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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8.風流性向(풍류성향)

구글서생 2023. 6. 10. 20:14

선비의 의식구조-8.風流性向(풍류성향)

 

□ 放浪人의 風流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방랑 생활 도중 중흥사(中興寺)에 있을 때 일이다. 비가 내린 뒤, 시냇물이 불면 종이를 썰어 1백여 조각을 만들고 사람을 시켜 붓과 벼루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한다. 시내를 따라 내려가다가 물결이 급한 곳을 골라 앉는다. 그곳에서 율시(律詩) 혹은 오언절구(五言絶句)를 지어 종이에 써서는 물에 띄워 보내고, 멀리 떠내려간 것을 보면 또 써서 띄워 보내기를 밤이 늦도록 계속하여 종이가 다하면 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또 그는 길 가다가 시흥(詩興)이 솟으면 등에 진 배낭에서 낫을 꺼내서 서 있는 나무를 깎고 시를 쓰기를 좋아하였다. 한참 읊고 나서는 문득 곡을 하여 깎아 버린다.

 

옛날 선비들이 유람할 때나 유배길에 오르면 이 나무밑둥을 깎아 시를 쓰기 위한 낫을 휴대하는 습성이 있었는데 이를 통칭 풍류낫 혹은 시도(詩刀)라 했다.

 

그리하여 어느 풍광을 접하면 마치 나뭇잎에 이슬이 맺히듯 그 시공(時空)에 방황하는 미와 회포를 이슬처럼 응집시켜 살아있는 생나무에 결속시켜 놓고 떠나간다. 이런 풍류가 세상 어느 나라에도 있었던가 싶다.

 

경진(庚辰)년(중종 15년 1520) 윤달 든 가을철 소장 과격파학자요 정치가로 일세를 떨쳤던 충암(沖菴) 김정(金淨·판서)은 제주도에로의 유배길에 해남의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물론 그의 배낭에는 풍류낫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바닷가의 한 그루 노송 아래 쉬면서 풍류낫으로 이 노송 밑둥을 깎아 시판(詩板)을 만들었다.

 

바닷바람 불어올 때 슬픈 소리 저멀리 울리고

산달 외로이 떠오르니 솔여윈 그림자 성글기도 하다.

곧은 뿌리 땅 밑같이 뻗어있어 눈서리 겪은 자태 안보이게 보이네.

가지는 꺾인 채 잎새는 흩어진 여인의 머리 도끼에 찍힌 몸을 모래 위에 눕히고자

슬프다 동량지재 당초의 희망 이젠 그만이로다.

뻣뻣한 그대로 해선(海仙)의 뗏목이 되려니.

 

만약 지묵(紙墨)이 마련돼 있지 않으면 불을 피워 숯을 만들고 그 숯을 바위의 오목한 곳에 넣고 갈아 숯먹을 만든다.

 

갈대나 수수를 잘라 즉석 갈붓(蘆筆)을 만들어서 하얀 암벽이나 계곡의 널펀한 수석에다 시를 쓴다. 물론 그 시는 비나 이슬에 씻기우고 말 것이다. 씻기건 말건 아랑곳이 없다.

 

이 같은 숯먹에 갈붓의 시풍은 극히 근대까지 이어 내렸던 것 같으며 1920년대의 명필, 통도사의 김구하(金九河)스님도 이 숯먹 갈붓으로 통도사 계곡의 수석에 많은 시를 썼다고 한다.

 

또 매월당은 토막으로 한 농부의 모습을 조각한다. 경우에 따라 한 달이건 석 달이건 그 조각에 집념을 한다. 옷섶이며 눈썹까지 세밀하게 깎고 다듬고 손때로 윤을 돋군다. 그리고 그 조각에서 티끌만큼도 없어서는 안될 것이 있고 티끌만큼도 없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마저 그것을 없애 책상에 두고 하루종일 드려다 보다가 곡을 하고는 아궁이에 쳐넣어 불태워 버린다.

 

이같이 그의 풍류는 그 예술행위의 진행에서 그치는, 적이 주관적인 것이었다. 누구라 보아주거나 보이거나 하는 표현이 배제된 순수한 예술 행위임에 숙연해진다.

 

또 그가 어느 산에 들면 그 산에서 자란 나무를 깎아 금(琴)통을 만들고 그 산에서 잡은 짐승의 심줄을 말려 그 산 고유의 금을 만들어 그 산에서 그 금을 탄다. 그 금에서 그 산의 소리가 나며 그 산의 소리를 다른 산의 소리에 견주어 감식하고 감상하는 이런 풍류는 압권이다.

 

그리고 그는 금오산을 떠나갈 때면 그 금오산 금을 금오산에 버리고 가서 수락산에 들어 水落山琴을 만든다. 또 풍류하던 우리 옛 한국인들은 하룻밤 잠을 얻어지는 역사(驛舍)나 부잣집 사랑방을 지어 또는 놀이간 친구의 집 하얀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지어놓고 떠나가곤 했다.

 

기방(妓房)에서는 기생의 치마폭을 벌리라 시키고 그곳에 사군자(四君子)를 치고 시를 쓰기도 했다.

 

□ 「動中風」과「不動風」

 

이같이 이동하며 즐기는 풍류를 「동중풍(動中風)」이라 하고 이동하지 않고 즐기는 풍류를「부동풍(不動風)」이라 했다.

 

연산기(燕山期)의 문형(文衡)성현(成俔)의 실례로 부동풍의 한 예를 보자.

 

그의 아들 성세창(成世昌)의 친구인 홍모(洪某)가 눈내린 밤의 성현의 집 동원별당(東苑別堂)에서 밤새워 이야기하고 노는데 거문고 소리가 들려와 홍모가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성 창은 그 노인이 그의 아버지라고 일러 주었다.

 

한 노인이 눈과 달이 소복한 매화 무 밑에서 눈을 쓸고 앉아서 허연 백발을 날리며 거문고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 홍 모는 이 인상적인 인생의 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글로 써서 남겨 놓고 있다.

 

〈그 때 달빛이 밝아 대낮같고 매화가 만개했는데, 백발을 바람에 날려 나부끼고 맑은 음향이 암향(暗香)에 타 흐르니 마치 신선(神仙)이 내려온듯, 문득 맑고 시원한 기운이 온몸에 가득함을 느꼈다. 용재(慵齋 : 아호)는 참으로 선골유골(仙骨遺骨)의 풍류객이라 할 만하다.> <기재 잡기(寄齋雜記)〉

 

산다는 것은 떠돈다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은 쉰다는 것이라는 성현의 임종의 말에서도 풍류의 맛이 깃들어 있음을 본다.

 

성종 때 명상(名相) 신용개(申用漑)는 천품이 호방하고 또한 술을 즐겨서 때로는 늙은 여종을 불러 서로 큰 잔을 기울여 취하도록 마시곤 했다.

 

어느 날은 집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분부를 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필시 여덟 분의 아름다운 손님이 찾아올 터이니 술과 안주를 장만해 놓고 기다려라.』

한데 날이 저물어도 온다던 손님이 오질 않았다. 그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하였다.

달이 이미 떠올라 달빛이 방안을 비치어 그가 방안에서 기르고 있던 아름다운 국화꽃을 한결 황홀하게 하였다.

 

그는 국화꽃 기르기를 즐기어 당시 여덟 분(盆)을 그의 방안에서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달빛이 방안에 가득 차자 손이 다왔다고 소리치며 술을 내오라 하였다. 이 화분과의 사이에 술상을 놓고 대작하기를 은도배(銀桃盃)에 각기 두 잔씩을 국화에게 권하고 공도 녹취하였다.

 

이같이 정적으로 극대화하는 풍류에서 옛 한국인이 찾은 어엿한 멋의 보편성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상은 홀수(單數)의 멋이요, 짝수의 멋은 한폭의 수채화와 같이 담담한 것이었다.

 

박공달(朴公達·좌랑)과 박 수량(朴遂良·현감)은 둘 다 중종때 조광조 등이 설치한 현량과(賢良科)에 특채된 신진 선비들로서 기묘사화 때 당적에 올라 낙향한 사람들이었다.

박공달은 고향 강릉에 살면서 박수량과 더불어 술벗을 삼고, 항상 해벌의 쌍한정(雙閑亭)에 모여 나이의 노소에 아랑곳없이 맘껏 마시곤 했던 것이다.

 

두 집이 큰물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혹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할 경우에는 양쪽 언덕에서 물을 사이에 두고 대좌하여 각기 한 병씩 들고 온 술병과 안주로 잔을 들어 권한 체하고 받아 마신 시늉으로 대작 흥이 다하도록 마셨던 것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대작한 풍류 역시 동서고금에 전무후무한 멋 가운데 하나랄 것이다.

 

조광조와 더불어 혁신정치를 시도했던 김정(金淨)이 금강산을 유람하는 길에 강릉에 들러 옛 동지인 박수량의 집을 찾았다.

 

집이 어찌나 가난한지 머슴들 속에서 함께 새끼를 꼬고 있었으니 누가 주인인지 분간 못할 지경이었다. 마당에 자리를 깔고 질그릇 술병에 나물안주로 이틀 동안 놀다가 돌아왔는데 작별할 즈음하여 박수량은 손수 꺾어 다듬은 철쭉 지팡이를 선물하면서 다음과 같은 헌시(獻詩)를 했던 것이다.

 

깊은 산골짜기 층층 바위 뒤란이

늦가을에 눈서리 맞은 이 꽃가지

이 가지를 가져다 군자에게 주노니

늙으막에 그처럼 살아보라는 걸세.

 

수채화같은 담담한 인생의 기미에 철쭉지팡이 같은 강인하고 앙상한 의지의 뼈대가 드러나 보이는 인생 스케치랄 것이다. 또한 이같은 한국인의 풍류는 반드시 돈이 있어서만이 아닌, 가난하고 처지가 궁벽해도 이루어져 왔다는 점에서 돋보이기만 하는 것이다.

 

홀수풍류, 짝수풍류 말고 복수풍류의 한 보기를 예시해 본다.

 

□ 聽開花声을 듣고 風流

 

다산 정약용은 당대의 선비 이치훈(李致薰), 이유수(李儒修), 한치응(韓致應) 등 14명의 뜻맞는 사람끼리 죽란시사(竹欄詩社)라는 풍류계를 맺고 그 시사(詩社)의 규약을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필 때와 한여름 참외가 무르익을 때 모이고

가을 서련지(西蓮池)에 연꽃이 만개하면 꽃 구경하러 모이고

국화꽃이 피어 있는데 첫눈이 내리면 이례적으로 모이고

또 한 해가 저물 무렵 분에 심은 매화가 피면 다시 한 번 모이기로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시사(詩社)풍습은 이조 중엽 이후, 한국 선비들 간에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웃이나 멀리 사는 명시인들을 초치하여 시사를 여는 것이 선비의 한 조건처럼 여겨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죽란시사(竹欄詩社)의 서련지(西蓮池)의 모임같은 것은 풍류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서대문 밖 모화관(慕華)에 이르기 전에 있는 서지(西池)는 연꽃 많기로 또 연꽃 크기로도 장안에서 소문나 있었다. 이 서지가 결사(結社)한 선비들이 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녘에 모여든다. 다 모이면 서지에 배를 띄우고 연꽃 틈에 갖다 대고는 눈을 감고 숨을 죽이곤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연꽃이 필 때 청랑(淸朗)한 미성(微聲)을 내며, 꽃잎이 터지면 그 미성을 듣기 위한 것이다.

 

‘청개화성(聽開花聲)'으로 마치 시원한 꽃이슬을 맘속에 떨어뜨리는 듯한 청량감을 그렇게 소중히 수용할 줄 알았던 선비들의 멋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또 학을 기르는 풍류의 시사가 있어 이 선비들이 모일 때면 자기가 기르는 학을 안고 모인다. 그리고 학 같은 높은 기골의 학시(鶴詩)만을 써서 재주를 겨룬다.

 

이 학시사(鶴詩社)는 선비의 기풍을 고양하고 유지시키는 풍류적인 뒷받침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같은 기골풍류는 연산군의 폐모(廢母)에 분개하여 낙향했던 조춘풍(趙春風)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것으로 그 후 이를 본따서 시류에 저항적인 선비들끼리 뜻을 같이하고 보존하는 수단으로 이 학시사의 풍조가 낙향 선비들 간에 유명했던 것이다.

 

■ 風流郷甫吉島

 

명시인 윤선도(尹善道)가 낙향해서 건설한 이상향 살이도 한국풍류의 압권이었다.

 

윤선도의「가장유사(家藏遺事)」에 보면 그가 살았던 남해의 절도(絶島)인 보길도(甫吉島) 살이는 멋있는 것이었다.

 

낙서제(樂書齊)에서 자는데 닭소리와 더불어 일어나서 반드시 경옥주 일배를 마신 다음 관즐(盥櫛)을 단정히 하고 자제들이 글 읽는 것을 둘러보면서 강(講)을 한다.

 

조반 후는 사륜차를 타고 절죽(絶竹)의 예기를 따르게 하여 회수당(回水堂) 또는 석당(石)에 올라가 놀았다.

 

세연정(洗然亭)까지 갈 때는 노비들에게 술과 안주를 충분히 준비시켜 작은 수레에 싣고 자제들을 시종케 하였으며 희녀(姬女)들을 작렬시켜 낚싯배를 못에 띄우고 영동남녀(令童男女)의 찬란한 彩服이 물 위에 비치는 것을 보며 자기가 손수 지은 어부사를 읊는다.

 

윤선도는 이 같은 환상적 경지에서 시를 살았던 것이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 베는 한국적인 청빈한 낙천에는 적이 異端이었다.

 

보길도는 나무가 좋기로 이름난 섬이었고 일제 초기에는 이 보길도 나무를 탐낸 일본 상인들과 현주민들 간에 일종의 소전쟁이 일어났을 만큼 이 나무에 대한 애착심이 강한 별난 섬이었다. 그같이 나무에 애착을 갖게 한 데는 윤선도의 영향이 크게 미친 것이다.

 

그는 이 외딴섬에다 낙서제(樂書齊), 세연정(洗然亭) 정성암(靜成庵)등 정자를 지을 때 그 좋은 나무 한 그루 자르지 않고 잡목만으로 지었으며 그 섬의 민가에도 잡목작실(雜木作室)의 전통을 세우게 했던 것이다. 또 고산보(孤山湺) 등 섬사람들의 후생에 손수 돌짐을 등에 지기도 하였다. 유배나 은거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생활에서 소외시켰던 한국적인 전통에서 그는 이단적인 앙가쥬망을 했던 별난 선비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한국의 풍류가 형성된 요인으로 첫째 선비사회에 시가 생활화되어 있었고 그 시상을 생활화했던 데 그 풍류의 개성이 부각된다. 시가 곧 인격의 바로미터요, 본질의 평가기준이 됐으리만큼 생활화되었으므로 그 시상을 산다는 동양사람 공통의 사고방식인 구상성을 현실화한 데서 풍류가 생겨났다고 볼 수가 있다.

 

둘째 문사 위주였던 유학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등 유학자의 혁명으로 도학(道學)위주로 변혁한 연후에 육체적 본능적인 것의 규제와 억제로 마음의 평정을 얻는 정적인 경지의 발견이 또한 한국적 풍류형성의 주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평정의 추구는 유학자로 하여금 선(禪)과 선(仙)의 주정(主靜)적 요인과 절충 융합하여 조용한 속에서 마음이 얻을 수 있는 극대의 것을 찾은 풍류가 생겼음직도 하다.

 

세째 잦은 유배와 은둔생활에 불가피했던 정치 사회의 여건이 선비들로 하여금 낙향하게 했고 은둔지에서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여가추구의 본능이 한국적 풍류형성을 재촉했을 것이다.

 

□ 茶信契의 멋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유배살이 18년 만에 정들었던 강진땅을 떠난 것은 1818년, 그의 나이 58세 때였다.

 

다산이 떠날 즈음에 석별이 아쉬운 그의 제자들은 어떻게든지 그의 스승과의 정의를 유지하고 유대를 지속하고자 궁리한 끝에 다신계(茶信契)라는 계를 맺은 것이다.

 

이 아름다운 결속으로서의 계의 면목을 엿보여주는 다신계의 절목(節目)을 옮겨 보기로 한다.

 

『사람의 귀한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무리가 모여서 서로 즐거워하고 헤어져서도 서로 믿는다면 이것은 금수(禽獸)의 길이라 할 것이다.

우리들 수십인이 여기에 무진년(戊辰年), 다산이 강진읍에서 귤동(橋洞)으로 옮겨온 순조(純祖)8년 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여 살고 글을 쌓아 형제처럼 지내다가 지금 函丈이 북으로 돌아가시니 우리들도 헤여져서 만약 이내 막연히 서로 잊고 이른바 강신지도(講信之道)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역시 경박한 일이 되지 않으리오.

지난 봄에 우리들은 미리 이것을 우려하여 돈을 모아 계를 마련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사람이 돈 한 냥씩 내었는데 2년 동안에 이자가 늘어 지금 35 냥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헤어진 뒤에도 돈의 출납이 마음대로 되기 어려울 것을 생각하고 걱정하던 중 函丈이 가지고 계시던 보엄서촌(寶嚴西村)의 부전수구(簿田水區)를 떠날 때에 방매하고자 하니 잘 팔리지도 않는지라, 여기에 우리들이 35 냥의 돈을 형장에 넣어드렸더니 함장은 서촌수구(西村水區)의 논을 돌려 계물(契物)로 만들고 다신계라고 이름 지어 일후(日後)의 강신(講信)의 터전으로 삼기로 하여 그 조례(條例)의 전토결자(田土結資)의 수량(數量)같은 것을 아래에 적는 바이다.』

 

18명의 문하생들의 이름이 그 아래 적히고 이 다신계에 속한 전답을 기록하고 이 계의 約事를 적었는데 이 약사에서 정실(情實)이 협화하여 풍류로 승화시키고 있는 한국인의 한 아름다운 정신적 단면이 완연하다.

 

① 해마다 청명(淸明)·한식(寒食)날 계원은 다산에 모여서 계사를 닦고 운(韻)을 내어 시를 지어 총명작서(聰名作書)하여 다산선생에게 보낼 것. 이날의 고깃값(魚價) 한 냥은 계에서 내며 양식 한 되는 각자가 가져올 것.

② 곡우(穀雨)에 연한 차잎을 따서 이것을 불에 말려 한 근을 만들고 입하(立夏)에 만다(晩茶)를 따서 떡(團茶) 두근을 만들어 시찰(詩札)과 더불어 다산선생에게 부칠 것.

③ 국화 필 때에 계원이 다산에 모여 계사를 닦고 시회를 열것. 이 시를 다산선생에게 보낼 것과 기타의 절차와 준비는 청명 때와 같이 한다.

④ 상강(霜降)에 새 면포(綿布) 한 필을 사고 백로(白露)에 비자(榧子) 5되를 따서 면포와 더불어 다산선생에게 보낼 것.

⑤ 다역(茶役)은 각자가 마련할 것이며 스스로 마련을 못하면 돈 5푼을 계두(契頭)에게 주어서 귤동 시골아이를 시켜 차를 따서 수를 채울 것.

⑥ 모든 계사에 소용되는 비용을 지출한 후 만약 남은 돈이 있으면 착실한 계원에게 돈을 빌려주되 한 사람에게 2냥을 넘겨주지 말 것. 그리고 15냥 20냥이 차면 논을 사서 계에 붙이되, 그 식리(殖利)의 돈은 20냥을 넘기지 말 것.

 

우리도 이 약사에서 떠나간 스승에 대한 보은(報恩)과 정의를, 그리고 문하생의 화목과 풍류를 그리고 조촐한 대로 담백하며 소박한 대로 아기자기한 한국인의 화합의 한 상태를 알게 된다.

 

이 같은 화합의 보은 때문에 비록 떠나간 다산도 이곳을 잊지 못하여 시와 편지로 동암(東庵)의 지붕은 잘 이었는지, 뜰에 심은 홍도(紅桃)가 죽지는 않았는지, 우물에 쌓은 돌은 무너지지나 않았는지, 못에 방생한 잉어는 얼마나 컸는지, 백련(白蓮紅)과 가는 길에 심었던 동백꽃은 잘 자라고 있는지, 차는 철을 놓치지 않고 잘 따는지 하며 항상 마음만은 이 다산동으로 향했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같은 아름다운 화합의 전통을 계승하고 향유하였으며 이 계의 정신은 교통이 지체된 지역사회에서 아름답게 또 화목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다.

 

■禊와 風流의 함수관계

 

계란 말의 본은 중국의 계락 또는 낙계(洛稧)란 말에서 비롯되었다. 황하의 한 지류인 낙수는 우(禹)가 중국사상 가장 큰 혁명이랄 황하치수(黄河治水)를 성공시켰을 때 신구(神龜)가 나타나 서조(瑞兆)를 보였다는 강으로, 이 거북 등에서 치세(治世)의 본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신탁(神託)받았다고 해서 중국에서는 가장 신성시되고 있는 강이다.

 

이 낙수에서 태고적부터 신을 맞기 위해 몸의 때를 씻어 부정을 없애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부정씻는 푸닥거리를 낙계라 했던 것이다.

 

신굿을 위해 부정을 씻고 몸을 깨끗이 하는 풍습은 우리나라 삼한시대부터 있었는데 중국 문명에 물든 후세 사가(史家)들이 이 전래의 풍습에다 낙계란 중국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김수로왕(金首露王)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적이 일어났던 날을 삼월달의 계락의 날로 잡아 이 지역에서는 이조 중엽까지 이 계락의 축전을 벌려왔던 것이다.

 

이 계의 발생에 대해 다산은 그의 유언각비(維言覺非)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계의 본뜻은 깨끗하다는 결(潔)과 같은 뜻으로 중국 정(鄭)나라 민속에 궁궁이(芷)이란 화초와 난초를 꺾어 부정을 씻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계라 했다 한다. 한나라의 예의지(禮儀誌)에도 상사(上巳)날에 관민이 모두 동쪽강 상류에 가서 오랫만에 때를 씻는 풍습이 있었는데 결이라고 하였다 했다. 곧 결이나 계는 모두 제사에서 연원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사람들이 모여 회음(會飮)을 하면 모두 이를 계라 부르는데 동갑끼리 모이면 동갑계(同甲禊), 과거에 같이 급제한 사람끼리 모이면 방계(膀禊), 동관(同官)끼리 모이면 요계(僚禊)라 했다. 이와 같이 친목이나 이식(利殖)을 위한 추렴의 모임은 계가 아니라 약속이란 뜻인 계가 합당하다고 어원(語源) 풀이로 계의 잘못을 가리고 있다.

 

그러나 많은 문헌과 민속으로 보아 이 부정을 씻는 푸닥거리가 오늘날의 계가 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위지(魏誌)에 보면 삼한 풍속에 귀신에게 제사지낼 때 여러사람들이 모여 회음가무(會飮歌舞)를 했다 한다. 제정(祭政)을 했던 고대사회에 있어 푸닥거리인 계는 이 같은 회음가무(會飮歌舞)의 유흥경비를 염출하는 경제조직이 필수적이었다. 이것이 계의 신앙적 요인을 경제적 요인으로 탈바꿈하게 한 요인이 된 것이다. 이 추렴이란 이름의 금융유습이 근대의 산제계(山祭禊)·시제계(時祭禊)·상계(喪禊)·혼계(婚禊) 같은 목돈을 필요로 하는 행사의 금융수단으로 전용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계는 신앙조직이었던 것이 풍류조직 경제조직으로 다시 친목조직으로 복합 또는 분리발달한 것이다.

 

신라의 화랑제도는 고대의 신앙계의 풍습이 삼한시대의 「청년의 집」의 풍습과 복합하여

① 신앙적 조직

② 오락적 풍류조직

③ 호국적 조직

④ 전투적 조직으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곧 계는 친목조직에서 지역 공동방위조직으로 발전, 호국전투적인 요인도 내포하게 된 것이다.

 

이 계조직은 수천년 동안 한국지역사회의 협동 · 상화(相和) · 상부(相扶) · 상조(相助) · 풍류 등 곧 한국인을 결속시켜 온 중추적 정신의 고향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