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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18.여백과 여운

구글서생 2023. 6. 13. 08:50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우리 한국인은 노래나 그림이나 춤이나 장식이나 공간 배치나 모든 부문에서 여백의 미를 추구한다는 데 한국인의 멋이 깃들인다.

 

10여 년 전 한국의 저명한 동양화가 한 분이 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졌었다. 그분의 저명도 때문인지 한 뉴욕의 화랑 주인이 두 점의 수묵화(水墨畫)를 사갖고 갔다.

 

그날 밤 이 화가는 뜻밖에도 화랑 주인의 방문을 받았다. 낮에 사갔던 두 점의 수묵화를 펴놓으면서 그리지 않은 여백에 마저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더라는 것이다.

 

여백을 둔 미, 여백에 깃들인 멋을 모르는 서양 사람들의 자연스런 요구일 수 있으며 여백을 둔 한국인과 서양인의 정서나 감각을 단적으로 들어낸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한국인은 노래나 그림이나 춤이나 장식이나 공간 배치나 모든 부문에서 여백의 미를 추구한다는 데 한국인의 멋이 깃들인다.

 

수묵화의 예를 들어보자. 하얀 화폭에 그려진 부분보다 그려지지 않은 부분………, 곧 여백이 한결 넓다. 대(竹)나 난(蘭) 친 것을 보면 그려있는 부분은 화면의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화면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가 않다.

 

그래서 수묵화는 그리려는 형상보다 그려지지 않는 여백을 항상 머릿속에 가늠하고 그린다. 그렇게 그려놓고서 그려진 부분과 그려지지 않은 부분을 통관함으로써 미를 느끼고 멋을 찾아낸다.

 

노래도 그렇다. 부르는 대목보다 부르는 대목 사이에 낀 부르지 않는 여백을 중요시하는 것이 우리 한국 가창(歌唱)의 멋이다. 물론 서양 음악에도 쉼표가 있어 사이를 두나 서양 음악에서 쉼표는 생리적 휴식이나 다음 대목이 효과적이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우리 가창법에 있어 사이는 절정이요, 바로 주체인 것이다. 이를테면 옥중 춘향의 몰골을 읊은 춘향전에서 '쑥(間) 대머리 귀(間) 신형우'하고 대목에서 쑥과 대 사이에 사이를 두고 귀와 신 사이에 사이를 둠으로 비장감을 돋우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옛날에 직업적으로 이야기책을 읽어주고 돈을 버는 방랑 입담꾼이 있었다. 이 입담꾼의 입담재주는 바로 읽는 대목보다 읽지 않는 대목에서 얼마나 감정을 농축시키느냐에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요전법(邀錢法)이라 하여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에서 청중들을 격앙시킬 대로 격앙시켜 놓고서 잠깐 읽는 것을 멎는다. 곧 사이를 둔다. 그 사이는 읽는 사람의 휴식을 위한 그런 사이도 아니고 또 듣는 사람의 정서 작용이 중단된 그런 사이도 아니다. 오히려 소리는 없지만 격앙의 절정에서 소리가 나지 않은 것뿐이요, 또 정서가 너무 강하게 농축되고 밀집되기 때문에 들리지 않은 것뿐이다.

 

그 격앙된 사이에 청중들은 마냥 흥분하여 입담꾼에게 돈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곧 '사이'가 절정이요, 그 절정에서 돈을 던져 준다 하여 요전법인 것이다.

 

유럽의 교회 종소리와 우리 산사(山寺)의 범종(梵鍾) 소리가 다른 것은 이 여백에 깃든 여운의 유무가 결정적 요인이 되고 있다. 교회의 종소리는 높은 고음으로서 천상(天上)으로 사람을 끌어올리는 그런 사이를 허락치 않는 울림새인데 비해 한국 종소리는 다 울리고 난 다음에도 듣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전도된 같은 주파(周波)의 여운(餘韻)·여정(餘情)이 종소리의 주체가 되고 있다. 곧 물리적으로는 사라지고 없는 소리가 현상학(現象學)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마음에 와닿는 그 소리 없음을 듣는 소리가 본운본정(本韻本情)이요, 주운주정(主韻主情)인 것이다.

 

그것이 한국의 기본적인 멋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