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말에는 산에 감히 오른다 하지 못하고 반드시 산에 든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숨이 턱에 닿아 어느 봉우리 위에 발을 좀 붙인 것이 어찌 산의 정복이 되겠습니까?
옛 선비로서 행락을 호사스럽게 한 분으로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를 들 수 있다. 이 시인이 보길도에서 행락할 때의 모습이 《가장유사(家藏遺事)》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조반 후에 사륜차(四輪車)를 타고 현죽(絃竹)의 예기(藝妓)를 따르게 하여 회수당(回水堂) 또는 석당(石堂)에 올라가 놀았다. 세연정(洗然亭)까지 갈 때는 노비(奴婢)들에게 술과 안주를 충분히 준비시켜 작은 수레에 싣고 제자들을 시중케 했으며 희녀(姫女)들을 작렬(作列)시켜 낚싯배를 못에 띄우고 남녀 영동(令童)의 찬란한 채복(彩服)이 물 위에 비치는 것을 보며 자기가 지은 어부사(漁夫詞)를 읊곤 했다.
현대의 아무리 호사스런 행락일지라도 당해낼 수 없는 행락과 풍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같은 행락은 극히 예외적인 행락에 불과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몸져 누웠을 때 스님들이 무슨 병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이에 매월당은 평생을 떠돈 행락병(行樂病)이라고 대꾸했을 만큼 평생을 떠돌며 살았던 분이다. 그 매월당의 행락은 퍽이나 멋있었다.
그는 지리산에 들면 지리산에서 자란 나무로 금(琴)을 만들고 지리산에서 잡은 짐승의 심줄로 금줄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 산을 유람하는 도중에는 그 금을 탐으로써 그 산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즐기고, 그 산을 떠날 때는 그 산의 금(琴)을 아낌없이 버리고 떠났다.
다른 산에 들면 그 다른 산의 금슬(琴瑟)로 그 다른 산 소리의 묘미에 도취하곤 했다 하니 그 아니 멋있지 않은가.
물론 매월당의 행락도 세상을 버린 소외받은 사람의 이단적인 행락으로 우리 선조들의 보편적인 행락과는 거리가 멀다.
행락 욕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겠지만 행락을 둔 모랄과 인식의 차이 때문에 우리 전통 사회에서의 행락은 억압받고 은폐된 행락이었다. 농경민족인 우리 선조들에게 있어 논다는 것은 악덕이었기에 행락을 내놓고 즐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멀리 떨어진 친척 친지의 상가에 문상갔다 오는 길이라든지, 또는 멀리 있는 농토에 토조(土租)를 받으러 간다든지, 멀리 사는 노비로부터 신공(身貢)을 받으러 간다든지, 부모의 풍수길지(風水吉地)를 찾으러 나선다든지 하는 출타의 명분을 세우고 오가는 길에 명산이며 명승지에 들리는 그런 행락을 하게 마련이었다.
행락 태도도 경건하기 마련이었다. 왜냐하면 산은 성스러운 신령이 사는 身體로 알고 그 신체를 훼손시켜 산신령의 노여움을 사면 자신의 불행으로 직결된다는 한국인의 경건한 자연관(自然觀) 때문이었다.
육당 최남선은 이 한국인의 경건하지 않을 수 없는 산수(山水) 행락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 민족 생활에 있어서 그 나라 산천을 존경하는 감정은 심히 소중한 것이요, 그 존경하는 태도는 신앙적·종교적으로까지 가야 비로소 든든한 것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산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대소변을 받아가지고 나올 그릇을 가지고 가서 행여나 몸뚱이를 더럽힐까 조심하고 또 산중에서 큰소리로 지껄이면 행여나 산신령을 성나게 할까 봐 극진히 조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옛말에는 산에 감히 오른다 하지 못하고 반드시 산에 든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숨이 턱에 닿아 어느 봉우리 위에 발을 좀 붙인 것이 어찌 산의 정복이 되겠습니까?
요즈음 관광지에서처럼 어떻게 고성방가가 가능하고 또 곤드레 난무가 가능하며,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아무 데서나 방뇨가 가능할 수가 있겠는가.
옛날 충청도 화양동(華陽洞)의 명승을 구경하러 온 선비들의 작태를 적은 글을 본 일이 있다.
동구(洞口)에 이르면 다소 해이해졌던 정신을 바짝 차려 관을 바로 쓰고 옷을 가다듬으며 걸음걸이도 동구 밖에서보다 장중하게 하고 사우(祠宇)나 암석이나 거목을 바라볼 때도 먼저 두 손을 들어 배례한 다음에 구경을 했다고 한다.
또한 산길을 걸을 때는 일부러 느슨하게 삼은 짚신을 신는 것이 행락의 법도로 되어 있었다. 쫀쫀하게 삼은 짚신을 신고 걸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벌레들을 나도 모르게 밟아 살생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만한 배려로 자연보호를 했다면 감히 어떻게 풀 한 포기를 뽑고 나뭇가지 하나를 꺾을 수 있었겠는가.
요즈음 사람들에게 이만한 정신적 자세로 행락을 하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을 택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선조들의 행락정신에서 부활시키고 배워야 할 현대적 요인이 적지 않음을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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