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은 필요불가결한 재물 이상의 재물을 추구하는 법이 없었으며 그 이상 추구하면 악덕이요, 부덕이요. 그 사회에서 손가락질당하는 그런 인간 실격을 뜻했던 것이다.
오늘에 사는 현대의 우리 한국인과 옛날에 살았던 전통적 우리 한국인과는 달라진 것이 많이 있다. 그 달라진 것 가운데 두드러진 것을 손꼽는다면 맨 먼저 분(分)을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문제를 들 수 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자신의 분을 지키며 살았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분을 지키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이다. 분을 지킨다는 것을 손쉽게 풀어서 말한다면 내가 처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인격적인 위치에 알맞는 행동을 하고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분에 넘는 벼슬이나 덕망을 사양하고 분에 넘는 몸치장이나 사치나 집이나 음식을 사양하는 것이 분이다.
곧 내가 그 사회에 처한 객관적인 조건이나 실존에 눈곱만한 위선이 없이 사는 것을 분에 맞게 산다고 하는 것이다. 분에 맞게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사례는 허다하지만 그 가운데 하나를 예로 들어 본다. 조선왕조 후기의 정승에 김좌명(金佐明)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 집에서 심부름하는 최수(崔戍)라는 하인이 있어 김좌명이 호조판서가 되었을 때 최수를 서리(書書)로 임명해서 긴요한 직책을 맡겼다. 한데 과부인 최수의 어머니가 김좌명 대감을 찾아가
”수에게 그런 직책을 맡기는 것은 과분한 일이니 예전대로 벼슬을 거둬주십시오.”
라고 간청을 했다. 이유를 물으니 수의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제가 혼자 되고 나서 수만 믿고 보리밥도 끼니를 못 이은 채 살아오다가 대감께서 수를 잘 보아 월급을 받게 되니 이로써 세 끼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돈 많은 부자가 대감 문중에서 일보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여 수를 사위로 삼았습니다. 한데 수가 처가에 며칠 기거하더니 뱅어국으로 밥을 먹으니 맛이 없어 못 먹겠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에 사치한 마음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재물을 맡는 직무에 오래 있으면 그 분을 잃는 마음이 날로 더해져 마침내 죄를 범하고말 것이오니 불쌍한 과부 자식 살려주는 셈치고 과분한 벼슬을 거둬주십시오"
분을 지키는 우리 옛 선조들의 지혜가 이처럼 서민들 틈에까지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분에 넘치는 일이나, 요행에서 오는 지위나 재물은 거부하는 성향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런 요행은 반드시 그만한 불행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학성이라는 사람은 숙종 때 서울에 살았던 평범한 서민이었다. 과부인 어머니가 바느질 품을 팔아 두 아들을 서당에 보내고 있었다. 한데 어느 비오는 날 처마물이 떨어지는 지점에서 무슨 울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그 땅 밑을 파보았더니 금과 은이 가득 담긴 커다란 솥 하나가 나온 것이었다. 옛날 우리나라는 전란이 자주 있어 돈많은 사람이 피난갈 때 이렇게 재물을 땅에 파묻고 가곤 했으며 묻은 사람이 전란에 죽으면 이렇게 묻혀 있게 마련이었다. 김학성의 어머니는 이 보물을 다시 그 자리에 묻어두고 남대문 성 밖으로 이사해 버렸다.
이 어머니가 80이 넘어 죽어가는 베갯머리에서 장성한 아이들을 불러놓고 이 금은 보물 이야기를 하고 다음과 같이 훈계를 했다는 것이다.
“무고히 큰 재물을 얻으면 반드시 뜻밖의 재앙이 있는 법이다. 너희들이 아직 어릴 때에 衣食이 충족하여 안일이 버릇이 되면 공부에 힘쓰지 않을 것이요, 만약 가난하게 자라지 않으면 어찌 재물이 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집을 옮겨서 그 큰 요행을 단념한 것이다. 집에 있는 약간의 재물은 모두 나의 열 손가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니 창졸간에 눈앞에 닥친 재물과는 비길 것이 아니다."
돈이면 제일이요, 돈이면 된다는 그런 생각은 오늘날 사회에서 좋지 않은 생각이라고 다들 여기고 있는 데는 예외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곁에 나타나는 명분이요, 감추고 싶은 속심은 그지없이 돈에 집착되어 돈이면 최고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예외가 없다. 요즈음 청소년들 또한 이같은 돈이면 최고란 생각이 동서고금에 공통된 세상 사람들의 본심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 시대의 그리스 사람도 그렇고 요순 시절의 중국 사람도 그랬으며, 삼국시대의 한국 사람도 그러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 곧 재물이란 세상 사는 데 필요불가결한 최소한도만 갖는다는 생각을 가졌던 시기가 우리나라에는 5백여 년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겠다. 곧 분을 지킨다는 가치관이 조선왕조 5백여 년 동안 한국인 마음의 틀을 억세게 잡아 왔던 것이다.
이를테면 많은 선비가 필요불가결한 최소한도의 재물만으로 세상을 살았지만 그 한 실례로 오늘날 차관 벼슬과 맞먹는 참판(參判) 벼슬에 있었던 김정국(金正國)이라는 선비의 생활상을 보기로 하자. 그는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었다.
내가 20여 년 사는 동안 두어 칸 집에 두어 이랑 전답을 갈고 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이 각 두어 벌 있었으나 눕고서도 남은 땅이 있고, 신변에는 여벌 옷이 있으며 주발 밑바닥에 남은 밥이 있으니 이 세 가지 남은 것을 가지고 한세상 편하게 지냈소. 없을 수 없는 것은 오직 서적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벗 한 두어 사람,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개 하나, 환기할 창 하나, 햇볕 쪼일 마루 하나, 차 다릴 화로 하나, 늙은 몸을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 경치를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면 족한 것이요, 이 열 가지는 비록 번거롭기는 하지만 하나도 빼놓을 수는 없는 것이요. 사람 사는 데 있어 이 밖에 더 뭣을 구할 것이요.
우리 선조들은 이처럼 필요불가결한 재물 이상의 재물을 추구한다는 법이 없었으며 그 이상 추구하면 악덕이요, 부덕이요, 그 사회에서 손가락질당하는 그런 인간 실격을 뜻하였던 것이다.
돈은 돈을 부르고, 뜻은 뜻을 부른다는 옛말이 있다. 이 말은 돈이 많다고 뜻이 생기는 법이 아니며, 또 뜻이 크다 하여 돈이 생기는 법이 아니라는 고금의 진리를 말해 주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돈이나 재물 등 물질만을 지향하는 사람은 끝내 뜻을 못 세우고 물질처럼 썩어 사라진다는 뜻이다. 우리 옛날 선조들은 대체로 뜻을 찾고 뜻을 키우느라 너무 가난하게 살았다는 데 별반 예외가 없었다.
강원도 통천 땅에, '선비무덤'이라는 전설에 얽힌 무덤 하나가 있다. 지금의 지사나 차관 벼슬을 지냈던 한 선비가 뜻을 기리다가 가난하게 죽어갔기로 옛 선비들은 이곳을 지나갈 때 그 뜻을 흠모하여 성묘를 하고 시 한 수를 지었던 선비들의 성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이 있었던 선조 16년의 일이다. 이 선비는 겨울에도 입을 것이란 해어진 베옷뿐이었다. 소를 몰고 인근 추지령 고개 밑에 나무를 하러 갔을 때 날씨가 무척 추웠다. 날이 저문 후 그 몰고 갔던 소만이 빈 길마로 집에 돌아오자 그 선비의 아내는 남편이 짐승으로부터 해침을 당한 줄 알고 달려가 찾아보았다. 산길에서 동상에 걸려 정신을 잃고 있는 남편을 발견하고 아내는 자신의 체온으로 덥혀 주고자 옷을 벗고 가슴을 맞대어 끌어안고 그 자리에 누웠다는 것이다.
아마 이 아내의 체온을 나눠 갖는 것만으로는 살아날 훈김을 얻지 못했음인지 이 가엾은 선비 내외는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어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현대인이면 그렇게 얼어 죽을 만큼 재물을 기피해야 했던 선비의 뜻이 저주스럽게 느껴질 줄 안다. 차관이나 도지사급의 큰 벼슬을 지낸 분인지라 굳이 잘살려 들면 해어진 베옷 하나로 겨울을 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뜻을 세우고 분을 지킨다는 우리 옛 선비들의 전통적인 가치가 이 같은 정신적 죽음을 있게 하였다. 아무리 잘살 수 있어도 그 호의호식을 배제하고 최저의 생계로 근근히 살아왔던 우리 옛 선비의 의지력에 순교한 한 선비의 기념비가 바로 그 '선비무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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