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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文章/조선명인전 101

50.고려-최무선(崔茂宣)

권덕규(權悳奎) 1890~1950. 국어학자, 사학자. 호 애류(崖溜). 경기도 김포 생. 휘문의숙 졸업. 휘문, 중앙, 중동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한글학회에서 「큰사전」편찬위원으로 일함. 저서에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조선유기(朝鮮留記)」, 「을지문덕」등이 있음. 선(先)하여 구진천(仇珍川)이 있고 후(後)하여 이의립(李義立)이 있으니 구진천은 천리노(千里弩)1)의 발명자로 신라 문무왕 때 사람이다. 1)노(弩): 쇠노. 잇달아 여러 개의 화살이 나가게 된 활의 한 가지. 신라의 군사가 이 천리노를 써 전쟁에 큰 조익(助益)이 많은지라, 조정에서 사찬의 작(爵)을 주었다. 이 소문이 해외에 떨치매 서방 한토(漢土)의 당(唐) 임금(고종) 이치(李治)가 구진천을 청하여다가 그 술(術)을 자..

49.고려-정몽주(鄭夢周)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역임.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모진 바람에 굳센 풀을 알 수가 있으며 추운 때라야 송백(松柏)의 변치 아니하는 줄을 아는 것이다. 고려조의 말기는 내외를 통하여 실로 다사다난하던 때였다. 국내에는 정치와 강기가 무너져 백폐(百弊)가 첩출(疊出)하는 위에 권신의 발호는 더욱 국맥(國脈)을 흔들었으며, 대륙에서는 원·명(元明)이 교체하여 기다(幾多)의 파란이 미쳐 왔으니 이러한 난국은 실로 정몽주를 시련하..

48.고려-공민왕(恭愍王)

고유섭(高裕燮) 1905∼1944. 미술사학가. 호 우현(又玄). 경기도 인천 생.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이화여전, 연희전문 등에 출강하면서 국내의 명승고적을 답사하여 미술문화 연구에 진력. 저서에 「송도고적(松都古蹟)」, 「조선 탑파(塔婆)의 연구」, 조선미술문화사논총(朝鮮美術文化史論叢)」 및 유저로 한국미술사 급미학논고(韓國美術史 及 美學論攷)」등이 있음. 공민(恭愍)은 명실(明室)의 사시(賜諡)이 고려조의 존시(尊諡)는 인문의무용지명렬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시다. 고려조의 제31대 왕이시요 제28대 충혜왕과 동복제(同腹弟)로서 충숙왕의 제4비 명덕태후(明德太后;洪奎의 딸)의 소출이시며 선화(善畫)1)로 이름 높으신 충선왕(「동국문헌」화가편)의 영손(令孫)이시니 초휘(初諱)는 기(旗)요, ..

47.고려-문익점(文益漸)

이승규(李昇圭) 생몰 연대 미상. 동아일보 기자, 조선어연구회 회원 역임. 공의 성은 문씨요 초명(初名)은 익첨(益瞻)이더니 후에 익점이라 개칭하고, 자는 일신(日新)이요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니 강성현(江城縣;丹城) 사람이다. 고려 말기의 사람이니 그의 생년월일은 미상하다. 소성(素性)이 자상강직(慈詳剛直)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비록 극한성서(極寒盛暑)라도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를 폐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이가정(李稼亭)에 나가 배워 그의 아들 목은(牧隱)과 계분(契分)1)이 깊더니 나이 30 되던 해에 정포은(鄭圃隱)으로 더불어 동방(同膀)에 등과하여 행(行)와 문장이 세간에 나타났었다. 1)계분(契分): 뜻이 맞는 친한 벗끼리의 두터운 정분. 이때는 공민왕조이다. 공이 사명을 받들고 원나라에 갔었..

46.고려-이색(李穡)

황의돈(黃義敦) 1891~1969, 사학자. 충남 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 평양 대성학교, 휘문의숙, 보성고보교원을 거쳐 조선일보 사원, 문교부 편수관, 동국대 교수 역임. 저서에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 「중등조선역사」등이 있음. 1. 유년시대 선생의 성은 이(李), 관(貫)은 한산(韓山)이며, 명은 색(穡), 자는 영숙(穎叔)이요, 호는 목은(牧隱), 시(諡)는 문정(文靖)이다. 선생의 부는 원조(元朝)에 등과하여 문명이 일대에 울리던 가정(稼亭) 이곡(李穀)이요, 모는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 김씨로서 고려 충숙왕 15년 무진 5월 5일 (신미)에 영해부(寧海府) 괴시리(槐市里) 그의 외택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의 「독서처가서(讀書處歌序)」서에 “나는 태어나서 2년 만에 부모와 함께 고향으로..

45.고려-최영(崔瑩)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농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 등이 있음. ※ 본문의 ‘×적, ×구’는 ‘왜적, 왜구’의 표기인 바, 당시 시대 상황(일제시대)에 의한 표기임. 최영은 말기 고려조의 지주로서 왕조의 운명은 그의 두 어깨에 지워 있었다. 그러한만큼 그의 사적은 여말 역사의 대부분에 긍하는 것이며 여말역사는 그의 개인사(個人史)의 전부인 감이 있다. 그러므로 이하 몇 가지 조항으로써 그의 사적의 경개를 적어 볼까 한다. 최영은 ..

44.고려-이제현(李齊賢)

이승규(李昇圭) 생몰 연대 미상, 동아일보 기자, 조선어연구회 회원 역임. 사람이 세상에 나서 도덕이 일시의 중망(重望)을 띠고 문장(文章)이 시대의 풍기(風氣)를 떨치고 勳業이 일국의 안위를 매어서 살아서는 명신(名臣)이 되고 죽어서는 상귀(上鬼)가 된다 하면 이는 위대한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로써 고려 500년 사상의 인물을 헤아려 보면 익재(益齋) 이제현이 가히 당할 만하다 하겠다. 선생의 성은 이씨요 자는 중사(仲思)요 호는 익재니 고려 충렬왕 13년 정해 12월에 경주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의 천성이 영오(穎悟)하고 자품(資品)이 순수하여 어려서부터 의연히 성인과 같더니 15세에 이미 속(屬)할 줄 알아서 작자의 기상이 있었다. 이해에 성균시(成均試)에 입격하였는데 선생이 말하되 이는 작은..

43.고려-안향(安珦)

이병도(李丙燾) 1896∼ . 사학자. 호 두계(斗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한국사학 수립에 막대한 공을 세움.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등이 있음. 고려의 문교는 의종(제18대) 만년 장군 정중부(鄭仲夫)의 난의 결과 무인발호시대(武人跋扈時代)를 현출함으로부터 문관의 지위의 미약과 한가지로 침체하여 그후 고종(제23대) 때에 이르러 몽고의 침입으로 국도를 강화도에 옮기고(19년) 거기를 유일한 안전지대로 삼아 20여 년이나 몽고에 버티던 동안은 더구나 문교 방면에 돌아다볼 겨를이 없어 거의 암흑시대를 이루다시피 되었지만 동왕 만년에 부득이 몽고에 굴..

42.고려- 일연(一然)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농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우리 고대의 수많은 사승(史乘)1)(해동고기, 단군기, 삼한고기, 신라고기, 신라국사, 고려국기, 고구려유기 및 신집, 백제서기, 제왕연대력, 신라수이전, 화랑세기, 한산기 등등)이 인멸한 오늘에 있어 고대 사실을 전하는 것은 약간의 금석문 이외에 사책(史冊)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가장 오랜 것으로 되어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1..

41.고려-정서(鄭敍)

이병기(李秉岐) 1891~1868. 시조시인, 국문학자, 수필가. 호 가람(嘉藍). 전북 익산 생. 한성사범을 거쳐 조선어강습원을 수료.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서울대, 단국대 교수, 학술원 임명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역대시조선(歷代時調選)」, 「시조의 개설과 창작」, 「국문학개론」등이 있으며 시조집으로 「가람시조집」, 「가람문선」등이 있음. 정항은 나이 적을 때부터 환로(宦路)에 나서 일을 잘 처단하고 마음을 바르게 쓰고 고려의 숙종, 예종, 인종 3조를 섬기고 죽을 때에는 집에 벼 한섬이 없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탄식하되 “30년 근시(近侍)와 11년 승제(承制)로 이와 같이 가난하다.” 하고 부미(賻米) 100석과 포 200필을 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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