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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10.내 논이 주는 지혜

耽古樓主 2023. 6. 13. 05:39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참지 못하고 허리를 한 번 펴면 참아내는 기간이 절반으로 줄고 그 절반이 다시 절반으로 줄어 김을 매는 건지 허리를 펴러 왔는지 모를 지경이 된다모든 인생이 다 그런 거여."

 

일곱 살이면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적령이다. 그러하듯이 옛날에는 농사일을 배우기 시작하는 적령이 일곱 살이었다.

 

일곱 살만 되면 논 한쪽 구석 50평 남짓을 '네' 곧 너의 논이라고 떼어준다. 나는 그 논을 곧 '나의 논' 곧 내 논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농사일의 교육답(畓)이요, 실습답의 정통적 호칭이 내 논인 것이다.

 

자작하는 초다랑이의 논도 없이 남의 논 빌어 짓는 소작농의 집에 태어난 일곱 살에 떼어 받은 내 논은 동구 밖 숲거리에 있었다. 네 논이라고 떼어준다 해서 내 이름으로 등기 분양해 준 것이 아니다. 논둑 양편에 말뚝만 박아놓고 그 말뚝 저편이 네 논이라고만 표시해 줄 따름인 내 논이다.

 

이 내 논에서 한 해 동안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부여된다. 그것은 다음 다섯 가지 일이었다. 내 논의 모는 내가 심어야 하고 내 논에 물을 말려서는 안 되며 내 논에 잡초나 피가 자라서는 안 되고 내 논에서 새를 보아야 하며 내 논의 벼는 반드시 내가 베어야 한다.

 

이 다섯 가지 약속된 일 년 노동에 대한 대가는 추석날 내 논에서 벤 벼로 밥 한 그릇 지어주는 것이 고작이다. 일 년 노동에 대한 보수치고는 하찮은 것이었다. 내 논에서 벼 베고 난 다음 이삭을 주워 엿 사 먹는 부수입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 하찮은 보수에도 불구하고 왜 그다지 내 논에 대해 그토록 애착을 가졌는지 모를 일이다. 내 논에서 처음 모를 심을 때 모를 한 주먹 열 포기 남짓씩 쥐고 논바닥을 파가며 깊이 심었던 기억이 난다. 보다 많은 모를 보다 깊이 심어야 벼가 많이 열릴 것이라는 단순사고에서였다. 그렇게 욕심 많게 심고 있는 것을 할아버지가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무 말 하질 않으셨다.

 

모두 심고 논둑에 올랐을 때야 하시는 말씀이,

“이놈아 모란 것은 서너 개씩 물에 뜨지 않게끔만 가볍게 심어야 벼포기가 가장 많이 패고 벼가 많이 열리는 법이야.”

하는 것이었다.

 

왜 처음부터 보고 계셨으면서 그 말을 일찍이 해주지 않으셨느냐 물었더니 네가 커서 나이가 들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다 자라 늙어가면서까지 그 확실한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가늠이 가는 것은 있다. 할아버지 마음속으로 이놈이 제 논이라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 제 논에 대해서 애착을 갖기 시작하는구나 애착을 갖는 것만으로도 기초적 교육효과, 곧 기술 교육 이전에 정신 교육 효과를 얻었다고 평가되기에 그 확인 방법으로 두어두었음 직한 것이다.

 

심부름을 갔다 오거나 학교 갔다 돌아오거나 할 때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나는 동구 밖 내 논을 돌아보곤 했다. 언젠가 내 논에 물이 말라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이웃집 논에는 물이 철철 넘치고 있는데……

갈라진 논바닥이 고갈되어 내 가슴이 갈라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는 이웃 논과 대조되는 갈등 때문에 저녁밥이 먹히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천장에 투영된 내 논과 이웃 논의 영상 때문에 잠이 들지 않았다. 새벽 한 시 닭이 울 때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도둑처럼 살금살금 기어나가 괭이 하나 메고 동구 밖으로 달려나갔다. 미리 생각해 두었던 이웃 논 논둑을 갈라 내 논에 물을 쏟아 흘렸다. 원상 복구해 놓고 다시 도둑처럼 기어 들어와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여덟 살의 일이었다.

 

세상에 논둑에 꽃을 심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데 비오는 날 도롱이 둘러 쓰고 내 논둑에다 오랑캐꽃을 심었던 생각도 난다.

 

내 논을 둔 연상은 끝이 없다. 언젠가 내 논에서 김을 맬 때 할아버지는 교관 자격으로 더불어 나란히 김을 매셨다. 이편 논둑에서 저편 논둑에까지 왕복하는 동안 허리를 펴서는 안 되게끔 되어 있는 인고의 교육 과정이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애개개하며 허리를 편 적이 있었다. 곁에 나란히 김을 매던 할아버지가 나의 정강이 틈에 발을 걸어 사정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이었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어린 손자에게 하신 말씀이 지금도 선하다.

 

“참지 못하고 허리를 한 번 펴면 참아내는 기간이 절반으로 줄고, 그 절반이 다시 절반으로 줄어 김을 매는 건지 허리를 펴러 왔는지 모를 지경이 된다. 모든 인생의 일이 다 그런 거여.”

 

내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고통을 당했을 때마다 상기되었던 바로 그 말이다.

 

내 논은 먹고 살기 위한 생존 교육 수단뿐만 아니라 슬기롭게 사는 인생 교육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