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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5.派黨性向(파당성향)

구글서생 2023. 6. 10. 20:07

선비의 의식구조-5.派黨性向(파당성향)

 

■ 가마고개의 悲劇

 

하동(河東) 옥종면(玉宗面) 종화골에서 안계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다. 「가마고개」로 불리우는 이 고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구전된다.

 

광해군 때 일이다.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학통을 이어받은 종화골의 한 명문 집안에서 딸을 출가시키고자 가마 행차를 하였다.

 

공교롭게 이때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안계골의 한 명문 집안에서도 딸을 출가시키고자 가마행차를 하였다. 이 양가(兩家)는 수백 년 동안이나 학통이 다르다는 것을 두고 다투어온 적대 가문이었다. 이 적대하던 가문의 두 가마가 공교롭게 이 고개마루에서 부딪치게 되었다. 비록 좁은 고갯길이기는 하지만 가마가 못 비켜가리 만큼 좁진 않았다. 고개 아래는 낭떠러지로 남강(南江)의 지류인 덕천강(德川江)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한쪽의 가마가 비켜주거나 비켜 가기만 하면 아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한데 그들의 골수에 사무친 학통의식은 그 같은 겸양을 철저히 배제하고 대치하고만 있었다. 비켜 가는 가마쪽의 가문이 굽힌다는 의식에서 치열한 다툼이 생겼다.

 

구전된 바로는 그들은 연사흘을 버티었고 각기 학문에서 응원 온 유생들이 초막을 치고 버티는가 하면, 신부가 오지 않은 양 신랑 집에서도 달려와서 대치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영남의 각지의 퇴계 문하생과 남명 문하생까지 몰려들어 대치하였다고도 한다. 퇴계의 문하와 남명의 문하는 서로의 학문을 헐뜯으며 사이가 좋지 않던 때였으므로 이 가마 고개의 대치는 차츰 큰 뜻을 지니게 되었다.

 

이 가마고개에서 있었던 일은 한국적 사고방식의 적절한 표현이었다. 당시 한국사회의 구성 단위는 대가족제이었다. 숱한 정치적 문란과 잇따른 외침이 사회의 가난을 가져옴에 따라 각자의 생활의존을 친족 공동체인 대가족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도 그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이 대가족제도에 의해 형성된 가문은 다시 그들 선조의 학통(學統)에 따라 보다 큰 공감적 세력인 학문(學門)을 형성하였다. 이 학문은 어느 한 스승을 핵심으로 한 문하생의 대단위가 아니라, 그 문하생에게서 가지 친 문하생, 다시 그 문하생의 후손들까지 크게 포괄되는, 그리하여 몇 대를 이어 내렸으므로 학문하는 선비가 없는데도 학문이란 파벌이 크게 형성되어 같은 학문끼리는 마치 한 가문처럼 교우도 하고 交婚도 하는 반면「라이벌」학문은 아무런 구체적 사연이 없는 데도 서로 적대시하고 헐뜯는 생리가 체질화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학문에 의한 파벌은 학자가 많았던 영남지방에서 가장 심했고, 전국적으로도 낙향 선비가 정주(定住)했던 곳에는 이와 같은 유전된 학문의식이 조금씩 남아 있었다.

 

특히 이황, 조식,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 최영경(崔永慶), 정경세(鄭經世) 등, 거학(巨學)들은 각기 문하생의 몇 대 후손들까지 그 강한 학문의식을 전승해 내려왔고, 이 학문 의식이 가문의식과 야합되어 가마고개의 희비극을 빚어놓은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나라가 망한다는 건 가문이나 학문이 망한다는 것보다 절실하게 실감이 나질 않았다. 가문이나 학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있어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질 않는다. 따라서 한국은 역사상 한 번도 침략국이 되어보지 못했으며 침략만을 받았고 이 침략이 가져온 빈곤이 대가족주의를 조장하는 악순환을 거듭해온 것이다. 가문과 학문의식은 이같이 다져졌고 그 가문이나 학문의 명예는 국가나 개인의 생명보다 한결 높은 데 있어 왔다.

 

가마고개의 대결은 이런 절박한 상황 때문에 탈출구를 찾지 못했다. 학문의 명예를 내건 그 마당에 극히 조그마한 요소인 딸이 시집간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팽팽히 맞선 이 양 學門에서는 그 대결의 불씨가 된 시집가는 딸에게 각기 자결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가문과 학문의 명예를 구제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두 시집가던 딸은 가문의 어른들이 짐짓 가마 속에 넣어준 무거운 돌덩이를 붉은 비단 치마에 싸서 안고 덕천강 벼랑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들의 신방은 바로 무덤이었다.

 

이건 흔히 있는 비정사(非情史)의 극히 많은 한 실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학문전쟁의 고전장은 「가마고개」로 불리었다. 이와 같은 학통 보수주의는 동양인의 공통적 성향인 상고보수(尙古保守) 주의와 이설(異說)에의 배타성향에서 굳어진 것 같다. 과거에 있었던, 자기 선조가 찬양하고 심혈을 쏟았으며 믿었던 어떤 사실에 절대성을 부여하여 그 사실을 맹신(盲信)하고 맹종(盲從)하는 것이 도리이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선조가 좋았던 학문을 비판하고 그 잘못을 지적하고 불합리한 것을 합리화하는 그런 발전적 작업은 불손하다고 저주받 았으며, 학문에서 뿐만 아니라 온 사회로부터 파문(破門)을 받게 마련이었다. 이 같은 상고(尙古)성향 때문에 공자나 주자, 그리고 퇴계나 율곡의 가르침이나 학문은 항상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상고성향이 그 학문과는 아랑곳없이 가통을 타고 내려 파당(派黨)을 구성하였고, 한국의 중세적 사회구성의 한 특성을 형성해 놓기에 이른 것이다. 극히 근대까지만 해도 모르는 사람끼리 첫 대면을 하면 성(姓)과 본관(本貫)을 먼저 알리고 그 가문의 명인을 들어 그 명인의 몇 대손임을 알린 다음 학문(學門)을 대게 마련이었다. 여헌(旅軒)문의 함양파(咸陽派)요, 또는 한강(寒岡)문의 산청파(山淸派)요 하는 식으로 학문을 대어 서로 「라이벌」이 되지 않나를 가늠한 다음 社交가 시작되곤 했었다.

 

이와 같은 학통지상(學統至上)의 생리는 그 학문의 시발점인 학자를 보다 위대하게 여기고 유일화하여 심한 경우에는 신격시하는 성향이 자연 발생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성향은 자기네 학조(學祖)의 무사문설(無師門說)이 입증해주고 있다. 즉 위대한 자기 학조는 곧 시발자(始發者)로 누구로부터의 계승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워 자기네가 속한 학문의 독자성과 신성(神聖)을 지키려 한 것이다.

 

■無師門

 

여말(麗末) 이성계(李成桂)의 「쿠데타」에 관한 직필(直筆)은 집권 후 위험서적으로 간주되어 모조리 말살되고 말았다. 한데 철종(哲宗) 조에 한 비전(秘傳)이 발견되어 당시 정계와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여말 충신인 원천석(元天錫)이 지은 그의 스승 불훤재(不諼齋) 평산(平山) 신현(申賢)의 전기(傳記) 「화해사전(華海師全)」이 그것이다. 직필로 이름난 원천석의 글이기에 이조 왕조의 조신들이 위험서적시했던 것이고 그보다 이 책이 충격을 준 것은 한국 이학계(理學界)의 정설이 되어온 동방이학의 조(祖)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신현을 스승으로 부른 대목이다.

 

정몽주가 신현의 문하라면 정몽주의 위대한 유교적 지위가 떨어질 뿐 아니라 그의 무사문설(無師門說)이 뒤집히는 결과가 되므로, 정통적 유종(儒宗)과 정씨 가문에서는 통장(通狀)을 돌려 「화해사전」은 후인의 조작이라고 시위를 하였다.

 

거유(巨儒)의 후손들은 그들의 자랑스러운 선조의 무사문설을 주장함으로써 그 위대성을 돋보이려는 경향이 짙었으며 그것은 한 전통이 되어왔었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후손들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정경세의 사문(師門)이었다는 것을 완강히 부정하였고, 여헌 장 현광의 후손들은 여헌이 한강 정구(鄭逑)의 문하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던 것이 그 일례들이다.

 

그리하여 신현의 후손인 신석희(申錫禧)가 경상관찰사로 있을 때 이 「화해사전」에서 이조왕실에 거슬리는 부분을 삭제하여 만든 「불훤재실기」를 출판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으나 정계와 학계 그리고 정씨가문의 육박시위 등 반대가 심해 뜻을 못 이루었고, 양반계급을 비판했던 문호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가 정승으로 있을 때 이 책을 출판하려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철종 연간에 각 지방의 서원과 향교가 서로 호응하여 신현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추모행사로 사당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무르익었으나 그 역시 정치적 압력으로 저지당하고 말았다. 신씨 가문에서는 판권을 업고 덤벼드는 유림(儒林)들로 말미암아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것은 이설에 대한 보수적 반발이라기보다 정치나 가문의 명예 때문에 어떤 진실이 말살되는 한 한국적 「도그마」의 실례랄 수 있을 것이다.

 

「화해사전」의 서문에서 저자 원천석은 후세 사람들이 단지 신현의 이름이나 벼슬만을 알고 그의 행실이나 학문은 모르기 마련이니 이 책을 지어 군신(君臣) 상호 간에 고루 알리는 것이 제자의 임무로 안다고 말하고서, 이 스승이 상용하던 이학문답(理學問答) 등 이학에 관계된 조항을 많이 수록하였다. 이와 같은 학문의「도그마」때문에 독창적이고 가치 있는 서적들이 많이 말살되어 왔고 또 독창적 발전적 학문을 절망적으로 말살시키는 요인이 되어오기도 했다.

 

□ 여자의 服色에도 派黨이

 

부인장씨(夫人張氏)는 여헌 장현광의 손녀로서 안씨의 집에 시집갔다가 그 사위 유(柳)씨의 집에서 죽었는데 그 나이 구십팔 세였다. 부인의 아들 안연석(安鍊石, 1662~1730)이 간사하고 술책이 많아 벼슬하기에 급급하여 대대로 지켜 오던 남인파(南人派)의 당론(黨論)을 배반하고 서인(西人)에게 붙었으므로 남인 선비들이 수치로 생각하였다. 연석이 죽고 그 아들 복준(復駿)이 계승하여 더욱 심하였는데 남인 선비들이 그 음해함을 받아서 체포되고 귀양간 사람이 전후에 여럿이었다. 남인 선비들이 분하게 여겨 복준의 집에 일제히 모여서 그 집을 헐고 고을에서 쫓아내려 하니 부인이 비로소 그 상세한 것을 알고 크게 놀라 사람을 시켜서 자손 잘못 가르친 것을 사죄하니 사람들이 어진 어머니의 뜻을 상할까 하여 차마 집을 헐지 못하고 돌아갔다. 부인은 복준을 불러 통렬히 꾸짖고는 다시 대면하지 않았으며, 그 뒤에도 매양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탄식하고 분통해 했던 것이다.

 

복준이 집에 있기가 불편하여 서울로 돌아다니다가 오랫만에 돌아와 뵈오매 부인이 말하기를,

『무엇하러 왔느냐?』

하니 복준이,

『집에 돌아와 할머니를 뵈옵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이것이 네 집이냐.』

하니 복준이,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에 부인이,

『우리 집은 선대부터 대대로 남인인데 내가 네 집에 거처할 수 없으니 속히 가마를 준비하라.』

하였다. 복준이,

『어디로 가시렵니까』

하니 부인은,

『유씨(柳氏)의 가문에 시집간 너의 고모는 아직 남인이니 내가 거기에 가서 의탁하여 목숨을 마치겠다.』

하였다.

복준이 간절한 말로 만류하기를,

『해가 이미 저물었으니 내일을 기다릴 수 없겠읍니까.』

하였다.

부인이 노하여 마루 끝에 앉아서 명령하기를,

『네가 만약 나의 뜻을 어긴다면 내가 여기에서 떨어져 죽을 것이니 사람들은 네가 나를 핍박하여 나를 죽게 하였다고 말하지 않겠느냐. 속히 가마를 준비하고 나를 오랫동안 지체케 하지 말라.』

하였다.

복준이 부득이하여 가마를 준비하여 행장을 차려 드렸고 수십리 길을 가서 비로소 유씨 집에 이르렀는데 밤이 이미 깊었었다. 그 때문에 병이 더하였다. 복준이 자주 들어가 시탕(侍湯)하기를 청했으나 부인은 이를 거절하고,

『내가 네 손에 죽기보다는 내 딸의 손에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고, 자기의 딸에게 복준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고 안팎 모든 손자들을 불러 모아 영결의 말을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옮겨간 지 겨우 오일 만이었던 것이다. 〈동소만록(桐巢漫錄)〉

 

한국인의 억센 파당의식은 선비집의 정신적 골조 같은 것으로 비단 선비뿐 아니라 그 골조 안에 사는 안사람들까지 체질화돼 있음을 이에서 본다. 또한 이 파당생리는 부녀자의 복식까지도 달리해놓고 말았다. 곧 자기 가문의 당색에 따라 복색이 달라졌고 그 복색만 보면 그 부녀자가 소속된 당색을 한눈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노론(老論)의 경우 저고리의 깃과 섶이 둥글며 치마주름이 굵고 접은 수가 적다. 헤어스타일도 느슨하게 뒷머리를 늘여서 쪽을 지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소론(少論)파 부인들의 깃과 섶은 노론의 그것에 비해 뾰족하고 모났기로 「당(唐)코」라는 속명으로 불렸다. 저고리 둘레가 둥글고 치마주름이 잘며 따라서 주름수가 많다. 머리쪽도 바싹 올려서 쪽지었기로 비단 옷매무새뿐 아니라 머리 쪽만 보더라도 黨色을 한눈에 보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집요하고 너무나 보편화한 파당성향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 派黨에 좌우되었던 行動方式

 

선비의 파당(派黨)의식은 선비의 정신뿐 아니라 선비의 행동마저도 파당에 따라 고식적으로 유형화시켜 놓고 말았다.

 

청주 화양동(華陽洞)에 연장암(煙章庵)이란 암자 하나가 있었다. 구곡산천(九曲山川)의 아름다운 경치를 거치면 숭명사대주의(崇明事大主義)의 성지(聖地)라 할 명(明)나라 황제(皇帝)를 모신 만동묘(萬東廟)가 나오고 노론인 송시열(宋時烈)선생의 서원이 있다. 다시 읍궁암(泣弓岩)을 지나서 그 암자에 이르게 된다.

 

「이순록(二旬錄)」에 보면 이 저자가 어느 날 연장암에 이르러 그곳 늙은 스님과 대화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를 여기에 옮겨 본다.

『대사가 이 같은 산중에 살면서도 세정(世情)에 대해 알고 있는가』

고 물었더니 스님은,

『여기에 거처한 지가 삼십여 년이 되었는데 산수(山水)가 절승(絶勝)하므로 유람하러 오는 손을 많이 겪어서 자연히 사색(四色)당파를 알게 됩니다. 이것은 세정을 아는 것이 아닙니까』하였다. 이에

『사색 당파를 대사가 어찌 알아서 구별하는가』

하니 다음과 같이 대꾸했던 것이다.

『보고 그 모양과 행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읍니다. 처음 동구에 들어올 때 산천을 두루 돌아보면서 좋다 좋다 하고 동(洞) 안에 들어와서는 반드시 암자에 중을 부르고 서원(書院)을 지날 때에는 눈을 부릅뜨고 손을 휘저으며 기침하고 침뱉기를 함부로 하고 만동묘를 지날 때 공경하고 근신한 뜻이 없는 자는 남인이요,

동에 들어올 때 산수를 자세히 보지 않고 서원과 만동묘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바쁘게 지나가고 암자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중들의 허물 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서 잔소리를 하며 성가시게 구는 것은 소론이요,

동에 들어와서 산수만을 보고 서원과 만동묘를 지날 때에 존경하는 뜻은 없으나 또한 너무 거만한 태도도 짓지 않고 바쁘게 지나가는 자는 소북(小北)이요,

동에 들어올 적에 좌우로 산천을 돌아보며 혹 냇가에 앉거나 바위에 기대었다가 서원에 이르러서는 조심스럽게 뜰에서 절하고 자세히 서적을 보며 감탄하기를 마지 아니하고 만동묘에 이르러서는 처마만 쳐다보아도 이미 깊은 감회가 생기고 전(殿)안을 봉심(奉審)하고 몸을 굽혀서 뜰을 지나 암자에 이르러서는 중들의 생활을 자세히 묻고 밤에는 늙은 중을 불러 담화하면서 산중의 고적을 묻는 자는 노론입니다. 』했다. <이순록(二旬錄)〉

 

세도와 직접 연관이 되는 왕실과의 결혼도 파당에 의해 좌우되었던 것이다. 덕종(德宗), 예종(睿宗), 성종(成宗) 내려 3대에 청주 한(韓)씨가 비(妃)가 된 것이라든지 순조(純祖), 헌종(憲宗), 철종(哲宗)의 비가 내려 안동 김씨라든지 또 고종(高宗), 순종(純宗)의 비가 여흥 민(閔)씨라든지 하는 것도 당파 생리에서 빚어진 것이다.

 

계해(癸亥)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 무리들이 모여 서로 약속한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국혼(國婚)은 서인(西人)인 우리 당에서 놓쳐서는 안 되고 도학자(道學者)를 숭상하고 추장(抽獎) 』한 조문(條文)이 있었던 것이다. <당의통략(黨議通略)>

 

□ 派黨生理는 人脈을 타고도 완고하게 생동하였다.

정희적(鄭熙績)이 경연에서 말하기를,

『이이(李珥)가 처음에 중이었기 때문에 선비들의 공론이 그 과거보는 것을 허락지 아니 하려 하였는데 심의겸(沈義謙)이 주선하여 그것을 풀어주었고 그 뒤에 출세한 것이 심의겸의 힘이다.』

하였다. 홍적(洪迪)이 이를 받아

『옛적에 상앙(商鞅)이 환관 경감(景監)을 통하여 진(秦)나라 임금을 보았으므로 조양(趙良)이 한심하게 여겼는데 지금 이이가 심의겸을 통하여 출세한 것이 무엇이 그와 다르겠읍니까.』하였다. 이에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 말대로 한다면 이 이는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이 되는데 불과할 것이요, 나는 경망한 임금이 되는 데 불과하다. 너희들이 이런 일만 가지고 다투면 능히 북쪽 오랑캐 니탕개(尼湯介)를 잡을 수 있겠느냐』했던 것이다.

 

이 같은 파당성향(派黨性向)에서 이를 극복하려고 초당(超黨)적인 노력을 기운 선비 또한 적지 않았었다.

 

선조 때에 동고 이준경(東皐 李浚慶)이 죽을 때 유차(遺箚)를 올리기를,

『붕당(朋黨)의 사(私)를 부셔야 합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혹 몸에 허물이 없고 하고 일에 법칙을 어김이 없어도 단 한마디 말이 자기네 뜻과 합당하지 않으며 배척하고 용납하지 않으며 행검(行檢)을 일삼지 아니하고 글읽기도 힘쓰지 않고 높은 말과 큰 소리로 당파를 만드는 것을 고상한 것으로 여겨 드디어 허위의 풍속을 이루었으니, 이는 전하께서 공정하게 듣고 두루 보아 이 폐단을 제거하기를 힘써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마침내 국가를 구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 뒤 얼마 안 가서 을해년에 동인(東人), 서인(西人)의 당쟁이 생겨 그 말이 과연 맞아들었던 것이다. 〈당의통략(黨議通略)〉

 

이식(李植)이 일찌기 이완평(李完平)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하루는,

『매양 여쭈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오늘에야 틈을 얻었읍니다. 이 율곡이 어떠합니까.』

고 물었다. 이에,

『몸이 당상(堂上)에 있어야 당하(堂下)에 있는 곡직(曲直)을 알 수 있는데 내가 그 직위에 이르지 못했으니 비평을 옳게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李)가 말하기를,

『제가 항상 존경하고 사모하기를 태산(泰山)과 북두성(北斗星)같이 하여 스스로 의지할 곳을 얻었다고 생각하였더니 오늘 성심으로 말씀하여 주지 아니하시니 저는 이 자리에 있지 못하겠읍니다. 이로부터 하직(下直)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완평이,

『조금 앉으라, 가령 두 사람이 술에 취하여 서로 붙들고 때리고 욕하며 언덕 밑에서 싸울 때에 한 사람이 언덕 위에 서서 말로 타일러 말리다가 취한 사람이 듣지 않으매 그제는 직접 달려가서 말리다가 드디어 한데 섞여 밀고 당기는 것을 면치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

하였다. 이에 감탄하여,

『공경히 들어 알았읍니다.』

하였다. 〈성호사설(星湖僿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