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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文章/조선명인전 101

20.발해-발해태조 고왕(渤海太祖 高王)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발해는 실로 고구려의 후신으로서 신라와 병립하여 남북조를 이룬 국가이니 그의 건국 시조는 고구려의 유장(遺將) 대조영(大祚榮)이다. 고구려에는 보장왕 말년에 내홍(內訌)이 일어나매 전부터 연횡(連衡)의 자세를 취하고 그를 엿보고 있던 신라와 당에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보장왕 27년(668)에 고구려는 드디어 나·당 연합군으로 말미암아 멸망되고 말았다...

19.신라-의상(義湘)

김영수(金映遂) 釋義湘은 신라 문무왕 때의 고승이다. 師의 속성은 김씨니 「宋高僧傳」에서 師의 속성을 박씨라고 한 것은 착오된 것이다. 사의 속성이 신라 국성(國姓)과 동일하므로 당인(唐人)들이 신라 국성을 박씨로 인(認)하는 까닭에 사의 속성을 박씨라고 하였으나 의상 당시의 신라 국성은 박씨가 아니라 김씨였었다. 진평왕 47년 갑신에 계림부(鷄林府)에서 탄생하니 고(考)의 휘(諱)는 한신(韓信)이라고 한다. 20세에 가까와서 경사(京師) 황복사(皇福寺)에서 양도(陽度)하고 문무왕 원년에 입당(入唐)하여 장안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 지엄공(智儼公)의 강하(講下)에 취하여 화엄경의 오지(奧旨)를 수(受)하고 문무왕 10년에 귀국하여 동 16년 2월에 조지(朝旨)를 봉하여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창..

18.신라-원효(元曉)

김영수(金映遂) 석원효(釋元曉)는 신라 문무왕 때의 고승이다. 사(師)의 속성은 설씨(薛氏)인데 잉피공(仍皮公)의 손이요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이다. 진평왕 39년에 상주(혹 上州 즉 지금의 尙州)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 율곡(栗谷) 사라수(裟羅樹) 밑에서 탄생하였으니 오늘의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이 즉 사의 고향이다. 신문왕 6년에 이르러 오늘의 경주 혈사(穴寺)에서 향년 70세로써 귀적(歸寂)하였다. 그 후 80여 년을 지나 혜공왕 때에 이르러 오늘의 경주 내동면 암곡(谷)에다 탑비(塔碑)를 세우고 서당화상(誓幢和尙)이라고 추시(追諡)하였다. 서당이란 이름은 새들(新野)이란 말로서 본래 사의 출생지인 불지촌의 일부 지명이다. 일부 지명을 새벌이라고도 하고 새들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

17.신라-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홍순혁(洪淳赫) 1. 유적 신라 고도(古都) 경주 채 못 미처에 서악리(西岳里)라는 촌락이 있어 학자들과 탐승객(探勝客)들의 끊임없는 방문을 받고 있다. 그곳에 있는 무수한 고분구적(古墳舊蹟) 중에 제일로 많은 사람의 주의를 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비신(碑身) 없는 한 개의 귀부(龜趺)와 이수이다. 귀부라 함은 비석을 앉히기 위하여 만든, 도사려 앉은 거북 모양의 기석(基石)이요, 이수라 함은 비석 위에 놓는 것으로 소위 뿔(角) 없는 용(龍;이시미)의 머리를 새긴 돌이다. 경주 부근에만 보이는 귀부가 한둘이 아니지만 크기로나 조각으로나 이만한 것이 없으니 폭이 8척 4촌, 길이가 11척, 높이가 2척 8촌 6푼이나 되는 거대한 거북으로 화강암에 정치(精緻)를 다하여 새겨 있어 두부(頭部)로부터 사지(四趾..

16.신라-김유신(金庾信)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삼국통일의 위업을 세운 김유신은 신라 진평왕(제6대) 건복(建福) 12년(595)에 만노군(萬弩郡; 지금의 진천)에서 출생하였다. 가락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12세손이요 구해 (仇亥;가락 최후의 왕)의 증손이니 신라 신부귀족(新附貴族)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무력(武力)은 진평왕때에 신주(新州) 군주로서 백제 성왕의 내침을 요격하여 구천(狗川)에서 성왕을 공살(..

15.신라-선덕여왕(善德女王)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사학자. 호 호암(湖巖). 평북 의주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학부 중퇴. 상해에 있는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 근무, 귀국 후 중동·중앙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편집 고문으로 7년간 근무. 저서에 「조선사화」, 「호암전집」, 「조선문화예술」, 「한국의 문화」등이 있음. 1. 머리말 신라에는 여왕이 선덕·진덕 및 진성 이렇게 세 분이 전후 군림하였는데 선덕은 최초의 여왕이요, 또 그중의 현주(賢主)이다. 선덕여왕은 이름이 덕만(德曼)이니 진평왕의 장녀로 어머님은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인바 진평왕이 승하하매 그 뒤를 이어 신라 제27대 왕이 되었다. 이는 여자로서 대통을 계승한 효시이다. 선덕여왕의 재위 16년간은 신라에 있어 ..

14.신라-솔거(率居)

이여성(李如星) 1901∼?. 화가. 호 청정(淸汀), 경북 생. 대구 청년을 중심으로 혜성단(慧星團)을조직,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3년간 복역. 닛교(立敎) 대학 경제학부 중퇴.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조사부장, 편집차장 역임.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월북․ 저서에 숫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 솔거는 신라 진흥왕(540~576) 때 사람으로서 조선사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 유명한 화인(畵人)이다. 그는 빈한한 농가의 아들로서 일찍부터 화사(畵事)에 뜻한 바 간절하였으나 적빈여세(赤貧如洗) 참으로 붓 한 자루 얻을 길조차 바이 없어 김매러 갈 때는 호미끝으로 모래판을 종이삼아 그리기도 하고 나무하러 갈 때는 칡뿌리를 붓 삼아 바위 위에 그리기도 하면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다. ☞적빈여세(赤貧如洗): 가난..

13.신라-우륵(于勒)

안확(安廓) 1884~?. 국학자. 호 자산(山). 서울 생. 일본의 니혼(日本) 대학 졸업. 「청년연합회잡지」, 「신천지」등의 잡지사 주간 역임. 저서에 「조선문학사」, 「수정 조선문법」,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 「시조시학(時調詩學)」, 「조선문명사」등이 있음. 1 세종대왕이 언문을 흠정(欽定)할 때에 각국은 다 문자를 제(制)하여 자국의 언어를 기술하되 홀로 아국은 없다 하여 드디어 28자를 제하였다. 이 제자의 대지(大旨)는 즉 자방(自邦)을 위본(爲本)한 정신이니 삼국시대에 우륵이 가야금을 작(作)함도 역시 그 정신에서 출한 것이다. 초에 가야국 가실왕(嘉悉王)이 써 하되 “제국은 방언이 각이(各異)하니 성음(聲音)이 어찌 동일할 수 있으랴” 하고 이에 악사 우륵을 명하여 독특의 음악..

12.신라-진흥대왕(眞興大王)

이병도(李丙燾) 1896~. 사학자. 호 두계(斗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한국사학 수립에 막대한 공을 세움.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 등이 있음. 1 新羅史上의 진흥대왕의 지위는 마치 백제사상의 근초고왕, 고구려사상의 영락대왕(광개토왕)과 같아 나는 매양 이들 3왕을 아울러 삼국사상의 3걸주(傑主)라고 부르나니 3왕은 비록 때와 곳을 달리하였지만 각기 중흥의 위업을 이룬 점으로 보아 특히 통일국가, 권력국가를 현출한 점에서 서로 방불한 느낌을 주거니와, 삼국은 이 3왕의 웅략(雄略)에 의하여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즉 대방(帶方)의 남(..

11.신라-김흠운(金歆運)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 등이 있음. 김흠운은 신라인이니, 내물왕의 8세손이요 잡찬 達福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 화랑 문노(文努)의 문하에 종사할 제 도중(徒衆)들로부터 “아무는 전사하여 그의 이름이 이제까지 남아 있다.” 라는 말을 들으면 김흠운은 문득 감격하여 개연히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자기도 그를 본받겠다는 빛을 보였다. 그리하여 동문들로부터 “이 사람이 만일 적에 부(赴)한다면 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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