

『임금께서 공을 대우하는 것이 옛날에 소열황제(昭烈皇帝)가 제갈무후(諸葛武候)를 대우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도 오래 머물지 아니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퇴계가 말하기를,

『요순 때에는 임금과 신하가 서로 합함이 천고(千古)에 비할 데가 없었지만은 그래도 오히려 그 말이 옳았느니 그 말은 틀렸느니 하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 주상(主上)께서는 노신(老臣)의 말에 가부를 묻지 아니하고 문득 이를 좇으시니 나는 이 때문에 감히 머물지 못한다.』

하였다.

 

양공(兩公)의 처신하는 것이 같지 아니함이 이와 같았으나 모두 정인군자(正人君子)가 되었다.

 

서로 극단인 과격과 은둔은 이처럼 한국 선비사회에서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이 같은 은둔의 전통 때문에 은사에게 쏠리는 성망은 조야간에 대단하였다. 곧 존경의 대상이요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 많은 선비들이 추종하게 마련이었다. 이 같은 구심점 구실 때문에 드가쥬망 은둔파워가 형성되고 이 은둔파워는 질시당하고 모함을 받아 중종 사화로 비약했던 것이다.

 

■ 뻐꾸기 隱士

 

이희안(李希顔)이 고령현감이었을 때 경상감사 정언각(鄭彦慇)은 사특한 사람이어서 그 어진 것을 질투, 심히 구박하였다. 이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니 언각이 아뢰어 죄주기를 청하였다. 호조판서 조사수(趙士秀)가 이 문제를 두고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수령이 능히 행정을 옳게 하지 못하여 관(官庫)를 탕갈(還渴)되게 하고는 어떻게 할 계책이 없어 갑자기 벼슬을 버리고 가는 것은 죄가 그보다 더 클 수 없읍니다. 지금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란한데 중앙과 지방에서 법을 잘 지키지 아니하니 청컨대 언각의 아뢴 대로 하소서.』

하였다.

장령유중영이 이에 반대하였다.

『무릇 수령으로서 재물을 탐하고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반드시 벼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니 능히 벼슬을 버리고 가는 자는 반드시 재물을 탐하고 백성을 학대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우기 조정에서 선비를 대접하는 데 있어 마땅히 예절을 숭상하여 염치를 길러야 할 것이니, 법을 가지고 압박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희안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나왔는데 한번 벼슬을 버리고 갔다고 하여 중한 죄로 다스리면 조정의 선비 대접하는 체통을 손상하는 것입니다.』

고 했다.

 

박영지(朴永之)란 사람이 있어 서울 북부 준수방(俊秀坊)에 우거(寓居)하였다. 사람됨이 너그러워서 시속에 혼동되지 않았다. 초립을 만들어 생활을 하였으나 부지런하지도 아니하여 의식이 군색하나 마음만은 편하였다. 수학에 통하여 말하는 바가 징험되는 것이 많았다. 중간에 오랫동안 소식이 없더니 선조(宣祖) 정해(丁亥) 무자(戊子) 년 간에 흔연히 나타나 선비들을 보고,

[평안도 지방에 살 길을 찾아갔다가 거의 10년 만에 서울에 돌아와 보니 인심 풍속이 전일보다 크게 달라져서 위로 조정 사대부에서부터 아래로 민간의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을 내려다보고 제가 잘난 척하는 풍습이 있으니 흙처럼 한꺼번에 무너지고 기왓장처럼 함께 풀어질〔土崩瓦解〕형세가 이미 이루어졌읍니다. 만약 나의 소견을 고집하면 저들이 반드시 대항을 할 것이며, 만약 몸을 굽혀 저들을 따르면 도리어 사체(事體)에 손상이 될 것이니 물러가 산림에 누워 계시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

하였다.

선비들은 그의 말에 깊이 감복하긴 하였지만 그대로 하지 못하였더니 그 뒤에 역옥(逆獄)의 변이 3년 동안이나 끝나지 않았으며 왜적의 화가 밀어닥쳤던 것이다. 그 후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며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다.

 

정경세(鄭經世)가 소지에 최영경(崔永慶)을 방문하였더니 최가 말하기를,

『내가 지금 놀러 나가기 때문에 함께 조용히 담화할 수 없으니 나를 따라가세.』

하였다.

이에 응낙하고, 나갈 때에 보니 최를 따라 같이 가는 자가 백여 명이나 되어 장사진을 이루어서 들판에 뻗쳤었다. 정이 마음으로 이러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곳에서 자고 다음 날 최가 돌아온 뒤에 가보니 최가 말하기를,

『어제는 왜 오지 않았는가.』

하였다. 정은 다른 말로 핑계하여 답하였다.

『최가 산림의 선비로서 그 몸가짐이 이와 같으니 화를 받을 것이 당연하다. 』

정이 그때에 나이 겨우 약관인데도 눈이 밝고 노숙하기가 이와 같았다.

 

반면에 이 은둔거사에 쏠리는 존경과 명망 때문에 가짜 은사도 더러 생겼던 것 같다.

 

탄옹(炭翁 :權諰)이 희롱하는 말을 좋아하였다. 그의 익살가운데,

『지금의 은사들은 '뻐꾹은사' 다.』

는 말이 유명하다. 그 말의 뜻을 물으니 옹이 말하기를,

『봄(春)에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할 때 제 몸을 숨기고서 친구들로 하여금 찾아내라 하였다가 찾아낼 사람이 오랫동안 찾지 못하면 한참 동안 몸을 숨겼다가 문득 스스로 '뻐꾹' 하며 소리를 내니 그것은 저를 찾는 사람이 빨리 오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은사들은 선비(士)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고 나면 곧 세상에서 자기를 찾지 못할까 겁을 내어 반드시 알리는 방법을 쓰니 이것이야 말로 제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 스스로 뻐꾹 하며 부르는 것이 아닌가.』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