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文眞寶(고문진보)

7歌類-15石鼓歌(석고가)

耽古樓主 2024. 2. 20. 03:01

古文眞寶(고문진보)

석고가(石鼓歌)-한유(韓愈)

▶ 石鼓歌 석고의 노래昌黎先生集》 5에 실려 있음.
石鼓는 돌로 만든 북 모양의 것으로都合 열 개가 섬서성 扶風縣 서북쪽에 있었다.
나라 때 鳳翔府의 孔子廟로 옮겨졌다지금은 北京의 淸代 國子監에 있다.
거기에 새겨져 있는 글은 학자에 따라 나라 초기 것이라느니 宣王 때 것이라느니 또는 나라 때 것이라느니 의견이 분분하다.
또 당 이전에는 석고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당대에 와서 韋應物과 韓愈의 석고가를 통하여 유명해졌고석고문은 古文苑에 실려 있다.

 


張生手持石鼓文, 勸我試作石鼓歌.
張生이 손에 석고문을 들고 와서, 내게 석고의 노래 지으라고 권하네.
張生 : 韓愈 문하의 詩人 張籍이다.

少陵無人謫仙死, 才薄將奈石鼓何?
杜甫는 가고 없고 李白도 죽었으니, 재주 천박한데 석고를 어이 노래할 수 있을까?
少陵 : 杜甫를 가리킴. 두보는 長安縣 杜陵(:漢宣帝) 동남쪽 少陵(:許后) 서쪽에 살며, 杜陵布衣少陵野老自號하여 흔히 杜少陵이라 불렀다.
謫仙 : 李白을 가리킴. 賀知章이 이백을 처음 만나보고 謫仙人(:귀양 내려온 신선 같은 사람)’이라 찬탄했다 한다[唐書李白傳].

周綱陵遲四海沸, 宣王憤起揮天戈.
周나라 기강이 무너져 온 세상이 물 끓듯 하니, 宣王이 분발하여 일어나 하늘의 창을 휘둘렀네.
周綱陵遲 : 주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다. 陵遲는 무너짐. 쇠함.
宣王 : 주나라 임금. 기원전 827~782 재위. 西周의 끝에서 두 번째 임금으로 幽王의 아버지이며 厲王의 아들로 한때 중흥을 꾀하였던 임금, 선왕 때의 太史籒籒書라는 字體를 발명했는데[許愼 說文], 석고문의 글씨가 籒書라 여긴다.
揮天戈 : 하늘의 창을 휘두르다. 선왕이 西戎·玁狁·荆蠻·淮夷·徐戎 등을 토벌하여 주나라를 중흥한 일.

大開明堂受朝賀, 諸侯劒珮鳴相磨.
궁전의 明堂활짝 열고 朝賀를 받으니, 諸侯들의 칼과 佩玉이 울리며 서로 부딪쳤네.
明堂 : 옛날 천자가 제후들이 來朝할 때 맞던 곳으로 太廟였다[禮記明堂位 疏].
劒琳 : 허리에 찬 칼과 佩玉.

蒐于岐陽騁雄俊, 萬里禽獸皆遮羅.
岐山 남쪽으로 사냥나가서 뛰어난 인재들 말달리게 하니, 만 리 사방의 금수를 모조리 잡았네.
: 봄사냥.
岐陽 : 岐山의 남쪽 기슭. 석고가 있던 섬서성 扶風縣 서북쪽. 석고에는 임금이 사냥하는 모습을 읊은 글이 새겨져 있다.
聘雄俊 : 영웅과 준걸을 말달리게 하다. 뛰어난 인물들을 말달리며 사냥하게 하다.
遮羅(차라) : 길이 막히어 그물에 걸리다. 걸리어 잡히다.

鐫功勒成告萬世, 鑿石作鼓隳嵯峨.
중흥의 공로를 새겨 만세토록 알리고자, 돌을 캐어 북을 만들려고 솟아오른 바위 무너뜨렸네.
鐫功勒成 : 공을 새기고 성과를 새겨놓다. 이룬 공을 석고에 새기다.
鑿石作鼓 : 돌을 캐어 북 모양을 만들다.
隳嵯峨(휴차아) : 높은 바위산을 무너뜨리다. 嵯峨는 산이 높은 모양.

從臣才藝咸第一, 簡選譔刻留山阿.
시종하는 신하들 재주와 학문 모두 천하제일이었으니, 뛰어난 사람 뽑아 글을 석고에 새기어 산 언덕에 두었네.
簡選譔刻 : 재주있는 사람을 뽑아 글을 지어 새기게하다. 은 골라 뽑는 것. 은 글을 지음.
山阿(산아) : 산 언덕. 岐山의 남쪽 기슭.

雨淋日炙野火燒, 鬼物守護煩撝訶.
비에 젖고 햇볕에 타고 들불에 그을렸어도, 귀신이 수호하여 수고스럽게도 해치는 자를 물리치고 꾸짖었네.
雨淋日炙 : 비에 젖고, 햇볕에 타다.
煩撝訶 : 번거로이 손 휘두르고 꾸짖다. 해치려는 자들을 번거로이 손을 휘둘러 몰아내고 꾸짖어 쫓아버리다.

公從何處得紙本? 毫髮盡備無差訛.
張公은 어디에서 이 拓本을 얻었는가? 터럭까지 완전히 갖추어 어긋남이 없네.
紙本 : 拓本.
無差訛(무차와) : 그릇되고 거짓됨이 없다. 석고문의 본 글씨와 어긋남이 전혀 없음.

辭嚴義密讀難曉, 字體不類隷與蝌.
문장이 嚴正하고 뜻은 세밀하여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고, 글씨체는 隸書나 蝌蚪文字와도 비슷하지 않네.
隷與蝌 : 隸書蝌蚪文字. 예서는 진시황 때 程邈이 만든 자체로 대에 통용되었고, 蝌蚪는 올챙이로 옛날에는 올챙이 모양 자획의 과두문자도 있었다 [尙書].

年深豈免有缺畫? 快劒斫斷生蛟鼉.
세월 오래되었으매 어찌 缺畫이 있지 않으랴? 잘 드는 칼로 산 龍과 악어를 잘라낸 듯하네.
缺畵 : 자획이 없어짐. 자획이 마멸됨.
斫斷(작단) : 찍어 자름. 잘라냄.
蛟鼉(교타) : 교룡과 악어. 는 용의 일종.

鸞翔鳳翥衆仙下, 珊瑚碧樹交枝柯, 金繩鐵索鏁紐壯, 古鼎躍水龍騰梭.
난새와 봉황새 날아오르며 신선들이 선계에서 내려오며, 산호와 벽옥 나무가 가지를 뻗고, 금줄과 쇠사슬을 얽어서 웅장하고, 오래된 솥이 물에 뛰어들고 용이 베틀 북처럼 뛰어노네.
鸞翔鳳翥(난상봉저) : 난새가 날고 봉황새가 날아오르다.
珊瑚碧樹 : 산호와 碧玉나무, 벽옥나무는 崑崙山에 있다 한다 [淮南子].
金繩鐵索(금승철삭) : 금줄과 쇠사슬.
鑠紐壯(쇄뉴장) : 얽어매고 묶고 한 듯 웅장하다.
古鼎躍水 : 오래된 솥이 물에 뛰어들다. 나라 때 九鼎汾水 남쪽[山西省]에서 얻었음[本書注]에서 나온 말. 자획의 기세가 격렬함을 형용.
龍騰梭(용등사) : 용이 베틀 북처럼 뛰어놀다. 이는 나라 대장군 陶侃雷澤山東省에서 고기를 잡다가 한 개의 북을 건졌는데, 용으로 변하여 날아갔다[本書注]는 전설에서 인용한 표현. 역시 자획의 기세가 격렬함을 형용.

陋儒編詩不收入, 二雅褊迫無無委蛇.
고루한 유생이 《詩經》을 편찬함에 석고문을 編入하지 아니하매, 大雅·小雅도 편협하여 여유가 없네.
: 시경을 말함.
二雅 : 시경小雅大雅. 대체로 궁중의 雅樂 비슷한 성격의 노래들이다.
褊迫(편박) : 좁게 몰리다.
委蛇 : 본시 逶迤와 통하여 위이로 읽음이 옳으며, 여유있는 모습으로 걷는 것. 여기서는 여유가 있음.

孔子西行不到秦, 掎摭星宿遺羲娥.
공자가 서쪽으로 秦나라에는 가지 못하였으니, 별자리를 주워 모으면서도 羲娥는 빠뜨렸네.
不到 : 공자는 평생에 여러 나라를 周遊하였으나 석고가 있는 나라[陝西省]에는 간 일이 없었다.
掎摭(기척) : 끌어 모으다. 주워 모으다.
羲娥(희아) : 해와 달. 는 해의 신 羲和, 는 달의 姮娥.

嗟余好古生苦晚, 對此涕淚雙滂沱.
아아! 나는 옛것을 좋아하나 출생이 매우 늦어, 이것을 대하니 눈물이 쌍으로 비 오듯 하네.
▶ 雙滂沱 : 쌍으로 비오듯 흐르다. 두 눈에서 비 오듯 눈물이 흐르다.

憶昔初蒙博士徵, 其年始改稱元和.
생각해보니, 처음으로 國學 博士로 불리어 온 시기는, 그해 처음으로 年號를 元和라 고쳤을 때였네.
博士徵 : 國子學博士召命을 받다. 韓愈元和 원년(806)에 국자학 박사가 되었다.
元和 : 憲宗의 연호. 806~820.

故人從軍在右輔, 為我量度掘臼科.
아는 사람이 종군하여 右扶風에 있으매, 나를 위해 재고 헤아리어 (석고를 놓아둘) 절구통 같은 구덩이를 파주었네.
右輔 : 右扶風의 벼슬. 京兆·左馮翊·右扶風三輔라 불렀다. 곧 석고가 있던 섬서성 岐陽에 벼슬하는 친구가 있었다.
量度(양탁) : 재고 헤아리다.
掘臼科(굴구과) : 절구 같은 구덩이를 파다. 석고를 안치하기 위한 구덩이임.

濯冠沐浴告祭酒, 如此至寶存豈多?
관을 씻고 목욕한 뒤 國子祭酒에게 고하기를, 이와 같은 지극한 보물이 어찌 많이 있겠습니까?
祭酒(좨주) : 국자학 祭酒. 東漢에서 박사 중 가장 뛰어나고 권위 있는 사람을 골라 좨주로 임명하였으니, 국자학의 長老.

氈包席裹可立致, 十鼓只載數駱駝.
담요와 멍석으로 싸서 곧 가져올 수 있으니, 열 개의 석고래야 다만 몇 마리 낙타에 실으면 됩니다.
氈包席裏 : 석고를 담요로 싸고 자리로 싸다.
立致 : 즉시 가져오다.

薦諸大廟比郜鼎, 光價豈止百倍過?
조정의 大廟에 들여놓고 郜鼎과 나란히 둔다면, 그 빛나는 가치가 어이 백 배를 넘음에 그치겠습니까?
薦諸大廟 : 태묘에 바치다. 태묘에 들여놓다. 태묘는 선조를 제사지내는 廟堂.
郜鼎(고정) : 나라의 큰 솥. 나라에서 뇌물로 고나라의 큰 솥을 나라 桓公에게 보내주매, 환공이 그것을 태묘에 들여놓았던 일이 있다[左傳桓公二年].
光價 : 빛과 값.

聖恩若許留太學, 諸生講解得切磋.
聖恩으로 만약 太學에 보관하도록 허락하면, 諸生에게 강의하여 학문을 갈고닦을 수 있겠습니다.
得切磋 : 切磋琢磨할 수 있게 되다. 학문을 닦을 수 있게 되다.

觀經鴻都尚塡咽, 坐見擧國來奔波.
石經을 보려고 鴻都門이 붐볐으니, 저절로 온 나라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올 터입니다.
觀經鴻都 : 鴻都後漢 太學의 문 이름. 후한 靈帝熹平 4(175) 봄에 諸儒를 시켜 五經의 글을 바로잡고 돌에 새기어 태학 문밖에 세워놓았었다. 따라서 홍도문 밖에 세워놓은 석경을 봄.
塡咽 : 사람들이 꽉 막히도록 잔뜩 모여드는 것.
來奔波 : 물밀듯이 몰려옴.

剜苔剔蘚露節角, 安置妥帖平不颇.
석고의 이끼를 깎아내어 글씨의 稜角을 드러나게 하고, 든든하게 잘 놓아 평평하여 기울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剜苔剔蘚 : 이끼를 깎아내고 후벼내는 것, 은 모두 이끼의 한 종류.
露節角 : 글자 획의 마디와 모가 드러나게 함.
妥帖 : 잘 놓여 안정함.

大廈深簷與盖覆, 經歷久遠期無他.
큰 집의 깊은 처마로 석고를 덮고 가려서, 오랜 세월 지나도록 아무 탈 없기를 기약해야 합니다.
大厦深簷 : 큰 집의 깊은 처마.
期無他 : 아무 탈 없게 되도록 하다.

中朝大官老於事, 詎肯感激徒媕啊?
조정의 대관들은 事務에 익숙할 터이거늘, 어이하여 감격할 뿐 쓸데없이 우물쭈물하고만 있을까?
老於事 : 일에 老成하다. 일에 익숙하다.
: 어찌.
媕啊(암아) : 결단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함.

牧童敲火牛礪角, 誰復著手為摩挲?
목동이 석고를 쳐서 불을 일으키고 소는 뿔을 비비니, 누가 다시 착수하여 소중히 어루만질까?
敲火 : 석고를 돌이나 쇠로 쳐서 불을 일으킴.
礪角 : 뿔을 비비다.
摩挲 : 소중히 여겨 어루만짐.

日銷月鑠就埋沒, 六年西顧空吟哦.
나날이 지워지고 다달이 녹아서 埋沒되니, 6년 동안 서쪽을 바라보며 헛되이 앓는 소리 내고 있네.
日銷月鑠(일소월삭) : 날로 녹아 없어지고 다달이 녹아 없어지다. 글씨가 나날이 지워지고 다달이 녹아 없어지는 것.
吟哦(음아) : 소리내어 탄식하는 것.

羲之俗書趁姿媚, 數紙尙可博白鵝, 繼周八代爭戰罷, 無人收拾理則那?
왕희지의 俗書는 모양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종이 몇 장으로 흰 거위와 바꿀 수가 있었거늘, 周나라를 이어 8대의 왕조가 전쟁을 그쳤을 적 많았으되, 아무도 석고를 수습하는 이 없었으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
羲之 : 나라 王羲之. 의 천재로 蘭亭集序등을 남김.
趁姿媚 : 아름다운 모양을 좇다. 모양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다.
數紙 : 글씨를 쓴 몇 장의 종이. 왕희지는 거위를 무척 좋아했었는데 山陰(:會稽山북쪽)의 한 道士가 좋은 거위를 기르고 있었다. 왕희지는 그걸 보고 매우 좋아하여 道德經을 베껴 주고 대신 그 거위를 얻어온 일이 있었다.[本書 注].
八代 : 이후의 ·······의 여덟 왕조.
理則那 : 까닭은 무엇인가? 의 뜻.

方今太平日無事, 柄用儒術崇丘軻.
지금은 태평하여 매일 아무 일도 없으니, 儒術을 높이 받들고 공자와 맹자를 존중하네.
柄用 : 존중하여 쓰다.
崇丘軻 : 공자와 맹자를 존중하다. 丘軻孔丘孟軻.

安能以此上論列? 願借辯口如懸河.
어찌하면 이 일을 가지고 조정의 논의에 부칠 수 있을까? 그리하여 황하 물 쏟아져 내리듯 하는 구변을 빌고 싶네.
上論列 : 조정에 올리어 정사와 함께 논의케 하다.
懸河 : 황하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 웅변에 능함을 비유한 말[晉書郭象傳].

石鼓之歌止於此, 鳴呼吾意其蹉跎!
석고의 노래 여기에서 끝내나, 아아! 내 뜻과는 어긋나네.
蹉跎 : 넘어지다. 뜻대로 되지 않고 실패하는 것.

 

 

 해설


石鼓는 周나라의 것이 아니라나라 시기에 만들어졌음이 후세에 考證되었다.
그러나 이 시에는 옛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韓愈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를 周宣王 때의 것으로 믿고이 석고문이 《詩經》에 들어가지 못하였음을 애석히 여기고 있다.
《古文苑》에 실린 석고문에는 ‘我車旣攻我馬旣同’과 같이 《시경》 小雅 車攻편의 구절과 완전히 같은 것조차 들어 있다.

석고문에 관하여 알아보자.

 

석고문은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石刻文字이다.
石鼓는 둥근 돌을 위아래로 잘라서 평평하게 하여 만든 것으로, 모양이 북처럼 생겼기 때문에 석고라고 하며, 석고문은 석고에 새겨진 글자이다.
석고의 크기는 대략 지름이 60cm이고, 높이가 90cm이다.
당나라 초기(618~907)에 중국의 섬서성 천흥현 들판에 방치되어 있다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석고는 모두 10개가 발견되었고, 각 돌마다 모두 四言詩가 1首씩 새겨져 있다

 

석고 10개에는 각기 오거(吾車)·견면(汧沔)·전거(田車)·칙홀(勅來)·영우(霝雨)·작원(作原)·이사(而師)·마천(馬薦)·오수(吾水)·오인(吳人)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글의 내용이 모두 사냥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獵碣이라고도 한다.
10개의 석고 중 作原은 五代의 난리 때 없어졌다가 송나라 때인 1052년에 민간에서 다시 발견되었는데, 농부에 의해서 반이 잘려 나가서 아랫부분에 새겨져 있었던 4자의 글자만이 남아 있다.
석고에 새겨진 문자의 갯수는 구양수(1007~1072 북송 중기의 정치가, 문학가)가 조사했을 때 465자였지만, 오랫동안 마모되어 현재는 270여 자만이 남아 있다.
글자 하나의 크기는 가로세로 4cm 정도이다.
석고가 만들어진 시기에 관하여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는데, 1931년 馬衡이 〈石鼓爲秦刻石考〉에서 진나라 때의 석각문자라고 고증하였고, 이후부터는 마형의 주장이 공인되었다.
석고는 2,000여 년 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많은 글자가 닳아 없어져서, 원래 있었던 글자를 알기 위해서는 탁본으로 확인해야 한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만든 탁본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북송 시대의 탁본이 유명하다. 현재 석고는 베이징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고문의 서체는 篆書로 초기 전서인 籀文(좁은 의미에서의 大篆)에서 진나라 때 통일된 전서인 소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이다.
이전의 훌륭한 글자를 베껴 쓰면서 글씨를 연습함을 臨書라고 하는데, 석고문을 임서하면 위로 갑골문과 금문의 大篆에서 아래로 小篆까지 쓸 수 있으매, 전서를 배울 때 많은 사람이 석고문을 임서한다.
청대의 서예가이자 篆刻家인 吳昌碩 (1844~1927)은 석고문을 소중히 여겨 열심히 임서함이 유명한데, 평생에 걸쳐 석고문을 임서하였다.

 

다음은 석고문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다.

10개의 석고평균 높이 100cm, 직경 약 60cm.
명나라의 錫山 安氏十鼓齋의 舊藏本임.
나라 초기에 天應縣 三疇原에서 출토.
원석은 현재 北京古宮博物院 銘刻館에 소장.
석고문은 중국 서법사에서 제일 오래된 석각 유물이다.
석고문은 字數가 많고 시와 글이 모두 훌륭하여 예나 다름없이 書法史에서 "第一石刻"으로 불리운다전서로써 秦 계통의 문자에 속한다.
西周金文의 전통을 계승하여 엄숙하고 단정하며 조금도 소홀함이 없다.
서법의 특징은 선이 풍만하고 부드러우며 힘이 있고 方圓이 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균형있고 듬직한 질감이 농후하다.
結體는 方正하고 縱勢가 좀 나타났으며 결구의 각 부분 사이는 모두 대칭평행되게 조합하였다.
先秦시기에 技藝의 숙련은 書寫者가 선과 형체의 일치성을 정확하게 유지하는가에 있었으매字間과 行間은 정연하고 劃一的이다.
整齊化規範化의 경향은 석고문에서 돌출하게 표현되었다.
석고문의 體態樣式은 바로 나라의 고아한 正體書風이 돌 위에서 전개된 것이다.
진나라가 통일한 후에 창제한 小篆은 바로 이런 서법양식의 연속과 완성이다.
<석고문>은 또한 <獵碣혹은 <雍邑刻石>이라고도 하며 비갈의 종주라고 일컫는다.
이들은 모두 10개의 돌로 되었으며 연월의 기록이 없고 돌의 형태가 북과 같다고 해서 <석고>라 했다.
각 돌마다 籒文으로 4言古詩 한 수씩을 새겼는데 글귀가 고아하고 대체로 秦國의 國君이 遊獵했던 일을 기술했으며 대략 600여 자가 있다.
당나라 초에 섬서성 鳳翔현 남쪽의 三疇原에서 출토되어 여러 번 옮겼다가 지금은 고궁발물관에 수장되어 있다연대가 오래됐기 때문에 風雨에 浸蝕되고 벗겨짐이 많다.
당송시기에 이르러 이미 대부분 殘缺됐고 아홉 번째 돌은 아예 한 글자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현존하는 문자는 단지 300여 字 뿐이다.
<석고문>의 연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여 의 文公襄公穆公獻公 등의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으나종합하면 춘추말기에서 전국초의 유물이라 하겠다.
<석고문>은 상당히 성숙한 대전의 체계에 속한 것으로 금문의 體勢와 風格을 계승했다.
용필은 둥글고 굳세며 둥근 가운데 모남이 나타난다결체는 긴 것을 촉박하고 짧은 것을 당겨 균형을 이루도록 힘썼으며 굳세고 소박하며 예스럽고 표일하며 기이하게 우뚝 솟았다.
자간과 행간은 넓게 벌려 균형을 잡았으며 성글고 명랑함은 마치 맑은 하늘의 별과 같다.
글자 크기는 1촌이 넘어 매우 공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이를 전서로 쓰거나 새기기가 힘들다.
그 글씨와 새긴 솜씨를 보면 모두가 당시 일류의 고수가 틀림없다.
서체의 특징은 대전과 소전의 사이에 있어 진나라가 문자를 통일함에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줬다.
이 글씨는 역대로 매우 높은 평가를 하며 서예가의 제일 법칙으로 삼고 있다.
당나라의 두보와 한유 등은 시를 지어 이를 찬송했으며 구양순·우세남·저수량 등은 모두 이를 극찬하고 보배스럽게 여겼다. <석고문>은 독특한 웅장하고 굳세면서 혼후한 풍격을 가지고 있어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진귀한 예술작품의 대접을 받고 있다
唐 초기에 陝西省 天興縣(:지금의 鳳翔縣)에서 발견되었다.
석고는 모두 10개였는데 각 돌마다 모두 四言詩 1수 씩 새겨져 있었다.
10개의 석고는 각각 오거(吾車)·견면(汧沔)·전거(田車)·칙홀(勅來)·영우(霝雨)·작원(作原)·이사(而師)·마천(馬薦)·오수(吾水)·오인(吳人)으로 나누어지며 이를 陳倉十碣이라고도 부른다.
舊說에는 모난 것을 碑라 하고 둥근 것을 갈이라 했는데석고는 원형으로 되어 있고 새겨진 문사는 거의 사냥에 대한 일을 기술하였기 때문에 獵碣이라고 하며통칭 석고문이라 한다.
10개의 석고 중에 作原(작원)은 五代(:907~960) 시기의 난세에 없어졌다가 그 이후 송나라 때인 1052년(皇祐 4)에 민간에서 나왔다그러나 그때는 이미 농부가 반 덩어리를 잘라간 뒤였고글자는 겨우 맨 아랫부분의 각 행마다 새겨져 있던 4자뿐이었다. 1931년에 馬衡이 〈石鼓爲秦刻石考〉를 지은 후 비로소 秦나라 때의 석각문자임이 공인되었다.
석고의 연대는 견해가 여러 가지 있으나진나라 <진공돈>의 발견으로 그 字體가 <석고문>과 비슷하고 <조초문>과도 비슷해 그 연대는 춘추 말기 秦나라의 것으로 본다.
<왕국유>는 전국시대는 진나라의 籒文을 사용하였고 육국은 고문을 사용했는데 넓은 의미의 籒文은 대전과 소전 고문을 포함하고좁은 의미로 말한다면 단지 <사주편>에 있는 문자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즉주나라 문자로 의 재상이던 李斯가 이를 근거로 하여 소전을 만들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문>을 대전이라 한다.
<석고문>의 서법은 온화하면서도 그윽하고필세는 웅장하면서도 두텁고 소박하면서도 자연미가 있다결구는 네모진 형태를 띠면서도 단정하고 무겁게 응축되어 있다.
석고는 2,000여 년 이상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표면이 많이 벗겨지고 부서져 나가서 지금은 그 위에 새겨졌던 글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오래전에 떠둔 탁본(拓本)이 매우 진귀하게 남아 있으며현재 북송(北宋:960~1126) 때의 탁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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