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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6. 敬天性向(경천성향)

구글서생 2023. 6. 10. 20:09

선비의 의식구조-6. 敬天性向(경천성향)

■守令의 自虐祈禱

 

기우(祈雨) 관계 자료를 수집·분류하는 과정에서 어느 지방을 다스리는 수령이 제주(祭主)가 되는 기우제의 빈도가 가장 잦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어느 한 고을이 가물면 그 고을의 수령인 목사나 현감이, 한 지방이 가물면 지방의 관찰사가, 나라 전체가 가물면 임금이, 그 가뭄은 자신의 부덕이나 악정의 소치로 보고 그 죄책을 하느님에게 비는 형태로 기우제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 실례는 다양하다.

 

기우제의 제단에 수령이 바지자락을 걷고 올라선다. 수령은 두 손을 맞쥐고 하늘을 올려 보며 하느님에게 기구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럼 복면한 사제들이 곤장을 들고 올라와서 이 수령의 종아리를 내려친다. 피가 터져 나오도록 친다. 수령은 용서비는 기사(祈)의 주문을 외운다.

 

문헌에 따라서는 수령 자신이 가죽 채찍을 들고 자신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치기도 한다.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의 기둥 가운데 동량(棟樑)을 버티고 있는 복판의 기둥은 천주(天柱)라 하여 신성한 주술적 뜻이 부여되어 있었다. 곧 하늘 위에 계시는 상제와 영통하는 매개물로 신성시 하였던 정치와 도덕의 최고 지배자인 상제와 지상의 어느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과의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인 것이다. 그러기에 동헌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은 이 천주 앞을 지날 때마다 허리를 굽혀야 하고 수령은 집무가 시작되기 이전에 이 천주에다 큰절을 하는 관속도 있었다.

 

한 고을이 가물면 그 수령은 관을 벗고 천주 앞에 공손하게 앉아 마냥 머리팍을 디려 찧는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이 천주에 머리를 찧는 뜻은 이 가뭄의 원인인 자신의 부덕이나 실정을 상제에게 메아리치게 하여 그 벌을 받는 시늉인 것이다.

 

또 몹시 가물면 수령은 자신의 통치영역 안에 어떤 원한의 죽음이나 억울한 죽음이 하늘에 감천(感天)하여 상재가 이를 응징하는 뜻으로 가뭄을 내리게 한 것으로 받아드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관내에 철저한 원한 조사를 시킨다.

 

이를테면 수절 과부가 자결한 일이 있는가. 있다면 간통을 당해 자결했는가. 억울한 풍문 때문에 가문에서 죽였는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면 수령은 이 죽은 여인의 원한을 풀어주는 제사를 지내고 정문(旌門)을 세워주는 한편 억울한 요인을 가려 형벌을 가한다.

 

□ 天人相關思想

 

자연현상은 인사현상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고방식은 태고적부터 있었다. 특히 정치를 하는 군주, 상신(相臣), 지방장관인 수령, 그리고 각 가정을 다스리는 가장은 각기 자기의 권력이 미치는 범위에 사는 인간의 대표자란 위치에서 하늘의 포상 및 징벌을 받는 것으로 알았다. 이를테면 임금이 바른 정치를 하면 자연현상도 질서를 얻어 인간질서에 순응하여 비바람이 순조로운데, 임금의 행실이 바르지 않으면 자연현상에 역조가 생겨 천재(天災)의 이변이 생긴다고 생각하였다. 즉 천재는 그 임금, 그 수령에 대한 경고로 알았다. 혁명이란 말은 천명이 갈린다는 말로 곧 천명에 순응한다는 뜻이었다. 임금이 악정을 하면 역천배인(逆天背人)하는 행위이므로 순천응인(順天應人)한다는 뜻인 혁명은 합리적이었다. 이 천인 상관사상(天人相關思想)은 유교에서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강조되고 있어 한국인의 한 사고방식 형성에 이바지했던 것이다.

 

<금광명경(金光明經) 정론품(正論품(品))>에 보면, 국왕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비바람이 억세어지고 성숙일월(星宿日月)이 상태를 벗어나며 곡식, 초화, 과실, 종자가 제대로 익지 않으며, 기근이 일어나고 천계에 있는 신들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늘(天)에서도 천인(天人) 상관이 노골적으로 표시되어 있음을 본다. 큰 대(大)자 위에 일선(一線)을 그은 이 글씨에서 큰 대는 곧 사람이 두 손을 펴고 두 발을 벌려 버티고 서 있는 상형문자로 본래 사람을 뜻하였으며, 한 일(一)자는 사람 위를 덮은 천공을 상형한 것이다.

 

혁명 후의 이조 초기에 각종 관제(官制) 등의 제도 개혁을 한 장본인은 하륜(河崙)이었다. 고려시대의 제도인 문하부(門下府)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합쳐 의정부(議政府)라 하고 그 권위를 강화하여 육조(大曹)의 상위에 두었고, 성균제주(成均祭酒)를 사성(司成)으로, 사헌중승(司憲中丞)을 집의(執義)로, 잡단(雜端)을 지평(持平)으로, 시사(侍史)를 장령(掌令)으로 하는 등 일대 혁신을 하였고, 또 저화(楮貨・지폐)를 처음 발행하여 통화를 편리하게 하였다.

 

이 같은 개혁은 어느 시대건 항상 보수 세력의 강인한 반발과 저항에 부딪치게 마련이었고 또 그것을 감당해낼 용기와 소신의 성숙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개혁작업을 대담하게 해낸 하륜은 당대에 「가시박힌 정승」으로 무척 미움을 받았던 것이다.

 

태종 을유년에 가뭄이 심했는데 시가의 곳곳에 익명서가 나붙었었다.

 

「이 가뭄은 하륜이 정권을 잡은 까닭이다」라는 데 그 익명서는 공통되어 있었다. 또 간관(諫官)이 하륜의 논척(論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疏)를 올렸다.

 

『예전에는 재앙을 당하면 세 정승이 자리를 피하는데 지금 하륜은 임금의 총애만 탐하고 물러나지 아니하고, 새로 제도를 세워서 선왕의 제도를 문란하게 합니다.』

 

계사년에는 다시 대간(臺諫)들이 하륜이 자기 권세를 위해 제도개혁을 했으니 의정부를 혁파하여 그 권력을 육조로 돌리자고 보수반동의 구체적 환원을 책략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혁신에 대한 일련의 저항은 한국인의 사고방식 가운데 하나인 천정사상(天政思想)의 한 발로이기도 하다.

 

현대에도 그런 사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옛 우리 선조들은 모든 인간사회의 행실이나 정치는 천의(天意)와 밀접한 인과가 있는 것으로 확신하였다. 이를테면 벼락맞은 피해자는 반드시 어떤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듯이, 가뭄이나 재앙 또는 천재이변(天災異變)은 그것이 어떤 지역에 국한됐을 때는 그 피해지역의 수령이나 감사, 그것이 전국적일 때는 임금의 어떤 부덕이나 불성(不誠)에 대한 하늘의 징벌로 이해했던 것이다.

 

가뭄 때 그 지방 수령이 기우제를 지내는데 그 제문(祭文)은 자신의 부덕을 하늘에 비는 것으로 일관되었고, 제천의 단(壇)위에서 기둥에 머리를 부딪히고 회초리로 자기 알몸을 후려치는 자학기도로 징벌을 하늘에 보이는 것 등도 이 같은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륜의 혁신정치가 가뭄에 직결된 것으로 생각한 백성이나 조신들의 발상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 륜은 이 가뭄에 책임을 지고 사직소를 올렸었다. 이에 영명(英明)한 태종은 다음과 같이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내가 옛글을 본즉 재앙이 오는 것은 재상의 허물이 아니다. 이번에 비가 아니 내리는 것도 그 죄는 과인에게 있다.』

하고 그 이전 갑신년에도 가뭄이 들어 하륜이 자리를 피하여 집안에 근신한 일이 있었는데 그 근신 중에 또 큰물의 재앙이 있었던 일을 태종은 상기시키고, 이번 재앙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태종 17년 5월에 서리가 내리는 천변이 있었다. 태종은 이에

『전에 진산군(晋山君·하 륜)이 수상으로 있을 때 사람들이 재변은 진산군의 탓이라 하였는데 지금 진산이 죽고 없는데도 이 같은 재앙이 생기니 이것은 재상의 허물이 아니라 다 나에게 덕이 없는 까닭이다.』

라고 말했다.

 

이 천변을 둔 일련의 사고(思考)에서 이것이 인간사회에 인과를 절대시하는 천의가 아니라고 회의를 한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는 데 주의를 끈다. 다만 그 인과의 대상자를 두고 임금은 신하를, 신하는 임금을 위해 겸양하고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천의 사상은 민심의 여론이나 여망을 형성하는 가장 큰 「파워」요 압력형성의 요인으로서 정치목적에 적지 아니 이용되었던 것이며, 이것은 한국 정치사 연구의 한 모체로서 연구돼야 할 줄 안다.

 

□ 怨恨應天

 

일식(日蝕), 월식(月蝕), 혜성(雪星)등 천이(天異)가 일어나면 상제(上帝)인 신이 임금에게 내리는 계고(戒告)로 알았다. 그러기에 현명한 왕은 이런 천이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과실이 뭣인가를 널리 구하기는 하였지만 절대자인 군주에게 그의 잘못을 스스로 가려 스스로 상주(上奏)하는 현명한 신하는 드물었다.

 

양천(陽川) 허종(許琮·우의정)은 바로 그런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그가 천문을 관측하여 일월성신(日月星辰)의 도수(度數)를 추정하는 말단 관직에 있을 때 일식이 일어났다. 이와 같은 천이(天異)는 임금의 악정을 고발할 수 있는 용서된 기회임을 허종은 놓치기 싫었다. 그는 관직상 임금에게 올려야 하는 일식의 도수(度數)를 적은 글 끝에 대담하게 악정 고발을 하였다.

 

이번 일식의 원인은 시휘(時諱)에 저촉되기 때문이라 하고,

첫째, 세조가 불법을 좋아하고

둘째, 사냥을 좋아하며

세째, 경연에 나오지 않고

네째, 간(諫)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시위에 저촉된 구체적 조건임을 적어 올린 것이다.

 

조정의 신하가 만당에 모인 데에서 이 말단 관리의 대담한 상서가 낭독되었을 때, 듣는 이들은 숨을 헐떡거리고 땀을 흘렸으나 옹졸하지 않았던 세조는 그를 지개(志槪)가 있다 하여 오히려 벼슬을 한 계급 올려주었다.

 

세조 때 저술인 <추강냉하(秋江冷河)>에 의하면 이천에서 한 강도를 처단했는데 처형 직전에 이 강도가 하늘에 손을 뻗고 맹세하기를,

『나는 어릴 때부터 절도질을 배운 일은 있어도 강도질은 아직 한 일이 없읍니다. 내 말이 진실이면 하늘에 반드시 변고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처단하자 그날 밤부터 폭우가 쏟아져 이천골이 모두 침수되었다 한다.

 

이것은 처형과 폭우가 우연하게 일치되었거나, 비의 피해가 과장되어 와전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천인상여(天人相與)에 의한 억울한 백성을 두둔한 하늘의 징벌로 이해하는데 조그만한 의문도 갖지 않았을 것은 뻔한 일이다.

어느 고을이 유별나게 가물면 그 고을 수령은 의무적으로 다음과 같은 행정명령을 내리기 마련이었다. 행여 억울하게 죽은 부녀자라도 없는가고, 이를테면 관리에게 강간당하거나 배신당하고 죽은 부녀자, 윤상(倫常) 범죄로 원한을 머금고 죽은 부녀자라도 없는지를 수소문한다. 왜냐하면 한 백성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 가뭄이라는 징벌을 내린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이 억울하게 죽은 부녀자가 있으면 그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고 그 원한을 풀어주는 형을 다스리기 마련이었다. 이와 같은 습속은 하늘과 무력한 서민의 상여관계에서 권력자에게 압력으로 작용하는 종류인 것이다.

 

이밖에도 가뭄이 든 고을이나 도나 나라에 따라, 가뭄을 현감, 군수, 목사, 감사, 임금 등에 내린 징벌로 여기고 주금(酒禁), 감선(減膳), 소찬(素餐)을 하기도 하고, 가뭄이 심하면 사임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부덕을 응징하는 뜻에서 회초리로 자기 자신을 친다든가 관가의 기둥에 머리를 스스로 부딪혀서 피를 흘린다든가 하는 고행으로 자기 징벌을 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숙종조(肅宗朝) 신묘년(辛卯年)에 전국이 몹시 가물었는데 조상우(趙相愚)가 우의정이 되던 날 갑자기 비가 쏟아졌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조상우의 큰 덕으로 여기고 그의 이름은 조상우(趙相雨)로 바꿔 썼고, 그 자신도 말년에 천심 덕분으로 벼슬살이를 잘 해낼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천인상여의 사고방식은 중국에서 흘러들어온 천심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극단적인 천심의뢰(天心依賴)의 취향까지 빚었던 것이다.

공자는 「지천명(知天命)」으로서 도덕률을 삼았고

묵자(墨子)는,「통치자란 곧 천(天)이 원하는 것을 행하고, 천이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천의 의지를 역설했다.

사람은 땅에, 땅은 하늘에, 하늘은 도(道)에, 도는 자연에 따른다고 노자(老子)는 가르쳤다. 이같은 천에의 순종은 한국 정치가들 틈에 지천주의(至天主義)란 숙명론적인 정치관을 이식시켰던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로 선조(宣祖) 때 장수한 상신(相臣) 강사상 (姜士尙)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이르는 지천(至天)이란 전심지상주의다. 인위란 있을 수 없으며 천심에 의해 모든 정치가 지배되므로 무리해서, 또 애써서 인위적으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천리에 역하는 것으로 삼가했다. 그러므로 착하고 선하게 정치를 할 수 있었으나 무기력하고 무계획하며 발전적 요인이 내포되지 않는 결함이 있기도 했다.

 

그는 30여 년 동안 정치하면서 모든 시사에 대해 그것이 옳건 그르건 그것의 존재 이유를 천심에 다 합리화하였으므로 그 시론의 파당 때문에 몸을 다친다는 법은 없었다.

항상 그의 말을 다하고는,

『국가의 정치란 천운에 있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고 말했다.

공론도 주장하지 않으며 사정(私情)도 따르지 않고 다만 사람을 대하면 코만 만지고 모든 사리를 하늘에다 결부시키므로, 「하늘에 닿는 강상신의 코」란 속담이 생기기까지 했다.

이 같은 지천주의 처세는 그 후 혹심한 당파의 와중에서 편리한 처세술이 되어 식비(拭鼻)한다는 처세 동사가 생겨나기까지 했다. 즉 파당이나 공론에 개입하지 않고, 모두 천심이요, 천운이라면서 코만 만지고 있으면 화를 면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종(中宗) 때 일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세조가 단종의 어머니인 문종비 권(文宗妃·權)씨의 능인 소릉(昭陵)을 폐한지 58년 되던 해였다. 당시 많은 조신이나 민심은 이 억울한 폐릉陵)의 처사에 대해 원한을 품고 통분을 느껴오던 터라 소세양(蘇世讓) 등 선비들이 소능의 복위를 상소하고 조정에서는 그 가부가 논의되었으나 결판을 못내고 질질 끌고만 있을 때였다.

 

「때마침 태조(종조)의 나무에 벼락이 치자 임금이 놀라고 두려워서 급히 태묘에 가서 공경히 절하고 급히 공경 (公卿), 대간(台諫), 시종(侍從) 등을 불러서 잘못을 입대(入對)하게 하니 소릉의 일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의논이 지배적이므로 드디어 윤허를 내려서 도감을 설치하고 그 일을 감독하도록 명하였다. 」〈海東野言 第三卷〉

 

이 소릉의 폐릉에서 나온 돌을 민가에서 쓰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병이 나고 마소를 놓아 능자리를 밟으면 맑은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져서 큰 폭풍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이 공경하고 신비하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새 능을 문종의 능인 현릉의 왼편 등쪽에 정하였는데 그 능들 사이에는 커다란 해송 몇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능의 역사(役事)를 시작하자 연고 없이 이 해송들이 시들어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말라비틀어지자 이를 베어버렸더니 두 능이 마주 대하고 막힘이 없어졌으니 이상한 일이라고 옛 문헌들에 기록되어 있다.

 

조광조가 형틀에서 죽던 해부터 가뭄이 혹심했는데 당시 백성들은 모두 이 억울한 죽음이 응천(應天)한 소치로 알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다.

 

이 같은 악정이나 불의나 부정 등에 의한 원한이 응천하면 징벌을 내린다는 천인상여의 사상이 당시 위정자인 선비들 간에 없었다고 가정해 보기만 해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상의 실례로 보아 한국의 문인 신분층, 곧 목민하는 선비들은 그들의 정치와 도덕이 절대자인 천에 의해 규제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에 한국선비의 특질인 경천사상, 천명사상, 순천사상 등이 빚어낸 것이다.

 

■ 韓國人이 손를 비벼 기도하는 뜻

 

물론 이같은 사상은 선비 고유의 것만은 아니다.

 

심청이 뒷마당을 깨끗이 쓸고 황토를 단에 뿌린 후 금줄을 매고 정화수를 소반 위에 받쳐 놓고서 분향 재배한 후 다음과 같이 빌었다.

「상천 일월성신(上天 日月星辰)이며 성황 사방지신 제천 제불 석가여래 팔금강 보살(城隍 四方之神 諸天 諸佛 釋迦如來 八金剛 菩薩)님 소소(所所) 응감하옵소서. 하나님이 일월두기 사람의 안목이라 일월이 없사오면 무슨 분별하오리까. 소녀 아비 무자생 이십 후 안맹(眼盲)하여 시물(視物)을 못하오니 소녀 아비 허물일랑 이 몸으로 대신하고 아비 눈을 밝게 하여 천생연분 짝을 만나 오복을 갖게 해주어 수부귀다남자(壽富貴 多男子)를 점지하여 주옵소서.」

 

흥부전에서 흥부가 돈 30 냥에 김부자 대신 영문으로 매(笞)품 팔러 갔을 때 흥부 아내는 뒷뜰에 단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기축생 연씨 대주 남의 죄 대신으로 매맞으러 갔사오니 하나님 어진 신명으로 무사히 다녀오기를 천만축수 비나이다.』

 

한국 서민들은 모든 인간사가 신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알고 곧잘 신명에게 기구했다.

 

다만 이 같은 서민의 신명사상과 선비의 신명사상이 다른 점은 전자가 운명적인 귀의(歸衣)로 그친 데 비해 후자는 규범적인 예(禮)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선비의 신명 사상은 곧 정치와 인사가 하늘에 계신 무형의 상제로부터 감시받고 있다고 생각한 데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기에 선비는 진리요 선이며 이 세상의 모든 플러스적 가치 만을 대행하게끔 규제를 받는 존재인 것이었다.

 

그러기에 선비의 행동은 항상 법률이나 계약 같은 외부적 규제에 의해 강제된 선행이나 의행이 아니라 신명을 내포한 그 자신 스스로의 선행이나 의행(義行)이었던 것이다.

 

천(天)과 인(人)사이에는 천명을 대행한 천자가 있고 임금이 있고 법률이 있고 도덕이 있고 별별 중간미디어가 많다. 이 같은 미디어가 가장 발달한 것이 서양의 법치사상과 계약사상이다.

한데 한국의 선비는 그 같은 미디어의 게재를 거부하고 직접 천과 자기 개체와에 직접적인 상여를 한다. 이같은 직접적인 천인상여사상은 하늘 천(天)자의 자의(字)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큰 대(大)자는 곧 사람이 두 손을 펴고 두 발을 벌려 버티고 서 있는 상형이고 그 사람이 머리 위에 떠받치고있는 한일(一)자는 사람 위를 덮은 천공의 상형이다.

 

천은 한국인에게 있어 객관적인 자연이 아니라 주관적인 동일체인 것이다. 한국인은 이같이 신명을 갖고 다니는 이상한 사람이며 이것이 선비의 모럴을 감시하는 인스펙터인 것이다.

 

만약 한 선비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선비는 그 불행이 전혀 인과 없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법은 없다. 그 불행은 자신이 저질렀거나 또 자신이 품고 있는 어떤 마이너스적 가치의 사고나 행동의 보복으로 인식한다.

 

만약 남에게 행운이 안기면, 우발적이고 우연한 행운으로 생각하는 법은 없고 그 행운에는 그 사람이 언젠가 행했던 플러스적 가치의 사고나 행동의 소치로 이해한다.

 

만약 정치에 참여한 선비들에게 있어 이 천인상여사상이 결여되었던 한국의 역사는 적지 아니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많은 악정과 수탈과 민원(民怨) 속에 점철된 그런 악의 역사가 선비는 그 스스로를 지키는 도덕과 남을 다스리는 정치가 어떤 규범이나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천명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런 경천문화의 가치 단위다. 그러기에 정치나 법률경제 등이 발달되지 않아도 소기의 이상적 목적을 이행하고 이상적 결과를 얻을 수가 있었으며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한국다운 소중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 敬天과 民主主義

 

충남 부여에서 북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는 백제시대의 정사암(政事岩)에서는 재상을 투표해서 선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곧 하늘과 접한 펀펀한 바위는 하늘의 뜻이 내리는 곳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굳이 이곳까지 와서 재상을 선출한다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이 하늘의 뜻에 의해 뽑혔고 따라서 하늘의 뜻을 충실히 대행한다는 의무감을 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공주 북쪽에 있는 취리산(就利山)에도 천정대(天政臺)로 불리는 마당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백제가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망했을 때 신라 문무왕(文武王)과 당나라 총독 유인원(劉仁願), 그리고 멸망한 백제의 왕족 부여 융이 백마를 희생시켜 그 피를 나누어 마시고 영원한 예속을 혈서한 다음, 그 서약을 새긴 철권을 천정대의 서약단 북녘에 묻었다 한다.

 

곧 약속을 천의로 보장시키기 위한 소행이었다.

 

원시시대는 천의와 민의의 조화가 정치의 주체였다. 이 주체의 교합장소는 이같은 천의를 잘 받을 수 있는 높은 곳에 자리 잡은 펀펀한 바위였다.

 

모든 결의나 약속은 이곳에서 해야 보장을 받고 효력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았다.

 

이 일련의 천정대는 희랍 아테네의 신전, 아크로폴리스 기슭에 있는 희랍 민주주의의 집회소인 아골라와 같은 것이었다. 아골라의 핵심지에 있는 집회소는 펀펀한 대석(臺石) 위였다. 즉 아테네의 마당바위를 중심으로 이 아골라가 형성된 것이었다. 백제시대의 정사암이나 천정대는 이 한국 원시 민주주의의 아골라였던 것이다.

 

동해안에서만 줄지어 발견되고 있는 영랑대(永郞臺)나 영랑암(永郞岩) 등은 신라 화랑들의 원유지라는 풍류적 해석보다 동해안을 어지럽혔던 왜구를 방어하는 화랑들의 향토방위 초소이거나 왜적을 막기 위해 임정(臨政)하는 젊은이들의 결의서천(結義誓天)하는 제단이 아니었던가 싶다.

 

강원 횡성군 둔내면 영랑리에 있는 영랑대는 옛부터 왜구가 쳐들어올 때마다 왜적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겠다는 동네 젊은이들의 서천 결의터였다 하였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전염병의 마을 침입을 막는 무당들의 푸닥거리터가 돼있다 한다.

 

1913년 10월의 일이다.

일본인들의 산림침략이 시작되고 완도 남쪽 보길도의 아름다운 산림에 한 일본인이 군침을 흘렸다. 총독부에 압력을 넣어 식산국 산림과 직원 5명이 측량을 하러 이 보길도(甫吉島)에 상륙한 것이다.

 

이 산림은 시조의 명인 윤선도가 이상향을 가꾸기 위해 조림하기 시작했던 섬의 재산이었다.

 

이 마을 도주(島主)격인 김노인은 섬이 생긴 이래 최대의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마을의 좌장(座長)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마당바위로 속칭되는 너른 암대에서 열렸으며 옛부터 공사가 있을 때마다 모이던 암대였다.

10명의 좌장들은 전투로서 이 측량단과 이들을 엄호하는 경찰을 축출하기로 결의하고 양피를 탄 소주를 돌려마시며 서천결의를 하였다.

 

이 결의장정군과 측량단을 원호키 위해 출동한 목포경찰 응원대와의 유명한 보길도 소전쟁이 야기된 것이다.

 

하늘에 다 맹세하는 이 서천결의 습속은 이같이 근대에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같이 하늘에 맹세하고 하늘의 뜻을 받드는 습속은 한국인에게 경천이라는 한 사상을 형성시켜 놓기에 이르렀다.

 

곧 하늘은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의 선악을 지배한다는 천인상여의 사고방식을 형성하였고 이 사고방식은 한국인의 경천사상을 체질화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