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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11.痴愚性向(치우성향)

구글서생 2023. 6. 10. 20:19

선비의 의식구조-11.痴愚性向(치우성향)

 

□ 마음의 벌거숭이 - 禿山辯

 

영등포 가리봉동을 지나 시흥에 이르기 중간지점, 왼편에 1백여m 되는 야산이 있다. 그것이 독산(秀山)이며, 이 산 이름이 연유가 되어 그 인근 마을을 독산동이라 한다. 이 산은 옛부터 벌거벗었기로 그 같은 슬픈 이름을 얻은 것 같다.

 

조선 왕조 초 이곳에 살았던 유명한 선배 강희(姜曦)의 호가 독산이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강희(姜曦, ?~?)를 찾아와 자네가 호를 독산이라 한 것은 살고 있는 지명(地名)을 따른 건가 딴 뜻이라도있는 건가 하고 물었다.

 

이에 그는 그 유명한 독산변(秀山辯)을 늘어 놓았다.

 

『내 집 지은 곳에 산 하나가 있는데 활딱 벗겨져서 나무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독산이라 한다. 어찌 이 산의 토성(土性)이 본래부터 나무가 없어 그러하리오. 한성교외(漢城郊外)에 자리잡은 까닭으로 도끼로 찍히고 소 · 염소 따위에게 먹히는 것이 나날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 산 밑에서 성장하면서 개연히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탄식하면서 그 독산의 처지와 나의 처지를 비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의 본성도 또한 이 산에 나무 있는 것과 같은데 진실로 그 심성을 존양하지 못하면 뭇 사욕이 엄습해 오는 것이 바로 이 산의 나무를 도끼와 소·염소 따위가 해치는 그것과 같다.

물(物)과 아(我)가 이미 대립되고 사심(私心)이 한계를 만들면 나의 본성이 어두워지는 것도 또한 이 산이 활딱 벗겨진 것과 같다.

감히 이것으로 표준하여 스스로 나의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마음에 나무가 없다는 독산변은 어쩌면 현대인에게 공통된 상황의 날카로운 손가락질만 같다. 사욕의 도끼날에 남벌되어 메마르고 벌거숭이가 된…. 그리하여 너도 독산이요, 나도 독산이다.

 

우리 옛 선조들은 이 같은 마음의 벌거숭이, 마음의 어리석음을 자처하는 것으로 사리에 겸손하게 대하는 정신적 전통을 지니고들 살아왔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적힌 시흥(始興) 호암(虎岩)의 도참(圖讚)에서도 이 같은 어리석음에 가치를 두는 인간을 찾아볼 수가 있다.

 

삼성산(三聖山)이 시흥 쪽으로 면면히 뻗어 오다가 부러지듯 단절된 목에 형세가 뛰어갈 것 같은 험한 바위가 바로 호암이다. 범이 달리는듯 하니 도참을 막지 않으면 시흥 고을은 흉재(凶災)를 못 면한다 하여 이 기세를 꺾기 위한 풍수작업이 베풀어졌다.

 

곧 호암 아래 호랑이를 짓누르는 호압사(虎壓寺)를 짓고 또 그 호암이 뛰어내릴 만한 지점에 화살을 상징하는 궁교(弓橋)를 놓고 다시 그 북쪽에 호랑이를 위압하는 사자암(獅子庵)을 지은 것이다.

 

지금도 그 지점에 호압사며 궁교며 사자암이 그대로 남아있다.

 

옛선비 윤자(尹慈, ?~?)가 어사를 그만두고 긍천(矜川=始興) 고을에 원으로 와서 호암의 도참을 듣고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고을 민속이 본래 어리석고 나도 또한 어리석다. 사람들은 모두 바위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고 전부터 그것을 진압하려 한 것도 어리석지 않게 하기 위한 까닭이라 한다.

나는 말하기를 옛적에 광천(狂泉) · 음천(淫泉) · 탐천(貪泉)이 있어 사람이 그 물을 마시면 미치거나 음하거나 탐하거나 하지 않은 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지어졌다 한다.

옛적에 오은지(吳隱之)가 원이 되어서 탐천 물을 마셨으나 마침내 탐하지 않고 청백한 지조를 더욱 지켜내었다.

그리하여 백이(伯夷) 숙제(叔齊)에게 이 샘물을 마시게 해도 마침내 본심을 바꾸지는 않으리라는 시를 지었다.

하물며 사람의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은 당초 태어날 때에 품수가 있는 것인데 어찌 산천이 바꾸어지게 하리오.

가령 이 범바위 밑에 사는 자로서 혹 안자(顔子)의 어짐과 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 어리석지 않은 자가 있는지도 마침내 알 수 없다.

이것으로서 미루어 보면 민속과 나의 어리석음은 바위 때문이라 말하는 자는 진실로 어리석은 자이다.』

 

당나라 유자후(柳子厚)가 염계(冉溪) 풍경을 사랑하여 거기에다 집을 짓고 「염(冉)」자를 어리석을 「우(愚)」자로 고쳐 우계(愚溪)라고 고쳤다.

 

이것은 자기의 어리석음으로 이름 붙인 것인데 어리석지 않음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나의 어리석음은 한마디 말과 한 번의 움직임 어디에 가나 어리석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도 유자후의 우계라는 어리석은 뜻을 가만히 본따서 호암(虎岩)을 우암(愚岩)이라 고쳤다.

그렇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데에야 어찌 하랴. 감히 설(說)을 지어서 어리석지 않은 군자를 기다린다 - .

 

어리석음이 어리석지 않은 한국적 가치관을 이 우암에서 발견한다.

 

□金馹孫의 痴辯

 

충청도 제천의 옛 객관(客館) 서쪽에 군수가 거처하는 치헌(痴軒)이란 집 한 채가 있었다. 어리석은 사람이 사는 집이란 뜻이다. 이 집 이름은 갑자사화 때 화를 입은 학자 김일손(金馹孫)이 그의 친구였던 제천군수 권자범(權子汎)의 부탁을 받고 지어준 당호인 것이다.

 

이 당호를 받아든 권자범은 무척 불쾌하게 생각했다. 왜냐면 자기를 어리석은 자로 농락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김일손은 어리석음이 한국인의 한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음을 적시하는 유명한 치변(痴辯)을 늘어놓았다.

 

『세상 사람들은 말에 영리한데 자네만은 말에 어리석어서 말을 하면 꼭 기휘(忌諱)에 저촉되고 또 세상 사람들은 모양을 차리기에 능란한데 지네만은 차림에 어리석어 남들의 눈에 띄지도 않고 또 세상 사람들은 출세하는 데에 교묘하여 한 관등(官等)만 얻으면 잃어버릴까 근심하는데 자네는 교리(校理)의 청반(淸班)으로서 스스로 낮추어 궁벽한 고을의 현감이 되었으니 이것은 벼슬에 어리석은 것일세. 세상 사람들은 사무에 응함이 민첩하고 백성이 임하는 데는 명예얻기에 민첩하고 윗사람을 받들고 칭찬얻기에 민첩한데, 자네는 홀로 아무 일없이 재간(齎間)에 앉아 휘파람이나 불고 억센 호족(豪族)과 교활한 자를 탄압하여 불쌍한 홀아비와 과부를 무휼(撫恤)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부세(賦稅)를 독촉하는 데는 졸(拙)하니 이것은 정사에 어리석은 것이고....』

 

이같이 권자범의 어리석음을 나열하고 자네가 기거하는 집의 편액(偏額)으로 이 치헌 이상 마땅한 당호가 없다고 했다.

권자범은 이에 어리석은 것으로 자신이 욕되거나 또 불명예가 되는 것은 괜찮지만 그 어리석음으로서 공관(公館)을 욕되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끝내 못마땅해 했다. 이에 김일손은 계속 설득을 했다.

 

『안연(顔淵)의 어리석음과 고시(高柴)의 어리석음 영무자(寧武子)의 어리석음이 모두 공자의 칭찬을 받았고 주무숙(周武叔)의 어리석음은 형벌을 맑게 하고 폐단을 씻게 했는데 어찌 어리석을 치자로 헌의 이름을 짓는 것이 헌을 욕되게 함인가.』

 

애써 자범이 이를 승락하고 앞으로 처세를 애써 어리석게 하여 일생을 어리석게 마치겠다고 하자, 김일손은 어리석음을 의식한 어리석음은 어리석음이 아니니 반드시 애써 어리석게만 살 일이 아니라고 말하자,

 

『내가 교(巧)한 것을 싫어해서 어리석게 살려 하는데 어리석기가 그다지 어려우면 어떻게 어리석게 살 수 있겠는가.』

고 난처한 표현을 하였다. 이에 김 일손은

『정말 자네는 어리석다.』

하니 권자범은 이 치의 이론에 지쳐서 난간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한다. <신승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어리석기가 현명하기 보다 얼마나 어려우며 이 현명한 어리석음이 얼마만한 가치형성을 하고 있나를 알 수 있다.

 

어리석기란 다난한 한국사를 겪은 지식인 선비들의 지혜였고 또 선비들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모든 교육이나 습속에 이 미련하고 어리석어지는 수법이 한 주요한 요소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 벙어리통 處世

 

이조 개국 초기의 상신(相臣)인 남재(南在. 영의정)는 그릇이 크고 호탕하였으며 술을 좋아해서 정승자리에 있으면서 정사에 비판적이고 반항적인 정치가였다.

 

손님만 오면 남정승은 아무 말 없이 바둑판을 내밀고 대국을 했다. 이 바둑 소아병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 사람은 기운이 있으므로 반드시 말을 하게 되고 말하게 되면 조정의 일에 말이 미치지 않기 어렵다. 종일 바둑만 두면 기휘에 저촉되는 말을 피할 수가 있을 것이다. 』

남재의 별호는 「기치(棋痴)」였다.

 

의종 때의 명신 정탁(鄭擢·우의정)은 학자 조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젊었을 때 조식에게 배우고 작별을 하자

 

『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는데 군이 끌고 가게』

하였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하니 조식이 웃으며

『군이 언어와 의기가 너무 민첩하고 날카로우니 날랜 말은 넘어지기 쉬운지라 어리석고 둔한 것을 참작하여야 비로소 능히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므로 내가 소를 준다는 것이네.』

하였다.

곧 마음의 소였다.

 

정탁은 이 마음의 소를 항상 끌고 처세하는 바람에 대과없이 관직을 살아냈다고 항상 그의 친지들에게 말했다 한다. 곧 소는 미련하고 어리석어지는 지혜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선비의 처세술은 요즈음 어린이들의 벙어리 저금통으로 상징되기도 했다. 옛날에도 벙어리통이 선비사회에 통용되었는데 그 벙어리통은 요즈음처럼 저금통으로 쓰였던 것이 아니라 귀 있어도 듣지 말고 입 있어도 말하지 말라는 처세단지로 이용했던 것이다.

 

한양 천도를 마음먹은 이성계(李成桂)는 한양의 풍수 보고를 듣고 한 가지 결함에 무척 언짢아하였다. 좌우의 사(砂)로 미루어 한양에 도읍하면 벙어리가 많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는 명풍수들로 하여금 이 악혈(惡穴)의 보비(福禪) 방안을 모색케 하였다. 결과는 한양 도민들이 미리 벙어리가 되어 버림으로써 이 악혈의 소응을 상쇄시키는 공감주술(共感呪術)이 고안되었다.

 

왕도를 옮기기 전, 옛 고양군(高陽郡) 한지면(漢芝面) 한강리(漢江里)와 마포 벙어리 고개에 아도점(啞陶店)이라는 관립제도소(製陶所)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벙어리 항아리啞陶〕」를 대량으로 만들어 한양 성안 사람들에게 구매를 의무화시켰던 것이다. 사지 않으면 벙어리가 된다기에 한양 사람들은 앞다투어 샀고, 이 벙어리 항아리의 주술적(呪術的) 효과를 위해 신주 단지처럼 가문마다 유전시켰다 한다.

 

수집된 이 풍수적 벙어리 항아리는 보주(寶珠)형으로 생겼고, 길이 1치5푼, 폭 1푼의 돈구멍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속이 텅 빈 소형 항아리다. 일단 돈을 넣으면 빼낼 수 없게 되어 있는 이 벙어리 항아리에는 구멍없는 귀가 양쪽에 붙어 있었다. 입이 있어 먹기만 하고 토하지 않으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 항아리 벙어리로 하여금 인간 벙어리를 주술적으로 대신시킨 것이다.

이 의인화한 벙어리에게 그 주술적 효과를 계속시키기 위해서는 사람처럼 먹여야 한다고 생각하여서 이 벙어리의 밥을 주전(呪錢)이라 불리운 엽전으로 대행시켰다. 부자집에서는 돈을 넣었고 가난한 집에서는 종이를 돈처럼 오린 지전(紙錢)으로 대행시켰다. 풍수적 벙어리가 양속(良俗)인 저금 벙어리로 전화한 그 소치가 이에 있는 것이다.

 

이조 중기에 들어와서는 이 주술적 벙어리가 선비 집안의 처세 신물(神物)로 전화하였음을 본다. 선비가 거처하는 사랑방 상좌에 벙어리 신단을 만들어 이 벙어리 항아리를 얹어 놓고 손님이 오면 그것을 내려 손님 앞에 내어 민다. 이것은 時諱나 시세(時勢)에 관한 화제에서 자신을 벙어리로 소외시킨다는 상징적 전제인 것이다. 즉 시세에 관해서는 듣지도 말하지도 않겠다는 계명적(戒命的)인 묵시인 것이다. 잇따른 무고(誣告)와 사화(士禍)의 연속인 이조 중기의 위험한 선비사회 풍토에서자신을 소외시켜 벙어리가 된다는 것은 가장 현명한 보신술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선비사회의 벙어리 풍습은 이 벙어리 항아리를 「미니」화 시켜 주머니에 끈을 달고 다니는 악세사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한국 선비들의 참여 의식은 퇴영(退嬰)으로 줄달음쳐,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근대 지식인의 기풍을 형성한 주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철저한 자기 소외의 습속이 민족 기질로서 체질화되면서부터 세상에 우둔한 처세를 미화하고, 그런 소극적 철학을 장려하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 같은 선비들의 벙어리 속은 난세나 악정일 때는 플러스적인 가치를 형성하나 성세(盛世)나 선정(善政)일 때는 참여의식을 퇴영(退嬰)시킴으로서 마이너스적인 가치를 형성한다.

 

이조의 역사가 어느 만큼 이 선비들의 벙어리 인생을 플러스적 가치로 또 마이너스적 가치로 이용했는가는 알 수 없으나 이 같은 아웃사이더적 전통이 오늘의 한국인을 무기력하게 하고 소극적으로 만들었으며 또 참여자에 대한 원칙적인 시기심을 체질화시켰던 것만은 부인할 수가 없다.

 

□ 拭鼻哲學

 

이 같은 벙어리의 가치관은 한국의 선비들로 하여금 무관심 무개입을 덕(德)으로 정착시키기에 이르렀다.

 

옛 속담에 무관심을 종용하는 말로 [콧등이나 어루만지지] [혹이나 쓰다듬지] 하는 게 있다. 이것은 곧 아무말도 하지 말라, 관여하지 말라, 개입하지 말라, 관심을 갖지 말라, 의견을 피력하지도 말고 그저 혹이 있으면 혹이나 어루만지거나 혹이 없으면 콧등이나 어루만지고 있으라는 계명인 것이다.

 

이조 초의 학자 김수온(金守溫)의 문집(文集) 이름이 혹이나 쓰다듬는다는 「식우집(拭疣集)」이었다. 세상에서 소외된 경지의 표현이며 옛선비들의 아호로 「식우(拭疣)」나「식비(拭鼻)」를 자주 쓰는 저의도 이에 있었다.

 

이 식비처세(拭鼻處世)로 일생을 살아간 전형적인 인물로 정승 강사상(姜士尙)을 들 수가 있다. 그는 시사나 공론, 그리고 파쟁을 말하는 자리에서는 일체 발언을 않고 콧등만 어루만지고 앉아 있었다. 술을 좋아하기에 술을 먹여놓고 그의 의견이나 주관을 유도하려 해도 그는 마냥 붉어진 코끝만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한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것― 비록 그것이 악(惡)이요, 흉(凶)이요, 모(謀)일지라도 존재 이유를 인정한다. 그것은 하늘이 내린 천심의 징벌로 받아드린다. 그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해 개입하고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역천(逆天)이라 하여 마냥 코만 어루만진다.

 

너무 시사에 개입을 하여 불행해진 송강 정철의 조카 정인원(鄭仁源)이 술을 들고 은거중인 송강을 찾아갔다.

 

『원컨대 아저씨는 입 좀 열지 말고 코나 어루만지므로서 정승자리 하나 얻어 궁한 처지에 빠진 가문을 좀 구하십시오』라고ㅡ,

 

명종(明宗) 을사(乙巳)년간에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들이 기휘에 저촉되는 말 때문에 죄에 걸려서 가볍게는 귀양가고 중하게는 죽기까지 하여 면한 이가 적었다.

한 늙은 재상(宰相)이,

 

[노경에 심심한데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으니 이 뒤에는 마땅히 남녀 관계의 일이나 이야기하며 희롱과 웃음으로 심심풀이를 하는 것이 옳다. 』

하였다. 그것은 남에게 들려서 해로울 것이 없고 詼諧(회해)에 가까운 때문이었다. 일시에 사람들이 서로 본보기로 하여 사랑방에 모이면 음담패설이 성행하는 전통적 습성이 이에 연유된것이라 한다. <효빈잡기(效顰雜記)>

 

□ 藏六處世

 

벙어리통처세, 식비처세 말고 옛선비들이 누렸던 폐쇄적 처세 가운데 장육처세(藏六處世)란 게 있었다. 속칭 거북이 처세라고도 하여 이 처세를 선언한 선비들은 자기 집 문기둥에 장육표라 불리우는 거북등 무늬〔龜甲紋)를 그려 붙인다.

 

장육이란 거북이나 자라가 네 발과 머리, 꼬리 등 여섯 부분을 움츠려 귀갑 속에 감추고 부동보신(不動保身)하는 것을 본딴다는 말이다. 여섯을 감추고 보신한다는 뜻인 이 장육이란 말 역시 선비의 아호나 당호로서 많이 쓰여왔음을 알 수가 있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도승지였던 이원이 비명에 죽자, 그의 아우 이 창은 과거를 보지 않고 황해도 평산에 숨어 살았다. 그가 사는 집을 장육당(藏六堂), 아호를 장육이라 하고 늘 술을 실은 소를 타고 고을의 노인들과 더불어 낚시질을 하거나 혹은 사냥을 했다. 시를 읊고 술을 따르며 해가 기울어도 돌아갈 줄 몰랐다. 매양 술에 취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기도 했다 한다.

 

또 장육처세를 한 대표적인 인물로 무오사화(戊午士禍)때 화를 입은 이종준(李宗準)을 들 수가 있다. 그의 친한 벗 가운데 갑(甲)이라는 지평(持平) 벼슬의 선비가 있었다. 그 친구의 아호가 장육이었다. 이종준은 그 아호를 욕심이나 술 한병과 그 호를 바꾸자고 졸라댔다. 기록에는 그 갑이라는 친구가 끝내 그 아호를 팔지 않은 것으로 돼 있으나 모든 문헌에 이종준의 아호가 장육으로 기록돼 있는 것을 보면 이 아호를 기어히 샀거나 빼앗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장육거사(藏六居士)가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에 귀향가게 됐는데 귀양길인 고산역에 쉬면서 문득 시상이 떠올라 바른말하는 충정때문에 귀양가는 애달픈 심정을 바위에 새겨놓고 떠난 것이 화가 되어 연산군이 잡아다 죽인 것이다. 장육거사를 처형할 때 그의 호를 미워하여 장육의 여섯 부분을 하나씩 절단해서 죽였다니 장육사상에 대한 가장 가혹한 박해의 죽음으로 그가 죽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장육을 호로 삼고 장육표(藏六票)를 붙이고 살았던 선비로 조귀석(趙龜錫), 최양, 배용길(裵龍吉) 등이 있었으며 이 장육의 삶을 산 가문은 후세 대대로 「거북집」이라 하여 뭇 선비들이 존경하였고, 새 수령이 부임하면 그 거북집에 들러 인사를 하는 습속이 근세까지 남아 있었다.

 

또 수령에 따라서는 부역이나 병역을 면제하는 특전까지 베풀었기로 가짜로 장육두문(藏六杜門)의 가통을 꾸미는 악습까지 생겼던 것이다.

 

또한 장육을 표방하고 살았던 선조가 있는 가문에서는 절대로 자라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자라를 보면 그것을 사서 방생하는 것을 가훈으로 전승해 내렸다고도 한다.

 

□世事無心의 価値體系

 

이같이 무관심에 가치를 부여해 온 한국사의 체질은 선비들에게 비단, 시세나 시휘뿐만이 아닌 세상만사에 무관심하는 것에까지 가치를 부여했다. 특히 금전이나 산업, 경제 같은 세사(世事)에는 무관심하도록 가르쳤고 이 무관심의 가치가 선비들에게 많은 넌센스를 빚기도 하였다.

 

병자호란때 명상인 최명길(崔鳴吉)은 색맹도 아닌데 늙을 때까지 푸른빛〔靑〕과 초록빛〔綠을 분간 못했으리만큼 세상일에 우둔하였다.

 

어느날 그의 조카가 당나귀를 타고 왔는데 최명길이 이 당나귀를 보고 말하기를

 

『네가 타고 온 말의 귀가 어찌 그다지 기냐』

고 물었다 한다.

 

그가 호조판서로 있을 때 어느 관청에서 기와 5백장을 달라고 문서로 신청을 해왔다. 한데 그의 결재는 엉뚱한 것이었다.

 

『5백장은 너무 많으니 한 우리만 내려주라』

 

이 결재를 하명받은 관리는 어리둥절하였다. 왜냐하면 기와의 한 우리란 바로 1천장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최판서는 기와 한 우리가 1백장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흥(長興)에 귀양가 있는 선비 윤경희(尹慶會)를 찾아간 남효온(南孝溫)은 윤의 세사무심(世事無心)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고 있었다.

윤이 소변을 보러 갈 즈음, 첩을 불러「중문에 문짝이 있던가 없던가」묻더라 했다. 문짝 유무를 모르고 살아온 이 선비를 두고 남효온은 그 큰그릇〔大器)을 탄복해 하고 있었다.

 

명종조의 명신 정옥형(丁玉亨, 1486~1549)이 지제학의 벼슬로 있을 때 말을 타고 가다가 한 주정꾼을 만났다. 이 주정꾼은 정옥형의 마부에게 얻어맞은 일이 있어 앙갚음으로 마부의 뺨을 이리치고 저리 치곤 하였다. 마부는 꺼들거리면서도 말고삐를 놓지 않아 말 위에 앉아 있는 상전은 마부가 비틀거리는 대로 동으로 갔다 서로 갔다 꺼들거리길 한참 하였다. 정옥형은 그러는 동안에도 시종 노하지 않고 말 위에서 꺼덕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주정꾼이 기운이 빠져 물러가 있다가 말 앞에 와서 엎드려 말하길

[영감께서는 장차 큰 정승이 되실 겁니다.』

고 그 무관심을 찬양했다 한다.

 

이 같은 객관적, 물질적, 생리적 요인에의 무관심은 한국 선비의 본질이었다. 서구사회가 그것들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으로 주관적 요인에 집중적인 가치를 부여해 온 주자학의 영향이기도 하나 악정의 연속인 한국사가 선비들에게 강요한 슬픈 체질이기도 하다. 이 무개입, 무관심을 어리석고 우둔한 가치관으로까지 순화시킨 한국 선비였다.

 

현실은 항상 안이와 안락으로 치닫는 본능운동이 적용함으로써 과거와 미래를 링크하는 가치유지를 불안하게 한다.

 

역사는 항상 근시적인 것과 원시적인 것의 갈등 틈에서 근시적인 것의 우세로 유지되기 마련이며 이 근시적 유지의 지속은, 곧 역사에서 암흑과 멸망과 비극의 시대로 낙인찍힌 데 예외가 된다는 법은 없었다. 이 근시적인 것을 견제해 온 선비사상이 없었던들 우리 한국의 역사는 오늘날보다 더 처참해 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후원(李厚源)은 임금이 말한「우활(迂闊)」이란 말에 느낀 바가 컸던 것 같다. 그는 황주선영 아래 집을 짓고 「우제(迂齊)」라 집이름을 붙이고 살았었다. 이것은 비당세적 선비의 이성의 강한 표현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