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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신라-선덕여왕(善德女王)

耽古樓主 2023. 4. 29.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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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선덕여왕(善德女王)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사학자. 호 호암(湖巖). 평북 의주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학부 중퇴. 상해에 있는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 근무, 귀국 후 중동·중앙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편집 고문으로 7년간 근무.
저서에 「조선사화」, 「호암전집」, 「조선문화예술」, 「한국의 문화」등이 있음.

 

 

1. 머리말

 

신라에는 여왕이 선덕·진덕 및 진성 이렇게 세 분이 전후 군림하였는데 선덕은 최초의 여왕이요, 또 그중의 현주(賢主)이다.

 

선덕여왕은 이름이 덕만(德曼)이니 진평왕의 장녀로 어머님은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인바 진평왕이 승하하매 그 뒤를 이어 신라 제27대 왕이 되었다. 이는 여자로서 대통을 계승한 효시이다. 선덕여왕의 재위 16년간은 신라에 있어 진실로 파란이 많은 공전(空前)의 난국이다.

 

이때 신라는 국제간에 고립이 되어 선덕여왕이 자주 당에 호소하여 진덕여왕에 이르러 나·당 사이에 밀약의 성립을 보게 되었고, 이 밀약의 발동으로 마침내 무열왕에 이르러 나·당이 공동 출병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공멸(攻滅)하고 신라의 반도 통일을 이루었거니와 그의 복선(伏線)은 벌써 이 선덕·진덕 양 여왕대에 쳐 둔 것이다.

 

특히 선덕여왕이 쌓은 9층탑은 이 통일의 이상을 표현한 것이니 이 탑은 후세에 길이 신라 3보(三寶)의 하나로 꼽게 되었다.

 

동 여왕의 고문격으로 문교의 임에 당한 이에 자장(慈藏)이라는 고승이 있었으며 외교 방면에는 종횡으로 그 거완(巨腕)을 휘두르던 김춘추 같은 정치가와 군사 방면에는 전필승 공필취하던 김유신 같은 상승장군(常勝將軍)이 있었다.

 

동 여왕은 김춘추, 김유신을 문무의 고굉(股肱))으로 삼아 후일 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고굉(股肱):다리와 팔.

 

 

2. 신라의 고립

 

선덕여왕 때에 삼국의 국세가 일변하여 전일에 개별적으로 상생(相爭)하던 것이 이때 이르러서는 고구려·백제가 연결하여 신라를 공침(共侵)하게 되었다. 신라가 독력(獨力)을 가지고는 도저히 여·제 2강을 대항하기 곤란하게 되었음은 신라에 있어서 크게 불리한 점이다.

 

여·제 양국에게 협공을 당하게 된 선덕여왕의 신라는 당의 세력을 빌려고 책동한 것도 자존을 위하여 혹은 부득이한 일일런지 모른다. 당시 야심이 발발한 당 태종 이세민은 신라의 요청을 듣는 체하고 중재의 美名하에 여·제 양국에 대하여 슬그머니 간섭함에 이르렀다.

 

백제는 당의 권고에 응종(應從)하여 철병하였으나 고구려는 애초부터 당의 조정 같은 것은 일소에 붙이고 말았다. 당은 그 간섭이 실패됨에 미쳐서는 태종 이세민이 몸소 대군을 끌고 고구려에 입구하였다. 그러나 당의 상승군(常勝軍)도 안시(安市) 일전에 패배하고 말았으므로 대제국으로서 당의 면목이 없게 되었거니와 가장 난처한 것은 신라이다. 왜 그러냐하면 그 신뢰하던 유일의 여국(與國)인 당이 패배하기 때문에 신라는 더욱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궁지에 빠지게 된다.

 

처음에 신라는 入寇하는 당군을 도와서 고구려 남경(南境)을 진공(進攻)하기까지 하였으니 신라는 조만간 고구려의 일대 보복전이 있을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비상시를 당하여 거국이 일치하여도 오히려 불급할까 공(恐)하려던 하물며 輦穀下에서 대신 비담(毘曇) 등의 반란이 돌발함이랴. 이야말로 신라의 위기이다.

연곡하(輦穀下): 임금이 타는 수레 밑.

 

비담은 당시 신라 국상으로서 이처럼 일조에 거병 범궐(擧兵犯闕)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여주(女主)가 선치(善治)하지 못한다고 양언(揚言)하나 그는 구실에 지나지 않고 인심의 불안한 틈을 타서 폐립의 역모를 수행하려 함이다.

 

관군과 반군이 서울에서 10일간이나 相持할새 일시는 반군의 기세가 熾盛하여 그네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매 선덕여왕으로도 경구실차(驚懼失次)한 적이 있었다.

 

만일 이때 고구려·백제 같은 강적이 내침하여 叛徒가 이에 상응했다면 그 결과는 어찌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슬아슬한 일이다. 필경은 반란이 討平되고 말았으나 일시는 크게 위기에 빈(瀕)했던 것이다.

 

 

3. 통일의 이상

 

여·당간에 안시 전역(戰役)이 있던 선덕여왕 14년(645)은 동방 제국을 통하여 대사변이 많던 해이다. 이해에 일본에는 대화개신(大化改新)이 있었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는 용호상박의 격렬한 쟁탈전이 몇 번이나 되풀이하였다.

 

선덕여왕은 소의간식(宵衣旰食)으로 군국의 만기(萬機)를 살필새 김유신더러 나라의 존망이 공의 일신에 달렸다고 격려하던 것도 이때이다.

소의간식(宵衣旰食):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함을 뜻함. 미명에 일어나 정복을 입고 해가 진 후에 저녁밥을 한다는 뜻에서 온 말.

만기(萬機):임금이 보살피는 정무.정치상의 모든 중요한 기틀.

 

개선한 김유신이 복명(復命)도 하기 전에 또다시 출정하라는 대명이 내리매 자기집 문 앞을 지나되 들어가지 않고 바로 전지로 향하던 것도 이때이다. 이렇게 군신 상하가 한가지로 국난을 펴려고 분투 노력할 즈음에 고승 자장의 청을 따라 적국을 정복하고 삼한을 통일할 웅도(雄圖) 아래에서 황룡사 9층탑을 건조하였다.

 

지금 그 건조의 유래를 말할진대 일찌기 자장법사가 당에 유학할 때 신인(神人)이 자장더러 부탁하기를 너희 나라에 돌아가 황룡사에 9층탑을 쌓으면 인국이 항복하고 9한(九韓)이 내공하여 왕조(王祚)가 영안하리라 하였다 한다. 자장법사가 귀국 후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으로 분황사에 주(住)하여 전국 승니(僧尼)를 계려(戒勵)하더니 이해에 선덕여왕께 여쭈어 신인의 부탁대로 이와 같이 황룡사에 9층탑을 건조함에 이르렀다.

 

이로 보면 이 9층탑은 종교적 신앙에서 생겨난 신비적 상징물이 아닐까. 대저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위급한 경우를 당하면 흔히 일반 인심이 자아(自我) 이상의 무슨 위력을 희구하여 이처럼 신비적으로 기울어지기 쉬우며 특히 정치적 이상이 종교적 신앙과 서로 일치할 때 비로소 그것이 위대한 힘이 되어 역사를 움직이게 된다. 그 예증을 구태여 멀리서 구할 것 없이 우리는 이 황룡사탑에서 잘 발견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 황룡사탑은 선덕여왕을 통해서 표현된 당시 신라의 원력(願力)과 이상이 결정된 것이라 하겠다.

 

당시 백제로부터 명장(名匠) 아비지를 초빙하여다가 온갖 솜씨를 다 부려서 신라의 모든 건축 중에 있어서도 가장 선미(善美)하게 지은 것이다. 황룡사탑은 건축의 미로도 당시 예술의 정화(精華)를 모아 일세의 자랑이 될 만하게 만들었다. 225척의 고(高)를 가진 동탑의 웅자는 마치 현대 파리의 에펠탑 모양으로 신라 온 서울을 부감(俯瞰)하던 것이다.

 

선덕여왕의 통일적 이상을 표현한 이 예술적 거탑은 신라 국보로 꼽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

 

 

4. 여왕 인물

 

선덕여왕을 말할 때 진덕·진성의 양 여왕과 서로 비교 관찰함도 퍽 흥미있는 일인가 한다. 3여왕 중에 선덕과 진덕은 성골(聖骨)의 여왕이요 진성은 진골(眞骨)의 여왕이니 마찬가지 여왕이로되 이처럼 성골과 진골의 구별이 있다. 선덕과 진덕은 중흥의 艱局을 당하고 진성은 衰亂의 간국을 당하니 마찬가지 간국이로되 이처럼 중흥과 쇠란의 차이가 있다.

 

골품은 문제가 될 것이 없으되 시운의 비태(否泰)는 곧 그 인물에 대한 훼예(毁譽)를 달리하고 그 업적에 대한 경중을 묻게 한다. 그러므로 논인평사(論人評事)함에 있어서 매양 그 소조(所遭)한 경우를 잘 살피어야 한다.

비태(否泰):막힌 운수와 터진 운수. 곧 불행과 행복.

소조(所遭):고난이나 부끄러움을 당함.

 

선덕의 뒤를 계승한 진덕은 재위 8년간에 그 국정이 모든 점에 있어서 선덕의 연장에 지나지 못하니 내치에도 그러하고 외교에도 그러하다. 다만 진덕 때는 선덕 때보다 일층 더 사대에 공순하고 대륙문화 수입에 철저했다고 할까. 당제에게 직금시(織錦詩)를 보내고 당의 관복을 채용하며 법흥왕 이래 150년간이나 행하여 오던 자국의 건원을 일조에 폐지하고 당의 연호를 차용한 것도 모두 진덕왕대의 일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200년 후인 진성여왕에 이르러서는 그 재위 11년간이 난세임에도 불구하고 동 여왕은 오히려 신라 국학에 유의하여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칙선(勅選)하였다. 진덕의 직금시와 진성의 「삼대목」은 하나는 한시로, 하나는 향가로 좋은 대조가 된다. 사대의 진지자(眞摯者)는 진덕여왕이요, 국수(國粹)의 보존자는 진성여왕이니 이 반대되는 두 운동이 모두 여왕의 손에 개시됨은 문화사상 한 이채이다.

 

종래 사가(史家)가 나말(羅末)의 쇠란을 진성의 실덕에 기인된 줄로 말하나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나말의 쇠란은 역대 군신의 공조(共造)한 얼업이 마침내 진성의 실덕을 타서 폭발되었을 뿐이니 여왕 일인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없다.

 

이 3여왕의 인물을 볼진대 관인명민(寬仁明敏)한 덕성으로 선덕이 으뜸이 되나 그러나 진덕도 신장이 7척에 수수(垂手)가 과슬(過膝)은 즉 그기상이 고귀함을 알 것이며 진성은 천자(天資)가 명예(明銳)하고 골격이 장부와 유사했다 하니 그 풍격이 남성적임을 알 것이다.

수수(垂手)가 과슬(過膝): 팔을 내리면 무릎 밑까지 이른다.

 

 

5. 女中의 현주(賢主)

 

선덕여왕에 대한 사평(史評)이 관인명민하다고 하였다. 혹은 폄칭(貶稱)하여 유덕이무위(有德而無威)라고 한 이가 없는 바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깎아 말하는 이라도 선덕여왕의 관인명민함을 시인하지 아니할 수 없게쯤 되었다. 공주 때로부터 유명하게 된 기다(幾多)의 일화에 의하여 그 총혜(聰慧)가 과인하였음을 짐작할 것이며 여자로서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도 그 관인한 덕성에 말미암지 아님이 아니다. 그 당시 신라국인이 선덕여왕께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올린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선덕여왕은 치국의 요법을 체득한 女中의 현주이다. 즉위 원년에 먼저 사궁(四窮)을 진휼하고 다음해에 일년 부세를 경감하며 다시 대신을 보내어 지방 관민을 순무(巡撫)하여 국인으로 하여금 안업낙생(安業樂生)하도록 힘썼다.

사궁(四窮): 鰥寡孤獨(늙은 홀아비, 홀어미, 부모 없는 아이, 자식 없는 늙은이)의 네 가지 불행.

 

이처럼 내정에 있어서 방본(邦本)을 견고하게 만드는 동시에 문교 방면에 대해서도 노력함을 잊지 아니하였다. 후일 종교의 연수(淵藪)가 된 분황사를 비롯하여 영묘사(靈廟寺) 같은 거찰이며 천문을 관측하는 첨성대도 모두 선덕여왕 때에 된 것이다.

연수(淵藪):못에 물고기가 모여들고 숲에 새들이 모여드는 것과 같이 여러 가지 물건이 모여드는 곳.

유학승을 특파하여 당에서 장경(藏經)의 일부를 가져오게 하며 유학생을 명송(命送)하여 당나라 대학에 입학하게 하는 등등 대륙으로부터 문화의 섭취를 끊임없이 꾀하였다.

 

선덕여왕은 외교에 있어서도 확실히 강자를 조종하는 술책에 장(長)하였다. 친당주의를 把持함은 부왕 진평 때부터이었으나, 선덕여왕은 역시 선왕의 유지를 계승하여 外交家 김춘추를 시켜 몇 번이나 당 태종을 달래어 삼국 분쟁을 조정케 하려고 하였다. 그것이 비록 실패에 마치고 말았으나 당시 동양의 영웅을 움직여 조정에 출마케 한 그것만으로도 어느 의미에서 또한 성공이 아님이 아니다. 기타 현우(賢愚)를 감별하는 그 혜안과 영걸을 구사하는 그 민완(敏腕)에 이르러서는 참말 경탄할 바이다. 어디로 보든지 선덕여왕은 여중의 현주가 아닐 수 없다.

 

 

6. 지기삼사(知機三事)

 

인물을 아는 데는 일화가 사론(史論)보다 나으니 열 마디 사론에 모르던 것을 한 마디 일화에 깨달을 수 있다.

선덕여왕의 일화로서 지기삼사는 너무나 유명하다. 후래(後來) 세인이 신라의 특수한 국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갓 선덕을 여주(女主)라 하여 턱없이 깎았으되 지기삼사만 보아도 선택의 비범함을 알 수 있다.

 

선덕이 공주 때 당에서 신라에 붉고 흰 3색의 모란도와 함께 그 종자 3승(三升)을 보냈는데 아버님 진평왕이 그 꽃의 그림을 귀여운 공주에게 보여 주었다. 공주가 모란도를 보고 말하여 가로되

“이 꽃이 반드시 향기가 없으리다.”

진평왕이 이상히 여겨 공주더러 묻되

“어찌하여 향기가 없는 것을 아는가.”

공주가 대답하기를

“이 꽃의 그림에 봉접(蜂蝶)이 없으므로 반드시 향기 없음을 아나이다.”

이에 명하여 그 종자를 뜰에 심었더니 붉고 흰 3색의 아름다운 꽃이 피기는 했으나 공주의 예언과 같이 과연 향기는 없었다 한다.

 

선덕여왕은 이렇게 공주 때부터 유명한 일화가 있거니와 임금이 되어 일국을 통치하게 된 이후에도 역시 기행이적(奇行異蹟)이 있으니 하나는 와성(蛙聲)을 듣고 적병이 온 것을 안 것과 하나는 평시에 있어서 미리 그 붕어할 시일을 안 것이다.

 

궁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하(夏) 5월에 중와(衆蛙)가 모여 3, 4일을 두고 크게 울새 국인이 모두 괴상하게 여겼다. 이때 선덕여왕이 장군 알천을 불러 분부하되

“짐이 듣건대 서교(西郊)에 여근곡(女根谷)이 있다 하니 거기 필시 적병이 잠복했을 듯한즉 급히 가서 보라.”

라고 하였다.

 

장군 알천이 왕명을 받들어 정예를 끌고 달려가 보매 서교 여근곡에 과연 백제병 500인이 와서 숨어 있으므로 곧 그것을 엄습하여 하나도 없이 전멸시키고 말았다. 이 일이 하도 이상하여 군신(群臣)이 선덕여왕께 물으매 선덕께서 말씀하기를.

“와(蛙)는 노목(怒目)이니 병사의 기상이요, 옥문지는 곧 여근곡인 고로 이로써 서교 여근곡에 적병이 있음을 추측하였노라.”

이 말을 듣고 군신이 모두 그 성지(聖智)에 크게 탄복하였다 한다. 옥체가 無恙할 때에 있어서 선덕여왕은 군신과 더불어 이야기하다가 짐이 모년 모월일에 죽을 터이니 짐을 도리천 가운데 묻어달라 하였다.

무양(無志):몸에 탈이나 병이 없다는 뜻으로 웃사람에게 자기를 말하거나 아랫사람의 안부를 물을 때 쓰는 말.

 

그러나 군신이 도리천이 어디임을 몰라서 여왕께 물으매 여왕의 말씀이 낭산(狼山)의 남쪽이라 하였다. 그러더니 그해 그 월일에 가서 여왕께서 과연 붕어하므로 그 말씀대로 낭산의 남쪽에 장례를 지냈다.

 

그 후 10여 년간에 문무왕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여왕의 능묘 밑에 영조(營造)하니 불경에 이르되 사천왕의 천상(天上)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은즉 이에 이르러 여왕의 말이 맞았다. 여왕의 영지(靈智)가 능히 앞날을 내다본 데 대하여 군신이 또 한번 경탄하였다.

 

이처럼 그림꽃을 보고 향기 없을 것과 개구리 소리를 듣고 적병이 온 것과 또 평시에 있어서 죽을 날을 미리 안 것을 선덕의 지기삼사라 일컬어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하게 됨을 보아도 동 여왕의 인물이 비범함을 짐작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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