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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권덕규(權悳奎) 1890~1950. 국어학자, 사학자. 호 애류(崖溜). 경기도 김포 생. 휘문의숙 졸업. 휘문, 중앙, 중동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한글학회에서 「큰사전」편찬위원 역임. 저서에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 「조선유기(朝鮮留記)」, 「을지문덕」등이 있음. 아비지는 백제 의자왕 때의 명장(名匠)이다. 신라 선덕여왕의 청에 응하여 황룡사 9층탑을 세우니 높이가 225척이요 그 장려함이 반도에 제일이다. 신라에 3대보(三大寶)가 있으니 진흥왕 때에 조성된 황룡사의 장육불상(丈六佛像)과 진평왕의 천사옥대(天賜玉帶)와 이 탑이다. 신라 법흥왕 15년 (528) 무신이라. 사인(舍人) 이차돈(異次頓 ; 속명 朴厭髑)이 순법(殉法)한 뒤로 불교가 걷잡을 새 없이 흥하여 유명한 불국사가 왕의 말년..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 등이 있음. 백제의 계백과 신라의 김유신으로 말미암아 연출된 용양호박의 황산(黃山)의 일전은 실로 양국의 운명을 결한 것이며 동양사상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이제 먼저 황산역이 일어나기까지의 상황을 추어 보면, 백제에서는 특히 그의 말기에 이르러 부질없이 신라와 전단(戰端)을 여러 연년이 싸운 결과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였으며 무왕과 의자왕은 모두 음사연악(淫奢宴樂)에 ..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 등이 있음.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그의 규모 및 영향, 의의에 있어 동양사상에 일찍이 보지 못하던 큰 싸움이라 할 것이다. 예로부터 한족과 타족(他族)과의 충돌에 있어 저명한 싸움으로는 살수전 이외에 5호 16국시대의 전진(前秦)과 동진(東晋) 사이에 일어난 비수전과, 금(金)과 남송(南宋) 간에 일어난 채석전(采石戰)과, 근세에 이르러 후금(청)과 명(明)의 살이호역(사르후 ..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 등이 있음.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세족(世族)으로서 동부(혹은 서부라고도 하며 「泉男生墓誌」에는 계루부로 보임) 대인의 계통을 받아 고구려 말경에 태어났다(강화 甑峯 위에는 그의 舊基의 유적이 남아 있다는 전설도 있음). 그의 祖는 자유(子遊)요 부는 태조(太祚)니 모두 막리지(莫離支 ; 병부상서와 중서령의 직책을 겸한 것)의 位에 올라 군국의 권병(權柄)을 쥐었었다. 개소문은 ..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사학자. 號는 호암(湖巖). 평북 의주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학부 중퇴. 상해에 있는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 근무. 귀국 후 중동·중앙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편집 고문으로 7년간 근무. 저서에 「조선사화」, 「호암전집」, 「조선문화예술」, 「한국의 문화」 등이 있음. 1. 공주의 성애(聖愛) 금전옥루(金殿玉樓)의 부귀영화를 일조(一朝)에 내던지고 다만 그의 동경하는 이상적 연인을 찾으려 하여 장안성 달 아래와 낙랑구(樂浪丘) 꽃사이로 헤매던, 공작같이 영롱한 미모를 가진 평강공주는 고구려의 황금시대를 거룩한 애(愛)로써 수놓았다. 알지 못하여라. 공주의 연인은 어느 명문 화주(華胄)인가, 혹은 풍신이 수려한 미남자나 체..
노정희 (盧鼎熙) 생몰 연대 미상. 조선사 연구가 삼국을 대표하는 사가(史家) 이문진의 전기를 기술함에는 필자는 너무나 천학(淺學)하다. 더구나 문헌에 남음이 선소(鮮少)한 이 사가의 전기를 작성하노라니 노력으로 보상할 수 없는 소홀이 생긴다.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의 기사에 의하면 영양왕 11년 춘정월에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국초에 문물이 미비한 때에 된 「유기(留記)」라는 고사(古史)를 산수(刪修)하여 신집(集) 5권을 편작(編作)케 하였다는 4, 50자에 불과한 기록이 간신히 남아 있다. 1) 산수(修):쓸데없는 부분을 깎아 내어 정리함. 이 몇십 자의 기록이야말로 영영 泯滅한 고구려사 신집 5권이 고대에는 있었던 것이요, 동시에 이문진이 고구려 시대의 사가였던 것을 그래도 ..
안확(安廓) (1884~?) 국학자. 호 자산(自山). 서울 출신. 일본의 니혼(日本) 대학 졸업. 「청년연합회잡지」, 「신천지」등의 잡지사 주간 역임. 저서에 「조선문학사」, 「수정 조선문법」, 「조선무사영웅전(朝鮮武士英雄傳)」, 「시조시학(時調詩學)」, 「조선문명사」등이 있음. 1 금일 성악계에서 본악(本樂)이라 하여 가장 숭상하는 것은 소위 가곡이라 하는 것이다. 이 가곡에 대하여 그 작곡상의 성질을 문(問)하면 왈 평조(平調; 羽調)요, 왈 계면조(界面調;우조)라 하는 것이니 이 2조를 악리(樂理)에 상조하여 강토(講討)하면 평조는 보통 우조라 하나 기실은 치성(徵聲)을 위본(爲本)한 치조(徵調)요, 계면조는 보통 애음(哀音)이라 하나 기실은 우성(羽聲)을 위한 장쾌한 우조이다. 그런데 2조로 작..
이병도(李丙燾) (1896~) 사학자. 호 두계(斗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 한국사학 수립에 막대한 공을 세움.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 등이있음. 1 고구려가 중흥기에 들어 날로 토경(土境)을 넓히고 국력을 뻗어 바야흐로 큰 통일국가 즉 권력국가로 약진하려 할 즈음에 웅재대략(雄才大略)을 품고 나타난 임금이 곧 이 영락대왕이었다. 영락대왕은 흔히 광개토왕(廣開土王) 또는 호태왕(好太王)이라고 일컫거니와 저 통구평야(通溝平野;강계 만포진 對岸)에 1,500년간 풍찬우학(風餐雨虐)을 무릅쓰고 올연(兀然) 흘립(屹立)한 왕의 훈업을 자랑하는 능비(陵碑..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국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 등이 있음. 고구려의 발전기에 있어 한족과의 충돌은 면할 수 없는 바이다. 적군의 공격을 받아 국도(國都)가 무너지고 적의 급습으로 국왕까지 위험에 빠져 국가의 명맥이 조석에 달린 때에, 죽음을 달게 여기고 감연히 적군 중에 뛰어들어 3촌(寸)의 혀로써 적을 달래며, 한 뼘의 비수로 적장을 거꾸러뜨려 백척간두에서 조국의 위세를 만회한 것이 실로 유유이었다. 고구려 제11대 동천왕 ..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 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 「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 등이 있음. 삼국시대의 명상(名相)으로는 고구려의 을파소를 대표로 들게 되는 것이다. 을파소가 국정에 당하게 되던 때는 고구려의 내외 정세가 실로 다난하였으니, 원래 발전도상에 있던 고구려와 한족(漢族)과의 충돌은 처음부터 자주 일어났던 것이거니와, 제9대 고국천왕시대에 이르러는 후한(後漢)이 쇠퇴하고 요동에는 공손씨(公孫氏)의 半獨立的 세력이 나타나 자주 고구려를 침구(侵寇..