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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17.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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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17.흥

구글서생 2023. 6. 13. 08:49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흥은 외부의 어떤 작용이 가슴으로 표현되는 심정의 표현에 와닿아 일으키는 어떤 동요다그러기에 흥은 반드시 즐거운 동요뿐만이 아니고 눈물겨운 동요도 흥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사이’와 ‘사아아이’의 미학

 

연전 서울 동교(東郊), 불암산(佛岩山)에 등산 갔다가 비를 만나 산 중턱에 있는 한 거사(居寺)의 헛간에서 밥을 지어 먹은 일이 있다. 50대의 절머슴이 나무를 갖다 주어 불을 피우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그 절머슴과 더불어 흥겨운 몇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흥이 난 이 절머슴은 그의 장기(長技)인 꼽추춤을 추어 보였다. 등산 냄비인 코펠을 등 저고리 아래에 넣어 꼽추 모양을 한 이 절머슴은 소시 때 기방(妓房)의 머슴을 할 때 꼽추춤의 본통을 이어받았다는 한 노기(妓)로부터 본격적으로 배운 춤이라면서 제법 격식에 맞게 추어 보이는 것이었다.

 

고(鼓)잡이가 없기에 스스로 코펠 뚜껑을 치며 장단을 맞추는데 그 타고(打鼓)의 리듬과 자신의 동작의 間斷을 컨트롤하는 입소리……

'사이 사이 사아이, 사이 사이 사아이' 하는 음성을 조화시키면서 구성을 맞추는 것이었다.

 

'사이, 사이, 사아이' 할 때에 북소리를 스타카토로 죽이고 춤의 동작은 순간적으로 멎다가 다시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이' 할 때는 짧게 멎고 '사아이' 할 때 조금 더 길게 멎었으며, '사아아이'할 때는 마치 춤추는 것을 포기라도 한 듯 모든 자세를 흐트렸다가 갑자기 춤의 동작으로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곧 '사이'란 동작의 중단이요, 동작의 정적을 의미하였다.

 

이 꼽추춤을 보고 있노라니 이 춤이 자아내 주고 있는 흥이란, 춤추는 그 동작의 연속에서 우러난다기보다 춤추다가 멎는 이 춤추지 않는 사이, 곧 간단(間斷)의 처리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 절머슴에게 '사이'란 무엇을 의미하냐고 물었더니 노기(老妓)로부터 꼽추춤을 배울 때 진행 중의 동작을 굳히는 구호로써, 그 ‘사이, 아이, 사이' 하는 구호의 길이 동안 춤의 동작을 그 형태대로 중단시키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 사이만 잘 잡으면 비단 꼽추춤뿐 아니라 모든 춤 익히는데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는 것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했다.

 

어떤 동작을 '본(本)'이라 하면 사이란 '간(間)'이요, 어떤 동작을 '행(行)'이라 한다면 사이란 '묵(默)'이다. 꼽추춤 뿐만 아니라 모든 춤을 이 사이의 미학(美學)으로 뜯어 보노라면 춤에서 우러나는 흥의 원천이 바로 이 사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가 있다.

 

이 '사이'는 한국적인 미(美)에 공통으로 내재되어 있는 한국미의 동일성(identity)이며, 이 사이에서 우러나는 흥 또한 한국적 흥의 한 형성 요인이 아닌가 싶다.

 

1960년, 동양에 애착을 갖고 또 조예가 깊은 미국의 여류작가 펄벅여사가 한국에 왔을 때 필자는 그녀를 수행하여 지방 여행을 다녔었다. 대구에서든가 그녀를 위해 거문고의 피로연이 있었다. 거문고를 들은 여사는 나더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거문고는 나는 소리보다 나지 않는 소리를 듣게 하는 악기다. 마치 사람이 혼자 울 때 소리 없이 우는 그 내부의 소리를 듣는 것만 같다."

 

비단 거문고뿐 아니라 가야금이나 아쟁(牙箏)이나 한국의 모든 현악기는 나는 소리보다 그 나는 소리의 중간중간에 처리하는 나지 않는 소리, 곧 묵음(默音)으로 미(美)의 처리를 하는 악기들임을 알 수가 있다.

 

■치는 마음과 타는 마음

 

현의 진동으로 그 실음(實音)이 파상(波狀)의 음파로 떨면서 스러져 간다. 그 소리를 감지하는 청각의 한계선을 넘어 그 실음을 들을 수 없다 해도 이미 그것을 듣는 사람은 그 한계선을 넘어선 여운의 주파(周波)에 마음을 공명시켜 그 소리를 듣게 된다. 곧 실음(實音)은 심음(心音)으로 탈바꿈하여 심정에 와서 닿는다. 심음이 와서 닿는 심정의 표면에서 마치 구름일 듯 이는 것이 곧 '흥'인 것이다.

 

서양의 악기는 '친다(play)'하고 한국의 악기는 '탄다(get in)’고 한다. 같은 말 같지만 이 친다와 탄다의 차이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친다는 쳐서 내는 소리 곧, 본음(本音)과 실음(音) 본위의 연주를 의미하지만 탄다는 것은 마치 물결 위에 배를 타듯 기폭의 공존, 본음이나 묵음, 실음이나 심음을 공존시킨다는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있다.

 

현악기뿐 아니라 타악기에서 더더욱 이 '사이'는 '흥'과 직결되고 있다. 북이나 장고, 꽹과리 등 타악기도 '둥둥'하는 실음보다 '탁’하는 사이 유지의 묘미 때문에 흥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서양의 북은 그 '둥'하는 실음의 빈도와 강약으로 묘미를 내는 데 비해, 한국의 북은 북의 언저리를 치는 '탁'으로 사이를 유지하는 데 묘미를 내고 있다.

 

심청이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이 팔려 인당수에 빠져 죽으러 가야 하는 날 아침, 심청의 영탄(嘆)에 맞추어 치는 북소리를 들어본다.

 

여기 판소리의 사설(辭說)에는 두 가지 요인, 곧 플롯을 이어가기 위한 사설과 플롯을 이어가다가 감정을 덧들이는 사설 두 가지로 대별된다.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한 사설의 전후에는 둥하는 북을 쳐서 감정이 복받치고 심정을 자극하고, 사설 전후에는 탁하는 사이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둥) 웬 년의 팔자로서, (탁) 날 낳은 어미 얼굴 보아도 모를 테요, (둥) 날 기른 아비 덕은 못 갚고 죽느냐, (탁) 설움이 중하여 울기나 하랴 한들(탁탁), 아비가 잠을 깰가 울지도 못하고서 눈물만 흘리더니, (둥둥) 원촌에 계명하며 날이 점점 새는구나, (둥) 문을 열고 급히 나가 물을 긷고 쌀을 씻어 아침밥 급히 지어 (둥둥), 반찬을 장만하여 아비 앞에 상드리고 마주 앉아 반찬을 가리키며 (탁), 이것은 고기, 이것은 자반이요, 반찬 많이 있사오니 진지 많이 잡수시오 (탁), 심봉사는 아무 명색도 모르고 (둥), 오늘 아침 반찬이 왜 이다지 좋으냐 저 건너 장승 상대 제사를 지냈느냐 (탁)

 

정말 듣는 이들의 눈매가 매콤하게 맺혀 오르는 그런 슬픈 대사에서 '탁'으로 사이를 잡고 있다. 곧 '둥'은 이야기를 꾸려가는 데 듣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대사이기에 귀에서 머릿속에 전달시키라는 신호요, '탁'은 이야기를 꾸려가는 것과는 아랑곳없이 듣고 느끼라는 대사이기에 귀에서 가슴으로 전달시키라는 신호인 것이다.

 

곧 흥은 외부의 어떤 작용이 가슴으로 표현되는 심정의 표면에 와 닿아 일으키는 어떤 동요다. 그러기에 흥은 반드시 즐거운 동요뿐만이 아니고, 눈물겨운 동요도 흥의 요인이 될 수 있다. 흥의 극치에서 한국인이 곧잘 우는 것이며, 울므로써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도모하는 것 등도 이 때문인 것이다.

 

박초월(朴初月)과 박귀희(朴貴姫)가 부르는 느린 중머리 장단의 흥타령을 듣다 보면 그 점이 완연하다.

 

무정방초(無情芳草)는 연연이 오는데, 청춘은 한번 가면 다시 올 줄 모르는고(후렴) 아이고 데이고 흥, 성화가 났네 흥.

 

여섯 구절까지 있는 이 흥타령의 사설은 남녀의 정과 인생의 무상을 읊은 것이나, 이 노래에서의 흥은 흥에 겨운 흥이 아니라, 비감이 극에 달해 나는 한숨 섞인 홍임을 알 수가 있다.

 

'아이고 데이고 흥'할 때, 아이고 데이고의 여섯 말을 읊은 진행시간과 흥하는 한마디 말을 읊은 진행 시간은 같다. 곧 '흥'하는 한마디로 '사이'를 잡고 있음을 알겠다. 흥은 비음(鼻音)으로 연결되고, 비음은 실음을 심음으로 전환시키는 과도적 음성이다. 곧 귀로 듣는 감각음을 심정에 전도시키는 심정음(心情音)으로 변압(變壓)시키는 장치가 '흥'인 것이다.

 

우리 민요의 특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민요마다 후렴이 없는 민요가 없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이를테면 진도 아리랑에서, ‘문경새재는 웬 고개인고,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하는 대목은 두뇌로써 판단되는 그런 사설로 타고법(打鼓法)에 비기면 '둥'에 해당된다.

 

그 다음에 부르는 후렴 부분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는 무슨 말인가 모르는 곧 두뇌로는 판단 못 되는 음으로 엮어지고 있다. 모든 민요의 후렴 부분에는 주로 이처럼 이해되는 말이 아닌 느껴지는 음으로 돼 있다. 그것은 귀에서 심정으로 연결되는 신경을 타는 소리로 타고법에 비기면 '탁’에 해당된다.

 

곧 후렴은 ‘흥’과 연결시키는 부분이다. 대체로 민요를 부를 때 본가사는 독창을 하고 후렴은 모두가 합창을 하는 이유도 흥을 불러일으켜 공감시키는 감정적 메카니즘인 것이다. 흥의 온상은 후렴에 있으며 후렴은 곧 민요의 '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