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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7. 直諫性向(직간성향)

구글서생 2023. 6. 10. 20:12

선비의 의식구조-7. 直諫性向(직간성향)

□임금 앞에서 史筆 빼앗은 老蔡

 

중종때 선비 이홍간(지중추부사)은 어떠한 세도의 압력 밑에서도 소신을 밝혔으므로 속세적 차원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전형적인 선비였다.

 

간신 남곤 일파에 의한 젊은 엘리트 학자 조광조 일당의 축출정변인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남곤의 세도는 절대적이었다. 이 때 평안평사(平安評事)라는 미직에 있던 이 홍간(李弘幹)은 남곤의 사위 이선에게 남곤을 규탄하는데 서슴치 않았다.

『지정(남곤의 호)은 오늘날 가장 명망높은 분이긴 한데 두 번이나 고변(告變)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이선은 이 말을 남곤에게 일러바쳤고 이 구설수로 남곤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 변방으로만 쫓겨다녔던 것이다.

 

남곤이 죽은 다음 장령(掌令)의 벼슬에 올랐는데 그는 정변음모 혐의로 귀양가게 된 영산군(寧山君)의 억울함을 역설하였다.

 

영산군은 공명을 바라는 한 천인의 조작된 무고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때 이홍간은 임금(중종)에게———

 

『천륜이란 지극히 중한 것이온데 분명하지 못한 일로써 형제가 상보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한 사람 뿐이겠읍니까. 이제 영산군이 귀양살이로 쫓겨났으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한나라 사람들의 풍자한 노래를 거울삼아 조그마한 은사를 베푸시옵소서.』하였다.

 

임금의 자리를 노렸다는 대역사건에 대한 이 대담한 건의에, 주변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고 하며 이에 임금은 얼굴빛을 고치어 영산군의 무고함을 밝혀 석방하였고 조야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한다.

 

이같이 바른말을 잘하는 사람의 주변에는 그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이 싫어하는 사람들의 책동으로 대간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간풍은 팔도선비의 우러럼을 받아왔던 것이다.

 

을사사화(乙巳士禍)때 장살(杖殺)당한 당대의 위험인물 곽순의 죽음에 즈음하여, 그의 집에 문상을 하는 용기있는 행동을한 유일한 사람이 이홍간이었다. 만약 어떤 다른 사람이 문상부의를 했다면 바로 잡혀가 국문을 당했겠지만 이홍간만은 잡혀가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일생이 시세에 굽히거나 동요한 법이 없다는 것을 조야에서 모두 알고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비사회가 한 커다란 건물이라면 이같은 간풍은 그 건물을 형성하고 있는 철근의 골조같은 것이었다.

 

권력의 남용이나 어긋난 독주가 있을 때마다 이 선비사회의 간풍이 가장 큰 압력이 되었고 이 압력 때문에 그것이 저지되었으며 또 그 간풍때문에 많은 선비들이 의롭게 죽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의로움에의 순교는 그들 후손의 훈장이 되었으며 이같은 간풍의 습속이 한국인의 가치관으로 한국사의 믿음직한 뼈대를 이루어오기도 했다.

 

중종때 재상 채세영(蔡世英)은 기묘사화에 3간(三奸)의 무고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자 정광필, 남곤 등 상신들이 배석한 임금 앞에 뛰어 들어가 사관인 김근사가 쥐고 있던 사필을 빼앗아 들고ㅡ

『이 사람들이 무슨 큰 죄를 지어서 이러는 것인지 죄명을 듣고자 하나이다.』

하고 임금에게 엎드려 물었다. 이것은 놀라운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좌우에 배열한 정승들은 모두 목을 움츠렸고 안당(安瑭, 1461~1521)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가끔 돌아보며 헛기침과 눈짓으로 채세영의 과격함을 만류하였다 한다.

 

그 후 선비 사회에서는,

『 이 세상에 군자는 오직 노채(채세영을 가르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

하였고 채세영이 길 가는 것을 보고는 아는 이가 있으면 손을 들어 가리키며,

『저이가 임금 앞에서 붓을 뺏은 사람이다.』

고 우러러 보았다 한다.

 

선조 때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는 여러 재상과 더불어 국사를 의논할 때 일이 부득이 임금의 뜻에 거슬리게 될 경우가 있으면 다른 재상은 머뭇거리고 바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었으나 그만이 홀로 서리에게 붓을 잡으라 하여 할 말을 다하였다.

 

혹 임금의 노함을 당하기도 했으나 돌아보지 않았으며 다른 재상은 얼굴을 붉히는 이도 있었으나 그의 안색은 화평스러웠다 한다.

 

임진국난 때 서울을 버리고 북상하자는 의논으로 기울어져 갈 때 유일하게 도성을 지키자고 주장한 정승은 윤두수뿐이었고 평양에 있을 때도 평양성을 고수하자고 극렬 주장한 유일한 정승이기도 했다.

 

임금이 여러 신하와 더불어 거취를 논의할 때에 임금의 안색은 비참하였고 말소리도 비통하였던 것이다.

 

정철이 윤두수에게 이르길

『공의 말이 좋긴 좋으나 임금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오』

하니 공이 소리를 버럭 높여,

『어째서 이런 국사를 그르칠 소리를 하오.』

하니 정 철이 대답하질 못했다 한다.

 

□ 陽山思想

 

영동과 금산의 접경지대에 유명한 신라가요 [양산가」의 고장인 내가란 마을이 있다.

 

이곳에서 전사한 신라 명장 김흠운(金歆運)은 그 나름대로의 호국사상으로 그의 훌륭한 죽음을 울어주는 그 노래를 타고 싸움 심한 이곳 사람들 사이에 하나의 교훈을 전승시켰던 것이다.

 

그가 백제군에게 포위당했을 때 피신을 권고받았었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한다.

『몸을 나라에 바친 다음에는 남이 알건 모르건 마찬가지다.

뭣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남이 알아주고 또 알리는 것은 소중한 것이 못된다. 내가 국민의 하나, 시민의 하나, 한 단체의 하나, 직장의 하나인 단위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이같은 원시적 시민주의의 기조사상을 지니고 국민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다가 그의 많은 부하들과 옥쇄(玉碎)했던 것이다.

 

중봉 조헌(重峰 趙憲)은 그의 수백 문하생들에게 김흠운의 양산사상을 틈나는 대로 가르쳤다 한다.

 

그는 이(理)가 앞서느니 기(氣)가 앞서느니 하고 싸우고 제사절차에 하나 하나를 두고 싸우는 그러한 유풍(儒風)에서 이방인 같은 선비였다.

『몇 번이나 대궐 난간을 꺾고 몇 번이나 임금 옷자락을 끌어당겼던고』

이것은 이이가 조 헌을 두고 한 말이다.

그가 올린 疏文만 해도 수 십만 자가 되며 끌어내면 대궐 난간을 붙들고 늘어졌고 임금이 피하면 그 옷자락을 붙들고 곧은 말을 하는데 마치 어린애 같은 직정(直情)이 있었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전 해에 대궐 앞에 거적을 깔고 도끼 하나를 든 다음『왜란이 일어나니 대비하시라』고 소를 올리고 이 소가 불칙하거든 도끼로 목을 쳐달라고 며칠 동안 엎드려 있었던 강골선비였다.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향실(香室)의 집사로 있을 때, 대비가 불공용(佛供用)의 향을 달라고 사적인 부탁을 해왔다. 그때,

『 이 방에 있는 향은 사전(祀典)에 기록되어 있는 제사에만 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데 쓴다면 신이 비록 한 번 죽더라도 봉하여 올리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대비가 달라는 하찮은 향마저 불법이면 내어주질 않았던 그였다.

 

유백증(兪伯增. 이조참판)은 한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탄핵한 고집있는 선비였다.

 

하지만 그 탄핵 원인에 티끌 만한 사심이나 간계가 없었으므로 뜻있는 선비들은 그를 「충박신」또는 「유충박」이라고 별명을 붙여 불렀던 것이다. 「朴」이란 티없이 깨끗하다는 뜻글이다.

 

그는 이미 등과하기 이전에 임숙영(任叔英)을 그리고 인조때 사간이던 김서국, 박노, 조성(趙誠)을 논척했다.

 

이조참판 김류(金瑬)를, 그리고 정묘호란 때 화의(和議)에 찬동했던 모든 대신들을 연명(連名)하여, 그 고식성으로 미루어 소인배라고 극언하는 척소를 올렸다.

 

경상감사로 있을 때는 윤선도의 실정(失政)을, 대사간으로 있을 때는 병판 이성구(李聖求)를 벼슬자리에서 물러앉게 했다.

 

다시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을 「묵상(墨相)」이라 혹평하고 하옥을 청했고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서도 부총관으로 있으면서 대신 윤방(尹昉)과 김류를 청주(請誅)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병란 후에도 또다시 윤방, 김류 양 대신의 오국죄(誤國罪)를 재상소하였고, 김경징(金慶徵) 이 민구(李敏求)의 강도실수(江都失守)의 죄를 논척하였다.

 

이 같은 앞뒤 가눔 않는 유충박의 논척때문에 그의 벼슬길은 만신창이였지만 이 때문에 그의 뜻을 굽힌다는 법이 없었다는데 그의 선비사상의 투철함이 부각되는 것이다.

 

인조도 무척 유백증 때문에 골치를 앓았던지「유고집」이라 부르고 아꼈으며, 어탑을 붙들고 떼를 쓰며 늘어지므로 임금이 웃으며 그의 소를 들어주기도 한 일이 있었다.

 

아름다운 집념이었다.

비단 유백증뿐 아니라 우리 한국인의 사고방식 가운데는 이 같은 비타협의 집념이 있었으며 그것의 강력한 한 표현이 유백증을 통해 전형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 諫에 너그러웠던 成宗과 仁祖

 

성종 때 응방(鷹坊)에서 해동청(海東靑)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어느 날 임금이 경연(經筵)에 나왔을 때에 신종호(申從獲)가 아뢰기를,

『지금 가뭄이 연달아서 백성이 굶어 죽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전하께서 걱정하고 부지런하실 때인데 지금 내응방(內鷹坊)에서 해동청을 기르니 이것은 전하께서 오락과 놀이에 마음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서 아마 하늘을 공경하여 근심하고 부지런히 하는 본령이 아닌가 합니다.』했다.

이에,

『군자의 허물은 일식(日蝕) 월식(月蝕)과 같다는데 내가 어찌 허물을 숨기겠느냐.』

하며 곧 매를 놓아주었다 한다.〈燃室記述〉

 

성종 때에 명숙공주(明淑公主)가 임금에게 청하기를,

『부마 홍상(洪常)의 숙부 칭이 장흥부사(長興府使)로 가게 되었는데 그의 처가 병이 있어 부임하기가 어려우니 본직을 갈아 주소서.』

했다.

임금이 그 청을 들어주어 중앙의 관직에 자리를 주었다. 이에 대사간 손비장(孫比長) 등이 箚子를 올려,

『홍칭에게 사정을 써서 법을 무너뜨릴 수 없으니 일정한 기한 동안 벼슬에 쓰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친필 편지로 다음과 같이 하답을 하고 있다.

『내가 너희들의 말한 바를 보고 매우 정당하게 여기는 바이다. 나의 이 일은 사(私)요 공(公)이 아니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허물을 들었으니 곧 고치기 또한 어렵지 않다. 너희들이 직책을 다하니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긴다.』 했다. 〈國朝謨烈〉

성종조(成宗朝) 초에 내쫓겼던 임사홍(任士洪)이 뒤에 척리의 세력을 빙자하여 다시 등용될 징조가 있었다. 대사헌 이측(李則)이 동료들을 거느리고 閤門 밖에 엎디어 극력으로 간하기를,

『전하께서 傍系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셨으니 어찌 종묘 사직의 중한 것을 생각지 아니 하십니까.』하였다. 임금이 성을 내어 묻기를

『웬말이냐.』 하였다.

『부자가 계승하는 것은 원래 떳떳한 일이지만은 만약 백성을 위하여 임금을 선택하는 데는 큰 성인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요순(堯舜)을 따르도록 기대하였삽더니 지금 간(諫)하는 말을 좇지 않으시니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하니 듣는 자가 땀이 나고 목이 움츠려졌다 한다. 〈燃華室述記〉

 

인조가 세자와 함께 어수당(魚水堂)에 나와 앉아서 이시백(李時白) 등 두어 사람을 불러들여 임금이 친히 술잔을 공에게 주어 마시게 하고 또 세자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너도 한 잔을 부어 주어라.』

했다. 이어 임금이 묻기를

『근일에 신하들이 나라 일에 충실하지 못함이 심하다.』

하니

『전하께서는 신하들이 나라 일에 성실치 못한 것을 걱정하지 마시고 전하의 마음이 신하들에게 성실치 못한 것을 걱정하소서.』

하였던 것이다. 〈海東續小學〉

 

조경과 이명준(李命俊)이 인조 때에 임금을 모신 앞에서 임금의 과실을 말하기를,

『전하께서 궁중에서 아무 때에 아무 일이 있었으며, 아무 날에 아무 물건을 만들었다 하니 그렇습니까.』

하고는 임금이 혹 모호하게 대답하면 두 번 세 번 다시 아뢰어 인조가 직접 자기말로 허물을 복종한 뒤에야 비로소 물러났다. 두 사람이 다 진실로 곧은 말을 하는 자이기도 하였지만 인조가 곧은 말을 장려하였던 것이다. 〈公私見聞錄〉

 

□ 燕君시대의 忠諫列傳

 

연산주(燕山主)가 심순문(沈順門)을 죽이려 하여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삼정승 이하가 감히 반대를 하지 못하였다. 마침 대궐 뜰에서 연회를 하고 있는데 성세순(成世純)이 자리 위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리들의 직책이 간관(諫官)인데 어찌 침묵만 지켜야 하겠는가.』

하니, 헌납 김극성(獻納 金克成)이,

『벼슬이 간판이면서 사람이 죄 없이 죽는 것을 보고도 몸을 아껴 말하지 아니하면 국가를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정언(正言) 이세영(李世英)은 헌납의 말이 옳다고 하였으나 어떤 이는

『만약 임금의 뜻대로 순종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순문과 같이 죽을 뿐이오, 결코 유익함이 없을 것이다.』

했다. 세순과 극성은 태연히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도 큰일이니 각각 그 뜻대로 맡기는 것이 옳다. 오늘날 먼저 죽을 사람은 반드시 우리 두 사람이요, 다음은 정언이다.』

하고, 드디어 순문의 죄없는 사실을 아뢰었더니 연산주가 비록 그 말을 받아들이지는 아니하였으나 또한 죄를 주지도 않았다. <海東名臣錄〉

 

박한주(朴漢柱)가 연산조에 예천군수가 되어 행정을 매우 잘하였다. 연산주가 불러서 간관에 임명하니 임금에게 아뢰기를,

『비원 안에서 말을 달리며 공을 치고 용봉장막(龍鳳帳幕)을 쳐놓고 잔치하고 노래하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노하여,

『용봉장막은 그것이 네 물건이냐.』

하였다. 공이,

『그것은 다 백성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신민(臣民)의 장막이라 하여도 옳습니다. 어찌 임금의 사물(私物)입니까. 』

하였던 것이다. 〈燃藜室記述〉

 

광해(光海)가 즉위한 처음에 이조판서 성영(成泳)이 유영경(柳永慶)의 당이라 하여 탄핵을 당해 파면되자 영상 이완평(李完平)이 이광정(李光庭), 김수(金睟), 이정귀(李廷龜)로써 후보(三峯)로 천거하였더니 광해가 명령하여 삼망 외에 후보자를 더 써 올려라 하였다. 그래서 신 흠(申欽)을 추천하였더니 또 명령하여 더 써 올리라 하였다. 광해의 뜻은 정창연(鄭昌衍)에게 있었으니 창연이 왕비의 외삼촌이었기 때문이었다. 완평이 부득이하여 김신원(金信元), 한효순(韓孝純) 및 창연 등을 천거, 창연이 드디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공론이 떠들썩하였으나 외척의 권력이 성하므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정우복(鄭愚伏)이 대구부사로서 구언하는 교지에 응하여 상소하여 정사의 잘못을 말하면서,

『 마음에 있는 사람이 삼망에 참여되지 않았으면 명령하여 가망(加望)을 시키고 그 사람이 가망에 또 참여하지 못하였으면 또 가망을 시켜 반드시 그 사람의 성명을 써내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붓을 들어 낙점을 하시니 전하께서 자기의 의견을 참여시켜서 마음대로 올렸다 낮췄다 하는 것이 이에 이르러 심하였읍니다.』

라고 신랄하게 간했던 것이다. 〈荷潭破宗餘〉

 

■ 光化門前의 勉庵 집터

 

이 같은 간풍은 체통있는 사반(土班) 사회에 전래되어 한말의 국난 때에 이르러 그 바람이 거세게 일었던 것이다.

 

한말 간풍의 전형적인 상징적 인물이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었다.

 

그는 대원군의 세도를 꺾은 것을 비롯하여 척양(斥洋), 배일(排日)세력의 정신적 지주로서 사반과 대중간에 군림했는데 그것은 어떤 정치적 파워가 있는 것도 아니오. 또 어떤 대중 파워가 있는 것도 아닌――오로지 선비의 간풍만으로 그 큰일을 해냈다는 점에서 한국 선비사회의 간풍이 차지하는 비중을 충분히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백성에게 할 말을 하게 하고 서양의 기운을 씻어버려야 한다는 청무상소(晴務上疏)를 비롯하여「오호라 충국애인(忠國愛人)은 성(性)이요, 수신명의(守信明義)는 도(道)라, 사람에게 성이 없으면 죽는 것이요, 나라에 도가 없으면 망할 것이니!」로 시작되는〈기일본정부장서 (寄日本政府長書)〉, 「오호통재라 금일 국사를 상인언재(尙忍言哉)리오」로 시작되는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등이 특히 유명하다.

 

굴욕적인 병자수교조약이 강요에 의해 맺어지자 전통적 간풍인 지부복벽(持斧伏闢)을 하였다.

 

도끼와 거적을 들고 경복궁정문인 광화문 앞에 단식하고 앉아 척화소를 올린 것이다. 이 소문 끝에는,

『이 도끼로 신을 쳐 죽이므로서 조정의 대은(大恩)을 비추옵시고 이 신의 애통박절함을 죽음으로써 흐릴 수 있게 하옵소서』

하였다.

 

70대의 늙은 몸으로 병오년에는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리고 의병을 일으키는 노익장의 선비기풍을 승화시켰고 일본 대마도에 잡혀가 임종할 때 서향사배하고 남긴 유소를 끝으로 한, 그의 일생을 꿰뚫은 간증은 어엿한 우리 조상의 정신적 유산을 장엄하게 부각시켜 주고 있다.

 

고종황제는 언젠가 경복궁 광화문을 나시면서 최익현이 자주 복궐(伏闕)한 자리를 두고,

『면암의 집터가 어데냐』

고 물었다 한다.

 

얼마나 자주 복궐하였으면「집터」란 말을 썼겠는가.

 

한국사상 마지막 지부복궐(持斧伏闕)상소는 1920년 일제시대에 있었다.

 

유일한 한국 황실의 유신(遺臣)임을 자처하고 고종황제의 능참봉으로 있었던 강골의 선비 고 영근(高永根)이 전통적 간풍의 마지막 선비였다.

 

장단(長端)군수를 역임한 고영근은 고종과 민비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측신으로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가 가두연설로서 민심을 얻고 있었을 때 고영근은 고종의 특명으로 그 만민공동회의 사정을 살펴 보고토록 위임을 맡았었다.

 

만민공동회의 연설을 듣고 있던 고영근은 그 주의 주장이 올바른데 탄복하고 현장에서 조복을 벗어던지고 연단에 올라가 일장연설을 했다.

 

이에 흥분한 민중은 즉석에서 그를 만민공동회의 회장으로 선출했던 것이다.

 

황제의 특명을 받은 어사로서의 이같은 소행은 배임배명(背任背命)으로 황제의 노여움을 샀고 체포령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충성에 변함이 없다고 자신한 그는 민비시해범이요, 국적으로서 망명중인 우범선(禹範善)을 암살하므로서 그의 충성심을 한국 황실에다 입증시켰던 것이다.

 

일본 형무소에서 복역을 마친 그는 귀국해서, 고종 측근에서 봉사하다가 고종이 서거한 후에는 능참봉으로 봉사했던 것이다.

 

그가 참봉으로 있는 금곡능에 세운 비석의 비명이 불손하다 하여 조선총독부에서 건비를 못하게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한국황제 고종지능」이라 새겨진 이 비석 맨 앞에 「前」자를 넣지 않고는 세울 수 없다는 총독부방침에 고영근을 비롯한 종친이 반대하므로서 이 비석은 거적에 싸인 채 능 한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것이다.

 

조석으로 이 비운의 비석을 보고 살아야 했던 고영근은 결단을 하고 하룻밤 사이에 이 비석을 능 앞에 세우고는 거적과 도끼를 들고 창덕궁 순종이 계시는 돈화문 앞에 복궐하고 태황의 제능비를 세웠음에 대죄(待罪)한다는 상소를 올리고 단식한 채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당황한 궁내부와 총독부에서는 종일 회담 끝에, 세운 비석을 다시 철거하면 3·1운동의 여파가 아물지 않았던 그 시기에 다시 민중을 자극시키는 일이라 하여 그대로 두기로 하고 고영근을 비롯한 관계자를 파면시키는 것으로 수습했던 것이다.

 

이같이 하여 한국간풍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