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굴뚝이 낮은 이유
농촌의 골목길을 걸어보면 연돌 높이가 지붕 높이를 웃돈다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럽 농촌을 걸어 보면 벽돌로 쌓은 우람한 연돌 들이 지붕 위로 우뚝우뚝 솟아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서양의 연돌은 마치 부의 상징 인양 하늘 높이 치솟아 연기를 내어 뿜고 있음을 본다. 한데 한국의 연돌은 마치 그것의 노출이 부끄러운 듯 처마 밑에 초라하게 숨겨져 있으면서 연기를 위로 뿜는 것이 아니라 벽이나 처마에 반사시켜 아래로 내려 깔고 있다.
연돌이 높을수록 불을 잘 들인다는 물리의 ABC를 한국인이 몰랐다는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면 수천 년 동안 수천만 명이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그까짓 간단한 이치를 발견 못했다고는 믿어 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또 짚으로 이는 처마 밑의 연돌이 불을 일으킬 불안한 요건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을 게다. 한데 한국의 연돌은 언제나 높아지는 법이 없다. 왜 그랬을까.
한국인은 의식주란 인간생존의 본능적 필수를 노출하거나 공개한다는 것을 수치로 알고 부덕으로 알았기 때문에 밥을 짓고 방을 따숩게 하는 이 본능적 존재방식의 한 표현인 연기를 은폐했을 뿐이다.
밥을 짓고 밥을 먹는 일은 생존의 가장 근본 조건이기에 숨어서 하는 것이 도리였다.
홍콩의 거리나 사이공의 길바닥에서 온가족이 함께 외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길가의 카페에 앉아서 햄버거를 씹고 페르샤 사람들이 방석만한 넌(빵)을 목에 걸고 길을 걸으면서 뜯어 먹는 -그런 공개적인 본능 행위를 한국인은 할 수가 없다. 마치 성행위 같은 본능 행위의 일환으로 숨어서 먹는다.
밥 먹는 도중에 손님이 오면 밥을 먹다 말고 반사적으로 밥상을 치우는 한국인의 습성은, 반찬이 없어 낯부끄러운 것을 모면하기 위한 행위만은 아닌 것이다.
비단 먹는 것뿐만이 아니다. 잠잔다는 본능 행동도 수치로 안다. 한국인은 잠잘 때만 이부자리를 펴고 자고 나면 이불을 개서 벽장에 숨겨둔다. 만약 숨겨둘 곳이 없어 옷장 위에 쌓아놓게 되면 반드시 이불보로 덮어 은폐를 한다. 곧 사람이 잠잤다는 흔적을 소멸시켜 버린다.
서양의 침대가 잠잤다는 흔적을 고스란히 노출시켜 놓은 것과는 적이 대조적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집에서는 빨래 가운데 이불잇, 요잇, 벼개잇, 홑이불 등 침구에 관련된 빨래는 여자의 내의와 더불어 앞마당에서 말린다는 법이 없고 반드시 뒷마당에 다 말려야만 했다.
북관(北關)지방에서 부부싸움을 하다가 부부 가운데 누군가가 벼개를 마당에 던지면 그것은 파경을 뜻하였다. 침실 용구의 외부노출은 곧 성생활의 노출인 양 이같이 큰 뜻을 가졌었다. 서양의 교자와 한국의 방석과의 콘트라스트도 그렇다. 손님이 오면 방석을 내어놓고 손님이 가면 방석을 치워버린다. 곧 편하게 앉는다는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안락에 한국인은 죄악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데 서양의 교자는 항상 그곳에 있으면서 안락을 유혹하고 있다.
한국인의 고유의상이 육체의 철저한 은폐에 있었음도 그 같은 생활감각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장옷으로 눈을 제외한 얼굴을 가리고도 못다 가려 소매통을 넓게 하여 사람 앞에 나타나면 손까지 소매통에 감추도록 했다. 곧 옷소매통이 큰 한국 저고리의 저의는 이같은 일련의 본능 죄악감각에서 이해될 수가 있다.
□小學主義
『 「소학」은 비록 소자(小子)의 학(學)이라고 일컬으나 「소학」읽기를 마치고 「대학(大學)을 읽더라도 「소학」을 버리고 「대학」만을 일삼는 것은 아닙니다. 「소학」은 성학(聖學)의 시작이요 「대학」은 성학의 끝입니다. 집을 짓는데 비유하면 「소학」은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하는 것이요 「대학」은 그 터에 재목을 가지고 집을 짓는 것이 됩니다. 주자(朱子)의 소학제사(小學題辭)에 「뿌리를 북돋우어 가지를 뻗게 한다」하였으니 「소학」은 뿌리요, 「대학」은 가지입니다』
이 퇴계가 선조에게 아뢴 소학 중용론이다.
선비행동의 기초행동을 규격한 이 책은 내편(內篇) 외편(外篇)으로 나뉘었고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 꼐고(稽古)등이 내편이고 가인(嘉人), 선행(善行) 등이 외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르치는 법을 서술한 입교는 태교(胎敎)로부터 시작하여 인륜(人倫), 육행(六行), 육예(六藝)에 이르는 교육법을 중국의 옛 고사를 곁들여가며 적어 놓았다.
<부인이 아이를 임신하면 잠을 기울게 자지 아니하며 앉기를 비뚤어지게 하지 아니하며 한쪽 발을 들고 서지 아니하며 눈으로 부정한 것을 보지 아니하며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어린이 교육은 「아이가 밥을 먹거든 오른손으로 먹기를 가르치며 남자는 대답을 빨리 하게 하고 여자는 대답을 느리게 하게 하며 남자는 가죽띠를 매고 여자는 실띠를 매느니라.」고 가르치라 했다.
오륜(五倫)을 밝힌 명륜(明倫)의 장에는 부모에 관한 것이 많다.
「부모를 섬기는데 부모가 잡수시고 싶은 음식을 물어서 만들어 온 것을 온화한 안색으로 드리고 부모가 맛을 본 연후에 물러 나오느니라」,
「부모를 쳐다볼 때에는 부모의 안면까지 올려 보지 말며 띠 아래로 내려보지 아니 하느니라」,
「부모가 병이 나면 웃어도 이(齒)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고기를 먹어도 배부르지 않게 하고 술을 마셔도 얼굴이 변하게 하지 아니 하느니라」,
「어른의 시책이나 기물이 앞에 걸리면 앉아서 옮겨 놓고 넘지 아니하느니라」,
「손님 앞에서는 개를 꾸짖지 아니하며 ……」,
「존장에게는 나이를 묻지 아니하고 길 가는데 행방을 묻지 아니하며」
경신(敬身) 편은 예의범절의 가르침이다.
[마루에 오를 때는 반드시 소리가 나게 하며 문밖에 신이 두 켤레가 있거든 말소리가 안 들려도 들어가지 않느니라, 문에 들어설 때는 반드시 아래를 내려다 보며 ……」
「맹자가 신혼(新婚)한 지 얼마 안되어 아내의 방에 들어가면서 문을 왈칵 열었더니 아내가 옷을 벗고 싫게 하고 있었다. 맹자는 불쾌하여 문을 닫고 나온 뒤에 다시 안에 들지 아니하니 그의 어머니가 알고 아들을 불러서 꾸짖기를, 너의 아내가 무례한 것이 아니라 네가 먼저 무례하였다 하고 예절에는 마루에 오를 때 소리가 나게 하며 …………」
「밥숟갈을 크게 뭉치지 말며 국물을 쭈르르 마시지 말고 뼈를 씹지 말고 더운 것을 후후 불지 말며 남보는 데서 이를 쑤시지 말고 …………」
「서 있는 이에게 앉은 채 물건을 건네주지 말고 앉아있는 이에게 서서 건네지 말지며......]
이처럼 가혹하리만큼 행동에 제약을 주는 실천적 학문이었다. 그러했으므로 이 소학 지상주의를 도학이라 불렀고 이 행동철학이 중세기 이후의 이씨조선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이 소학의 기풍을 일으킨 이가 한국 도학의 비조(鼻祖)로 치는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이었다. 그는 나이 30이 넘도록 어린이가 배우는 「소학」을 읽고 터득하고 실천하였으며 자타가 늙어서도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는 굉장한 혁명을 하였다.
부모를 위하고 형제나 친구가 화목하는 등의 도리는 옛부터 있었지만 그러한 여러 가지 도리를 소학을 헌장으로 하여 규격화한 행실로 실천한 사람으로는 그가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조석으로 대부인(大夫人)에게 문안드렸고 서당에 나와 동상(銅像)처럼 움직이지 않고 앉아있으며 가법(家法)을 세우고 월삭(月朔)에 독법(讀法)의 식을 올린 것도 모두 소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희천(熙川)에 있을 때 대부인에게 바칠 꿩을 잘못 지켜서 고양이에게 빼앗긴 아이를 꾸짖다가 그 곁에 있던 젊은 제자인 조광조에게 꾸짖음의 과실을 사과한 것은 「소학」에 나오는 허물을 두 번 짖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이행한 것이다.
그가 순천에서 최후의 참형을 당하는 날에 수염을 입에 물고 조용히 타계한 것도「소학」에 있는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여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죽으면서까지 실천한 것이다.
이와 같은 소학혁명은 서정(抒情)에 대한 서사(抒事)의 부홍이고 시에 대한 반시(反時), 자유에 대한 교조(敎條), 자연에 대한 규제, 성정(性情)에 대한 성리(性理)의 혁명을 몰아왔다. 인간성·본능·감정·생리까지를 포함한 인간을 도리의 규제 속에 극소화시키는 행실철학을 일으켰으며, 이것은 여느 다른 외국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김굉필과 교우하면서 그의 소학이론에 영향을 크게 받았던 정여창은 철저한 반시·반성정으로 외골의 소학적 인생을 고수한 사람이었다.
「시란 성정에서 발로한 것이니 어찌 힘써 그를 공부할 것인가」
하며 일생동안 꼭 한편의 시를 썼을 뿐이라는 정여창은 성리의 화신이었다.
그는 김일손(金馹孫)과 더불어 지리산에 동행한 일이 있었다. 김일손이 지은 그 산등기(山登記)에는 정상에 있는 성모묘(聖母廟) 앞에서 정여창이 취한 행동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누구든지 영산(靈山)에 오르면 그 외포에서 산령에게 절을 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성정이다. 김일손은 이 성모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정여창은 이 김일손의 행동을 꾸짖고 끝내 이를 거부하였다.
정여창에게는 이 산신령에 대한 절이 성정에서 일어난 행위요, 「소학」이 규정한 잡신의 일종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낭만이 없는 이 드라이 한 「소학작풍」은 곧 선비 사상의 기조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육체적 유혹, 정신적 유혹, 곧, 성정적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선비들은 그 성리의 옥구(獄具)로 그들 육신을 고문하는 속까지 상습화하기에 이르렀다.
성균관에 있을 때 정여창은 앉아서 눈을 뜬 채 코를 골고 자는 습성이 있었다 한다. 이와 같은 정여창의 습성을 두고 참선한다 하여 당시 사도(邪道)로 쳤던 불교·도교의 아류라고 비방을 받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건 참선이 아니라 성리로 육신의 본능적 욕구를 콘트롤하여 성정을 다잡아 소학적 인격을 구축하는 기초 행습이었던 것이다.
□ 고요의 精神工場
이 소학의 행실철학은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趙光祖)가 이끄는 소장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정치철학의 한 「맥류」를 형성하였고 김굉필의 제자인 김안국(金安國)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각 고을의 향교에서 소학을 가르치게 하여 주로 경상도에서 소학에 기초를 둔 도학이 크게 일었고 이 도학에 의한 행실을 해야 진실한 유생이요, 선비로 알게까지 하였다.
그 후 조광조·김식(金堤)·김정(金淨) 등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소학파 소장학자들이 학살 또는 숙청당하는 정변이 있은 후에는 수십년 동안 국내에 소학 읽는 소리가 멎었고, 소학 책을「귀봉(鬼棒)」이라 하여 태워버리는 취향까지 있었다. 하지만 뜻있는 선비들은 이 위험서적을 몰래 간직해 내려오다 선조 때에 이르러서야 이퇴계와 기고봉(奇高峰) 등 거유(巨儒)들이 소학부흥을 하여 한국 유학의 행실철학으로 정착시키고 체질화시켰던 것이다.
사람은 정신력과 육체력이 대결하는 각기 하나씩의 개체이기도 하다. 이 대결은 항상 반비례 관계에 놓여 있다. 육체가 가진 요소인 오욕(五慾)은 물론 수면까지라도 대결시켜 그것을 극소화 시킴으로써 정신력을 극대화시킬 수가 있다. 역사적 어떤 인간이나 또 현대의 어떤 인간은 이 정신과 육체가 마주치는 각기 다른 좌표를갖 고 있으며 또한 그 좌표의 성향이 시대적으로 특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고려시대의 한국인들은 그 엑스(X)와 와이(Y)의 교차 좌표가 중심에서 육체면으로 기울었다면 이조에 들어 서서히 중심점을 넘어 정신면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가 개화기와 더불어 싹튼 반봉건·반성리의 정신 혁명에서 다시 해방 전후에는「휴머니즘」에 자극받고 [실존주의」나「프라그마티즘」에 고무되어 다시 중심점을 지나 육체면으로 극대화하고 있다 할 것이다.
한국 역사상 정신력 축의 극대화를 한점으로 찾는다면 그것은 소학에 의한 행실도학을 철저히 했던 조식(曺植)이 누린 개체의 좌표로 그 점을 가늠해도 대과가 없을 것 같다. 그는 책상머리에 항상 경의도(敬義刀)라는 날카로운 칼을 놓아두고 살았었다. 그 칼의 용도는 육체의 유혹이 그를 사로잡으려 할 때 그 칼을 어루만지며 유혹을 섬짓하게 물리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책을 읽는데 졸음이 오면 그는 기력을 칼날에 집중시켜 손으로 조심스레 어루만진다. 즉 기력의 유도체였다. 그 칼에는,
안으로 밝은 것은 경이오(內明者敬)
밖으로 곧은 것은 의이리(外節者義)
라는 도명(刀銘)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또 항상 쇠방울을 차고 다니면서 기력이 침체한 듯하면 그것을 울려 정신을 깨우쳤다. 그 방울을 성성자(惺惺子)라 이름하고 그의 문인들에 나누어 주며 말했다.
『이 방울의 맑은 소리가 깨우침을 주니 모른 사람이 차면 좋겠다. 내가 이를 중한 보배로 알고 항상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조금만 동작을 하여도 소리내어 경계하고 꾸짖었으니 심히 공경할 만하고 두려워할 것이니 이 방울에게 죄를 짓지 마라.』
문인들이 묻기를,
『옛사람이 옥을 차던 뜻이 아닙니까? 』
하자 그는 옥은 꾸짖질 않으니 그보다 뜻이 더 간절하다 하였다.
그같이 육체적인 것을 무화함으로써 커다란 것을 얻는 그의 지향은 그가 거처했던 뭇 당호(堂號)에서도 나타난다. 계복당(鷄伏堂)이란 그의 당호는 수양함이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다는 뜻에서 지어진 것으로 어떤 커다란 정신적 생산이 약속된 고요의 정신공장임을 시사한다. 또 서실(書室)의 이름을 뇌용사(雷龍舍)라 하고 현판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놓았었다. 燃黎室記述〉
뇌성이 나면 깜깜하고 용이 보이면 깊다.
송장처럼 있다가 용처럼 나타나고 모처럼 침묵하다가 우뢰처럼 소리낸다는 노자의 글귀가 그의 철학에 적절하였으므로 그것을 인용한 것이었을 게다. 정신적 거인의 기상이 완연하다.
청컨대 천석종(千石鍾)을 보시오.
크게 때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는 것을
만고(萬古)에 천왕봉(天王峰・智異山頂)은
하늘이 울어도 산은 안운다.
명종 때 학자 이중호(李仲虎)도 소학행실의 일생을 살았다. 그의 학문의 궁극적 지론은「사람은 누구나 요순(堯舜)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러기 위한 행동의 규제를 주도(主道)로 하였다. 그는 한국학자 가운데 학리(學理)로 인간의 생리를 규제한 극대화의 최고치를 누린 사람이기도 했다.
「동(動)하고 정(靜)한 것이나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모두 하늘(天)이니 터럭 하나의 잘못으로 사는 이치가 모두 이그러지며 멈추게도 된다」는 행동 철학의 소유자이기에 그는 평생 대쪽으로 만든 계명(戒銘)을 허리띠에 차고 다녔으며 죽을 때도 함께 묻어 달라고 하였다.
그 대쪽에는 「안색은 온화하게 가질 것을 생각하며, 이득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라」는 등의 구사(九思)와 「머리모양은 곧게 하고 손가짐을 온순하게 하라」는 등의 구용(九容)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또 경(敬)·의(義) 두 글자를 구슬에 새겨서 홀(笏) 끝에 매달아 그 부딪치는 소리를 항상 들으면서 그 파경(破敬) 파의(破義)의 위기를 의식하여 극복하곤 하였다. 이것은 마치 조식(曺植)이 날카로운 경의도(敬義刀)의 날을 만지면서 각성하고 성성자(惺惺子)라 부른 방울을 차고 다녔던 것과 심신(心身) 규제의 자학기구(自虐器具)들일 것이다.
이와 같은 중세 이후의 유풍은 소학에 근거한 행실의 치밀도에 의해 선비의 질을 따지며 우러러보는 풍조가 있었고 차츰차츰 상민사회에도 이 풍조가 침투하여 한국생활의 가장 뚜렷한 개성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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